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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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다 그만 좋지 않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너무 부끄럽고 무참해졌다. 이 책의 한 구절이 갑자기 떠오른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갖고 있는 것만 줄 수 있는 법이지요."

아, 지금까지 내가 남에게 주었던 것들이 슬라이드처럼 머릿속에서 영사되었다. 그 비겁하고 남루한 것들이 모두 내가 가진 것들이라니, 부끄럽지만 그것은 진실이었다. 그것과 비슷하게 자주 생각나는 구절이 하나 더 있다.

"당신이 걸어온 인생은 반드시 세상에 흔적을 남겨놓는다."

조지 부시도, 비틀즈도 아닌 하찮은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놓는다니.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세상의 순리다. 두 구절 다 정확히 생각나지 않아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인 의미는 왜곡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구절들은 읽을 땐 큰 의미를 두지 않다가도, 가끔 생활의 전면에 복병처럼 들이닥치곤 한다. 읽은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요샌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절제, 겸손 같은 것은 아니다. 뭐랄까, 모순적이지만 그것은 '용기'에 더 가깝다. 

이 책은 절대 가벼운 책이 아니다. (제목처럼)흘러가는대로 삶을 내버려둬도 된다는 위로의 책도 아니다. 이것은 벼락처럼 강하게, 바위처럼 무겁게 인생의 순리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뼈아픈 고통일지라도 반드시 지킬 것을 종용하는 책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인생의 책'이 충분히 될 가치가 있는, 바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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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1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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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혹시 이 책이 '과학소설'이라서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너무 부럽다고 이야기하겠다. 그는 인생의 행복 하나를 아껴놓은 셈이니까.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더 과한 찬사를 알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생일선물로 직장 후배에게 받은 것이다. 받고 나서도 일년 반쯤 서재에 묵혀있었다. 그러다 다른 친구가 우연히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닌가! 어라? 집에 있는데... 재미 없어 보이던데... 믿을만한 두 사람의 추천으로 이 두껍고 재미없어 보이는(게다가 '과학소설'이라니!) 책의 표지가 들춰졌다. 그리고 경악, 경악, 경악.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표제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다. 한 언어학자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지구에 찾아온 외계생물의 언어를 해독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을 담고 있다. 언어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봐도 논리적 모순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감동적이다. 바로 여기에 이 소설의 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테드 창보다 소설을 잘 쓰는 작가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액자의 틀안에서 감성적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쾌감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 A.I의 히로인 할리 조엘 오스먼트의 깊은 눈망울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스릴러든 과학이든 역사든,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소설은 인간을 향한다. 인간과 인간다움, 그 두 표지 사이에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놓여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런 소설에도 환호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선물해 준 후배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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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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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실화라는 설명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어째서 묻혀있었던 것일까. 이게 진짜라면 영화나 노래 같은 것으로 진작 나올 법한데. 혹시 나만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이야기는 실화가 맞았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는 1992년 사라예보 내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4년 동안 사라예보라는 도시는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적군은 도시를 둘러싸고 저격수를 배치했고, 도시의 거리는 누구나 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폐허로 변했다. 거리의 아무데서나 친구와 가족이 팩팩 쓰러져갔을 것이고, 쓰러졌던 자리 위에서 다른 누군가가 다시 쓰러졌을 것이다. 그 때의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4년이란 시간은 남은 평생을 합해도 모자랄 만큼 긴 시간이 아니었을까.
 
당시 내전 중이었던 사라예보를 어떻게 설명해도 상황의 묘사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대개의 전쟁은 한 사람의 목숨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나 거대한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그랬듯,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도 큰 사건의 작은 개인에게 시선을 돌린다. 거기 진짜 위대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아는 듯이.
 
이 책에는 사라예보의 시민들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네 사람이 나올 뿐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족을 위해 주기적으로 죽음의 거리로 나가 식수를 받아와야 하는 가장(그는 웃으며 문 밖을 나선 뒤, 죽음이 무서워 문에 기대어 하염없이 운다)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다. 22일 동안 죽음의 거리 한 가운데서 아다지오를 연주했던 첼리스트보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총으로 이제는 적군을 죽이는 여자보다, 단란한 가정을 지키고 싶은 무명의 한 남자가, 그의 눈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차라리 가슴이 아프다.
 
"거리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는 남자가 있어요."
"시장 근처에서요. 빵을 사려고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죽은 곳이죠."
"매일, 네 시에."
 
이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대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하는 행동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 2008년의 사라예보(터널 B라고 부르는 관광용 건물)

이제 사라예보는 전쟁의 상처로 돈을 번다. 숨기고 싶은 역사와, 숨길 수 없는 지금이 만나는 장소. 지금 사라예보 시민들은 위대했던 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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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조각들 - 타블로 소설집
타블로 지음 / 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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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시간이 아닐 때의 TV화면은 노이즈로 가득차 치지직거린다. 빌 브라이슨에 따르면 그 노이즈 중의 1%는 빅뱅의 잔재라고 한다. 우주가 만들어질 때의 경이가 작은 TV화면에서,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무심한 얼굴로 매일 우리 곁을 찾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지.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과거와 직면한다. 지금은 사라졌을지도 모를 별을 보며 소원을 빌기도 하고, 지금은 다른 사랑을 시작했을지도 모를 당신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과거는 때때로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과거는 책망의 대상이다. 내가 타임머신을 발명한다면 미래보다 과거로 먼저 갈 것 같다. 과거의 부끄러운 것들을 없애고 더 좋은 지금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과거의 나에게 갈 것이다.

하지만 타블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당신의 조각들>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날 것 그대로의 냄새
젊음과 심장의 냄새.
격발된 탄피의 어색한 뜨거움. 
일찍이 김연수가 얘기했던 바로 그 '스무 살'의 냄새.

그것은 처음엔 먼 행성에서 보내온 신호처럼 막연했다. 먼 도시 뉴욕의, 조나단이나 마크라는 사람이, 줄리어드에 다니거나 마리화나를 피우는 게, 바로 그런 것이 일상인 소설일 뿐이었다. 소설은 잘게 부숴진 파편 같았다. 우스울 것도, 심각할 것도, 심지어는 포즈조차도 없는 10개의 기록.

그러다 오늘 TV에서 타블로를 보았다. TV에서의 그는 비린내와는 거리가 먼, 세상의 인파이터이자 인사이더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는 슬픔을 노련하게 연마해 출세에 성공한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그래서, 반가웠다. 다시 책을 펼쳤고, 그가 비명처럼 보내는 신호가 들렸다. 나와 같은 나이의 한 소설가 지망생이, 단말마처럼 내질렀을 그 슬픔이 마른 가슴을 가볍게 쳤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공감이었고, 속삭임 같기도 했다. "야, 우리 지금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 간격은 엄청날 것이다. 비교하자면 한 우주와 다른 우주만큼. 그래서 우리는 늘 껴안고 키스하고 소리지르며 서로를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서로가 보내는 신호는 너무나 미약해서, 우리는 때때로 이런 방식으로 소통하기도 한다. 우주가 나에게 보내는 TV화면의 노이즈처럼, 그것의 1%처럼. 

그럴 때면 오히려 어떤 경건한 공감이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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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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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어렸던데다가 그 후에 살아온 모든 나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7p)"

거대한 서사, <황금 물고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라일라'라는 한 흑인여성의 가혹했던, 어쩌면 생의 끝자락에 올 축복이었을 그 일생의 시작은 이 작은 고백에서부터다.

유괴당해 한 부잣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라일라, 열 살 남짓한 그녀가 가진 것은 완벽한 순수함(무지)와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다. 비록 주종관계였지만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할머니 '랄라 아스마'가 죽자, 라일라는 자신을 음해하려는 그의 며느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그로부터 열 여덟 차례에 걸친, 평생의 방황과 시련이 계속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처음 라일라의 세상은 거짓말과 도둑질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지식과 교육, 그 다음은 춤과 노래와 성으로 이루어진 쾌락.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그렇게 문명과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특징을 알아가며 라일라는 느낀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건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그것을 사람들은 '자유'라고 부른다는 것을.

라일라의 자유에 대한 상징은 대부분 여성성으로 드러나는데, 라일라가 느끼는 모성애와 출산의 성스러움이 여성성의 긍정적인 발현이라면, 라일라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수없는 남성들의 성적 학대는 상대적인 위협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런 의미는 독자 각자의 몫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느꼈지만, 내가 느끼지 못했던 수많은 다른 의미들을 각각의 독자들이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것이 이 신화적인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마지막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저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인상이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떠나기 전에 나는 바닷속의 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노파의 손을 만졌다. 단 한 번만, 살짝, 잊지 않기 위하여. (295p)"

라일라라는 황금 물고기는 어쩌면 그 자신은 그냥 대단찮은 물고기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겪으면서 그녀가 느꼈던 세상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다가 아니었을까.

절망적으로 아름다웠던 그녀의 비늘에 나의 숨결도 섞여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때로는 거짓말과 위선일지라도, 그녀는 울고 소리지르고 껴안으며 언젠가, 어느 날에 나를 스쳐갈 것이다. 한 마리의 황금 물고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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