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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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힘든 이름이다. 존 버거. 정혜윤pd 책에서도 자주 등장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저런! 그 사람 맞다. 어릴 적에 존 버거를 미술 비평가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 후 그가 소설도 쓰고 사회비평가로도 활동했음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의 앞 표지 뒷면에는 아룬다티 로이의 추천사가 실려있다.

 

존 버거는 절묘한 작품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 책은 부드러움과 정치적 비전을 향한 희구를 도구 삼아 다듬어낸 절제된 분노에 관한 작품이다. 그가 쓰는 것은 모두 심오하고, 정확하며, 대답을 요구한다. 그것은 자유와 그 결핍, 희망과 그 결핍, 권력과 그 결핍, 사랑과 사랑하는 이와 강제로 헤어졌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하는 끔찍한 갈망이다.

 

책을 읽어보니 왜 아룬다티 로이가 부드러움과 정치적 비전을 향한 희구라고 말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존 버거에 대한 수전 손택의 말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양심의 명령에 따르는 책임감과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배려를 동시에 보여주는 데 있어 존 버거 만큼 성공한 작가는 없다.” 아마도 존 버거에 버금가는 이가 있다면 아룬다티 로이가 아닐까.

 

서간체의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감옥에 수감 중인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아이다의 편지 내용이 주를 이루다보니, 딱히 중심 서사가 없어 가독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없지 않지만, 버거의 정치적 비젼의 문장들과 감각적인 세계의 문장들은 쉽사리 다음 문장으로 눈길을 돌리도록 허락지 않는다. 사비에르는 주로 정치적 비젼을 토로하는 문장을 쓴다.

 

지옥은 돈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고안한 것이고, 그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우선 그들의 처지가 더욱 나빠질 수도 있다는 협박을 반복함으로써, 그리고 두 번째로는 약속을 통해, 말을 잘 듣고 충직하게 지내면, 다른 삶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그들도 지금 이 세상에서 부를 통해 살 수 있는 것과 그 이상의 것까지 즐길 수 있다는 약속을 통해서 말이다.

 

지옥을 들먹이지 않았다면, 교회의 과시적인 부와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의문이 더욱 공개적으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의 가르침에 명백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축적된 부를 일종의 성스러운 대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오늘날의 시련은 너무나 깊다. 이젠 사후의 지옥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제외된 사람들의 지옥이 지금 이곳에 세워지고 있으며, 똑같은 경고를 전한다. 오직 부만이 살아 있는 것을 의미있게 만들어 준다는 경고를.

 

아이다는 주로 우리에게 감각적인 세계를 맛보게 해준다.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 봅니다 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 하나까지

 

당신에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그녀는 삶이란 하나의 사고일 뿐이라고,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된 거예요. 그래서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주워 들고 어떻게든 다시 붙여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지니며 나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무것도.”

 

부재가 무라고 믿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을 거예요.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시간에 관한 문제죠. 무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고, 부재란 있다가 없어진 거예요. 가끔씩 그 둘을 혼동하기 쉽고, 거기서 슬픔이 생기는 거죠.”

 

미 소플레테, 야 누르, 혹은 미 구아포로 시작되는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아이다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그녀가 얼마나 사비에르를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다.

 

내가 보낸 손 그림들을 창문 바로 아래 붙여 놓았다고 했죠. 그렇게 하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림들이 제 멋대로 흔들린다고요. 그 손들은 당신을 만지고 싶은 거예요.”

 

위정자들의 폭력으로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다.

그들의 손이 닿을 수 없다는 사실에 몇 번을 울컥했는지.

 

적어도 당신에게 이 작품이 닿기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관심의 쉼표를 찍어주었으면.

 

-2014. 11. 1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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