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들은 세월호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라고 불렀다. 청해진 해운은 일본에서 18년 이상 운항한 나미노우에호를 구입해 불법으로 증개축했다. 증개축이 반복되면서 '승인이 나지 않은 도면'으로 증개축이 이어졌다. 증개축으로 배의 무게가 239t 늘었고, 배가 기울었을 때 평형상태로 되돌아오려는 복원력은 낮아졌다. 한국선급이 승인한 최대 화물 적재량은 1077t인데, 그날 배에는 화물 2214t이 실려 있었다(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이윤을 위한 과적은 상습적이었다. 부실하게 고박한 화물이 쏠리면서 복원성이 상실되었다. 배 한 구역이 침수되더라도 다른 구역은 침수되지 않도록 수밀문, 맨홀을 닫고 운행했어야 하는데 세월호 지하층의 수밀문, 맨홀은 모두 열려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이를 방치한 채 배를 떠났다. 시뮬레이션 결과, 닫혀 있었더라면 배는 더 오래 떠 있었을 것으로 나타났다. 해경 지휘부는 현장 출동 책임자에게 사진, 영상 송출을 계속 요구했다. 생사의 순간이 허비되었다. 수많은 부주의와 방관이 쌓였고, 배가 침몰했다. 304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아픈 기억이다. - P3


세월호 참사는 일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침에 출근했던 가족이 무사히 퇴근하는 것, 여행을 갔던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어요. (...) - P15




꼭 10년이 흘렀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어떻게 이 슬픔을 견뎠을까. 나는 지금도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생각하면 무너지곤 하는데 말이다.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서 지난 10년 간의 기록을 담은 책을 읽었다. 참사 당일의 현장 상황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참사의 역사를 복기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참사 초기 정부의 기능이 불능인 상황에서 자진해서 내려간 민간 잠수사들, 유가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봉사하러 간 택시 기사님들을 비롯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굴러갔을지 지금은 그저 그나마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다. 초기 정부의 막장 대응, 불통과 관련한 가족들의 인터뷰를 듣자니 그 때가 떠올라 분노가 일었다.  


2017년 4월 18일 세월호 선체의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세월호 선내 4층에서 단원고 조은화 학생이, 18일에는 허다윤 학생이, 22일에는 이영숙 씨가 수습되었다. (그전인 5월 5일에는 세월호 침몰 해역 수중 수색에서 고창석 단원고 교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8년 5월 10일 세월호가 바로 세워졌다. - P69

 

실종자 가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3년 간을 기다렸다. 3년이라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간이다. 


그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아이를 찾기 전과 찾고 나서의 표정을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예요. 완전히 달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요. 얼굴이 새카맣다가 하얘져요, 진짜로. 마치 살아 있는 애를 찾은 것 같은 얼굴이에요. 처음에는 진짜 이해하지 못했어. 완전히 얼굴이 피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하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얼굴이 빠짝 마르고 시커메지고 표정도 하나도 없던 사람이, 뼛조각이라도 아이를 찾는 순간 살아 있는 자식을 만난 것 같은 얼굴이 돼요. 그러다가 갑자기 슬픈 얼굴이 돼요. 자기 곁에 아직도 못 찾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기쁜데 미안한 거죠. (이승용) 


그마저도 세월호 선체 수색으로 9명의 실종자 중 4명은 돌아왔지만 5명은 영영 찾지 못했다. 뼛조각이라도 찾겠다는 가족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져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가 뭍으로 나오고 세워지던 날이 기억난다. 흉물 같던 배는 마치 너덜너덜해진 피부 같아 보였다. 세월의 흔적만큼 배도 그렇게 변해버렸구나 싶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이를 잃고 황망해진 부모와 형제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진상 규명을 위해 일어섰고 오래도록 지난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 힘은 분명 아이를 잃은 슬픔과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자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의 역량의 강화, 투쟁에 대한 승리의 경험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부모들의 나이는 평균 사오십 대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시대를 살아왔으며 다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다. 정치 활동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일지라도, 감금이나 고문 같은 국가폭력이 자행되던 시대의 공포에 시달렸던 세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정보통신기술과 네트워크 매체의 발달 역시 이들의 각성과 실천을 자극했다. 가족대책위라는 공동체로 모여 있었던 이들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공유했으며 수많은 시민과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새로운 특징을 지닌 유가족의 출현을 촉진했다. 한계 지어진 틀 안의 존재를 넘어 사유하고 증언하며 주장하고 실천하는 주체의 등장이었다. - P238~239


난관 끝에 탄생한 세월호 특조위는 여당과 정부의 탄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채 종료됐다. 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허망하게 갔는지 그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 그렇게도 자신들에게 문제가 되는지… 

’세월호특조위에 여당과 야당이 위원을 추천하는데 여당인 새누리당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사람을 추천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게 가족들의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새누리당에 김재원 의원이 ’아,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여론이 있고, 보는 눈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더라고요. 정말 상상이상이었어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위원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짜 하나하나 다 방해했어요. 공무원 파견을 안 하거나, 아예 뽑지를 않거나 예산을 덜 주거나 제때 안 주고, 자료도 부실하게 주고. 무엇 하나 특조위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박주민) - P150


세월호참사와 관련되어 법적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공직자는 123정 김경일 정장 단 한 명뿐이었다. 경찰, 국정원, 검찰의 적폐청산 기구들은 ‘세월호 참사는 사참위에서 다룰 사안’이라며 아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특조위와 마찬가지로 사참위 또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지 못했다. 세월호 5주기인 2019년 4월 16일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을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했지만 청와대의 답변은 역시나 사참위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 P167


세월호 선체 수색 종료 이후에도 참사와 관련하여 소식들이 이어졌지만 그동안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 안산에 합동분향소가 철거되었지만 대신 가족협의회와 안산 시민들이 연대하여 4.16생명안전공원을 통해 기억과 추모의 공간을 추진 중이다. 2021년 2월 마침내 4.16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가 시작되었는데 착공 예정 공사비가 500억 원을 넘으면서 사업 적정성 검토를 추가 진행하며 현재 착공 일정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상태다. 끝까지 공사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또한 진도의 팽목항에 있던 임시 시설물들도 철거될 뻔 했으나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이 가족대기실과 희생자 분향소로 쓰이던 낡은 컨테이너에 ‘팽목기억관’을 만들었다.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을 운영하고 합창, 공방, 연극, 목공, 꽃누르미 공예, 봉사 등을 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그들은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 같다. 사실 이 분들도 살아나가야 하는데 계속 피해자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우습지 않나. 웃으면 웃어서 뭐라고 하고 울면 운다고 뭐라고 하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그래도 가족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힘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영애 씨는 자신에게 전사(戰士)의 얼굴을 새로 주었다. 슬픔을 지우고 강함을 그려 넣었다. 그것이 순수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에게 순응을 요구한 사회에 맞서는 길이라 여겼다. 피해자다움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족쇄였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그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 P388


의혹으로 둘러싸인 사건에 대해 명쾌하고 간결한 단 하나의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현주소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진상규명의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은 때로 울퉁불퉁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모양을 갖는다. 왜 세월호가 그렇게 빨리 침몰했는지, 왜 세월호에 갇힌 이들을 국가는 구하려 하지 않았는지, 그 진실의 얼굴은 아직 장막에 가려진 채 남아 있다. 한편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사법적 정의 외에도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회복적 정의의 실현도 함께 가야 한다. - P173


의혹이 아니라 진실이 알고 싶다. 대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면 여전히 분노하는 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결국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못한다 해도 이 사회적 재난의 대가는 끝까지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사랑의 단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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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져만 가고 있던 민족주의 의식의 파도 속에서 국제주의의 경험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몹시도 어려운 일임이 중일 양국 모두에서 밝혀졌다. - P638

청조의 마지막 10년 전 기간 동안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5~6년 동안에 진행된 개혁 계획은 만주족 통치자들, 한족 순무와신사들이 권력을 보존하거나 심지어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목적한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져왔다. 결국 개혁들은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 P692

19세기 말 중국이 근대적 기업을 장려했던 것은 신속하게존경할 만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목표가 다양한 파벌의 정부 관료들을 단결시켜공동으로 공업화에 매진하도록 했다. - P699

하나의 새로운 사회 계급을 형성하게 된 상인, 신사, 관료들은 당시에는 아직 뚜렷한 부르주아 계급이 되지는 못했다. 대규모 조약항에서는 신사상인들의 수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러 그들의 공통적인 생활 방식과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성향은 일반 - P702

대중과 뚜렷이 구별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목표에 대한 광범위한 통일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향촌과 친족 관계에 강한애착을 갖고 있었다. - P703

공화주의와 사회주의가 중국인들의 흥미를 크게 끌었던 것은 두 이념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즉 중국인들은 그것들이 국가의 부강, 정치적 통일과 질서, 그리고 사회 복리를 제공해줄 최 ‘첨단‘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새롭고 진보적인 것을 찾아 나선 중국의 지식인들은 왕왕 하나의 사상을 위해 다른 사상을 버리거나 또는 쉽게 양립할 수 없는 사상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이념은 극심한 인격 분열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주요한 갈등은 외국인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차마 말할 수 없는 갈등이었다. 그들은 외국의 혁명가들에게 혈족 관계를 느꼈으며 외국의부와 막강한 힘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위에 분개하면서도 동시에 서구와 일본의 원조를 구했다. 제국주의가중국을 부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비롯된 이런 딜레마는 혁명 운동과 혁명 이념의 불안정성을 한층 더 증폭시켰다. 혁명가들 중에는 낙오하거나 변절하거나 사상을 바꾼 사람들도 있었고, 내부에서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 P821

폭정은 세 가지 상이한 방면에서 동시에 표출되었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종족 문제와 애국심, 민주적 의식, 경제적 이익 이 모두를 동시에 범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이 세 가지 시책은 결국 삼민주의의 세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청조에 대한최후의 심판에 있어서의 혁명파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청조는 기본적으로 정권 자체의 오류 때문에 적절치 못한 정권이라는 - P855

것이 드러났지만 그에 대한 판결은 혁명파가 전력을 기울여 수립하려고 했던 원칙(삼민주의)에 따라 내려졌다. 이 원칙들은 전적으로 분명하거나 일관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옹호한 일부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어대면서 실제로는 언제라도 어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1911년 당시 그것들은 중국의 국민적 합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마침내 혁명파가 사태의 핵심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양한 집단들은 이 세 가지 원칙 중 어느 하나에만 찬성한 반면 혁명파만은 세 가지 모두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최종적인 반연합에 가담한 모든 파벌 가운데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절하고 경쟁중인 집단을 규합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입헌주의 개혁파들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 세력을 찾을 수 있었다. - P856

1911년 이후 중국의 역사는 새로운 사상과 행동의 틀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11~1913년 사이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이 워낙 다양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 변화무쌍한 이합집산은 그 자체가 혁명적 변화의 증후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력은 너무 많고 또 너무나 다양해 서로 화해하거나 구질서의 많은 생존자들과 타협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제국의 멸망을 인정하면서 장젠은이렇게 말하고 있다.

각자는 자기 의지의 주인이며 세상에 이러한 힘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00년 이전의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 P874

1911년의 중국은 해체된 사회가 가진 이중적 전망을 보여주었다.
즉 그러한 사회는 동시에 신군, 근대적 엘리트, 혁명파 등 1911년에왕조에 반대하기 위해 협력한 일군의 새로운 사회 세력의 온상이기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서서히 영혼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던 사회의 흐릿한 틀 안에 감추어둘 수는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소위 소년 중국Young China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도 못한 채 극히다양한 지역적 상황에 불확실하게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면 위의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민중의 압력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왕조의 권력이 소진되지 않았다면 벼락부자(폭발호戶), 청년 장교, 활력에 찬 대도시의 지식인들이 정말 왕조를 종식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결국 황제를 퇴위시킨 것이 과연 이 소년 중국의 공격이긴한 것일까? 최고위층의 정치적 의지력의 약화와 상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시 폭동인 신해혁명은 아편전쟁 이후의 전례 없는 사회적 변화의 결과이자, 농업 제국인 낡은 세계에서 등을 돌리고 정치 조직과 경제적 발전에 관한 새로운 기술을 서구에서 찾으려고 한 도시 엘리트들의창작품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공화국은 당시 새로운 엘리트들의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탄생시킨 청조의 붕괴는 농촌 전체 내부에 깊숙한 근원을 가진 운동이 서서히 진척되면서 나온 성과였다. - P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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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봄이 지나가고 있다.

낮에는 이제 제법 초여름 느낌이 날 때가 있어서 이제 곧 여름으로 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요즘 회사에서는 일이 계속 터져서 도무지 짬이 나지 않는다.

주말에 그나마 책을 읽거나 산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할 뿐.



개나리와 벚꽃이 이제 거의 다 졌지만 그동안 찍어둔 사진들을 조금 풀어본다. 

개나리는 너무 빨리 폈다가 져 버려서 만개한 것을 포착을 제대로 못했고 벚꽃은 만개한 날마다 날이 우중충해서 별로 예쁘게 보이지가 않는다ㅠㅠ 


아무튼 올해 봄 꽃은 철쭉, 그리고 장미가 남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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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4-12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란 개나리, 정말 예쁘네요!
어렸을 때는 예쁜 줄 몰랐던 꽃이 개나리였는데. ㅎㅎ

거리의화가 2024-04-15 07:54   좋아요 0 | URL
저는 연두색 다음으로 노란색을 좋아해요^^ 그래서인지 개나리와 해바라기가 최애 꽃이네요.
올해 개나리는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제대로 포착을 못해 아쉽습니다. 자목련님 남은 봄 행복하게 보내시길!

미미 2024-04-12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벚꽃 덕분에 나날이 화사하더군요. 화가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4-04-15 07:55   좋아요 1 | URL
미미님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이제 벚꽃은 다 떨어지고 나무들이 어느새 연둣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맘때의 나뭇잎의 색깔이 참 싱그럽고 좋아요. 감사합니다^^

은오 2024-04-13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냥 꽃이 폈구나... 하면서 지나가는 저한테는 앞으로 남은 꽃들까지 꿰고 계신 화가님이 신기하고 멋집니다. ㅋㅋㅋㅋ
마지막 깨알 화가님 발!! >.<

거리의화가 2024-04-15 07:5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은오님. 그래도 지나치며 나무며 꽃은 보셨을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발 사진 캐치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날씨가 봄이 아닌 듯하지만 남은 봄 건강하게 보내시길요!
 


[CH32]

루페의 아빠는 멕시코에서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 국경에 나갔다. 헌데 그가 돌아오지 않자 루페는 싸한 기분을 느꼈고 악몽은 현실이 됐다. 아빠는 이민청에 붙잡혀 현재는 샌디에이고 감옥에 가 있다. 루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어깨를 연신 계속 들썩였다. 미아도 이는 불공평하다며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루페는 아빠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자 위험하다며 미아의 부모님은 반대했다. "They could throw us out anytime they want." 보다 못한 행크는 루페가 딸이라고 하겠다고, 그럼 안전할 거라고 말했다. 미아는 루페를 꼭 안아주었다.루페와 행크는 그렇게 출발했다. 


[CH33]

밤 10시쯤 행크와 루페가 돌아왔다. 행크는 루페의 아빠에게 그들이 강요하는 어떤 것에도 동의하지 말고 희망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했다고 했다. 먼저 그는 내일 이민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행크는 루페가 아주 의연했다며 칭찬했다. 미아의 부모님도 용감하다며 추켜세웠다. 오늘 밤은 함께 지내자며 엄마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우리가 뭐든 할 것이라고 루페를 안심시켰다. 미아는 루페와 잠을 자기 위해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루페는 아빠와 포옹하고 싶었지만 직접 대면은 불가능했으며 유리문 바깥에서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용기를 갖고 싶은데 자꾸만 무섭다는 루페에게 미아는 루페가 예전에 자기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했다. “We’re going to get through this. Together.”


[CH34]

아침에 일어나 우리는 지역 전체에 있는 변호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기는 작업을 했다. 미아와 루페는 등교했고, 미아는 제이슨에게 신문에서 오려 놓은 요리 기사를 건넸다. 그런데 제이슨은 요리 교실에 가고 싶은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며 주저했다. 아빠 사업도 그닥 좋지 않은데 너무 비싸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요리 수업은 여자들이나 듣는 것이라는 아빠의 반응이다. 미아는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괴상한 것이라며 말도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미아는 계속해서 제이슨을 설득해볼 생각이다. 

Mrs. Welch는 미아를 따로 불러 최근에 쓴 작문에 대해 칭찬했다. 문제는 칭찬 실컷 해 놓고 점수는 C. 대체 왜? 선생님은 자신이 모든 학생에게 캔디를 나눠주는 달콤한 사람이 아니라 말했다. 


[CH35]

루페 아버지의 구명을 위해 변호사에게 연락을 했던 미아는 드디어 Delaney씨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행크와 루페, 미아는 LA로 부푼 마음에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그는 사정은 자세히 묻지도 않고 변호사 비용은 1시간에 3백 달러이며, 부가비는 별도라고 이야기했다. 행크는 화장실에 손 닦으러 갈 때 휴지에도 값을 매기냐며 따졌다. 하지만 그는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사람을 돕는 것보다는 수임료가 더 중요하다는 뼈있는 말을 덧붙여 던지고 그들은 밖을 빠져나왔다. 김앤장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흠...


[CH36]

쿠퍼씨가 토요일에 전화해서 모텔 경영이 잘 되어가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의 지분을 돌려달라고 했다. 루페는 변호사비 비용 때문에 모텔 지분을 팔아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미아는 절대 안 된다고 루페의 가족이 모텔에 기여햔 바가 큰데 그럴 수는 없다 잘라 말했다. 루페는 전화가 올 지 모르니 집에 가겠다고 했지만 미아의 엄마는 그녀를 혼자 보낼 수 없다 이야기했다. 

미아는 모텔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다. 2주 후 전화가 왔다. 모든 3학년 이야기 중에서 미아 이야기가 뽑혀서 경연에 미아 이야기가 나간다고 했다. 경연에 뽑히면 상금도 받을 수 있다고. 그러나 루페는 자신과 가족의 정보가 유출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미아는 루페와 자신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종이(서류) 하나의 차이였다.


every passing day, the worry hung lower and heavier on all of us, like a soaking wet towel.


[CH37]

미아는 학교에서 제이슨과 맞닥뜨리고 자신의 경험을 다시 이야기해준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자신은 자전거를 타고 있다면 다른 사람은 자동차에 있다고. 그렇지만 볼 수 없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작가는 나의 꿈이고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고 미아는 이야기했다. Mrs. Welch는 작가로서 필요한 것은 절반은 감성이고 절반은 기술이라며 미아에게 감성은 있지만 기술이 부족하니 그 부분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감성이 부족하다고, 자신은 평범한 환경에서 지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이야기한다. 미아는 선생님께 모텔에 한 번 방문하라고 제안한다.


[CH38]

미아와 루페는 루페의 아빠를 만나러 교도소로 간다. 루페의 아빠는 며칠은 먹지 못한 것처럼 창백하고 볼은 푹 꺼질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는 가죽만 남은 사람 같았다. 행크는 그에게 굴하지 말라고 변호사를 찾고 있으니 잘 해결될거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루페의 아빠는 변호사비가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루페는 아빠가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잃어버린 것 같아 슬프다. "Have faith. Just hang on a little longer."


[CH39]

미아는 루페가 아빠와의 만남을 지켜보고 모텔로 돌아오자마자 부모님과 진한 포옹을 나눈다. 미아의 엄마는 루페를 꼭 안아준다. 

Mrs. Welch가 모텔에 깜짝 방문했다. 이민자들을 상대로 한 수업에 참관하며 미아 뿐 아니라 부모님까지 놀란다. Mrs. Welch는 미아의 엄마에게 미아가 잠재력이 있다고 칭찬한다.


[CH40]

모텔에 와 보니 다섯 통의 변호사 관련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형 로펌에서 온 4건은 건너 뛰고 마지막의 로펌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름은 Prisha Patel이고 이민 전문 변호사라 했다. 컨설팅 비는 무료고 변호 비용은 맞춰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루페는 아빠의 구명을 위해 Kids for Kids의 아이들에게 서명을 받았다. 

제이슨은 요리 학원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수업 때 187 법안 관련하여 있었던 LA시위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Mrs. Welch는 우리 중 참석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이 법안이 아주 중대한 결정이 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미아는 그녀가 변화하는 것 같아 기뻤다.

변호사 사무실은 초라했다. 대형 로펌이 아니라 그녀만이 있었다. 그는 인도 여성이었다. 미아는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현실에 대해 속상함을 표현했다. Patel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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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는 부모님이 불법적인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폭탄이나 마약처럼 불법자로 취급받는다고 너무 심하다 넋두리를 한다. 미아의 부모님과 미아는 그렇지 않다고 그녀를 추켜세웠다. 루페의 역할들이 다양하다며 기죽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저녁 식사 후 미아와 루페는 조용히 빠져 나와 마스터 키를 가지고 룸 하나에 들어가 노래를 신나게 불러제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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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는 Mrs. Welch에게 계속해서 작문 지도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마지막에 쓴 에세이의 이 표현(“My parents may be on side streets now, but one day, they’ll be on the main road.”)이 좋았다고 미아에게 말했다. C는 받겠구나 생각했던 미아는 A-라는 점수를 받았다. 깐깐한 선생님에게서 A-라니 다른 선생님으로 생각하면 A++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루페도 미아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토요일 오후에는 모텔 접수대에 의회, 미국 상원, 시장 등에게 보낼 편지가 쌓였다. 행크의 건의에 따라 마지막에 개인이 보내는 편지가 아닌 “California Against Garcia Deportation”이라고 썼다. 행크는 루페의 디자인을 실은 티셔츠까지 주문했으니 대단했다. 모텔에 오는 손님들은 계속해서 서명을 해주었다. 

일요일에 현금 등록기가 또 다시 가득 찼다. 얼마 후 제이슨을 포함한 Kids for Kids 멤버들이 왔는데 루페가 제이슨을 보고는 미아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제이슨의 엄마가 Mr. Yao 집에서 청소하면서 겪었던 대우, 엄마와 잠시 팔씨름을 한 걸 가지고 Mrs. Yao가 해고한 일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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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유물론은 계급 차원에서의 사회적 대립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때 계급은 생산 과정에서의 위치로 정의된다. 그러나 여성의 여성으로서의 상황에 대한 연구에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려 하면서도, 여성이 생산과 맺는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분석은 간단하고 완전하게 누락하고 말았다. 계급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 P6

가부장제 착취는 여성들에게특수하고도 핵심적인 공통 억압을 만들어낸다. 이때 억압이 ‘공통적‘인 까닭은 이억압이 모든 기혼 여성(시기에 상관없이 여성의 80퍼센트)에게 적용되기 때문이고, ‘특수‘한 까닭은 가정 내 무급노동을 제공할 의무가 여성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며, ‘핵심적‘인 까닭은 여성들이 ‘밖‘에서 일을 할 때조차, 이들이 속한 계급은 여성으로서 겪는 착취에 의해 조건화되기 때문이다. - P63

즉각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주장은 가부장제의 생산 및 재생산 체계를 총체적으로 파괴하지 않고는 여성 해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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