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개성 문제는 공산군 측이 38선이 아니라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하는 문제를 수용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38선을 고수하면, 개성을남측에 돌려주거나 최소한 비무장지대 안에 두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때문이었다. 개성은 그 대부분이 38선 이남에 위치했기 때문에 개전 이전 남한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북측이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정전회담 제2의제 분과위원회 회의록은 양측이 얼마나 개성을 차지하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왜 북측이 개성을 유엔군 측에 돌려주지 않기 위해 접촉선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 P112

비무장지대는 정전의 필요조건으로서, 또 정전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으로서 기획되었다. 정전협정문이 ‘정전‘(停戰), 즉 싸움을 멈추기(Stop the fighting), ‘정전의 유지‘(Keep the fighting stopped), ‘항구적인 평화의 실현‘(Establish permanent peace)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면, 229 비무장지대는 앞의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핵심 사항이었다. 비무장지대 설치는 바로 싸움을 멈추기 위한 조건이었고, 비무장지대의 역할은 정전을 유지하기 위한 ‘물리적 거리두기‘였다. 남북의촉을 막으면 적대행위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바탕으로 한것이었다. 물론 정전협정문 제60항에서 정치회담을 통한 외국군 철수및 항구적 평화 실현을 명시하기는 했지만, 미래에 실현될 평화의 조건으로서 비무장지대의 존속이나 존재 여부가 고려된 것은 아니었다. - P154

1953년 7월 27일 22시 이후 총 48일 동안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무장 부대 철수와 위험물 청소 작업이 이루어졌다. 양측은 비무장지대 위험물 제거와 안전통로 표식물 작업 등에 비교적 성실하게 임했다. 정전 직후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선전의 요소나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양측이 모두 통로의 위험물과 지뢰밭 제거를 서두르고자했고, 안전통로가 표시된 지도를 건넸으며, 위험물 제거가 완료되지 않았을 때는 상대의 안전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였고, 이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비록 비무장지대 전역에서 위험물이 제거된 것은 아니었고 수많은 지뢰와 사용 가능한 텅 빈 진지가 남아 있었지만, 45일간 우선순위로삼았던 영역에서 위험물을 가능한 한 제거하고, 양측이 군사분계선에서만날 수 있는 통로를 정비했다는 점은 그 의미가 절대 작지 않다. - P179

군사분계선 표식물은 7피트 높이의 금속이나 목재로 만들어진 말뚝 형태였다. 여러 유형의 토양에서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지지되거나 암석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어느 방향에서도 군사분계선 식별이 가능하도록 말뚝 꼭대기에 ‘군사분계선 표시물‘이라고쓰인 표지판이 고정되었다. 처음에는 원형 표지판이 제안되었으나, 직사각형 모양으로 바뀌었다. 표식물 사이의 거리는 한 곳에서 다음 표식물을 볼 수 있도록 직선 500m, 곡선 300m를 넘지 않았다. 군사분계선이 도로, 산길, 강, 개울과 같은 곳을 지날 때는 이로부터 10m가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북쪽과 남쪽 건너편으로 번갈아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총1.292개 지점에 군사분계선이 표시되었다.
그런데, 군사분계선은 말뚝 형태로만 표시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흔히 군사분계선은 선이 아니라 1292개의 점이라고 알려졌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다. 300~500m 간격으로 표식물이 있다고 해도 월경의 가능성은 충분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곧 표식물과 표식물을 잇는 가는 선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선은 오늘날 - P192

철책처럼 공고하게 전면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말뚝과 말뚝을단순히 잇는 정도였다. 더구나 말뚝도, 말뚝과 말뚝을 잇는 선도 관리가되지 않으면서, 군사분계선을 표시했던 선은 없어지고 말뚝도 훼손되어갔다.
군사분계선과 더불어 비무장지대 남북 경계선도 식별이 가능하도록설치되었다. 비무장지대의 남쪽. 북쪽 경계에 접근하고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표지판 형태로 설치되었고, 성근 철조망을 이어서 비무장지대 경계선이 곳곳에 표시되었다. - P193

민정 경찰의 무기 휴대 규정은 이후 비무장지대 무장화의 시작이 되었다. 더 위험한 무기를 제안한 것은 공산군 측이었다. 북·중은 민정 경찰의 휴대 무기와 관련하여 토미건이 미군의 카빈총에 상응하는 북측 무기라고 덧붙이며, 카빈총 또는 소형 기관총의 휴대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유엔사 측은 처음에는 권총만을 휴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소형 기관총은 전쟁 무기 또는 가장 폭력적인 폭도를 향해 사용하는무기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나아가 권총과 소총 사용으로 타협할 것을제안했다. 298민정 경찰의 무기 소지 문제는 군사분계선 표식물의 필요성 문제로이어졌다. 무기를 소지한 군사 경찰이 군사분계선을 우발적으로 혹은고의로 넘거나, 상대측을 향해 사격을 가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경계선 표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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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한국전쟁,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탄생

미국과 유엔의 서방국 사이에서 처음 논의되었던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정치적인 해법‘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의도를 고려하고, 한반도 밖으로의 확전을 방지하는 방안이었다. 정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군사 작전 지대‘로 인식되고 규정되었지만, 사실 비무장지대 구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해결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 P69

미국은 영국, 인도 등과 함께 중국과 정치적으로 정전문제를 협상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군사적으로 전황이 유리하던 중국은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의 정전 시도는 실패했으나, 비무장지대 설정을 통해 정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 기타 서방국, 중국 사이에 인식이 공유되었다. 이때 논의한 38선 기준의 비무장지대, 정전 감독 기구의 설치 등은 이후 정전회담의 토대가 되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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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합체‘ collective라는 말을 사용하여 인간들과 비인간 존재들 간의 연합을 묘사할 것이고, ‘사회‘society라는 말로는 우리의 집합체의 한쪽 부분만을, 즉 사회과학이발명해 낸 분할의 한쪽 편만을 지칭할 것이다. 맥락과 기술적 내용은 매번 재정의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 P26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근대성‘이라는 말이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실천을 지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 하지만 최근에는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 - P41

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로서,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대를 창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적 지대이다. 첫 번째 집합이 없다면 정화의 실천은 헛되고 무의미해질 것이다. 두 번째 실천이 없으면 번역의 작업은 느려지고 제한되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질 것이다. 첫 번째 집합은내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며, 두 번째는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전자는 예를들어 고층대기의 화학과 과학적, 산업적 전략, 그리고 국가의정상들의 관심사, 그리고 생태주의자들의 근심 모두를 단일한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시킬 것이다. 후자는 언제나 거기에있어 온 자연세계와,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시대상과 사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담론들 사이에 분할을 수립할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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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이득‘을 준 이상 이는 노동이다. 그러나 그이득이 스스로에게 돌아갔고 그 보상 역시스스로가 얻은 것이므로 ‘무료‘ 노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로부터 ‘무료 노동‘이라고 불릴 수있는 유일한 노동은 지불받지도 보상을 얻지도 않은, 다른 이를 위해 행해지는 노동이라는 점을 도출할 수 있다. - P41

가사노동의 특징적인 생산 관계가 가사노동에만 해당하지 않고 혹은 가사노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종류의 과업과 노동역시 특정 지으므로, 우리는 가정 내 노동이 - P46

라는 개념으로 가사노동의 개념을 대체하기를 제안한다. 연구 대상은 분명 사회학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의 집에서 무료로 실시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 P47

토착 이론은 개인의 신장과 그의 신체 기관에 필요한 음식의 양 사이에 상관관계가 성립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분배의 원칙이 아니라 합리화에 불과하 - P86

다는 것은 이 상관관계에서 드러나는 예외의 수만 봐도 명백해진다. 남편, 사장, 아버지, 장자는 그 자신이 아무리 왜소하더라도자신과 신장이 비슷한 여성이나 노동자, 아이, 동생에게 특권을 양보하지 않는다.
필요 편차 이론은 또한 에너지 소비의 차이라는 세 번째 논거를 포함한다.
이 주장은 실제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 측정값에 근거하지 않으며, 활동과 에너지 소비 사이에 개인과 무관한 관계를 설정한다.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활동을 ‘큰일‘과 ‘작은 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 분류는해당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활동의 성격에 기초한다.
이때 기술적인 수행 자체는 분류의실질적 기준이 아니다. - P87

소비는 재화만이 아니라 서비스도 포함하는 문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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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들은 세월호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라고 불렀다. 청해진 해운은 일본에서 18년 이상 운항한 나미노우에호를 구입해 불법으로 증개축했다. 증개축이 반복되면서 '승인이 나지 않은 도면'으로 증개축이 이어졌다. 증개축으로 배의 무게가 239t 늘었고, 배가 기울었을 때 평형상태로 되돌아오려는 복원력은 낮아졌다. 한국선급이 승인한 최대 화물 적재량은 1077t인데, 그날 배에는 화물 2214t이 실려 있었다(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이윤을 위한 과적은 상습적이었다. 부실하게 고박한 화물이 쏠리면서 복원성이 상실되었다. 배 한 구역이 침수되더라도 다른 구역은 침수되지 않도록 수밀문, 맨홀을 닫고 운행했어야 하는데 세월호 지하층의 수밀문, 맨홀은 모두 열려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이를 방치한 채 배를 떠났다. 시뮬레이션 결과, 닫혀 있었더라면 배는 더 오래 떠 있었을 것으로 나타났다. 해경 지휘부는 현장 출동 책임자에게 사진, 영상 송출을 계속 요구했다. 생사의 순간이 허비되었다. 수많은 부주의와 방관이 쌓였고, 배가 침몰했다. 304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의 아픈 기억이다. - P3


세월호 참사는 일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침에 출근했던 가족이 무사히 퇴근하는 것, 여행을 갔던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는 것,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사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어요. (...) - P15




꼭 10년이 흘렀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어떻게 이 슬픔을 견뎠을까. 나는 지금도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생각하면 무너지곤 하는데 말이다.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서 지난 10년 간의 기록을 담은 책을 읽었다. 참사 당일의 현장 상황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과거부터 현재까지 참사의 역사를 복기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참사 초기 정부의 기능이 불능인 상황에서 자진해서 내려간 민간 잠수사들, 유가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봉사하러 간 택시 기사님들을 비롯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있었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굴러갔을지 지금은 그저 그나마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다. 초기 정부의 막장 대응, 불통과 관련한 가족들의 인터뷰를 듣자니 그 때가 떠올라 분노가 일었다.  


2017년 4월 18일 세월호 선체의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13일 세월호 선내 4층에서 단원고 조은화 학생이, 18일에는 허다윤 학생이, 22일에는 이영숙 씨가 수습되었다. (그전인 5월 5일에는 세월호 침몰 해역 수중 수색에서 고창석 단원고 교사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8년 5월 10일 세월호가 바로 세워졌다. - P69

 

실종자 가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3년 간을 기다렸다. 3년이라니…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간이다. 


그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아이를 찾기 전과 찾고 나서의 표정을 보면 하늘과 땅 차이예요. 완전히 달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요. 얼굴이 새카맣다가 하얘져요, 진짜로. 마치 살아 있는 애를 찾은 것 같은 얼굴이에요. 처음에는 진짜 이해하지 못했어. 완전히 얼굴이 피는데 그걸 어떻게 설명하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얼굴이 빠짝 마르고 시커메지고 표정도 하나도 없던 사람이, 뼛조각이라도 아이를 찾는 순간 살아 있는 자식을 만난 것 같은 얼굴이 돼요. 그러다가 갑자기 슬픈 얼굴이 돼요. 자기 곁에 아직도 못 찾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기쁜데 미안한 거죠. (이승용) 


그마저도 세월호 선체 수색으로 9명의 실종자 중 4명은 돌아왔지만 5명은 영영 찾지 못했다. 뼛조각이라도 찾겠다는 가족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져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호가 뭍으로 나오고 세워지던 날이 기억난다. 흉물 같던 배는 마치 너덜너덜해진 피부 같아 보였다. 세월의 흔적만큼 배도 그렇게 변해버렸구나 싶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아이를 잃고 황망해진 부모와 형제는 정부의 안일한 대응과 진상 규명을 위해 일어섰고 오래도록 지난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 힘은 분명 아이를 잃은 슬픔과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자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개개인의 역량의 강화, 투쟁에 대한 승리의 경험도 다른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부모들의 나이는 평균 사오십 대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시대를 살아왔으며 다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다. 정치 활동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일지라도, 감금이나 고문 같은 국가폭력이 자행되던 시대의 공포에 시달렸던 세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정보통신기술과 네트워크 매체의 발달 역시 이들의 각성과 실천을 자극했다. 가족대책위라는 공동체로 모여 있었던 이들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공유했으며 수많은 시민과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새로운 특징을 지닌 유가족의 출현을 촉진했다. 한계 지어진 틀 안의 존재를 넘어 사유하고 증언하며 주장하고 실천하는 주체의 등장이었다. - P238~239


난관 끝에 탄생한 세월호 특조위는 여당과 정부의 탄압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 채 종료됐다. 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허망하게 갔는지 그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 그렇게도 자신들에게 문제가 되는지… 

’세월호특조위에 여당과 야당이 위원을 추천하는데 여당인 새누리당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사람을 추천하면 어떻게 할 거냐“?‘ 그게 가족들의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새누리당에 김재원 의원이 ’아,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여론이 있고, 보는 눈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더라고요. 정말 상상이상이었어요.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위원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짜 하나하나 다 방해했어요. 공무원 파견을 안 하거나, 아예 뽑지를 않거나 예산을 덜 주거나 제때 안 주고, 자료도 부실하게 주고. 무엇 하나 특조위가 제대로 기능을 할 수가 없었어요. (박주민) - P150


세월호참사와 관련되어 법적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은 공직자는 123정 김경일 정장 단 한 명뿐이었다. 경찰, 국정원, 검찰의 적폐청산 기구들은 ‘세월호 참사는 사참위에서 다룰 사안’이라며 아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특조위와 마찬가지로 사참위 또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갖지 못했다. 세월호 5주기인 2019년 4월 16일 세월호 특별수사단 구성을 위한 청와대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했지만 청와대의 답변은 역시나 사참위 조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 P167


세월호 선체 수색 종료 이후에도 참사와 관련하여 소식들이 이어졌지만 그동안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 같다. 안산에 합동분향소가 철거되었지만 대신 가족협의회와 안산 시민들이 연대하여 4.16생명안전공원을 통해 기억과 추모의 공간을 추진 중이다. 2021년 2월 마침내 4.16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가 시작되었는데 착공 예정 공사비가 500억 원을 넘으면서 사업 적정성 검토를 추가 진행하며 현재 착공 일정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상태다. 끝까지 공사가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또한 진도의 팽목항에 있던 임시 시설물들도 철거될 뻔 했으나 희생자 가족 중 한 명이 가족대기실과 희생자 분향소로 쓰이던 낡은 컨테이너에 ‘팽목기억관’을 만들었다.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을 운영하고 합창, 공방, 연극, 목공, 꽃누르미 공예, 봉사 등을 하며 몸과 마음을 치유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적 시선에서 그들은 자유롭기 어려웠을 것 같다. 사실 이 분들도 살아나가야 하는데 계속 피해자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 우습지 않나. 웃으면 웃어서 뭐라고 하고 울면 운다고 뭐라고 하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그래도 가족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힘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영애 씨는 자신에게 전사(戰士)의 얼굴을 새로 주었다. 슬픔을 지우고 강함을 그려 넣었다. 그것이 순수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에게 순응을 요구한 사회에 맞서는 길이라 여겼다. 피해자다움은 그만큼이나 강력한 족쇄였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은 그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 P388


의혹으로 둘러싸인 사건에 대해 명쾌하고 간결한 단 하나의 진실을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의 현주소는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진상규명의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실은 때로 울퉁불퉁하고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모양을 갖는다. 왜 세월호가 그렇게 빨리 침몰했는지, 왜 세월호에 갇힌 이들을 국가는 구하려 하지 않았는지, 그 진실의 얼굴은 아직 장막에 가려진 채 남아 있다. 한편 진실을 찾는다는 것이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사법적 정의 외에도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회복적 정의의 실현도 함께 가야 한다. - P173


의혹이 아니라 진실이 알고 싶다. 대체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면 여전히 분노하는 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결국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못한다 해도 이 사회적 재난의 대가는 끝까지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사랑의 단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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