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져만 가고 있던 민족주의 의식의 파도 속에서 국제주의의 경험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몹시도 어려운 일임이 중일 양국 모두에서 밝혀졌다. - P638
청조의 마지막 10년 전 기간 동안은 아니더라도 마지막 5~6년 동안에 진행된 개혁 계획은 만주족 통치자들, 한족 순무와신사들이 권력을 보존하거나 심지어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목적한 바와는 정반대의 결과를져왔다. 결국 개혁들은 왕조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 P692
19세기 말 중국이 근대적 기업을 장려했던 것은 신속하게존경할 만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목표가 다양한 파벌의 정부 관료들을 단결시켜공동으로 공업화에 매진하도록 했다. - P699
하나의 새로운 사회 계급을 형성하게 된 상인, 신사, 관료들은 당시에는 아직 뚜렷한 부르주아 계급이 되지는 못했다. 대규모 조약항에서는 신사상인들의 수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러 그들의 공통적인 생활 방식과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성향은 일반 - P702
대중과 뚜렷이 구별되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목표에 대한 광범위한 통일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향촌과 친족 관계에 강한애착을 갖고 있었다. - P703
공화주의와 사회주의가 중국인들의 흥미를 크게 끌었던 것은 두 이념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즉 중국인들은 그것들이 국가의 부강, 정치적 통일과 질서, 그리고 사회 복리를 제공해줄 최 ‘첨단‘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새롭고 진보적인 것을 찾아 나선 중국의 지식인들은 왕왕 하나의 사상을 위해 다른 사상을 버리거나 또는 쉽게 양립할 수 없는 사상들을 하나로 결합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이념은 극심한 인격 분열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주요한 갈등은 외국인에 대한 태도를 둘러싼 차마 말할 수 없는 갈등이었다. 그들은 외국의 혁명가들에게 혈족 관계를 느꼈으며 외국의부와 막강한 힘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위에 분개하면서도 동시에 서구와 일본의 원조를 구했다. 제국주의가중국을 부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비롯된 이런 딜레마는 혁명 운동과 혁명 이념의 불안정성을 한층 더 증폭시켰다. 혁명가들 중에는 낙오하거나 변절하거나 사상을 바꾼 사람들도 있었고, 내부에서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 P821
폭정은 세 가지 상이한 방면에서 동시에 표출되었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종족 문제와 애국심, 민주적 의식, 경제적 이익 이 모두를 동시에 범했던 것이다(공교롭게도 이 세 가지 시책은 결국 삼민주의의 세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청조에 대한최후의 심판에 있어서의 혁명파의 역할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청조는 기본적으로 정권 자체의 오류 때문에 적절치 못한 정권이라는 - P855
것이 드러났지만 그에 대한 판결은 혁명파가 전력을 기울여 수립하려고 했던 원칙(삼민주의)에 따라 내려졌다. 이 원칙들은 전적으로 분명하거나 일관된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옹호한 일부 사람들은 입으로만 떠들어대면서 실제로는 언제라도 어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1911년 당시 그것들은 중국의 국민적 합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마침내 혁명파가 사태의 핵심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양한 집단들은 이 세 가지 원칙 중 어느 하나에만 찬성한 반면 혁명파만은 세 가지 모두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최종적인 반연합에 가담한 모든 파벌 가운데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절하고 경쟁중인 집단을 규합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입헌주의 개혁파들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 세력을 찾을 수 있었다. - P856
1911년 이후 중국의 역사는 새로운 사상과 행동의 틀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911~1913년 사이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이 워낙 다양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 변화무쌍한 이합집산은 그 자체가 혁명적 변화의 증후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력은 너무 많고 또 너무나 다양해 서로 화해하거나 구질서의 많은 생존자들과 타협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제국의 멸망을 인정하면서 장젠은이렇게 말하고 있다.
각자는 자기 의지의 주인이며 세상에 이러한 힘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00년 이전의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 P874
1911년의 중국은 해체된 사회가 가진 이중적 전망을 보여주었다. 즉 그러한 사회는 동시에 신군, 근대적 엘리트, 혁명파 등 1911년에왕조에 반대하기 위해 협력한 일군의 새로운 사회 세력의 온상이기도했던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서서히 영혼과 정신을 잃어가고 있던 사회의 흐릿한 틀 안에 감추어둘 수는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소위 소년 중국Young China은 분명한 정체성을 갖지도 못한 채 극히다양한 지역적 상황에 불확실하게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면 위의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민중의 압력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왕조의 권력이 소진되지 않았다면 벼락부자(폭발호戶), 청년 장교, 활력에 찬 대도시의 지식인들이 정말 왕조를 종식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결국 황제를 퇴위시킨 것이 과연 이 소년 중국의 공격이긴한 것일까? 최고위층의 정치적 의지력의 약화와 상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시 폭동인 신해혁명은 아편전쟁 이후의 전례 없는 사회적 변화의 결과이자, 농업 제국인 낡은 세계에서 등을 돌리고 정치 조직과 경제적 발전에 관한 새로운 기술을 서구에서 찾으려고 한 도시 엘리트들의창작품으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공화국은 당시 새로운 엘리트들의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탄생시킨 청조의 붕괴는 농촌 전체 내부에 깊숙한 근원을 가진 운동이 서서히 진척되면서 나온 성과였다. - P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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