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복한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요?”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유명한 조세희 작가를 모신 강연회 자리에서였어요. 이 난데없는 질문에 번쩍 손을 들 뻔 했죠. 다행이 제 손이 올라가기 전에 늙은 작가는 다음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행복한 건 도둑놈들이거나 아니면 바보들입니다.”

도둑과 바보, 저는 둘 중에 무엇이었을까요? 그 무렵 15개월 된 큰 딸내미가 한창 예쁜 짓을 할 때라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는 술을 한 잔 걸치고 밤늦게 집에 들어와 엄마 옆에서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이 고통이 넘쳐나고 갈수록 험악해지는 세상에서 한 생명이 온전히 자라도록 키울 자신이 없었던 것이죠. 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아이 탓에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우리 부부였지만 장모님은 멀리 사시고 어머니는 지병이 있으셨기에 마땅히 도움을 받을 곳도 없었지요. 게다가 아이 백일도 되기 전에 아이엄마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집근처 어린이집도 없었기에 일주일에 이틀은 제가 아이와 대여섯 시간을 꼬박이 보내야 했던 것이죠. 꼭 포대기에 업혀야 잠이 들던 딸내미였기에 베개를 아이삼아 등에 올리고 포대기를 두르는 연습도 몇 차례 했지요. 그래서 아이 업는 것은 곧 능숙해졌지만 기저귀도 갈아주고 분유도 먹었건만 계속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진땀을 흘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녀석이 옹알이를 하고 돌이 가까워서 아장아장 걷더니 도리도리에 잼잼에, 동화책까지 짚어들고 읽어달라며 안기니 그제야 아이 키우는 맛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조세희 작가의 강연이 있은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용산 재개발 현장에서 다섯 목숨이 한꺼번에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작가는 아픈 몸을 이끌고 그 자리에 나와 또 비슷한 말을 했죠. 또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져야 할 불행의 짐이 많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그 당시 저는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들, 하지만 꿋꿋하게 불의에 맞서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그러면서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수족구며 신종플루까지 이겨내고 무럭무럭 자라 벌써 다섯 살이 되었네요.

그리고 재작년 이맘때 덜컥 둘째가 생겼어요. 큰애를 낳고 하나 정도는 더 있어도 되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좀 당황스러웠죠. 한편으로는 그 힘들었던 시기를 다시 겪어야 한다니 많이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아이엄마는 둘째가 태어나면 더 힘들 테니 그전에 연수를 받아야 한다며 저한테 큰애를 맡기고 2주간 연수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일주일에 이틀 애를 봤다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죠. 휴가를 내고 아이와 처가로 갔습니다. 엄마가 없어서인지 떼가 늘은 네 살짜리 아이의 신경질을 받아주느라 2년 같은 2주를 보냈죠. 하루는 박물관, 하루는 도서관, 다음날은 놀이공원, 그리고 찜질방. 하도 성질이 나서 차안에서 우는 아이를 30분이 넘도록 달래주지 않은 적도 있지만 자다 깨어나 엄마를 찾다가 제 품에서 다시 잠든 아이를 볼 때면 ‘너야말로 무슨 고생이냐’ 싶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게 되더라고요.

작은애가 태어난 뒤 지난 일 년은 감기도 우리식구가 되었죠. 큰애가 어린이집을 다니니 줄곧 감기에 걸려 있는데 작은애가 피해갈 수 있나요. 한 번은 큰애 감기가 폐렴으로까지 가서 입원을 했는데 네 식구가 모두 병실에서 먹고 자고를 했어요. 늦은 밤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앉아 병원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 세 명의 여인네를 보니 무슨 피난민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작은애는 큰 병치레 없이 첫돌을 맞이했습니다. 둘째라 노하우가 생긴 덕분인지 키우기가 훨씬 수월했지만 노심초사, 조심조심했던 첫째와는 달리 무뎌진 부모 때문에 혼자 베란다로 기어나가 세탁세제를 퍼먹는가 하면 큰애와 방바닥에서 뒹굴다 가구 모서리에 찍혀 얼굴을 꿰매기도 하는 등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 몇 차례 있었죠.

그 사이 이사를 해서 작은애도 동네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귀신같이 엄마의 등과 아빠의 등을 구별해내는 젖먹이와 씨름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아이엄마의 일이 늦게 끝나서 제가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지하철을 타고 아이엄마 직장까지 갑니다. 몇 십분이라도 아이들에게 엄마를 빨리 만나게 해주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렇게라도 해서 좀 더 일찍 아이들에게서 ‘해방’되고 싶은 게지요. 그 지하철에서 어떤 할머니에게는 “요새 아빠들은 애를 참 잘 본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기도 했고 어떤 할아버지에게서는 “시대를 잘못 만나 고생이 많다.”는 위로 아닌 위로를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아이엄마들이 이 글을 본다면 고작 일주일에 며칠, 하루에 몇 시간인데 무슨 유세냐고 할 겁니다. 그래도 아이를 봐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바싹 침이 마르고 아이엄마에게 아이들을 넘기고 나면 무슨 큰일을 치룬 것처럼 홀가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늘 비실비실 하다고 구박받는 몸으로 작은애는 안고 큰애는 업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면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끊임없이 물어보고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큰애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작은애까지 함께 있다 보면 숨 한 번 돌릴 여유도 없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거든요. 그나마 작은애가 걸음마를 시작했으니 앞으로는 나아지리라 여겨도 좋을지, 아니면 또 다른 고비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딸을 둔 아빠들이 대게 그렇듯이 저도 자칭 타칭 ‘딸바보’입니다. 아이엄마는 큰애가 아빠에게 너무 버릇없이 군다며 요즘 걱정이 많지만 그저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렇건만 아직도 자다가 깨면 사정없이 저를 밀어내고 엄마 품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작은애야 말할 것도 없지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엄마아빠”라고 답하는 영악한 큰애지만 단 한 번도 ‘아빠엄마’는 아닙니다. 한 번은 그럼 왜 엄마하고만 자고 아빠랑은 안 자느냐고 물었더니 내일은 아빠랑 잘 거랍니다. 물론 그 내일은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당분간도 오지 않을 겁니다.

추석날 보름달 아래서 큰애랑 강강술래를 하는데 아이엄마가 소원을 빌자고 합니다. 아이들이 도둑이나 바보가 되지 않기를, 이웃들과 불행의 짐을 나눠질 수 있기를……. 딸내미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었더니 “어서 빨리 어른이 되게 해주세요.”랍니다. 저는 냉큼 딸내미의 소원이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이뤄지게 해달라고 소원을 바꾸었습니다. 큰애의 내일처럼 말이죠. 
 


 

 

 

 

 

 

 

 


 

 - 보리출판사에서 나오는 잡지 <개똥이네 집>에서 청탁을 받아 보낸 글입니다. 이런 잡지가있는 줄 몰랐는데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과 부모가 같이 보기 좋은 잡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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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어느 문학상의 생활•기록문 분야 예심을 덜컥 맡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전화로 수락하고 보니 우편으로 접수된 것까지 포함해서 대략 150여 편의 글을 일주일 만에 읽고 본심에 올릴 작품을 가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의 글을 평가하고 그 당락을 결정짓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의외로 본심에 보낼 작품과 탈락시킬 작품을 가리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본심으로 넘겨야 하는 작품 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때문이기도 하고 작품들의 편차가 워낙 심한 탓도 있었습니다. 생활글, 기록문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문장이나 예술성보다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흔적이 있는 글, 글쓴이의 정성과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글들을 위주로 추렸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에 많은 글을 읽어내야 한다는 게 부담이었지만 한 편 두 편 읽다 보니 글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져 잠시 원고를 내려놓기도 했고 혼자 드러누워서 낄낄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살아왔던 동시대의 가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그때 그 시절, 형편이 좋지 않아서 못 먹이고 못 입혔다며 미안하다 하시지만 사실 저희 집은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경제사정이 급속도로 좋아졌던 탓에 유별나게 궁상맞았다거나 고달팠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솔직히 1980년대 이전 보릿고개로 대표되는 절대빈곤은 소설이나 영화로 많이 접했지만 제가 십대, 이십대를 보낸 8, 90년대에도 이토록 가난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들과 함께 같은 하늘과 같은 땅에서 살면서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한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곳이었습니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이제 막 한국사회에 등장한 중산층들이 둥지를 틀었고 그 맞은편 작은 하천 너머로 아마도 신흥 중산층들에게 삶의 터전을 속절없이 빼앗겼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무허가 판자촌이 빼곡했습니다. 판자촌 동네 아이들은 한 학급에 대여섯 명 정도였는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꼬질꼬질하던 한 아이가 어느 날 제 짝꿍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5학년 때였을 겁니다. 땟물이 줄줄 흐를 뿐만 아니라 어딘지 좀 모자라고 숙기도 없어 보이는 그 아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저는 약간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 아이가 점심 도시락을 싸왔는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까지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서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하고 학용품을 제가 먼저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처음으로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생겼기 때문인지 계속 제 주변을 맴돌더니 급기야는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나랑 안 놀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아이가 제 주변에 있는 게 불편하고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약간 차갑게 대하며 제가 반걸음을 물러서자 그 아이는 더 차갑게 제게서 몇 걸음이나 물러나 아예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채로 그 아이와 멀어졌습니다.

다시 그 아이를 만난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서입니다. 제가 들어간 중학교는 인근에서 하나뿐이었던 남자 중학교로 당연히 학교 분위기가 상당히 거칠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우연히 복도에서 그 아이와 마주쳤습니다. 한눈에 봐도 그 아이는 더 이상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동네 형들이나 고등학생들과 어울린다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요샛말로 이른바 ‘일진’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복도에서 그 아이를 마주친 순간 서로 눈을 피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 뒤로는 그 아이를 보지 못했고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야 문득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지만 제가 첫 번째로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아이일 겁니다.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작품을 읽어나갈 무렵은 한창 무식급식 주민투표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면적인 무상급식은 안 된다는 주장의 핵심은 빠듯한 나라 살림살이에 왜 부자 아이들의 밥값까지 대줘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군대에서는 왜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모든 군인들에게 무상으로 밥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소득 상위 50%이상은 군복을, 상위 20%이상은 총까지 스스로 장만해서 입대하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 반대편 주장인 “아이들에게 눈칫밥은 더 이상 안 된다”는 이야기도 마땅치 않습니다. 군복무가 의무라면 당연히 군대에서 군인은 양질의 식사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듯이 의무교육에서 급식은 학생들의 당연한 권리여야 합니다. 눈칫밥이나 낙인효과 같은 정서적인 접근이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고 무상급식을 이뤄내는데 효과적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여력이 있을 때 베푼다는 시혜적 차원의 복지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편적 복지로, 그리고 인권의 차원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데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한편 정말로 무상급식을 한다고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만난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는 모두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라 오히려 분위기가 좋더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미 아파트 몇 단지에 사는지를 가지고 친구 집의 경제력을 짐작하고 무슨 학원을 다니는가 하는 것으로 또래집단이 나뉘는 마당에 무상급식 하나로 빈부격차에서 오는 차별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어른들의 바람일 뿐이겠죠.

군대에서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전방부대였기에 40명 정원의 한 소대에서 4년제 대학을 다니다온 사람이 채 10명이 안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중대 행정반이라는 편한 자리에서 군 생활의 절반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들었던 이야기로는 후방 무슨 본부 같은 곳은 4년제 대학생 아닌 이들이 열에 한둘이 될까 말까 하였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온 이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사회경험에도 불구하고 늘 힘든 일을 도맡아야 했고 제대할 날짜가 다가올수록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데모를 한다고 쫓아다니고 문학을 한답시고 술에 절어 지내던 대학시절에는 사회경제적 차이가 크게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둘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다 보니 출발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농사짓는 노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의 친구와 자식이 결혼을 한다니 전세 아파트라도 마련해줄 형편이 되는 집의 친구는 반지하와 신도시로 사는 곳부터 다릅니다. 아마 어느 한 편이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던 일이 대박 나지 않는다면 이 둘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 주거와 교육, 의료와 같은 것들은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아 누구나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고 그 가운데 어떠한 모욕이나 차별, 배제가 끼어들 수 없게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위한 기획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복지국가 논의에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가 이미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눈칫밥과 사회적 낙인을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다는 발상도 그렇습니다. 복지를 위해서,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누군가를, 좀 못 사는 다른 나라를 착취해야만 할 겁니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좋지만 그러면 당장 피해를 보는 것은 편의점이나 PC방 같은 영세 자영업자라는 말이 어쩔 수 없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평택 대추리에 지어지는 미군기지로 인해 누가 얼마나 더 안전해질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제주도 어딘가에 해군기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 앞에서, 그리고 공사 지연에 따르는 천문학적인 비용 운운하는 말들 속에서 강정 싸움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가 되고 맙니다. 서울시민의 쾌적함과 그럴듯한 ‘디자인’을 위해 서울역에서 노숙인은 당연히 쫓겨나야 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이주민은 필요한 만큼 시한을 정해 들여왔다가 쫓아내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한편 바로 이웃나라의 핵발전소 사고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도 원자력 에너지에 기대어 또 이렇게 한여름 불볕더위를 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곤란과 어려움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아닐런지요.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번호 《사람》의 표지 사진입니다. 다섯 명의 젊은이들 뒷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검은 색 계통의 어두운 티셔츠를 입었고 다들 무척 지친 듯합니다. ‘마리’라고 쓰인 간판 밑 내려진 셔터 앞에 선 이들은 마치 전쟁영화에서 나오는 포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누구일까요?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요? 어디를 보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용역, 용역직원, 혹은 용역깡패라고 부르는 이들입니다.지난 6월 19일 명동 재개발 구역인 카페 마리에서 철거가 진행된다는 소식이 트위터로 퍼지자 일요일임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항의집회와 몸싸움 끝에 카페 마리는 다시 철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농성장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그 과정에서 안에 들어간 동료가 집기를 다 철거할 때까지 철거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못 들어가도록 셔터 앞을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왠지 참 애처롭습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둘러싸여, 혹시라도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용역들. 사실 현장에서 이들을 만날 때면 유난히 겁이 많은 저는 눈을 마주치는데도 적지 않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몇 발짝만 물러나면 그저 애처롭고 안타까운 존재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정함과 공포의 대명사인 이들은, 이들의 뒷모습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뒷모습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 삶도 이미 자본의 용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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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이번 한진중공업에서도 희망버스보다 일찍이 희망퇴직이 있었다. 비단 한진중공업만이 아니라 아이엠에프(IMF) 이후 무수히 잘려나간 노동자들 중에 도대체 어떤 이들이 명예롭게 명예퇴직을 했는지, 희망퇴직자들이 무슨 희망을 갖고 일터를 떠났는지 모르겠다. 희망이란 말은 참 얄궂은 말이다. “네가 우리의 희망”이라거나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말은 대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상책이다.


2011년 새해가 밝은 지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김주익 열사의 추모 동영상으로 처음 알게 되고 『소금꽃나무』란 책을 읽으며 열혈 팬이 되었던 김진숙 씨가 다른 곳도 아닌 85호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나는 희망이란 단어 대신 고행, 순교 같은 단어가 불현듯 떠올라 망측해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송경동 시인의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야기를 읽고 다시 ‘김진숙과 85호 크레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또한 희망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85호 크레인에서의 죽음과 절망, 패배의 이야기였다. 이 죽음과 절망과 패배를 멈추기 위해 다만 우리의 적은 힘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냐는 시인의 말이 공명을 일으켜 ‘희망버스’가 생긴 줄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 희망버스는 그 출발이 절망이며 패배한 역사를 경로로 삼는 그래서 좀 사기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1차 희망버스는 장인어른 생신과 겹쳤고 2차는 어머니 칠순 날이라 타지 못했다. 3차도 뒤늦게 내려갔다가 반가운 이들을 만나는 바람에 술잔만 빨다가 서둘러 올라왔다. 무박 2일이었지만 ‘희망버스는 절망버스’라는 머리띠를 두른 영도주민의 욕설과 삿대질, 해방정국에서의 백색테러를 떠올리게 하는 어르신들의 ‘빨갱이 사냥’을 목격했다.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주택가 골목을 누비는 바람에 영도 주민들에게 큰 폐를 끼치기도 했지만 열대야에 무료했던 일군의 영도주민은 많이들 반겨주시기도 했다.


며칠 전 방바닥을 뒹굴다가 한진중공업 사태를 다룬 KBS ‘추적60분’을 봤다. 중간쯤이었을까, 덩치가 산만한 노동자 한 명이 현장에서 걸어 나오며 “살려 주세요”라고 울먹이는 장면이 나왔다. 경찰이나 용역에 손발이 들려 나오는 것도 아니고 곤봉에 죽도록 두들겨 맞는 것도 아닌데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제 발로 걸어 나오는 그 노동자의 살려 달라는 말이 참 생뚱맞았다. 그런데 뒤이은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살려 주세요, 우리 진숙이 누나 좀 살려 주세요.”


그 순간 나는 정리해고로 십 수 명이 죽은 쌍용자동차가 떠올랐다. 아니 죽음의 행렬 속에 무력하게 무얼 해야 할지 몰랐던 내가 TV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김주익이 죽고 살아도 산 사람같이 살 수 없었던 김진숙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먼 훗날 내 아이가 “그때 아빠는 뭐 했어?”라고 물어볼 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적어도 내게는 희망버스는 면피버스인 셈이다.


어떤 교수 양반은 자본주의에서 정리해고,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은 불가능하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몇 개월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회장님은 정리해고만큼은 물러설 수 없는 경영권이라며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고 3년 간 영업실적이 없음에도 월급을 올려 받은 임원들은 외부 세력이 개입해 문제를 어렵게 했다며 성화다. 많이 억울한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법률은 긴급한 경영상의 필요에 따라서만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고 못 박아 놓았다. 그 판단은 법원이 한다. 법원에서 탐욕은 죄일까 아닐까?


뒤늦게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린다고 하지만 큰 희망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 냉정하게 말해 4차 버스도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버스를 탈 생각이다. 적어도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거기에 ‘인간 존엄과 관련한 긴급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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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8-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몰랐던 사실을 이 글에서 알고 가네요. 양귀자의 [희망]의 초반부에 느껴지던 절망과 퇴락의 분위기가 문득 떠올랐는데, 희망버스의 출발이 절망이라는 부분에서 겹쳐진 것 같아요. 별명과 책 제목과 글이 참 잘 어울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나무처럼 2011-08-18 11: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김진숙 씨가 다시 태어나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었는데...

saint236 2011-08-1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전 다음에서 김진숙을 검색하니 특수 단체인으로 나옵니다. 항목을 클릭하면 그제서야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라고 나오고요. 민노총을 민노총이라 부르지 않고 특수단체라 부르나 봅니다. 추적 60분 찾아서 봐야겠네요.
 

1.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중요하다. 누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꽃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잡초가 되어 뿌리째 뽑힐 수도 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 

2.
동해인가, 일본해인가? 노무현 대통령이 이 논란에 대해 '평화의 바다'란 제안을 한 적 있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우익에서 난리가 났다.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는 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기억된다.
지금 다시 논란의 중심이 된 이 바다는 한국에서는 동해, 일본에서는 서해인 셈인데, 오늘 뉴스를 보니 한국해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있다. 친절하게 sea of korea라고 표기된 영국 지도도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왜 시 오브 코리아가 한국해인가? 그러면 한국해와 함깨 북한도 고려해 조선해라고 병기해야 할까? 고려해로 통일해야 할까? 

3.
콜롬버스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안이 되었고 아메리고 베스푸치 덕분(?)에 아메리카는 아메리카가 되었다. 땅과 바다에 이름 붙이기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각이다. 어느 바다가 인도양이 되었든 스리랑카양이 되었든 바다는 그 바다에 살아가는 이들, 물고기와 프랑크톤과 해초와 어부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 불러주기는 대상을 인식하는 차원의 것이어야 하지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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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유명한 구절이다.

김원의 책을 읽고 있다.

과연 괴물은 누구인가?

자본주의, 폭력, 테러리즘, 반인륜적 범죄... 광신도, 범죄자, 부랑인, 날품팔이, 껌팔이... 철거민, 빨갱이... 

우리는 정말 괴물과 싸우고 있을까?  

세상은 무엇을, 누구를 괴물이라 할까?

두려움, 절대적인 폭력, 이해불가능한 공포, 예측불가능한 행동.... 배제와 타자...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중에서...
 
   


우리의, 나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존재가 혹시 괴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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