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찍고 또 노래하리
MB 5년을 카메라에 담은 칼라TV 프로듀서 처절한 기타맨
춥다. 겨울 아침 문을 나서면 무심결에 튀어나오는 말인데 요즘 이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혹한의 날씨에 어쩌자고 철탑 위로 올라간 노동자들 때문이다. 아니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두 사람, 김주익과 정은임 때문이다.
“새벽 3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고.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 2003년 10월 17일 방송에서
인터넷 방송 PD, 다큐멘터리 감독, 그리고 뮤지션
2012년 12월 9일 오후 2시, 영하 8도까지 내려간 강추위 속에서 서울 시청광장으로 독립뮤지션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철탑에 방한용품 보내기 노란봉투 공연’이란 제목의 6시간짜리 거리 공연을 위해서다. 경기도 동두천과 평택에서, 충남 아산에서, 울산에서 철탑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자며 만들어진 자리다.
먼저 도착한 이들은 처음 공연을 제안했던 가수 백자와 그의 펜클럽, 그리고 발전기를 돌리고 음향을 손보느라 여념이 없는 ‘처절한 기타맨’(김일안, 44세)이다. 인터넷 방송 칼라TV 프로듀서, 한국독립영화협회 회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명동성당과 청계천 전태일 다리 그리고 각종 투쟁현장에서 노래하는 뮤지션, 처절한 기타맨과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삶이보이는창 르포문학교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깡마른 체격에 꽁지머리를 한 그는 글쟁이보다는 전위예술가가 더 어울려보였다. 술자리에서 “소싯적에 일본에 밀항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던 것 같다. 알고 지낸지 6년이 넘어가는데 그에 대해 별로 알고 있는 게 없다. 그를 만난 첫 번째 이유다.
인터뷰를 위해 장장 여섯 시간을 추위에 떨다가 공연을 마치고 칼라TV 사무실이 있는 합정동 한 막걸리 집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웬걸? 지극히 평범한 ‘학출’이란다.
“학번 물어보는 거, 대학 때 화염병 운운하며 무용담하는 거 정말 싫어한다고 꼭 써줘요. 얼마 전에도 무슨 술자리에서 어느 대학 CA출신 모임이 있다며 무용담을 하는데 옆에 사노맹 출신 한 명이 그러더라고. 난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는데 쓰발~. 일본 밀항은 누가 그래요? 내 입으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이래서 문제야. 돈 벌러 브로커 통해서 갔죠. 불법체류. 1년도 못 채우고 누가 찔러서 추방됐고.”
집이 좀 살았던 덕택에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고 그래서 클래식을 즐겨 들었던 사춘기 소년. 파스퇴르와 파브르를 좋아해 생물학자를 꿈꿨고 고3 때 ‘들국화’의 <행진>을 듣고 밴드를 하고 싶었던 청년. 1987년 항쟁의 해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사회과학 서적보다는 이외수의 소설에 탐닉했던 그는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고 제대를 하고 친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가면 빠징코장에 취직을 시켜준다고 해서 보름짜리 비자로 갔는데 가보니 자리가 없다고 그래요. 사기당한 거지. 운이 좋아서 친구 아버지가 있던 공장에 취직을 할 수 있었죠. 아마 그 시절에 자본주의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학습을 하게 된 것 같아. 돌아올 때 한 100만 엔 정도 모았나. 엄마한테 줄 전기밥통하고 전자기타 하나 사가지고 왔죠.
복학하고 야학도 하고 알바로 노가다도 하고 그러다 졸업할 때가 됐는데 머리 깎는 것도 싫고 양복도 입기도 싫어서 이벤트 업체에 들어갔어요. 군대에 있는 드럼 치는 친구가 제대하면 밴드를 하기로 해서, 기다리면서 틈틈이 다큐멘터리 음악작업에 참여하다가 ‘지하창작단 파적’이라는 다큐멘터리 팀 활동도 했고.”
친구가 제대하자마자 다니던 이벤트 회사도 그만두고 결성한 밴드는 여러 이유로 “망했다.” 때마침 IMF가 한국 경제도 거덜이 났으니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래도 알바하며 근근이 버텼죠. 달리 알바라고 드라마 촬영 현장에 깔려 있는 레일 위로 크레인 밀고 달리는 일. 일당 5만 원 정도였는데 한 달에 네다섯 번 나가서 그걸로 먹고 살고. 그 무렵 게임에 빠졌어요. 아는 선배가 피시방을 차려서 놀러갔다가 리니지란 게임을 하게 됐는데 딱 30분 만에 충격을 받아서, 앞으로는 영화가 아니라 게임의 시대다. 그때 나온 아이디가 ‘처절한 기타맨’이에요. 허영만 만화 『고독한 기타맨』있잖아. 근데 그건 누가 벌써 했더라고요. 그래서 뭐로 할까 하다가 처절한 기타맨. 그때 머리가 좀 돌아갔더라면 선배한테 피시방 팔아서 NC소프트 주식을 사라고 했을 텐데.(웃음) 피시방 알바 하면서 음악작업도 하고. 그러다가 막내 동생이 게임에 미쳐서 그것으로 게임 중독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하나 만들었죠.”
자, 여기까지가 기타맨의 탄생, 혹은 칼라TV의 전사(前史)쯤 되시겠다.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동태찌개에 소주다. 텔레비전에서는 대선 보도가 한창이다.
칼라TV가 기록한 MB 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과 <백년전쟁 번외편-프레이저 보고서, 누가 한국경제를 성장시켰는가>란 영상물이 화제다. 유튜브 조회 수가 100만 건에 육박한다고 한다. 고 김근태 씨의 수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남영동 1985>와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5.18 학살자 처벌을 다룬 영화 <26년>도 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과거를 ‘성공’적으로 청산한 나라로 꼽힌다. 학살자였던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사형을 구형했던 나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라는 국가기구를 만들었던 나라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난 5년간 우리의 과거청산이 얼마나 허술했으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기록노동자들의 노조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트위터에 릴레이 성명을 한다고 하기에 멋진 문구를 찾다가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에 나온 “인간의 권력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란 구절을 발견하고 용산참사를 다룬 연분홍치마의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 떠올랐다. 지랄 맞았던 MB정부 5년을 카메라에 담았던 칼라TV의 ‘처절한 기타맨’에게 전화를 걸었던 두 번째 이유다.
“삶이보이는 창 르포문학교실에서 지금은 칼라TV를 그만둔 조피디(조대희)를 만나 민주노동당 영상팀을 도와주게 됐죠. 그때가 민주노동당이 분당될 때였으니까 진보신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 찍게 된 거죠. 당이 만들어지고 총선에 돌입하면서 칼라TV에 본격적으로 결합을 하게 됐고, 총선 직후 2008년 촛불이 터졌고. 촛불 때는 서울 시청 광장에 텐트를 치고 한 달 반을 거기서 먹고 자고 했지. 촛불이 기본적으로 한미FTA 문제였으니까 진보신당 게시판에 정태인 선생이 와주면 좋겠다고 글을 올렸어요. 그랬는데 다음날 바로 오더라고.”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100일간의 시위, 명박산성과 국민토성, 물대포와 ‘온수! 온수!’라는 구호, 폭력·비폭력 논쟁과 깃발논쟁, 다음 아고라와 유모차부대, 광화문에서의 72시간 연속 집회……. 한국 사회운동과 민주주의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현장을 인터넷 생중계라는 첨단의 방식으로 전했던 칼라TV는 언론을 넘어 촛불시위의 일부분이었다.
“그때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칼라TV 후원 배너를 달아달라고 그랬는데 당에서 일주일 넘게 안 달아주더라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 일주일 사이에만 진보신당으로 후원금이 1억 원 정도 들어왔대요.
6월 6일 72시간 생중계를 하면서 막연히 촛불이 이대로 가다 꺼지겠구나 싶기는 했지. 막막해보였으니까. 마지막 날 장면이 인상적이야. 무대에서는 사회자가 ‘촛불이 승리했다’고 외치고, 뒤편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한쪽은 시민들이 전경버스 밀고 있고, 한쪽에서는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고.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요. 그것마저 없었으며 MB정부의 남은 5년 동안 더 후퇴했겠지. 나는 촛불이 구운동권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지금 좌파의 상황이 그때부터 예견된 것이기도 하고.
촛불이 한창일 때 촛불 말고 다른 데를 찍어보자고 해서 작전을 짰어요. 칼라TV를 보는 사람들이 운동권, 노동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많아서 매우 조심스러웠거든. 처음에 인천에 화물연대 파업하는 데 갔고 그 다음에 기륭을 갔지. 당연히 말이 많이 나왔어요. 그런 데를 왜 가냐? 그래도 나중에는 촛불과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함께 이야기가 되기도 했지.”
촛불시위가 끝나고 칼라TV는 진보신당과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당에서 독립해 좌파 언론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지엠대우 비정규직지회 천막농성, 강남성모병원 촛불시위, 기륭전자 농성장의 용역 침탈 현장 등을 누비던 칼라TV는 2009년 1월 19일 용산으로 간다.
“월요일이었는데 월요일 저녁마다 나는 명동성당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그날 공연을 마쳤는데 용산 철거투쟁 현장에서 화염병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집으로 갈까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교대해줘야 하니까 사무실에서 잠을 잤죠.
내가 예지몽을 좀 꾸는데 그날도 꿨어요. 바닷가인데 유원지에 천막을 치고 서커스를 하는 거야. 들어갔더니 너무 시끄러워서 못 있겠더라고. 그래서 바닷가를 걷고 있는데 하체는 거미, 상체는 사람인 예닐곱 되는 생명체들이 나한테 오더니 같이 가자고 하는 거야. 그런데 얼굴이 숯검댕이같이 까만 거야. 난 가기 싫다고 실랑이를 하다 눈을 뜨는 순간 애들이 사람이 죽었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새벽에 교대하러 가서 시신들 나가는 걸 찍었죠. 연행당하는 사람들 찍고.
남일당 망루에서 불이 나던 순간을 찍었던 박성훈은 아직도 망루에 불길이 확 올라와서 그 열기에 카메라를 들고 물러섰던 그때를 꿈에서 꾼다고 하더라고. 나도 그날 시신이 나가던 모습, 그날 꿈은 평생 못 잊을 거 같아요.
희망버스 촬영하러 내려갔다가 연행된 적이 있는데 그날 아침에도 사나운 꿈을 꿨어요. 쌍용자동차에서는 구사대에 맞은 적이 있는데 그때 기억도 오래 남지. 두들겨 맞은 것 말고 쌍차 마지막 진압 때였는데 정말 이상한 공간이었어요. 헬기가 뜨고 아수라장인데 이상하게 고요하고 적막이 흐르는 것 같은.”
어쩌면 칼라TV는 카메라 너머 23명의 죽음이 어렴풋이 보였던 것은 아닐까. 현장을 기록하는 일은 목격을 하고 증언을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건을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처자국을, 사건의 이면을 끊임없이 들춰봐야 하는 일.
“많은 사람들이 칼라TV의 역할이 중요하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해요. 그런데 현장에서 답을 찾기가 쉽지 않죠. 현장에서는 프레임으로 보게 되잖아요. 전국의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을 쭉 돌아다니며 찍는데 그것을 찍어놓은 영상이, 현장이 다 똑같은 거야. 시작할 때 묵념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고, 투쟁사 하고, 민중가수 나와 노래하고, 연대사, 몸짓패 공연……. 카메라가 아니라 프레임 밖에서 보면 분명히 차이, 다름이 존재하는데 그건 적어도 한두 달 현장에서 눌러 앉아서 기록해야 영상에 담을 수 있는데 칼라TV는 스쳐가면서 찍을 수밖에 없거든요. 현장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더 깊이 들어가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재정이나 여러 조건이 쉽지 않죠.”
2009년 3년 넘게 기륭전자 투쟁을 영상으로 기록해오던 김천석 씨가 목숨을 끊었다. 2011년에는 ‘숲속홍길동’이라는 예명으로 유명했던 영상 활동가 이상현 씨도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이 두 죽음을 계기로 2012년 3월 ‘현장을 지키는 힘을’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천석이 죽었을 때 정말 힘들었죠. 정말 똘똘한 친구였는데……. 죽기 얼마 전에 자기가 찍은 영상을 피디수첩에 제공해서 그 돈으로 노트북을 샀어요. 나한테 자기도 이제 칼라TV처럼 인터넷 생방송을 할 거라면서, 칼라TV는 너무 편파적이라고 농담하고 그랬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2012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자리를 잡고 칼라TV도 안정되면 개인적인 다큐멘터리 작업과 음반 작업을 하려 했다고 한다. 물론 오늘도 그는 공중파 TV에서는 볼 수 없는 대통령 후보 김소연, 김순자의 일정을 좇으며 틈틈이 거리 공연을 하고 있다.
“나이 60을 먹고 머리가 하얗게 됐을 때도 한 달에 한 번 전태일 다리에서 노래해야죠. 최근에 토지, 임꺽정을 읽었는데 결국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피 값으로 이만큼 나아진 거잖아요. ‘괜찮아, 어차피 잘 안 될 거야’라고 우스갯소리로 노래하기도 하지만 결국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람들의 힘으로 세상은 나아지고 있고 칼라TV도 나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술집을 나오니 역시 날은 찼고 술 마시는 내내 그는 외로워보였다. 그래. 추우면 춥다, 외로우면 외롭다 말하자. 그래야 추운 사람끼리 외로운 사람끼리 손도 잡고 어깨도 걸 것 아닌가.
- 삶의보이는창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