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을 기대했는데 정작 자유주의, 공동체주의 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된 것 같다. 10년 전에 쓴 글을 묶은 것인데 물론 지금에도 시사점이 많다. 센델의 공동체주의와 그 한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고. <정치제에 대한 권리>를 읽다가 끌려서 이 책으로 왔는데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나 절판되었다는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까지 가보고 싶어진다.

 

아래는 밑줄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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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우리'는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구성한다. 정치적 담론에는 항상 행위 과정에 대한 불일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특정 형식의 집단적 행위를 통해 창출되어야 할 '우리'라는 정체성을 사실상 핵심 문제로 간주할 수 있다. (85)

 

현대 정치의 특징을 이루는 투쟁 가운데 일부는 일정한 질서를 구축하려 하는 결절점들 주위에 사회적 관계들을 고정하려 하지만, 적대적 힘들의 영속성으로 말미암아 고정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분적이며 불확실하다. 정의와 관련된 담론들이 그런 투쟁에 속한다. 그것들이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대한 경쟁적인 해석들을 제안함으로써 상이한 유형의 요구들을 위한 정당성의 근거를 제공하며, 특수한 동일화 형식을 창조하고, 정치적 힘들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들은 어떤 주어진 순간에서 특정 헤게모니의 설립과 '시민권'의 구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공한 헤게모니는 상대적인 안정화의 시기와 폭넓게 공유된 '상식'의 창조를 의미하지만 (...)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정의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기는커녕, 평등과 자유라는 정치적 원칙들을 둘러싼 가능한 해석 가운데 한 해석에 불과하다. (90)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철학은 토대들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은유적인 재기술을 제공하는 언어의 정교화여야 한다.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형이상항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모체 내에 새로운 주체 위치들을 창출하여 민주주의적 관행의 범위를 심화, 확장하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게끔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97)

 

시민권을 법적 지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 형성의 한 형식으로, 정치적 정체성의 한 유형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시민권을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축되어야 할 무언가로 본다는 뜻이다. (108)

 

정치학이 어떤 정치적 공동체의 구축, 어떤 통일성의 창출을 겨냥하더라도,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해 주는 어떤 '구성적 외부', 즉 공동체의 바깥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에 완전히 포괄적인 정치 공동체, 다시 말해 어떤 최종적인 통일성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다. (114)

 

나는 근대적 개인의 범주가 모든 특수성과 차이를 '사적인' 것으로 추방하는 어떤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공중'을 가정하는 방식으로 구축되어 왔으며, 이것이 여성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페이트먼의 의견에 동의한다. (132)

 

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보편적 시민권 통념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지만, 개인이 국가에 반해 보유하는 권리들을 가리키는 단순한 법적 지위로 시민권을 축소했다. 권리의 보유자들이 법을 위반하거나 타인의 권리와 충돌하지 않는 한 그 권리들이 행사되는 방식은 문제가 안 된다. (...) 게다가 근대 시민권의 공적 분야는 분리와 적대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특수성과 차이를 사적인 것으로 추방하는 보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방식으로 구축되었다. 따라서 개인적 자유의 주장에 핵심인 공과 사의 구별은 강력한 배제 원칙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공과 사의 구별은 사적인 것과 가사를 동일시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5)

 

급진 민주주의적 해석은 다른 '신사회운동'은 물론 여성, 노동자, 흑인, 동성애자, 생태주의자 등 각종 참여 세력에서 발견되는 민주주의적 요구를 접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 목표는 급진적 민주주의의 시민들로서 하나의 '우리'를 구성하고, 민주적 등가성의 원칙을 통해 접합된 하나의 집합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그 등가 관계가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차이가 제거되면 단순한 정체성이 될 것이다. 민주적 차이들이 모든 차이를 부정하는 세력이나 담론들과 대립하는 한에서만, 그 차이들은 서로 대체될 수 있다. (137)

 

완전히 포괄적인 정치 공동체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구성적 외부' 즉 공동체의 실존 조건 자체인 그 공동체의 바깥은 항상 존재한다. '그들'이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으며, 합의의 모든 형식은 필연적으로 배제 행위에 근거하고 있음이 받아들여지고 나면, 적대와 분할과 갈등이 사라지게 될 완전히 포괄적인 공동체으 창출은 더는 쟁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감수해야 한다. (138)

 

나에게 여성주의는 여성의 평등을 위한 투쟁이다. 하지만 이는 공동의, 다시 말해 여성적 본질과 정체성을 지녔다고 규정될 수 있는 경험적 집단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의 범주를 종속적인 것으로 구축하는 다양한 형식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42)

 

현대 민주주의에서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것의 정치적 원칙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 곧 시민권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에 대한 공통의 동일시를 통해 하나의 통일성을 정치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철학의 중요한 역할은 정치나 평등이나 자유와 같은 통념들에 대한 참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통념들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을 제안하는 것이다. (184)

 

급진적이고 다원직인 민주주의 기획이라면 정치적인 것 내에 있는 갈등과 적대의 차원을 받아들여야 하며 가치들의 환원 불가능한 다원성이라는 결론을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급진화하며 사회적 관계들로 민주주의 혁명을 확장하려는 우리 시도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그 과제는 사회적 관계들에 내재한 폭력과 적의의 요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격적인 힘들의 분산과 전환이 가능하고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질서가 가능할 조건들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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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여 년 전,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적이 있습니다. 국가의 적(敵)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단체를 만들어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는 이유로 한 해에만도 수백 명의 학생들이 범죄자로 양산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런 무시무시한 범죄자들 대부분은 집행유예로 두서너 달 구치소에 있다가 풀려 나오곤 했죠. 심지어 어느 시점에서는 반성문만 쓰면 내보내주기도 했습니다. 담당 변호사도 한 번 다녀가고 감감 무소식이더니 최후진술을 앞두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접견을 와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최후진술을 잘 준비하라며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언론을 염두에 두고 그간 활동의 정당함과 국가보안법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재판부를 향해 논리와 감성을 동원하여 설득하고 호소하는 방식, 그리고 재판을 방청하러 온 방청객을 대상으로 선전·선동하는 방식이랍니다.

 

어떤 방식이든 재판 결과에는 별 영향이 없을 테니 좋을 대로 하라는 조언을 듣고 저는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재판하는 내내 심드렁했던 주심판사와는 달리, 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앳된 얼굴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재판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배석판사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이야 다 까먹었지만 마치 대학 새내기를 동아리방에 불러 앉혀놓고 말하듯 조근조근 이야기하며 진술을 마쳤던 기억이 납니다. 왠지 그 덕분에 두어 달의 구속과 지리한 재판 과정이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고 약간의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사법부가 구현하고자 하는 공정한 재판과 사회정의, 그리고 평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있는 까닭은 잘 듣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본다는 것은 앎을 뜻합니다. 무엇을 본다는 행위는 주체가 대상을 파악하고 알아나가는 과정이며 분별하고 구분 짓는 것입니다. 잘 보기 위해서는 높은 자리가 필요하고 그렇게 내려다보면 더 많은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그래서 지식을 찾고 쌓아나가는 일이며 이때 시선이 곧 권력이 되는 것이죠.

그럼 듣는다는 것, 들음이란 무엇일까요? 문자가 없던 시절 인간의 역사와 지혜는 구술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과 종교가 모두 성인이 이야기한 바를 듣는 것, 그 들음의 기록입니다. 본다는 것이 타자를 나의 앎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와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라면 듣는다는 것은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더 큰 지혜 속에 스며드는 일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눈을 가리는 것은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무지함을 선언하는 것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은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겸손함이 아닐까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매우 중요한 인권의 항목입니다. 사실 우리 사법부 역사를 조금만 들춰보면 ‘법원은 인권의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무색하지만 그럼에도 침해된 인권의 회복을 위해 결국에는 법원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조약은 물론 우리 헌법과 법률에서도 공개재판의 원칙이나 무죄추정의 원칙,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나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권리 등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7년 관련 법률을 제·개정하여 공판중심주의 국민참여재판 제도를 적극 도입하는 등 인권적으로 큰 진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법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고 이 정부 들어 신영철 대법관 사건에서부터 최근 서기호 판사 재임용 탈락까지 사법부의 독립성 또한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이 마당에 영화 ‘부러진 화살’로 불거진 사법 불신은 분명 사법부의 권위주의, 사법 엘리트의 권위의식을 겨냥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법부의 권위는 딱히 한국만의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의 법정 장면에서는 아직도 판사들이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의 머리모양 같은 하얗고 긴 가발을 쓰고 재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러나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여러 가지 설이 있더군요. 사실 긴 머리를 손질하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어서 유럽 귀족들에게 가발이 꽤나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런 풍습이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법부에만 고스란히 남아 아직도 판사들은 가발을 쓴다는 것이죠. 또 예전에는 법정이 주로 야외에서 열렸는데 가발이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기에 다른 분야에서는 사라진 문화가 법원에는 남아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재판할 때마다 상투를 틀거나 갓을 쓰고 나오는 격이니 상상해보면 여간 웃긴 일이 아닙니다. 상투나 가발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나라 판사들도 성직자가 입는 것과 비슷한 가운을 걸치고 나옵니다. 어쩌면 이러한 전통에 기대어 권위를 세우려는 문화와 특권의식이 사법 불신의 핵심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언젠가 아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일입니다. 의사가 회진을 돌다 한 환자에게 다가오면 그 환자는 일어나 앉으려 하고 의사는 그냥 누워있어도 된다고 만류하는 장면을 흔히 보셨을 겁니다. 저는 그것이 한국인 특유의 예절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는 아이에게 오더니 의자를 꺼내 앉아서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제가 환자였을 때를 떠올려보니 저 또한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일어나 앉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의사와 눈높이를 맞추고 싶어서, 그렇지 않으면 마치 무장해제가 되어 고양이 앞에 놓인 쥐의 기분이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의사들도 부지불식간에 시선에서의 권력관계를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고요.

시선의 높고 낮음만이 아니라 가발과 같은 일종의 치장, 재판장이 나온다는 알림과 함께 ‘일동 기립’을 하는 행위, 세심하게 고려된 자리 배치, 그리고 어려운 법률용어는 법정에서 묘한 극적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 장엄한 세레모니(ceremony)의 정점은 법의 권위를 가리키고 있죠.


크레온왕:  감히 그 법을 어겼단 말이냐?
안티고네:  네, 그러나 그 법을 저에게 내리신 분은 제우스신이 아니에요. 저승의 신들과 함께 사는 정의의 신도 사람의 세상에 그런 법을 정해 놓지는 않으셨지요. 저는 글로 써진 것은 아니지만 임금님의 법이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하는 것도 아니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르니까요.


흔히 자연법사상을 소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한 구절입니다. 왕(권력)의 법 이전에 우선하는 더 큰 법이 있으며 그것이 자연법이라는 이야기인데 천부인권설도 여기서 나온 이야기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가 신이 내려준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사회계약에 의한 것인가의 논쟁은 차치하고 저는 이 구절을 법(권력)의 권위와 그에 대응하는 불복종과 저항권의 기원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또는 법률을 위반한 사람이라고 해도 판사에게 사법권을 부여한 주권자로 대우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법의 권위가 세워진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번호 특집 제목을 “법원의 권위를 기각합니다”로 붙여봤습니다. 언제쯤 기각된 법원의 권위가 ‘인용’되지 않고 ‘인정’될 수 있을까요?

권위 없기로서는 한국사회에서 정치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의 매년 실시되는 직업별 신뢰도 조사에서 정치인은 최하위를 도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거철만 되면 앞 다투어 출사표를 날리며 여의도를 향해 달음질하는 이 행렬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내놓는 공약은 또 어떤지요. 흑묘백묘론. 중국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하는데 앞장섰던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나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인민을 잘 살게 해주면 된다며 한 말이지요. 극심한 사회 양극화와 불안정한 노동,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불안과 불만,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로 인한 공포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유권자의 환심을 사려는 기성 정당의 몸부림이 복지국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고양이 색깔이 어떻든 상관없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해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에서도 그랬지만 흑묘백묘를 떠올리게 하는 복지 논쟁에서도 한국사회에서의 철학의 빈곤을 느낍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복지국가가 아니라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이라며 “복지국가는 국가적 시스템으로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고, 복지사회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들 자신이 자주적으로 상호 연대하고 협동함으로써 만들 수 있는 사회”(녹색평론, 2011년 7-8월, 119호)라고 했습니다. 고양이의 색깔도 중요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고양이에게 쥐를 잡도록 해서 살아가야 하는 방식 그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겠죠.

2012년 연중기획 두 번째를 맞아 《사람》에서는 대담을 통해 총선과 대선에서 인권운동이 무엇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다루었습니다. 또한 지난 2008년 총선에서 성소수자의 가시화와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던 최현숙 선거운동의 의미를 되짚어보았습니다. 인권의제가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채택되는데 그치지 않고 소수자 집단이 제도 정치에서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을 넘어서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대표의 틀을 전복하고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도 배제된 이들, 대표되지 않거나 대표될 수 없는 이들, 몫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겠습니다. 

어떤 이는 우스갯소리로 검은 머리카락이든 흰 머리카락이든 머리에 붙어있기만 하면 좋겠다며 흑모백모론이라 합니다. 부쩍 탈모에 시달리는 저로서도 참 가슴에 와 닿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흰 머리냐 검은 머리냐, 대머리냐 가발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생기를 잃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가느냐 아닐까요?

 

 


 

 

 

 

 

 

 

 

 

 

 

 

 

 

<사람> 2012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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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저자 엄기호의 강연도 들어본 적이 있고 글도 여럿 읽었고 회의도 가끔 하는 사이지만 단행본은 처음이다. 강연을 들으며 참 술술 잘 풀면서도 조리가 있다고 느꼈는데 그대로 강연을 옮겨 놓은 듯 쉽게 읽힌다. 쉽게 읽힌다고 그의 문제의식이, 이 책의 주제가 가볍다거나 얇은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위로나 분노가 아니라 용기"라는 말은 새로운 세대들의 새로운 연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을 덮으며 너무 후딱 읽어버렀나 싶도록 재밌고, 뜻 맞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나누고 싶픈 이야기로 가득찬 책. 어떻게 이리도 핵심을 잘 짚었나 감탄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더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과 나랑 비슷한 생각이네, 무릎을 치게 만든 책이다. 

<삶이 보이는 창> 
격월간 삶창이 이뻐졌다. 약간 얇아졌는데 활자도 키우고 행간도 늘이고, 그간 답답했던 편집에서 아주 읽기 좋은 편집으로 바뀌었다. 디자인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아기자기한 변화가 엿보인다. 매번 받아보지만 이번처럼 꼼꼼이 읽지 못했다. 역시 이 또한 디자인의 힘이리라.

 


 

 

 

 

 

 

 

 

 

 

 

 

 

발리바르가 쓴 책 중에서 그나마 쉽다는 책인데... 사실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아래는 밑줄긋기...

 

나는 결코 국가 권위에 대한 불복종 및 그 내용이나 입안 조건들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법률들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시민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의 사멸"을 요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를 정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이 함축하는 개인주의는 정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불복종에 대한 이런 필수적인 준거가 없이는, 그리고 심지어 이처럼 불복종에 의지함으로써 생겨나는 위험을 주기적으로 감수하지 않고서는 시민성과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 16

 

지금 세기말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상상의 힘을 해방시키면서도 유토피아와 결별하는 일이다. (...) 집단주의적인 것이든 개인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유토피아는 현실주의와 비현실성이라는 양자택일 속에 상상력을 가두는 반면, 현실주의는 근원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며,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비현실적인 것, 더 나아가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 역사 속의 어떤 현실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지구화" 내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과정과 함께 고전적인 유토피아의 토대들 자체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을 확인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제도들의 변화라는 질문 및 제도가 불가피하게 포함하는 허구의 몫(집합적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한 단어들과 권리들, 새로운 기법들의 발명,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접합하는 가치들의 변화)이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는 진정한 철학적 딜레마가 존재한다. - 19

 

미등록 체류자들, "배제된 이들" 중에서도 "배제된 이들"은 단순히 희생자들로 나타나는 것을 그치고 이제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항과 상상을 통해 우리가 민주주의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것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해준 데 대해, 그리고 이를 말하게 해준 데 대해 그들에게 빚지고 있으며, 법/권리와 정의가 그들에게 회복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 쪽의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편에 참여하게 해준 데 대해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 35

 

반대로 나는 정치 및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또한 동시에 사람들까지 살해하는 극단적 폭력의 확산은 또한 그 본질적인 일부에서는 국경의 강제 및 불가능한 봉쇄를 수단으로 한 국가에 의한 인구 정착과 격리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면서 반폭력의 정치(내가 시민다움의 정치라고 부르는)를 옹호하고자 한다. 국경에 대한 치안적 관점, 곧 국경을 "방역선"으로 간주하는 관점 대신 국경에 대한 정치적 관점 및 실천이 필요하다. 국경을 정치의 장으로 전위시켜서, 더 이상 국경이 모든 반항과 통제, 상호성의 권역 바깥에, 가장자리에 놓이지 않고 중심에 놓이도록 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개인들과 집단들이 오늘날 때로는 국경 이쪽에서, 때로는 저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말하자면 그들이 경계선 양쪽에 걸쳐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109

 

"국민 우선"은 곧바로 다른 일련의 "우선들"과 쌍을 이루게 되는데 이 후자의 "우선들"은 국민 우선과 함체되며, 이 국민 또는 국민성을 일종의 이상화된 몸체로 존재하게 만들게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보다 "가족 우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가족과 결혼, 성에 대한 국민주의적 통제를 뜻하며 그와 동시에 그것과 분리 불가능한, 가족적 정상성 및 따라서 성적 정상성에 대한 선호를 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곧바로 다른 측면, 곧 일탈로 낙인찍힐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공격적인 입장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우선/선호가 증오의 조직, 유지 및 이상화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런 우선/선호가 또한 일탈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으로 표현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 129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파시즘에 근접해 가고 있다. 자신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국가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국가에 대해 그들이 항상 "좋은 쪽"에 있고, 희생자,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는 점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도록 가시적인 안전 중심적 조치들을 취하고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것을 제도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는 누구를 우선시하는가? 곧 국가는 누구 편인가? 그리고 국가의 결정들은 누가 내리고, 누가 국가로부터 정확히 우선이라는 답변을 얻을 수 있는가? 누가 선택된 이들이고 누가 버려진 이들인가? - 147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소통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인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모든 정체성은 하나의 연결로서, 서로 교환되는 것이며 (...) 모든 정체성은 하나의 시선이다. 곧 정체성은 타인들을 보는 한 가지 방식, 특히 어떤이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는 한 가지 방식이다. - 149

 

정치에서 "대표"되어야 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나 집단이 아니라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배제된 이들은 정확히 그들이 "표상/대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탁월하게 대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대표는 미리 존재하는 대표의 틀 속에서 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표의 틀을 창출해내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변형하거나 전복해야 한다. -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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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으면 뭔 이야기를 읽었는지 당췌 모르겠고

 

중고 서점에 가면 이게 집에 있는 책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서평을 읽으면 전에 읽은 책인지 헷갈린다... 하여

 

읽은 책 리스트라도...

 

 

 

 


 

 

 

 

 

 

 

 

 

 

 

 

 

 

 

 

 

 

 

 

 

 

 

 

 

 

김훈의 <흑산>은 읽는 내내 불편했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사유가 자꾸 현실에서 떠오르는 듯한... 앞으로 다시 김훈의 작품을 집어들게 될지 모르겠다.

 

<한낮의 어둠>은 설 연휴를 틈타 읽었는데, 초반에는 무척 지루했으나 후반에는 몰입된다. 조지오웰의 전체주의 비판과는 또 다른... 왜 모든(지금까지의 역사 상 있어 왔던 모든) 혁명은 실패하였는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까닭을 인간 내면을 직시하고 있다. 좌파, 혁명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는 생각...

 

언제나 많은 깨달음과 각성을 주는 <녹색평론>... 역시 '왜 지금 녹색당인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반면 <왜 분노하지 않는가-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은 많이 아쉽다.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 새로운 인권선언을 만들자, 새로운 인권운동을 구성하자는 이야기 같은데 서구 자유주의 관점이 지나치고, 그냥 인권 입문서 정도로 논점을 나열하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닌지... 전 세계적으로 자행되는 학살과 파괴, 기아와 빈곤,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 인간존업성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여 약간 한가한 소리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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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선배가 귀뜸해준 비법이다. 일단 친구들을 왕창 데리고 가서 왕창 술과 안주를 시켜 먹는다. 여기서 왕창이 중요하다. 주인장이 눈여겨 볼만큼 왕창 먹어야 한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집에서 조촐하게 술 한잔을 하고 외상(정확하게는 '가리'라고 했다)을 한 다음 약속한 날 칼 같이 외상값을 갑는다. 외상값을 갑는 날 술 한잔을 더 하면 금상첨화. 


출근길에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다가 문득 이게 20년 전 노래구나, 그러다가 단골집들이 떠올랐다. 그야말로 자유연상...


첫 단골집은 신사역 근처에 '축제'라는 호프집. 당시 고삐리였던 우리들에게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았던 곳이라는 이유로 버스 몇 정거장을 가서 마셔댔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그때 1000cc에 천원, 500cc에 5백5십원 했던 것 같다. 500원짜리 동전도 없던 시절, 우리는 백원짜리, 오십원짜리, 십원짜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수놓으며 마셨다. 남자는 1000이라며. 지금이야 보기도 힘들지만 그때는 1000이 대세였다. 


고3 무렵에는 한강을 건너 대학로로 진출했다. '취바리'라는 막걸리집. 대부분의 손님들은 대학생들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로는 대학로였으니까. 흔한 민속주점들 중 하나였지만 세 번에 한 번 꼴로 동틀 무렵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 밤 12시인가 공식적으로는 문을 닫아야 했기에 2차 3차도 없이 주구장창 쭉...

 

대학에 두 번 낙방을 하고 남산 위에 하얀 집이라 불리던 학원을 다닐 때는 숙대입구역 뒷편 '안성집'이 단골이다. 2500원 하던 김치찌게나 부대찌가가 주 안주. 절묘한 것은 다음 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교가 안성이었는데 단골집 이름은 '서울집'이었다. 안주는 '안성집'과 크게 다를 바 없었고.

 

그 뒤로는 이렇다할 단골집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부유하는 삶이지 않았나. 서울 도심에서는 당췌 단골집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작년에 이사간 동네, 집 앞 실내 포장마차가 있는데 얼마 전에 외상을 했다. 닭똥집을 포장했는데 카드 결제가 안 된다는 거였다. 현찰이 없었기에 다음에 들리겠다고. 당연히 외상값을 갑은 날 똥집 하나를 또 포장했다. 이제 뿌리가 좀 내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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