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위들이 그렇듯 처가에 가면 장인어른과 술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건설회사에 다니다 은퇴하셨고 정주영의 열혈 팬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자인 장인과 9시 뉴스를 틀어놓고 술을 마실 때면 저는 그저 벙어리 신세가 되기 일쑤입니다. 아주 가끔 요즘 젊은 사람들 생각을 물어보실 경우에야 에둘러 제 의견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이 역시도 조심스럽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술자리에서 한국전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장인은 전쟁 통에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오신 분인데 남녘에 내려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충남 공주 근처라고 합니다. 왜 하필 공주였나 여쭸더니 그쯤에서 인민군이 피난 행렬을 앞질러 가더랍니다. 그 시절 장인어른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죽음이 지척에 있었던 피난길의 기억은 아주 강렬했던 모양입니다.


넝마주의공동체를 이끌었던 윤팔병과 철학자이자 변산공동체인 윤구병 형제 이야기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일병부터 구병까지 아홉 형제 중 여섯은 좌익으로, 부역자로 몰려 처형되거나 실종되고, 일곱째는 고문 후유증으로 자살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란 흔한 관용구로 어찌 전쟁을 겪은 세대의 아픔과 고통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인지 윤팔병, 윤구병 형제의 아버지도 제 장인의 어머니도 자식을 많이 낳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합니다. 장인어른에게서 피난 시절 이야기를 들은 후 이른바 ‘반공 할아버지’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요즘 꽤나 유명한 반공 할아버지 한 명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KBS에서 6.25 특별기획으로 제작된 <전쟁과 군인>이란 다큐멘터리가 친일인명사전에도 올랐고 좌익 척결에도 앞장섰던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미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작진의 해명이 참 구질구질합니다. “(백선엽이) 독립군을 실제로 죽였는지, 민간인을 잔인하게 고문했는지는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당사자’가 백선엽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피학살자 유족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자라면 정말 비겁하고 후자라면 참으로 무책임합니다.


지난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나온 여러 책들 중 눈길을 끌던 두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과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라는 책인데 두 권 모두 구술 인터뷰를 통해 민초들이 실제로 겪었던 한국전쟁을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헤쳐나가야 했던 20대 초반의 여성, 그러나 국가의 공식 기억에서 철저히 지워지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한편에서는 ‘장한 어머니’로 추켜세워졌지만 현충일 행사에서 엄숙한 추모분위기를 망친다고 곡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군경미망인, 전쟁의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옮아온 가정에서 폭력과 함께 살아야 했으면서도 정작 보훈 대상에서 제외되어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던 상이군경미망인, 그리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조차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냉가슴으로 60년을 버텨온 피학살자미망인,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나마 지난 6월 30일 울산지역 보도연맹사건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원이 “울산 보도연맹사건 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요구는 시효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보상책임이 없다”는 고법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하라며 되돌려 보낸 반가운 판결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실을 은폐해왔던 국가가 이제 와서 시효가 지났다며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고 허용될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사법부가 그래도 KBS보다는 덜 비겁하여 다행입니다. 적어도 공영방송이라면 “당사자가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고 변명하기 전에 그 당사자를 찾아 나서고 그들이 어찌 살아왔는지, 왜 아직도 말할 수 없는지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5월 《사람》에서는 앞으로 《사람》이 꼭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를 독자 여러분께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응답해준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압도적으로 노인 문제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사실 특집으로 ‘노인 인권’을 다뤄보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우리의 준비가 부족해 미뤄졌더랍니다. 하지만 이번호에 실린 ‘부양의무 기준, 죽음의 제도’라는 글을 읽으며 이 주제가 언제까지 미루어 둘 수만은 없는 사안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망신창이가 된 한국사회를 그래도 이만큼 살만하게 만든 그들에게 합당한 예우는커녕 고작 지하철 공짜표를 가지고 ‘과잉복지’ 운운하는 사회에서 가난한 노인들은 하루하루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59년 전에 전쟁은 멈추었지만 이들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사실 지면이 넘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방방곡곡 전쟁이 아닌 곳이 없지만 또 하나의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의 싸움입니다. 며칠 전부터 자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스마트폰으로 85호 크레인의 안부를 확인하게 됩니다. 제발 무사히 그이가 내려왔으면 합니다. 그런데 다섯 차례 뭇 생명을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했던 지율 스님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진숙 씨에게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선뜻 말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크레인 아래인 이곳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요. 김진숙 씨가 서 있는 크레인 위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중 어디가 더 위험한가요?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지 사실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김진숙 씨도 바로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 누군가 절박하게 외치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그리고 어렵지만 답을 찾도록 노력해야지요.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 이 세상이야말로 위험한 곳입니다. 다시 물어보지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저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당신은 안녕한가요? 우리는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1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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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상이 불순해서 그런지, 주변에 있는 이들 열에 아홉은(아니 열에 열 가깝다) 이번 평창 올림픽 유치에 딴지를 건다. 내 경우에는 남의 잔치에 감놔라, 배놔라 하는 거 같아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 아홉시 뉴스를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뉴스에서 감격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그들을 그저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넘겨서야 하겠는가. 어떤 동기가 부여됐을 수도 있고 이해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그저 애향심이 커서일 수도 있다.

평창에 대해 딴지를 거는 사람들을 보고 왜 잔치집에 재를 뿌리냐고 성내는 사람도 있다. 남의 잔치집에 가서 감놔라 배놔라도 웃기는 일이지만 잔치집에 가서 재를 뿌리는 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이건 도대체 내 잔치인가, 남의 잔치인가, 우리 모두의 잔치인가?

우리의 잔치라면, TV에서는 대한민국의 경사라고 하는데, 그럼 나도 즐거워야 하는데 영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남의 잔치라기에도 뭔가 게름직하다. 진보신당은 논평에서 "국제 경기대회는 경제적 이익을 고려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고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동감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지만 동계올림픽은 일단 전 세계 스키나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잔치여야 하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판을 벌일 수 있게 자리를 펴주는 평창, 강원도민의 잔치여야 한다. 잔치판을 벌이는데 얼마가 남거니 모자라거니 하는 건 아무래도 좀 천박하고 너무 야박하다. 내가 즐겁고 네가 즐겁고 우리가 즐겁다면 밑질 수도 있는 게 잔치인 것 아닌가.

문제는 제 주머니 불리는 놈과 밑지고 마당 쓸고, 음식하고,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다, 그럴 거 같다는 거다. 그래서 영 잔치 기분이 안 난다.

어쨌든 한창 기분이 업되어 흥겨운 사람에게 재를 뿌리지는 말자. 언론을 보고 재를 뿌려 달라는 말도 하지 말자. 대신 누가 뒷주머니를 챙기고 누가 뒤치다꺼리를 하게 내몰리는지에 대해서도 제발 균형감 있게 다뤄줬으면 하는 바램, 너무 큰 기대일까.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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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1-07-0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감이에요.. 스포츠인들을 보면 정말 잘 된 일이지만.. 같이 나오던 mb를 보면 왜 자꾸 원전수주가 떠오르는지..ㅠㅠ 평창 땅투기꾼들 신났죠 뭐..
그래도 김연아 눈물 글썽이는 거 보니까 마음이.. 잘됐다 싶더라구요.
 


멀리 있는 무덤             

                -- 金洙暎 祭日에(김영태)



6월 16일 그대 제일(祭日)에

나는 번번이 이유를 달고 가지 못했지

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가던

좁은 잡초길엔 풀꽃들이 그대로 지천으로 피어 있겠지

금년에도 나는 생시와 같이 그대를 만나러

풀꽃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아

대신에 山 아래 사는

아직도 정결하고 착한 누이에게

시집(詩集) 한 권을 등기로 붙였지

객초(客草)라는 몹쓸 책이지

상소리가 더러 나오는 한심한 글들이지

첫 페이지를 열면

그대에게 보낸 저녁 미사곡이 나오지

표지를 보면 그대는 저절로 웃음이 날 거야

나같은 똥통이 사람 돼 간다고

사뭇 반가워할 거야

물에 빠진 사람이 적삼을 입은 채

허우적 허우적거리지

말이 그렇지 적삼이랑 어깨는 잠기고

모가지만 달랑 물 위에 솟아나 있거든

머리칼은 겁(怯)먹어 오그라붙고

콧잔등엔 기름칠을 했는데

동공(瞳孔)아래 파리똥만한 점(點)도 찍었거든

국적없는 도화사(道化師)만 그리다가

요즘은 상투머리에 옷고름

댕기, 무명치마, 날 잡아잡수

겹버선 신고 뛴다니까

유치한 단청(丹靑)색깔로

붓의 힘을 뺀 제자(題字)보면

그대의 깊은 눈이 어떤 내색을 할지

나는 무덤에 못가는 멀쩡한 사지(四肢)를 나무래고

침을 뱉고 송곳으로 구멍을 낸다우

간밤에는 바람소리를 듣고

이렇게 시든다우

꿈이 없어서

꿈조차 동이 나니까

냉수만 퍼 마시니 촐랑대다 지레 눕지

머리맡에는 그대의 깊은 슬픈 시선이

나를 지켜주고 있더라도 그렇지

싹수가 노랗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어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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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름을 정말 기억 못한다. 워낙 내 이름이 특이해서인지 상대방은 내 이름을 아는데 난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잠깐 공인으로 살던 때, 학생회 간부시절 참 민망한 일이 많았다. 최근에는 알콜성 치매인지 사람 얼굴도 몰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모르는 사람이 인사를 한다. 몇 주 혹은 몇 달 전에 안면을 튼 사이라고 얘기해주면 그때서야 '아, 그랬지'하며 떠오른다. 서너 번은 봐야 저 사람이 누군지 안다. 안면인식장애 초기 증세가 아닌가 의심해본다. 내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놈이라서 그런가 자책도 한다. 그래도 점점 실례를 범하는 일이 많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얼굴을 몰라봐도 어여삐 봐달라는 것이다. . 

.  
.
.
.
.
이렇게 적었는데 문득, 아래 시가 떠올랐다. 왜일까? 
 


너 죽은 날 밤 
차 간신 몰고 집에 돌아와 
술 퍼마시고 쓰러져 잤다. 
아들의 방.  
아들이 밤중에 깨어보니 
내가 화장실에서처럼 
소변보고 있었다. 
태연히. 
그리곤 방을 나가 
화장실에 누웠다.  
태연히. 

- 황동규 작 '너 죽은 날 태연히-같이 술 마시던 시절의 김현에게'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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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영래 변호사의 변론문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변론요지서였을 것이다. 망원동 수재사건 변론문에서의 치밀한 논리를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도 했다.  

드물지만 아름다운 판결문, 감동적인 판결문을 본 적도 있다. 물론 대다수의 변론문, 판결문은 아주 건조하고 거의 자기파괴에 가까운 문장이지만... 

아래 글을 읽으며 판결문 쓰기가 아니라 판결문을 쓰는 자세에서는 꽤나 배울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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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쓰는가①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정인진


 

    법관은 판결로만 말한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판결은 법관이 가지는 유일한 언어다. 법관은 사법권이라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판결이라는 기호체계만을 부여받은 셈이다. 법관의 글쓰기가 가지는 성격은 문자행위를 권력의 행사방식으로 삼는다는 이 기이함으로 규정된다.



    시사만화에서는 종종 법관을 머리에 문양이 그려진 모자를 쓰고 법대 뒤에 앉아 방망이를 내리치는 사람으로 그린다. 그러나 법관에게는 그런 모자도 없고 방망이도 없다. 법정에 앉아 있기도 하나, 그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뿐이다. 만화에서의 이미지와는 다소 동떨어지지만, 법관은 기본적으로 사무실에 앉아 판결을 쓰는 사람이다. 법관은 ‘판결 써야 하는데’ 왜 회의를 이렇게 오래 하느냐고 동료에게 투덜대고, ‘판결 쓸’ 시간도 없는데 무슨 여행이냐고 아내를 나무라고, ‘판결 쓰다가’ 다 보내버린 세월이 억울하다며 친구에게 하소연한다. ‘판결은 잘 쓰지만’ 인간성이 틀려먹었다고 욕을 먹는 법관이 있는가 하면, 사람은 좋은데 ‘판결이 좀 시원치 않은’ 법관도 있다. 법관에게 판결은 그의 직업적 모습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된다.

판결문 보면 법관 ‘견적’ 한 눈에…서울고법은 ‘서울고생법원’

    법관 생활은 3인 합의부의 배석판사로서 부장판사를 만나 판결을 쓰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장판사는 배석판사를 판결로 지도한다. 새로 짜인 재판부에서 처음 만난 배석판사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공부를 했는지, 제대로 된 법관 경력을 쌓아왔는지는, 그가 맨 처음 써 내는 판결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경력 높은 법관들이 다소 과장을 섞어 말하기로는, 가장 쓰기 쉽다는 자백간주 판결(피고가 원고의 주장을 다투지 않아 원고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리는 판결) 하나만 읽어 보아도 판사의 실력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새로 짜인 재판부에서 만나게 된 부장판사가 어떤 사람인지는, 배석판사가 써 낸 판결의 초안이 돌아올 때 그 모습이 어떤지를 보면 바로 안다. 전혀 손을 안 대는지 아니면 손을 대는지, 손을 댄다면 꼭 필요한 곳만 고치는지 아니면 완전히 자기 스타일로 만드느라고 난도질을 해 놓는지―이런 것을 보면 부장판사와 보낼 앞날의 윤곽이 잡힌다. 
 
    법관의 일과는 법정에 나가는 것을 빼고 나면 대부분 기록을 보고, 판결문을 작성하고, 작성된 판결문을 검토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법관은 주중뿐만 아니라 주말에도 일을 하고, 매일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거나 퇴근하더라도 집에서 일을 하는데, 그 일의 내용이란 판결문 작성이거나 기록 검토다. 법관 재직중에 나는 소속법원의 판사들 전원에게 보자기를 나누어 주는 법원장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보자기는 기록을 싸 가지고 가서 집에서도 일을 하라는 뜻으로 준 것이었다. 그래서 법관 생활은 ‘보따리 장사’다.

    법관들은 과중하다 못해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린다. 이 과중한 업무량은 법관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천형이다. 법관의 경력 중에서도 가장 고생스러운 때는 고등법원의 배석판사 노릇을 할 때인데, 대부분의 고등법원 판사들은 고등법원 재직기간 중 한 번이나 두 번쯤 몸에 심각한 고장을 일으킨다. 그래서 서울고등법원의 별명은 서울고생법원 또는 서울고등학교다.

야근·조근은 기본…자다가도 ‘벌떡’

    나는 변호사가 된 후에, 이미 사십대에 들어선 어느 고등법원 판사에게서 받은 문자메시지에 가슴이 아팠던 일을 잊지 못한다. 그 문자메시지는 이랬다. “몸이 부서지도록 아픕니다. 아직도 판결 다 못 썼는데……” 판결을 다 못 썼다는 말은, 기말고사가 내일인데 아직 책 한 장도 읽지 못했다는 것쯤 된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시험은 제 일이니 못 보면 그만이지만, 판결을 제 날짜에 선고하지 못한다는 것은 법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써도 써도 기록은 끝없이 올라오고, 떼어도 떼어도 사건은 한없이 배당된다. 담배꽁초는 재떨이에 이미 수북한데, 밤은 이미 지나 동이 훤히 터오는데, 몸은 파김치가 되다 못해 이제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 오는데,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판결을 놓고 기록을 읽는 심정은 참담하기만 하다. 그것도 모자라 어떤 법관들은 야근이 아니라 ‘조근’을 한다. 밤새 사무실에서 기록을 보고 판결을 쓰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퇴근해서 옷 갈아입고 밥 먹은 뒤 다시 출근하는 것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내 경험으로 말하면, 판결 쓰기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 노동이 아니었다. 무슨 화두 같았다. 몽중일여, 오매일여까지야 갔겠는가마는, 동정일여에 비슷하기는 했을 게다. 낮에도 밤에도, 판사실에서도 집에서도, 주중에도 주말에도 판결 중 어려운 대목을 놓고 무언가 머릿속에서 복잡한 검토가 끊이질 않는 것이었다. 세수를 하다가도, 전철 속에서 광고를 바라보다가도, 아침에 산책길을 걷다가도 다르지 않았다. 기록을 다 읽어 보고 판결은 내일 쓰자며 잠자리에 누웠는데 머릿속에서 무슨 자동기계라도 돌아가듯 판결문이 줄줄 쏟아지기에, 혹시 그걸 잊어버릴까 싶어 도로 일어나 판결을 쓴 일이 수도 없었다. 부장판사가 되고 나면 대개 판결을 쓰지는 않고 배석판사가 써 가지고 오는 판결을 검토하기만 하는데, 어느 날엔 기록을 너무 열심히 보고 나자 판결문이 대강 머릿속에서 완성되기에 그게 아까워서 그 자리에서 판결을 써 버린 일도 있었다. 주심인 배석판사로서는 횡재를 하는 셈이었을 게다.

    판결은 당사자에 대한 권력 행사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판결의 결론이다. 그런데 판결의 이유는 그다지 쓰기 어렵지 않으나 결론을 못 내려 망설이는 경우도 있다. 나는 단독판사 시절에 법정에 나가기 5분 전까지도 주문(판결의 결론)을 쓰지 못하고 고민한 일이 있었다. 그날 판결을 선고받을 피고인 중 한 사람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할지 실형을 선고할지 결심을 못해서였다. 결국, 어려울 땐 관용의 길을 따르라는 법언을 따르기는 하였지만. 어떤 이혼청구사건에서는 한 달을 넘어 매일 고민하곤 하였다. 한센병에 걸린 처를 수용소로 보낸 남편이 20년이 훨씬 지나 처를 상대로 이혼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이미 다른 여자를 얻어 그 사이에 낳은 자식이 결혼할 나이에 이르자 부득이 호적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 제소 이유였는데, 과연 나라면 한센병 처를 버리지 않고 평생의 반려자로 남길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를 앙다물고 이렇게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신청인(남편)의 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혼인서약을 한 배우자의 일방이 타방에 대하여 지켜야 할 윤리적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그 사건의 결론이 옳았는지 자신이 없다.



시시한 소송은 없어…모두 피 튀기는 ‘현장’

    판결 쓰기는 글쓰기 중에서도 여느 것과는 다른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판결은 공문서다. 그것은 내면의 고백도 아니고 사실을 기술하는 보고서도 아니고 허구적 갈등을 그려내는 문학작품도 아니다. 소송은 다툼이다. 다툼은 보통 밥을 놓고 벌어지지만, 명예나 신분이나 자유를 놓고 일어나기도 한다. 지면 돈을 내야 하거나 불명예를 안거나 신분이 바뀌거나 교도소로 가야 하는 것이 소송이며, ‘시시한 소송’ 같은 것은 당초에 없다. 송사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안다. 판결은 그 괴로운 일의 최종 결과물이다. 판결은 국가권력을 대변하는 것이며, 다툼을 공적으로 해결지어 놓는 법원의 의사표시다. 판결은 포즈가 아니고 수사가 아니다. 판결에서 보이는 갈등은 허구가 아니라 피 튀는 현장에서의 다툼이며 승부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판결문의 원본에는 반드시 법관이 개인 도장을 찍게 되어 있다. 이런데도 법관이 판결 앞에서 중압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비양심적이거나 신선이 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말하거니와, 법관의 글쓰기는 법관의 천형이다.

    판결은 항상 결론을 가진다. 판결은 당사자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선언하는 문서다. 그 결론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법은 판결에 반드시 이유를 붙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민사소액사건에서는 예외가 있다.) 이 점에서 판결은 다른 공문서와 크게 다르다. 판결의 이유는 대부분 길고 복잡하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법관의 판결 쓰기가 어려운 것은 결론을 내기 어려워서이고 다시 그 결론을 정당화할 이유를 붙이기 어려워서이다. 권력을 행사하되 문자행위로 설득하라는 이 어려운 주문 앞에, 법관은 늘 전전긍긍한다. 마지막을 매번 도장 찍기로 마감하는 이 독특한 글쓰기 방식은 법관의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판결의 복잡한 구문은 악명 높다. 좀 오래된 것이긴 하나, 1969년도에 나온 다음 판결문을 한 번 읽어보시라. “직권으로 살피건대 기록에 의하면 원심이 피고의 원고의 적법한 소원절차를 거쳤음을 다투지 않았음을 뒤집고 다시 한 본안전항변을 물리치며, 그 자백이 진실에 반하고 착오에 기인되었다는 입증이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음이 명백하니 이는 행정소송(무효선언의 의미의 취소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제기에 있어서 소원 제기의 유무가 그 소송요건이 되며 그 소송요건은 법원의 직권심사사항에 속하며 당사자의 자백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원심이 보아 넘긴 위법을 일으켰거나 아니면 이로 인하여 이유불비의 허물을 남겼다고 아니할 수 없어……” 이 글의 뜻은 대충 이러하다. “(당사자가 상고이유로 내세운 문제는 아니지만) 직권으로 살피겠다. (이 사건에서) 피고는 당초에 적법한 소원절차(訴願節次)를 거쳤다는 원고의 주장을 이의 없이 인정하였다. 그러더니 나중에 가서야 ‘원고가 소원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라면서 이를 본안전항변(소송요건이 흠결되었다는 피고의 항변)으로 내세웠다. 원심은 ‘피고의 당초 인정행위(자백)가 진실과 다르고 또 착오에 빠져 한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라고 판단하여 피고의 본안전항변을 물리쳤다. 그런데 행정소송을 제기하려면 그에 앞서 먼저 소원을 제기하여야 하고, 법원은 원고의 이러한 소원을 제기했는지 아닌지에 관하여는 피고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간에 직권으로 심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심으로서는 소원을 거쳤는지 아닌지를 놓고서 당사자인 피고의 인정(자백) 여부에 구애받을 것이 아니라 사실이 어떤지를 심리하였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법을 어겨 판결한 것이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판결에 이유를 제대로 붙이지 못한 셈이 된다.”

멀쩡한 문장 쓰던 사람도 사법연수원 거치면…

    우습게도, 이렇게 복잡한 문장은 훈련의 결과다. 멀쩡한 문장을 쓰던 사람도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치면서 법조계의 그 복잡한 문장 쓰기를 배우게 되고, 드디어는 그것을 자기의 문체로 받아들인다. 겨울날 사무실에서 판결을 쓰다가 문득 창밖에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본 법관들은 “오늘 같이 첫눈이 내리는 날, 우리는 각 밖으로 나가서 각 애인을 만나야 하는데 왜 이렇게 각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농담을 한다. 판결문에 적힌 동사의 주어 또는 목적어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일 경우 그 주체나 객체에 대한 법률요건의 충족이나 법률효과의 귀속이 각각 이루어진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각(各)”이라는 부사를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다가, 급기야 아무 데나 “각”을 붙이게 되는 것을 넌지시 자조하는 농담이다.

    도대체 판결은 왜 그렇게 복잡하고 긴가? 판결은 상식으로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상식이 복잡하다고? 그렇다. 법관이 알고 있는 상식이란 법 공동체 내의 누구든지 승인하는 이치다. 판결은 복종되기보다는 승복되어야 한다. ‘칼도 지갑도 없는’ 사법부가 내리는 판결이 가지는 권위는 오직 논리와 상식으로 뒷받침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결의 결론에 이르는 단 한 개의 사유과정도 판결문에서 빠뜨릴 수 없다. 지는 쪽의 주장은 단 한 개도 남김없이 전부 배척해야 한다. 네 말이 전부 틀렸다고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는 쪽의 주장도 다르지 않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어떤 결론에 가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단 한 개의 벽돌, 단 한 발짝의 걸음도 생략할 수 없다. 진 쪽의 변호사가 눈이 밝은 이라면, 그는 판결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허투루 밟은 논리의 구멍을 찾아내어 전동드릴이라도 들이대듯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판결을 깰 것이다. 그래서 법관은 판결에서 펴는 논리에 조그만 흠이라도 없애려고 사력을 다한다. 그런 판결이 간단해질 리가 없다.  
     
    판결은 논리다. 그런데 어떤 사건에서 법관들은 이유를 찾아 결론을 내기보다는 먼저 결론을 내리고 다음에 이유를 찾아간다. 아마 이 진술에 사건의 당사자들은 펄쩍 뛸 것이다. 뭐? 법관이 결론부터 먼저 내린다고? 종종 그렇다. 어떤 사건에서는 논리가 결론을 위한 포장물이 되는 일이 가끔 있다. 미국 대법원의 위헌심사권을 세운 최초의 선례는 마버리 대 메디슨 사건의 판결이다. 그 사건에서 마셜 대법원장은 누구나 수긍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논리를 내세워 그의 정적(政敵)이 원하는 결과를 주면서 그 반대급부로 법원의 위헌심사권을 얻어내었다. 그는 먼저 위헌심사권을 가지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어서 이유를 써 내려간 것이다. 그의 논리적 연금술은 궤변이지만 그 궤변은 사법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가 되었다. 무릇 글의 두 기둥이 진실과 논리라면, 판결은 때로 논리로 포장된 진실이기도 하고 때로 논리 없는 진실이기도 하다. 재판에 진 이들 중 몇은 판결을 진실 없는 논리 또는 진실도 논리도 없는 헛소리라고 욕하겠지만. 

최소한의 상식 기반…부사·형용사 사용 절제

    판결에서 인정하는 사실, 법적인 효과가 나오는 전제로서의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우선, 알쏭달쏭하게 들리겠으나,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실상 알 수 없다. 법관에게 진실이란 증거법의 테두리 내에서 인정되는 한정된 사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송법적으로는, 증거라는 도구로 진실이라는 화석을 캐는 것이 이른바 사실인정의 작업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사실은 화석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증거가 없는 경우도 있고 증거를 믿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증거가 없는 경우 누가 책임을 지도록 할 것인지, 이런저런 증거가 있을 경우 어느 증거를 더 믿을 것인지를 논하는 것이 증거법칙인데, 이는 상식과 확률의 법칙일 뿐이다. 그리하여 법관이 증거와 증거법칙에 의하여 파악한 사실과 그야말로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진실은 필연적으로 어긋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법관이 자기 자신의 직관적 판단만을 믿어, 증거와 증거법칙을 바탕으로 삼아 형성되어야 마땅할 심증의 금을 벗어난다면 그 순간 법관은 위험한 독단의 세계, 상식을 벗어난 아집의 세계로 빠질 가능성에 노출된다. 법에서 말하는 ‘실체적 진실’이란 그러므로 일종의 관념이며 이념에 불과하다. 어쩌면 의도적 오류라고 할 수도 있다. 판결은 이런 위악적 태도로 최소한의 상식과 논리를 지켜가는 것이다. 구체적 타당성의 대척점에 서 있는 법적 안정성이란 아마 이러한 상식과 논리의 세계일 것이다. 법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은 이렇게 지켜지는 것이라고, 법관들은 믿고 있다.

    이 심증형성의 자유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자유심증주의라는 이 원칙은, 심리과정에서 형성된 사실심 법관의 심증은 탓할 수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달리 말하자면 법관에게 사실인정에 관한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어놓은 견제장치라고는 경험칙과 논리칙밖에 없다. 경험칙이란 세상 살면서 경험하게 된 원칙이라는 것이고, 논리칙이란 논리적인 사고의 법칙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일억 원의 채무를 말 한 마디로 면제해 주었다는 주장이나 증언 따위를 법관은 믿지 않는다. 경험칙이란 알고 보면 인간이 가장 이기적인 행동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을 말한다. 이기적인 인간이 이유 없이―이타적 이유 같은 것은 이유가 아니다―일억 원의 권리를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이 경험칙이다. 문서도 없는데 일억 원이 포기되었다고 인정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논리칙이다. 그리하여 진실과 사실은 때로 어긋날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판결엔 부사와 형용사의 사용이 늘 절제되어 있다. 수사법 따위는 들어올 틈이 없다. 원고가 피고에게 준 돈의 액수는 정확해야 한다. 막연히 “막대한 액수의 돈을 주었다”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슴을 저미는 사랑 따위도 판결에서는 묘사하는 일이 없다. “원고와 피고는 서로 사랑하였다” 따위의 문장은 판결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제하거나 통정하거나 혼인할 뿐이며, 그게 아니면 교제를 중단하거나 통정관계를 끊거나 이혼할 뿐이다. 어떠한 사랑에도 진실은 있다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상대가 다른 사람과 혼인관계에 있을 경우 어쩌면 생애 최대의 결단이었을지도 모를 그의 행위는 판결에서 “1회 성교하여 간통하였다”라고 건조하게 표시될 뿐이다. 거기에 은유와 직유의 자유 같은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생략이 주는 강한 암시적 효과 따위도 의도될 수 없다. 만약 그럴 경우 그 판결은 이유 불비의 위법을 저지르는 것이며, 파기를 면할 수 없다. 이것은 판결이, 그리고 판결이 표상하는 법률생활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기반을 지키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판결은 삶의 가장 중요한 바탕을 움켜쥐려는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하던 사람, 아무리 아름다운 행동을 보여 주던 사람도 법적인 분쟁에 이르면 모두 어눌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렇게 피도 눈물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판결의 세계에서, 가끔은 예외가 있다. 1977년의 한 대법원 판결에서 다수의견에 맞서 어느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밝히며 그 의견의 마지막에 빚어 놓은 다음의 문장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한 마리의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수사도 필자가 대법관이었기에 양해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하급심에서 그런 언사를 농하였다면 아마 그는 ‘튀는’ 법관, 돌출행동을 할 위험이 있는 인물이 되고 말았을 터이다. 엄혹한 시절이었던 1985년, 비상계엄군법회의의 재판권에 관한 문제를 두고 대법원이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으로 갈렸을 때 소수의견을 집필한 이일규 대법관은 글 끄트머리에 “나로서는 다수의견이 헌법정신에 눈을 뜨지 못하여 헌법적 감각이 무딘 점을 통탄할 따름이다”라고 썼다. 그 때도 법관들은 한편으로 군사정권을 향한 그 일침에 무척 고소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판결에서 다른 법관들에게 그 정도의 말을 하는 것도 거의 금기사항인 법원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법관의 판결은 그토록 조심스러운 것이다.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오래 전 한 번은 이혼사건의 판결에서 우리 부의 배석판사가 “피신청인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를 믿었고, 이를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아 시부모와 갈등을 일으켜 그 결과 신청인(남편)과 불화하게 되었다”라고 쓴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피신청인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제사를 지내지 않아 시부모와 갈등을 일으켰고 그 결과 신청인과 불화하게 되었다”라고 고쳐 놓았다. 앞의 문장에서처럼 문제 된 사실의 설시를 중문으로 구성하면, 특정 종교를 믿는 것이 이혼사유가 되는 듯이 읽힐 것 같기에, 그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든 간에 또 누가 무슨 종교를 믿는지 간에, 법원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헌법상 기본권인 종교의 자유를 염두에 둔 내 견해였다. 다만 그로 인하여 제사 문제를 놓고 시부모와 갈등을 일으키고 나아가 남편과 불화한다면 그것은 이혼사유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판결의 문구 하나 하나에 극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도 본 일이 있다. “원심은 그 판시(判示)의 이유로 피고인의 판시 행위가 그 판시의 법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는바, 기록에 대조하여 보면 거기에 논지가 주장하는 위법이 없다.” 그대로 읽어서는 도대체 피고인이 무슨 행위를 하였고 그것이 어떤 법에 위반하였다는 것인지, 원심법원이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아가 대법원은 왜 원심법원의 판단이 옳다고 하는지, 도무지 짐작도 못하게 써 놓은 이 판결은 아예 소통을 포기한 듯 보인다. 이 판결의 배경에는, 문제의 처벌법규가 악법으로 이름난 긴급조치였다는 사정이 있었다. 피고인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판결문에 적어 놓기가 껄끄러웠던 어느 대법관이 ‘적당히 넘어가는’ 방식으로 쓴 판결의 예다. 이런 것도 조심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남의 말을 자꾸 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그렇지, 읽고 있자면 법관인 나마저도 답답해지는 판결이 있었다. “비록 민주주의의 원론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하는 여건에 따라서는 범죄가 될 수 있다”라든가.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던 목사가 계엄법위반죄로 기소된 사건이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런 어거지 판결을 쓰는 시대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남의 판결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련다. 2006년에 나온 어느 고등법원의 판결은 이런 문장을 담고 있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아름답지 않은가. 나도…… 그런 판결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소심한 내겐 따뜻한 가슴으로 자칫 법을 어길 수 있을 위험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역시 법관의 글쓰기는 그에게 천형이다. 오늘도 그 천형을 달게 받아, 어두운 밤 쓰고 또 쓰고 있을 법관들을 생각하며, 나는 가슴이 시리다.

 

글 정인진 판사 노릇을 이십 년 넘게 했다. 젊은 시절 판결 쓰다가 그만 진을 다 뺐다고 믿지만, 아직도 마음에 쏙 드는 판결을 써 보지 못했던 걸 아쉬워 한다. 변호사가 된 후론 법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사람들이 믿을지 고민하고 있다. 이제, 글 잘 하는 건 그 다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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