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생각으로는 자기의 욕망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인 거 같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욕망인지가 분명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면, 무엇을 왜 욕망하는지를 우선 알아야 한다. 그 앎에 대한 욕망은 남의 글을 읽게 만든다. 남의 이야기나 감정 토로는 하나의 전범으로 그에게 작용하여, 그는 거기에 저항하거나 순응하게 된다. 저항할 때 전범은 희화되어 패러디의 대상이 되며, 순응할 때 전범은 우상화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나는 누구처럼 되겠다가 아니면, 내가 왜 그렇게 돼가 된다. 그 마음가짐은 그의 이름붙이기 힘든 욕망을 달래고, 거기에 일시적인 이름을 붙이게 한다. 왜 일시적인가 하면, 전범은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 <행복한 책읽기> 중에서
#4.
책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마땅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작금의 도서정가제와 관련된 논란에서 소홀한 것, 아니 어쩌면 나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불편함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 빠져있기 때문은 아닐까?
책은 기획되고 유통되고 판매되는 소비상품이란 전제가 불편하다. 이 전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더 불편하다. 책이란 지식이고 앎이며 권력이다라는 말로 책을 과대포장할 생각도 없지만 책은 그저 욕망의 대상, 소비되는 상품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에도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끝장토론도 좋고(토론을 끝장을 볼 때까지 하는 것은 어디나 무엇에서나 필요한 일이다), 찬반 서명운동도 좋고 하지만 무엇보다 도서정가제가 옳냐, 그르냐를 넘어 출판생태계에 대한 논의, 인문학과 교양에 대한 교육적 성찰, 더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통해 과연 우리에게 책이란 무엇이었으며 이 시대에 책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3.
중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책이란 곧 문학을 뜻했다. 만화는 불량서적이니 책에 낄 수가 없다. 교과서는 더 쓰레기 같았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황순원의 <일월>, 카뮈의 <이방인>, 항동규와 황지우, 김지하와 김남주, 박노해, 이성복, 최승호, 최승자 같은 시인들... 20대가 가까워지면서 책들은 <전태일 평전>이나 <아리랑>과 같은 것으로 확장되었다. 요즘은 아무래도 하는 일이 그렇다보니 문학작품보다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읽게 된다.
10대 후반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이가 바로 김현이었다. 어쩌면 기형도의 시보다 <입속의 검은 잎> 뒤 편에 실린 김현의 글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김현은 우리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기 위해, 그 앎에 대한 욕망이 글(책)을 읽게 한다고 말했다. 책은 욕망의 결과물이거나 대상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이란 말이다.
#2.
어제 알라딘에서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도서정가제에 대한 찬반을 묻는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나는 바로 밑의 페이퍼에서 썼듯 조금 아리송한 입장이다. 입장이 확실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이 맞겠다.
실제로 좋은 책이지만 책값이 비쌀 때 주저하게 되고(또는 여기 알라딘을 이용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치맥 한 잔을 마시며 책값이 너무 싸다고, 번역비나 저자 인세를 봤을 때나 편집자와 디자이너에게 돌아가는 금액을 봤을 때나 이른바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하여튼 알라딘의 메일을 받고 몹시 불편했다. 왜 찬반인가? 찬성과 반대 말고 어정쩡한 이들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이 문제가 꼭 찬반으로만 물어야 할 일인가? 꼭 알라딘만은 아니지만, 알라딘의 (도서정가제 반대 운동만이 아닌) 그간의 행태가 괴씸하지만 울며 겨자먹기로 급할 때는 알라딘에서 책을 구입하고 비쌀 때도 알라딘에서 책을 찾게 되는 알라디너의 1인으로서 알라딘의 입장이 참으로 불쾌하다.
물론 창비를 비롯한 몇 몇 출판사가 알라딘과의 거래를 중단한다는 기사도 개운치 않았다. 당장 인터넷 서점과의 거래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수많은 출판사들이 한둘이겠는가. 그렇지만 창비나 김영사 쯤이나 되는 출판사들이니 알라딘과 거래를 중단할 용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대형 출판사 또한 그간 출판생태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출판생태계를 파괴하거나 교란하는데 앞장섰다는 지적을 들어왔다.
#1.
며칠 전에 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이>라는 강좌를 들었다. 나의 조악한 수준으로 이해한 바를 정리하자면 데리다는 모더니즘(근대) 철학의 한계를 선과 악, 주체와 타자,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에 있다고 보며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둘을 나누는 차이, 경계를 해체시키는 작업을 자신의 작업, 철학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차이, 데리다의 말에 따르면 '차연', 지연되는 차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글쓰기를 제안했다. 음성 중심주의, 로고스(이성) 중심주의가 생산한 문자 텍스트가 아닌 침묵의 말을 드러내는 글쓰기.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예수 등 많은 선인들인 책을 쓰지 않았고 그들이 남긴 말(음성)을 받아 적은 것이 경전이 되었다는 것, 또한 그것으로 인해 성현의 말씀이 단 하나의 진리로 해석되는 가운데 주류와 비주류, 정통과 이단이 생겨났으며 필연적으로 음성을 문자로 바꾸는 작업에서 권력이 생겨나고 개입된다는 생각-곧 글, 문자, 책은 권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생각과 데리다의 철학이 만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또 한 편으로는 데리다의 해체, 그의 철학적 작업이 가지는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것, 이분법의 전제가 되는 차이를 고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전복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