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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부터 일간지, 시사주간지에 르포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르포라고 하면 '잠입'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선정적인, 그래서 흥미 위주의 글이 실리고는 했지만 근래에는 이른바 탐사보도의 한 축으로 꽤나 좋은 기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물론 아직도 탐사보도, 르포르타주에 못미치는, 그야말로 현장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객관사실보도가 아닌 주관성이 가미되었다는 까닭으로 르포라 이름붙은 기사가 대다수이지만 말이다.  

좋은 르포르타주의 한 전형을 최근 <한겨레1>이 보여주고 있다. '노동OTL 시리즈'도 그랬지만 얼마전 실린 '영구 빈곤 보고서'도 그렇다. 이런 기사는 저널의 영역을 넓히고 르포문학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해주는 듯하다. 배울 점이 많다.    

 

 <한겨레21> 기획연재 - 영구 빈곤 보고서


폭풍 같은 빈곤, 구멍 뚫린 복지 우산 빈곤만 고도화된 ‘복지지체’ 세상
좁은 방에서 길을 잃다 무기력은 더 진하게 대물림된다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고 가난하게 죽는다 100만원 미만 소득으로 3명이 생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 ‘희망의 절대 빈곤’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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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가 그젠가 누가 물었다.  

- 아이티가 어디 있는 나라야? 
- 중남미 어딘가 있을껄. 왜? 

그때까지도 난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어제 한 시사프로에서 아이티 현장중계 하는 것을 봤다. 그 리포터는 "신은 참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최빈국 아이티가 겪고 있는 계속되는 허리케인의 피해, 그리고 이번 지진 피해에 대한 아주 인간적인 아픔과 절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절반의 진실이다.

미국에 노예로 끌려간 흑인들이 세운 최초의 독립국가 아이티는 풍요로운 땅으로 못 사는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끊임없는 외세의 개입과 내부 군부쿠테타로 이미 국가는 인민의 삶을 보호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그 한 예로 지난 몇 년간의 허리케인으로 아이티에서는 1천 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지만 인근 나라 쿠바에서는 불과 다섯 명만이 죽었다.  이번 지진 피해의 경우에도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되지 못하는 주거환경이 한 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재난은 국제정치의 문제, 빈부격차와 불평등의 문제가 빚어낸 인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담은 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오늘이 지나면 내일 해가 뜰 것을 철석같이 믿고 생활한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으리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일상에 대한 믿음은 어쩌면 삶의 전제조건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부서져버리는 것을 목격한 사람,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파괴되기 쉬운 것인지를 깨달은 사람에게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며 무슨 의미일까. 인류가 재난과 폭력에 대한 이해를 시작한 지, 트라우마란 말이 만들어진 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어떤 답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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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을 찾다가  우연히 오래전부터 보고 싶던 글을 찾았다.    
이 책을 읽고 아래 논문을 읽는 것이 나을지, 논문을 일고 책을 읽는 게 나을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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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 다원주의의 문제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 태혜숙(효성 카톨릭대 영문과 교수) 옮김


이 논문의 원래 제목은 <권력, 욕망, 이해관계>였다. 이 주제들에 관한 명상은 실로 어떤 식으로든 힘을 행사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파악하는 내 욕망의 기초적인 전제들을 끝까지 밀고 가 보지 않으려는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생겼을지도 모른다. 가장 단호하게 투신된 담론이나 가장 아이러닉한 담론 모두에 적응되는 이 통속적인 삼박자 규정은 알튀세르가 가장 적절하게 부른 <부정의 철학> (philosophy of denegation)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어쭙잖은 방식으로 내 입장을 환기하는 까닭은 탐색자의 자리를 문제삼은 태도가 주권적인 주체를 비판하는 최근의 많은 글들에서 무의미한 경건함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내 입장의 불안정함을 전면화하려고 할지라도 그런 제스처가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이 논문은 순환적인 글을 따를 수밖에 없어 주체를 문제화하는 최근 서구의 노력들을 비판하는 데서부터 제3세계 주체가 서구 담론 안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문제삼는 데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실은 마르크스와 데리다 양자가 주체의 좀 더 근본적인 탈중심화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 놀랍겠지만, 서구의 지성적 산물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구의 국제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와 공모하고 있다는 논의에 의지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서구의 담론들과 여성 하위주체에 대해(를 위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관계들에 관한 대안적인 분석을 제공할 것이다. 나는 인도의 사례로부터 내 구체적 예들을 끌어와서, 영국이 폐지한 과부 희생 관습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갖는 아주 역설적인 지위를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출처] 스피박,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작성자 muku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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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마감이라 정신이 없다. 글도 두 편이나 써야 하는데 어제 한 편을 겨우 완성했다.  
촛불시민과 용산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용산은 늘 2순위여서 미안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한편 무기력과 패배감과 싸우면서도 열정적으로 촛불을 들고 있는 그 앞에서 많이 부끄러웠다.  

오늘 서울시청에서 용산 집중 집회가 열린다. 잠시라도 거기 다녀와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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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촛불과 만나다

“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 예전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다들 힘든 시절이었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참 많은 노력을 하셨겠지만 조금만 더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어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는 왜 이럴까. 지난 10년간 그래도 내 자식한테 민주주의 국가를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근데 지금 되어가는 꼴을 보니까 아닌 거죠. 이럴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두어 시간 먼저 용산에 도착했다. 8월 15일, 집회도 문화제도 없는 날이다. 천주교 자체 행사가 많아 매일 열리던 미사도 오늘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부동자세로 서있는 경찰들 뒤로 참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남일당 건물을 한참 쳐다보고 있자니 이 한가로움이 왠지 낯설기까지 하다.

이대로 가면 낙원은 없다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나라는 민주주의 나라,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나라, 자유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가면 아무 생각 없이 돈 생기면 외국 여행이나 다니고 하는 이웃나라처럼 되지 않을까, 배부른 돼지들이 사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아니 배고픈 돼지들의 나라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용산과 관련된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촛불을 들고 있는 ‘플라워겐’(닉네임, 김혜경, 44)을 만나 근처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상태로 가서는 낙원은 없다.”는 작가 조세희의 말이 떠오른다. 용산참사 다음날 현장을 찾은 조세희는 “30년 전 난쏘공을 쓸 때 미래에는 이런 슬픔, 불공평, 이런 분배의 어리석음이 없기를 소망”했으나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토로했다.

"촛불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인터넷 개인방송)를 많이 보는데 새벽부터 놀란 가슴에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날 뉴스는 못 봤어요. 현장에 갔던 분이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나서야 알았죠. 그리고 다른 누가 올려놓은 동영상을 봤는데 그 비명소리들…. 미쳤나봐, 미쳤나봐 그랬죠. 너무 가슴 아프고. 그래서 일 끝나고 같이 모여서 여기(용산)로 왔던 거 같아요. 와보니 또 너무 기막히잖아요. 그날도 아마 (경찰이) 여기 앞을 다 막았어요. 그래서 전경버스에 욕도 쓰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솔직히 말해 저는 철거 이런 거 잘 몰랐고 별로 관심도 없었어요. 철거민들이 억울하고 그렇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별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죠. 그리고 철거민들은 과격하다, 전철연이 어떻다, 이런 소문들도 많았잖아요. 촛불들 안에서도 그래서 용산과 함께 하기 싫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플라워겐은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촛불이라 한다. 촛불, 촛불시민은 지난 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이후 여러 사회의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인칭대명사가 된 듯하다. 촛불들은 연령대만 해도 60대에서부터 열네 살 청소년까지 다양하고 정치적 성향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용산에 와서 촛불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촛불은 힘든 사람, 마음 아픈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촛불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했죠. 여기는 이래서 안 오고, 저기는 저래서 안 가고, 이런 건 아니다. 내가 비정규직이건 아니건, 철거민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느냐 하면서 말다툼도 했었어요. 누구든지 도움이 필요하고 촛불을 들어야 될 일이 생기면 가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죠. 또 사회적 약자들도 우리 같은 시민들이고, 누구나 언제든지 비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언제든지 철거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번에 갖게 된 거 같아요. 내가 사는 동네에 뭘 짓겠다고 하면 바로 나도 철거민이구나. 그렇다고 제가 여기 와서 뭐 한 일은 없어요. 그냥 머릿수 하나 보태려고 앉아있는 거죠.”

그가 처음 촛불을 든 까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에서 “애들이 나서는데 어른인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1980년대 후반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는 87년 6월 항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리에 섰고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학습지 교사로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 꼬박 21년 만에, 8년차 학습지 교사로 살아가는 사회인으로, 열 살 아이를 둔 엄마로 다시 거리에 선 것이다.

21년 만에 다시 거리에 서다

“그냥 제 삶만 열심히 살았죠. 사실 사람이 자기 일 아니면 무관심하고 그렇잖아요. 정치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 때 이라크 파병하는 거 보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김대중, 노무현 때는 그래도 그럭저럭 사회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김대중, 노무현 욕을 할 때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죠. 그런데 이명박 들어서면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죠. 내 안전이 위협받는다고나 할까. 이번에 기무사에서 사찰한 것도 그렇잖아요. 또 노무현 때 세금이 많이 올랐거든요. 그래도 세금 내는 게 아깝지 않았어요. 내가 이만큼 내면 누군가 혜택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세금 내는 게 너무 아까워요.

드라마 즐겨보는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 회원이었어요. 솔직히 거기서 저 혼자였으면 촛불을 못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서너 명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이랑 같이 나왔죠. 그러다가 ‘촛불집회 같이 가기’라는 카페에 가입하게 됐어요. 작년에 촛불집회에서 시민 한 명이 죽었다는 사망설이 있던 전후였는데 막 물대포 쏘고 강경진압을 했잖아요. 그때 생겨난 카페예요. 먼저 집 방향이 같은 사람들이 연락처를 교환하고 촛불집회가 끝나면 살아있냐, 어디냐, 전화를 해서 만나서 집에 같이 가는 거죠. 그리고 지금은 거기 말고도 ‘안티 뉴라이트’ 카페랑 ‘1인 시위’ 카페에서 활동 중이고요.
‘안티 뉴라이트’ 카페는 작년 8월 쯤 만들어졌는데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정기적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뉴라이트 바로 알기라는 내용으로 판넬전 같은 전시회를 하죠. 서울에서는 모일 장소도 마땅치 않고 집회신고도 잘 안받아주니까 분당이나 동탄 같은데, 관악산 입구 주차장에서도 했고요. 전시를 하고 있으면 시비 거는 사람도 많아요.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무관심한 사람이 80%, 관심 있는 사람이 20%, 그 중에 시비 거는 사람이 한 5% 정도라고 보면 돼요. 그래도 전단지 나눠주면 받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안 받아 가면 속상하죠. 사실 몰랐으면 저도 그 사람들처럼 싫다고 하고 안 받아갔을 텐데. 아는 게 죄인 거 같아요. 모르는 게 약인데. (웃음)”

냉정하게 말하면 촛불을 들게 되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올 6월까지만 촛불을 들자, 6월이 가기 전에 꼭 이명박을 끌어내리자고 다짐을 했고 아이와도 6월까지만 이해해달라고 약속도 했다. 그런데 이제 곧 가을이고 그의 활동은 더 늘어났다. 다음 아고라에서 뉴라이트에 대해 알게 되면서, 촛불을 드는 일 말고 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전단지라도 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카페에 가입해 활동하다 ‘얼떨결에’ 카페지기까지 맡게 되었고 ‘1인 시위’ 카페(1인 시위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양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주로 을지로 입구에서 1인 시위를 하죠. 사람이 많으면 명동으로 가거나 종각으로 가기도 하고. 아는 동생이 카페에 사진을 올려놓아서 알게 됐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워낙 많다보니까 같이 하자고 해서 그러자 그랬죠. 저는 수요일이나 토요일에 1인 시위를 하는데 두 시간 정도 서있으면 몸이 좀 힘들어서 그렇지 참 좋아요. 1인 시위를 하면 모래요정이라고 한 두 분이 나와 주시거든요. <바람돌이>라는 만화 있었잖아요. 모래요정은 거기서 따온 거래요. ‘3의 법칙’이라고 세 명이 한 곳을 바라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고 하잖아요. 그런 역할도 하고 시비 거는 사람들로부터 1인 시위 서는 사람들 보호해주기도 하고. 주로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 사람들인데 직장 마치고 퇴근하면서 같이 한두 시간 있다가 가는 거죠. 그런 사람들 만나면 너무 흐뭇하죠. 작년에는 촛불집회에서 ‘닥봉’이라고 있었잖아요. 닥치고 봉사하자는 모임. 촛불을 들게 되면서 정말 따뜻한 사람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거 같아요.
저는 요새 미디어법으로 1인 시위를 했고, 4대강 죽이기로도 했고, 그러고 보니 용산 문제로는 한 번도 1인 시위를 못해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죄송하게도 용산은 늘 2순위였던 거 같아요. 미안해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 거 같지만 용산문제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노무현 대통령 죽음 때문에 그랬고, 미디어법 터지면서 또 그랬고, 이번에 평택에 쌍용자동차 때문에 또 그렇고.”

평택 쌍용자동차의 파업과 진압과정을 지켜보며 용산에서 만약 그렇게 일찍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남일당 옥상의 망루는 며칠이나 견뎠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산으로 모였을까. 또는 얼마나 많은 비난의 화살을 용산으로 퍼부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용산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켜진 촛불

“빨리 끝장을 보고 저도 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쌍용자동차 보면서 참 나쁜 생각이지만 뭔가 큰 일이 터져서 이명박이 내려왔으면 하는 생각도 했어요. 참 나쁘죠. 평택 가면서도 그랬어요. 사고 터지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뭔가 촉발할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서 가족들 보니까 절대 용산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이상 사람들이 안 다쳤으면 좋겠다, 또 그래서 너무 다행이고요.
쌍용자동차 보면서, 용산도 그렇고, 왜 이렇게 사람들을 막바지로 내몰까. 2순위지만 어떤 다른 문제보다도 용산이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유족 분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고 해결이 되었으면…. 그런데 이명박이 절대 사과는 안 할 거 같고, 지금도 많이 힘드실 텐데, 앞으로도 더 힘드실 거 같고. 철거민 문제, 전철연과 같이 하기 싫다는 촛불도 있었지만 또 좀 다른 이유로 여기 오기 싫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여기 오면 항상 꽉 막혀있고 갇힌 듯이 답답하잖아요.
사실 저희도 기운이 빠지죠. 학부모들 만나면 정말 많은 분들이 이명박 싫어하고, 제가 촛불집회 다니고 그런 거 많이들 아시니까 격려해주고 그런 분들 많거든요. 한나라당 지지하면서도 이명박은 마음에 안 들어서 다음 선거에서 투표 안 하겠다는 분도 계시고. 그래도 결국 보면 이명박이 하고 싶은 데로 다 하잖아요. 쌍용도 그렇고 미디어법도 그렇고.”

희망을 찾기가 만만치 않은 시절의 답답함 또는 막막함. 용산만이 아니라 돌아가신 다섯 분의 시신이 모셔진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들어 설 때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딱히 공간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용산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다.

“오체투지가 있었잖아요, 올봄에. 저는 무릎이 안 좋아서 같이 오체투지를 하지는 못했지만 남태령에서 사당까지 두어 시간 동안 뒤에서 함께 걸었어요. 그날 날씨가 참 궂었어요. 비가 무지 많이 왔죠. 사실 오체투지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방으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를 않아서 못 가고 있다가 서울로 들어온다고 해서 갔죠.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더라고요. 촛불들도 많이 모였어요.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그걸 다 맞으시면서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걸 보면서, 그때 저도 그렇고 촛불들도 많이 느꼈을 거예요.
사실 용산이 터지면서 철거에 대해,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거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개발을 좋아했던가, 그래서 이런 대통령도 뽑힌 거고. 옛날에 바가지 받고 표 찍어주듯 다들 뉴타운 때문에 찍어주고 그런 거 아닌가요? 뭐 다를 게 없죠. 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파트만 빼곡히 짓는 것, 그 자리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인데. 촛불들도 용산에 함께 하면서 철거민을 보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전철연, 철거민에 대한 선입견, 편견이랄까 그런 것도 많이 없어지고. 처음에는 너무 씩씩한 아줌마들 보고 무섭고 그랬는데 이제 아는 사이가 되니까, 그분들이 어떤 사정으로 여기 와 있고 그런 거 아니까 이해가 되는 거죠. 다른 건 몰라도 용산 때문에 촛불이 많이 변했고, 철거민에 대한 생각,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그를 다시 만난 것은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시청 광장에서였다. 그곳에서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는 DJ의 용산참사 당일 일기의 한 구절을 1면 톱기사로 뽑은 경향신문을 보며 그를 기다렸다. 한 시간 반 동안 줄을 서 분향을 한 플라워겐의 눈가는 눈물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때보다는 (분향이) 빨리 끝났네요. 정말 우리나라 망하려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렸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김대중을 잘 알거나, 그렇게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돌아가시고 보니 무기력해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 소용이 없나봐 하는 생각도 들고. 슬픔도 슬픔이지만 막막함이 더 많고. 민주주의는 국민이 지켜야 하고 시민이 나서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우리가 더 힘내서 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기운 많이 빠지네요.
노무현, 김대중 때 용역깡패 같은 거, 이게 사회 암적인 존재인데 이런 사회악은 제거해주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아쉬움, 섭섭함이 남아요. 어쩌면 자연적으로 도태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도태되는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잡초가 더 빨리 자란다고. 사실 겁나요. 희생이 따라야 하잖아요. 이렇게 많이 후퇴했는데 다시 회복하려면 얼마나 큰 희생이 있어야 할까요?”

여섯 명의 목숨, 200여 일간의 장례식장 생활과 농성, 7개월을 넘어선 투쟁. 공개되지 않는 3000쪽의 수사기록. 십여 명의 부상자와 6명의 구속자, 훨씬 더 많은 연행자, 25만 명의 탄원. 더 무엇이 남았을까.

플라워겐은 향수 이름, 플라워겐조에서 따온 것이다. 이 향수는 병에 꽃 한 송이가 꽂혀 있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이제 곧 찬 바람이 불면 가을꽃이 피고 봄꽃들은 묵묵히 겨울을 견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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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핑계로 평택에 계속 못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쌍용에 대한 칼럼을 써달라네요.
현장도 한 번 가지 못하고 글나부랭이를 쓰려니 차마 키보드가 두드려지질 않습니다.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다가 찾은 기사입니다.

"이게 뭐냐, 소주라도 날리지, 그러면 새총으로 돈 날려줄 텐데.."하는 대목에서는 울컥합니다.  

새삼 자본은 참 악날하고 저열하다는 생각..
그런데 안락한 집에서 맥주마시며 이 글을 보는 저는 그저 한심스럽고 죄스럽네요.
 



“비오면 달려 나갈 거야”


쌍용차 주먹밥에 비를 기다리는 노동자들


2009-07-28 15시07분 미디어충청 특별취재팀

노-사 간의 옥상 새총공방이 끝난 27일 저녁8시경 미처 저녁을 먹지 못한 노동자들이 옥상에서 오랫만에 라면을 끊여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볼트가 날아다니고 최루액이 떨어지는 긴장속의 잠깐의 여유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쉬는 동안 쌍용차 사측은 대중가요를 틀었다.



옥상 위에 쳐진 임시 천막. 한창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경찰, 용역, 사측의 공장진입을 방어하며 교대로 '근무'를 서고 있다. 저녁에는 선선하지만 밤에는 춥고, 낮에는 매우 덥다.

#1. 방송

“노조의 파업은 실패했다. 노조의 파업으로 20만이 죽는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너희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KT노조도 민주노총을 탈퇴했다. MBC, 미디어충청, 사자후도 기대하지 마라.…”

평택시 칠괴동은 쌍용차 사측과 노조의 방송 공방으로 한 여름 매미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과유불급이라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 자연의 선물도 넘치면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고 짜증을 유발한다. 하물며 적개심으로 가득찬 인간의 소리가 차고 넘치는데 오죽하겠는가.

사측은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장소를 이동하며 방송을 튼다. 직접 방송을, 때론 녹음된 테이프를 튼다. 개중에는 사측이 연 집회를 녹음해 방송을 하기도 해 마치 콘서트 실황 중계를 듣는 것 같다.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공장을 떠들썩하게 한다. 주,야 교대근무에 수면장애를 겪던 노동자들이 파업기간엔 경찰, 사측, 용역의 공장진입 시도와 사측의 방송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시도때도 없고 아무 맥락없이 틀어대는 사측의 방송을 노동자들은 사측 방송을 ‘대북방송’이라 했다.

“처음에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방송하고 차분하게 존댓말 하다가 지들이 열 받아서 반말하고 소리 질러. 우리를 마구 짤라 놓더니 이제 지들이 짤릴 판이니까 궁지로 몰린 거지. 방송 듣고 있으면 꼭 대북방송 듣는 것 같아. 개구멍으로 나와라. 여기 오면 밥 줄께, 담배 줄께, 술 줄께… 밥은 우리도 먹어. 주먹밥이 아직 질리진 않아. 종종 아직 남아 있는 라면 몇 개 끓여 주먹밥 말아 먹으면 맛이 일품이지. 물론 술 한 잔 생각나기도 하는데… 기자가 좀 구해와 봐(웃음). 근데 방송 들으면서 처음엔 열 받았는데 이제 그러려니 해. 안쓰럽기도 하지 음악 방송 틀어줄 때는 같이 들으면서 천막에 누워 있어(웃음). 요즘엔 파업가가 입에서 더 맴돌긴 하지만.”



출처/노동과세계

사측 방송은 파업 중단을 요구하는 ‘회유와 협과’, 그리고 쌍용차 사태의 책임이 노동자들에게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영상의 이유로 법정관리까지 오게 된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대량의 정리해고를 포함한 구조조정,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부품사, 협력사의 도산 위기의 책임이 노동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매각을 밀어붙인 정부와 상하이차의 기술유출 의혹, 산업은행의 특별 약정 해제 조치는 사라져버렸다. "관리자와 경영진은 자신들의 책임이 뭐였는지도 모르는가봐" 라고 노동자들은 말한다.

“결국 니네(파업참가자) 때문에 다 죽는다는 내용이야. 자꾸 책임을 우리에게 넘기잖아.”

#2. '산 자'들과의 대화

대화중 파업중인 한 노동자에게 전화가 왔다. 소위 말하는 ‘산 자’란다. 천막에서는 ‘죽은 자’의 음성만 들을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파. 이게 뭐냐. 새총으로 볼트, 너트 말고 소주PT나 날려라. 새총으로 돈 넣어 줄 테니까.(웃음) 참. 담배랑. 이게 뭐냐. 38선 긋고 총싸움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오늘 너트 던진 거 보니까 5개씩 엮어서 던졌더만. 이게 살인무기지… 어제 밤새 (사측)천막에 불 켜져 있던데 혹시 이거 작업한거 아니야? 직장님이 뭐가 미안해. 그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산 자’는 옆 라인 직장이란다. 천막에 모인 노동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좋은 사람이지’라고 말했다. 또한 ‘전쟁’나면 앞에서 새총 쏘는 일 없고 회사 눈치에 뒤에서만 도와준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서로에게 새총을 쏘아도 함께 일했던 동료에 대한 신뢰는 쉽게 깨지지 않았다. 그걸 ‘미운 정’이라도 말한다.

“산 자 사이에서도 ‘새총’ 쏘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그런데 개 중에는 자기가 살아야 하니까 회사에 붙은 악질 관리자, 산 자들이 있지. 대부분의 산 자들은 노조와 대화하자고 한데. 결렬되는 한이 있더라도 대화 먼저 해야 한다는 거지. 선후배, 가족들끼리의 친분 관계가 모두 깨지고 있어. 거기서도 반반 갈려 모임도 깨졌어."

‘다시 얼굴 보고 일할 수 있을 까요?’하고 묻자 노동자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모아 “봐야죠”라고 말했다. ‘회사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사측이 주장하는 ‘회사 정상화’의 내용이 노동자들이 파업을 접고 정상조업에 돌입하는 것이라면 천막에 모인 노동자들의 생각하는 ‘회사 정상화’의 내용은 노동자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먼저였다.

“처음에는 산 자들이 미웠어. 회사의 잣대로 보면 나보다 일도 많이 빵구 낸 사람이 살아남고… 근데 게네도 회사가 다 시키니까 하는 거지. 지금은 무덤덤해. 근데 아무개 전무는 나쁜 놈이야.”

#3. 인권

사측은 7월16일부터 음식물을 차단했고, 22일 물과 가스공급을 중단했다. 일주일마다 정문에서 2-3시간씩 경찰, 사측과 실랑이하며 어렵게 출입했던 의료진도 출입 금지다. 다만 의약품 일부가 경찰과 사측의 통제 하에 들어올 뿐이다. 사람의 몸은 있는 약대로 조절해서 병이 나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된 약이 부족하거나 다치면 이들은 경찰의 연행을 무릅쓰고라도 어쩔 수 없이 평택공장 정문을 나서야 한다. “그래도(아파도) 끝까지 투쟁할 거예요” 라며 버티는 사람도 있지만 ‘살기 위해 투쟁하는 것’ 이라며 동료를 설득해 밖으로 내보낸다.



노동자들이 8일만에 라면을 끊여먹었다. 라면에 주먹밥을 말아먹으니 맛은 일품이었지만 설거지할 물이 없어 휴지로 닦아냈다. 한 여름에 건강이 걱정된다.

먹을 물도 없는데 땀나고 최루액으로 뒤덮인 몸을 씻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단수조치 초기엔 소화전 물로 해결했지만 사측은 소화전마저 끊었다. 공장을 돌아다니며 물을 모아 통에 두면 어느새 최루액이 뿌려져 ‘매운 물’이 되어 버린다. 최루액이 섞인 물인 줄도 모르고 기쁜 마음에 머리라도 감게 되면 한 동안 눈과 피부가 따가워 고생한다. 스티로폼을 녹이는 최루액을 경험한 노동자들에게 ‘최루’는 공포다.

“못 씻고 못 갈아입는 게 제일 힘들어. 옷과 양말을 주워 입기도 해. 몰래 그런 게 아니라 며칠 동안 양말과 옷이 그대로 있으면 공장에서 나간 사람인줄 알고 입는 거지. 소화전 물이 한 번 나왔을 때가 있는데 머리 감은 물로 양말 빨고 했어. 그 물은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화장실 물로 사용했지.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좀 그래. 담배 한 대를 돌려 피기도 해. 근데 그거 알아? 그 한 모금이 꿀맛이야(웃음). 밥도 그런대로 먹을 만해. 맛있고. 근데 덥고 끈적거리고… 참, 그리고 공장진입 때문에 교대로 옥상에서 자는데, 졸리고, 잠자리가 불편해. 어제는 이슬내리고 추웠어. 겨울 잠바를 꺼내 입기도 하고 침낭 있는 사람은 그 안에서 자고. 그것마저 없는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해. 추우면 움직여야 하니까.”

27일 밤, 날이 습하고 더웠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노동자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가장 오랜 기간인 10일 동안 씻지 못한 노동자가 비가 오면 옷 벗고 뛰어나가 씻을 거라며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 반의 말을 던졌다.

“아무리 2MB라고 해도 비 오는 걸 막을 수 있겠어? 얼른 폭우가 쏟아져야 할 텐데…”

#4. 회유와 협박

파업 68일차 넘어가도 회사의 회유성, 협박성 짙은 전화와 문자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것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한 노동자가 “나는 파업하면서 연락 한 번도 안 왔는데. 완전히 버림 받았나 봐.”라고 말하며 오히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때론 사측 관리자, 직원이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고등학교 선배한테 전화가 와 ‘부탁이다’며 공장 밖으로 나오라고 한단다.

“선배한테 전화 받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그 선배가 관리자 한 명이랑 아는 사인데 내가 ‘형, 000한테 사주 받았지?’하니까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로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끊었어. 그리고 나서 미안하다고, 몸 건강하라고 문자가 왔지.”

‘회유와 협박’의 연락과 문자를 받으면 노동자들은 아직도 기분이 ‘더럽다’고 했다. 물론 무덤덤하다는 노동자도 있었지만 노동자들에겐 아물지 않는 상처 같아 보였다.






“회사가 아무래도 밖에 있는 동료들을 세뇌시키는 것 같아. 통화하다보면 여기 있는 상황과 동 떨어진 말을 많이 해. ‘회사에서 들었는데 전화도 못 하게 한다더라. 감시가 심하더라’ 등. 그건 아니거든. 오해지. 힘들어도 참고 있는 이유가 생존권 지키려고 하는 건데. 노조에서 나가지 말라고 해서 안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얼마 전에 조선일보에서 공장 밖으로 나간 사람 인터뷰 한 거 보고 웃겨 죽는 줄 알았어. 나가면 죽여 버린다고? 기자가 웃긴 놈이지. 내용도 모르면서…. 솔직히 전화와도 잘 안 받는 게 맨날 하는 소리가 ‘나오라’는 말뿐이야. 그거 듣기 싫어서 안 받을 때도 있거든.”

#5. 정부

노동자들에게는 박영태, 이유일 공동관리인은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관리인이 정부, 상하이차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상대해야 할 대상은 ‘정부’라 생각한다. 매각 추진을 책임져야 할 곳, 자금 압박을 받는 쌍용차에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할 곳, 상하이차의 지분을 소각해야 할 곳, 기술유출과 미수금을 밝혀내고 상하이차를 처벌해야 하는 곳. 모두 정부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부는 쌍용차 문제와 관련해서는 ‘파업’중이다. 공장 라인이 멈춘 듯 쌍용차 사태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멈췄다. 대신 정부가 선택한 것은 ‘경찰병력 투입’을 통한 강제 진압이다.

“결국 정부가 열쇠를 쥐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어. 산 자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산 자’-‘죽은 자’라는 것만 다르지 이 생각은 비슷해. 관리직이야 지들 욕심 때문에 그러는 거고. 우리도 세금 내는 국민이야. 정부가 공적자금 투입해야지. 지역 기업, 사회 기업으로 만들어서 더 잘 살아보자고 하는데 왜 귀를 닫는 지.”



옥상 위에 쳐진 임시 천막이 어두워 손전등을 비취자 천막 위에 노동자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노동자는 이명박 정부와 김문수 도지사, 정치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정치권의 행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사태 해결을 위해 안 나서는 것보다야 나서는 게 낫지만 여론을 의식해 ‘생색내기용’으로 나서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단다.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사실관계를 떠나 “쌍용차 파업참가자 200명 남았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나서려면 진작 나섰어야지. 평택시민들 고생하게 해 놓고 이제와 뭘 한다고. 김문수 도지사는 자격박탈이야”

노동자들은 “똥 싼 놈이 똥 치워라”고 했다. ‘똥 싼’ 놈은 ‘정부’란다. 먹튀 상하이차에 쌍용차를 넘긴 것도 정부고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노동자만 짜른다며 그래서 억울하단다. 대한민국 국민이 정부로부터 버림받고 사측에게 공격당해 더 억울하다고 했다. 그들의 억울함은 어디다 하소연해야 할까? 70여일 되가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파업농성은 노동자 목소리에 귀막고 파업하고 있는 정부를 향해 두드리는 신문고일지 모른다. 쌍용차 사태의 책임과 해법 모두 정부의 몫인 듯하다.



미디어충청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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