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부터 《사람》 사무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내 서너 명이 찾아옵니다. 둘러앉아 회의를 합니다. ‘작은 음악회’라는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별로 음악적 조예가 깊어 보이거나 문화와 친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흔히 유서대필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20년을 맞아 하는 행사랍니다. 꽤나 시끌벅적 회의를 합니다만 그 모양새가 좀 안쓰럽기도 하고 약간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1991년 5월 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던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죽음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김기설 씨의 유서를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였던 강기훈 씨가 대신 작성했으며 자살을 사주했다는 수사당국의 발표로 한국사회는 충격에 휩싸였으며 큰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항간에 떠돌고 보수언론이 확대재생산하던 ‘죽음의 배후설’이 공안기관의 조작을 통해 ‘터무니없는 소리’에서 ‘그럴 법한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기훈 씨는 자신의 무죄를 끊임없이 주장했고 유서의 필적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에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음에도 결국 그는 3년 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정한 발단은 김기설 씨의 죽음 이전, 1991년 4월 26일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씨의 죽음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경대 씨의 죽음으로 촉발된 분신정국에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국면을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1991년 그해 저는 대학시험에 떨어져 재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91년 5월’과의 인연은 대학생이 된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갔다 우연찮게 시위에 참여하게 됐고, 바로 그날 성균관대생 김귀정 씨가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 속에서 질식사를 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날 저는 거리로 쏟아져나온 무수한 대학생들과 함께 뛰어다니면서도 어쩐지 국외자가 된 듯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분신과 투신 소식,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란 김지하의 <조선일보> 칼럼, 의문사한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씨의 시신을 빼돌리기 위해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오는 백골단의 사진, 저녁 9시 뉴스에서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가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장면 등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20년, 팔팔했던 젊은이를 머리 희끗한 중년 사내로 변하게끔 한 그 세월을 떠올리자 저절로 그동안 걸어왔던 길이 되짚어지고 지금 선 자리를 둘러보게 됩니다. ‘91년 5월’로부터 서너 해가 지난 어느 날, 대학 학생회관 화장실. 아마도 ‘인권’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난 건 그때였을 겁니다. 소변기마다 붙어있던 A4 종이 한 장, 지금은 <인권오름>으로 바뀐 팩스신문 <인권하루소식>이었습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뭐, 이런 것도 있네.’하며 지나쳤던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 십 수 년이 흐른 뒤 벌써 몇 년 째 인권잡지를 만들고 있으니 사람 사는 게 참 모를 일이지요.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이 2006년 1월, 《사람》이 생긴 지 반년이 지나서였으니 저로서는 이 잡지가 어떤 취지나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왜 하필 이름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했는지 그 속사정까지는 알 지 못합니다. 대학에서 브렌드 네이밍(Brand Naming)이라고 하는 상품 이름붙이기 수업을 들은 적도 있지만 이 방면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저로서는 의견을 내봤자 묵살되었겠지만 아마도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냥 ‘인권잡지’라고 하자고 했을 겁니다. 잡지이름이 참 좋다는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하면 대개는 그게 무슨 잡지냐고 되물어옵니다. 그래서 “인권잡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곤 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인권잡지’, 괜찮지 않나요? 다만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때문인지 간혹 제가 국가인권위원회에 다니는 줄 오해하는 분도 있는데 이름까지 ‘인권잡지’면 더 헷갈릴 듯도 합니다.   

어쨌든 《사람》을 창간하며 어떤 이는 인권현장을 취재하여 특종을 터뜨리는 시사지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깊이 있는 이론과 비평을 담은 전문지를 구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권감수성을 키우는 교양지가 됐으면 했을 수도 있지요. 월간으로 나오던 그 시절 《사람》에는 이러한 세 가지 지향이 그런대로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평택 대추리 싸움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인권활동가이자 재단 상임이사까지 겸직한 박래군 전 편집인과 달랑 저 하나뿐인 기자로 매달 거르지 않고 잡지를 내는 것만도 벅찼습니다. 원고를 청탁하고 취재하고, 취재한 내용을 기사로 만들다 짬을 내 다음호를 구상하고, 교정을 보는 와중에 기획회의를 준비하고. 그렇게 서른 세 권의 월간 《사람》을 낸 뒤 6개월의 휴식기를  거쳐 격월간 《사람》으로 개편한 데는 여기서 오는 피로감도 한몫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 잡지를 만드니 여유가 생겨 좋기는 합니다만 격월간이라는 것이 참 어정쩡합니다. 휴간을 결정하고 나서 편집부에서는 아예 폐간을 하자는 안부터 인터넷 웹진으로 전환하자, 계간지로 만들자 등등 여러 논의가 있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제작비용과 인력충원이 어려운 현실도 감안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인권분야에서 정기적으로 나오는 종이 잡지 하나쯤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 현실가능하고 지속가능한 형태가 격월간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일간지에 인권담당 기자가 생길 정도로 제도언론에서 인권문제를 다루는 비중도 높아졌고 인권의 각 영역 별로 단체에서 발행하는 웹진이나 뉴스레터, 소식지도 많지만 좀 더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영역을 가로지르는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돌아보면 ‘사람에 주목하는 잡지’, ‘경계를 넘나들며 인권의 영역을 넓히는 잡지’, ‘다양한 시각과 상상력으로 인권운동과 만나는 잡지’라는 개편 당시 모토에 얼마나 부응하여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말에 “뭇사람의 입은 쇠를 녹인다.”는 말이 있다. 고대 가락국이란 나라에서 군중들이 모여서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구지가’나 ‘해가’와 같은 고대가요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온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으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세상의 권력과 부와 언론 등을 장악하고 있음으로 세상에 하나 아쉬움이 없는 세력들로부터 외면당하고는 한다. ‘인권’이란 지팡이로 세상을 두드려 깨우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고 한 입으로 외치는 일에 《사람》은 모든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뭇사람의 입’이 되어 강철 같은 반인권의 현실을 녹여버리고 싶은 게 《사람》의 작지만은 않은 바램이다.




2005년 7월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서 뱉은 첫소리입니다. 바다 건너 나라의 어느 혁명가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말은 여러분의 무기인가요? 언제부터인가 “내가 쏜다.”는 말이 ‘한 턱 낸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총알이 돈의 은유로 쓰이고 있는 현실이 한편 섬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이 무기인 사람들과 말이 무기인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 곳곳에서 점점 치열하게 벌어지는 것 또한 분명한 현실입니다. 
 
잡지란 말은 근대 이후 서구에서 들어온 대다수의 단어들이 그렇듯 일본 사람들이 영어 매거진(magazine)을 옮기며 만든 것이지 싶습니다. 매거진의 어원은 창고를 뜻하는 네덜란드어의 ‘magazien’에서 왔다고 합니다. 한편 영어 매거진은 잡지라는 뜻 외에 탄약고나 탄창이란 뜻으로도 쓰인답니다. 포토저널리즘에서는 사진을 찍는다는 뜻과 총을 쏜다는 뜻을 함께 가진 슈트(shoot)를 거론하며 포토저널리즘의 속성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잡지는 좀 더 넓고 긴 시공간을 향해 던져지는 그물 같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 모르는 물건을 이것저것 주워 담아 차곡차곡 제여 놓는 일 같기도 합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으로 가득한 밤이 될 겁니다.




1894년 반유태주의의 광기를 등에 업고 무고한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몰았던 프랑스에서 소설가 에밀 졸라가 신문에 기고한 「나는 고발한다!」의 한 대목입니다. 졸라는 이 글로 인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영국 망명길에 올랐야 했지만 그로부터 7년 뒤 드레퓌스는 재심을 거쳐 복권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무수한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가 있었지만 그들은 더욱 혹독한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2007년에서야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나왔으며 아직도 대법원에서 재심결정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화장실 소변기 위에 붙은 <인권하루소식>을 무심히 읽어가던 그 무렵 워낙 악필인데다 특히 매직글씨는 지독하게 못 쓰던 제게 주어진 일은 다른 이들이 밤새도록 써놓은 대자보를 새벽녘 교정 곳곳에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임을 미처 알지 못했지만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대자보 앞으로 하나둘 모여들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팩스로 들어온 <인권하루소식>을 복사해 화장실 칸칸마다 붙이던 이의 마음도 그랬을까요? 쉰 번째 《사람》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50이란 숫자에 큰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때의 심정, 그 마음만은 잃지 않으려 합니다.



- <사람> 50호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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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가 참 많습니다. 가끔 들리게 되는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 정기간행물실에 가면 잡지의 숲에 있는 듯합니다. 정부기관에서 나오는 홍보물(육군, 공군, 해군에서 따로 잡지가 나오는데 총천연색 그야말로 삐까번쩍합니다), 지자체 등에서 나오는 지역홍보잡지, 매우 세련되고 볼 거리도 많은, 이른바 '사보'라 불리는 기업잡지, 문예지, 시사잡지, 의료와 교육, 과학 등등의 전문잡지와 각종 학술단체에서 내는 학술지...

한국에 잡지 종류가 몇 가지나 될까요? 한국잡지협회에 따르면 문광부에 등록된 정기간행물 수가 4500여 가지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지요. 여기에 각 단체나 동호회에서 발간하는 간행물, 소규모 비정기간행물까지 더하면 족히 만권은 훌쩍 넘을 것 같습니다.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이 무수한 잡지 중에 흑자를 내는 잡지는 정말 드물다고 합니다. 어느 날 미용실에 갔다가 우먼OO인가 여성OO인가 하는 잡지를 들춰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A4 크기에 웬만한 사전 두께의 올칼러 잡지가 단돈 6천원! 제가 만드는 잡지와 같은 가격이라니... 글보다 광고가 더 많고 잡지를 읽는 독자도 글보다는 광고를 보려고 읽으니 광고료에 기댄다면 6천원에 사은품까지 듬뿍 얹어주어도 밑질 것이 없겠지요. 하지만 광고에 기댈 수 없는(또는 기대지 않는) 잡지는 여간 살림살이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광고주들이 모여 시사월간지에 광고를 줄이기로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7~80년대 시대를 풍미했던 시사월간지였지만 이제는 그 독자층이 더 이상의 구매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매달 창간하는 잡지가 열댓개인 반면 폐간 잡지는 수십가지라고 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인구는 두배지만 잡지 시장은 열배가 넘고 가장 많이 팔리는 <문예춘추>는 45만부에 달한다고 하니 부러울 따름이지요.

팔리지도 않고 영향력도 없고 게다가 재미까지 없는 인권잡지를 만드는 저를 만날 때마다 제 친구는 늘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각종 운동권 잡지를 통폐합해서 메트로처럼 만들어 무가지로 뿌려야 한다고 말입니다.(주로 지하철역에서 뿌려지는 무가지는 하루 한 종류 당 발행부수가 수도권에서만 4~50만부 정도라고 합니다. 이것도 몇 해전에 들은 이야기이니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소중한 목소리를 널리 알릴 것인가를 고민할 때 솔깃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몇 백 페이지짜리 두떠운, 글자만 빼곡한 운동권 잡지를 나눠준다면 사람들이 받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보다 더 큰 걱정은 그 가운데 없어지거나 줄어들 다양성입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보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 사무실로 날아오는 잡지도 상당하고 이메일로 들어오는 웹진도 참 많습니다. <인물과 사상> <녹색평론>에서부터 장애운동 언론의 선구자격인 <함께걸음>, 전쟁없는세상이란 평화단체의 소식지(이번호 특집은 '군사주의, 기후변화를 말하다'라는 매력적인 주제를 다뤘군요), 늘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게 되는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나오는 <랑>이란 웹진, 인권운동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인권오름>... 이렇게 적다보니 어딘가를 빼먹고 욕을 들어먹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잡지가, 인권잡지가 자본과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보다 널리 읽히기 위해 최소한의 비용, 아니 되도록이면 무료로 배포되는 것은 너무나도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다양성이라는 가치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백인백색. 이웃나라 일본에서 2만7천명이 이번 지진으로 사망 또는 실종했다고 합니다. 이건 달리 말해 2만7천여 개의 생명과 역사와 목소리가 사라졌음, 찾을 수 없음입니다. 이들이 그저 지진 피해 상황판에 적힌 숫자에 갇히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듯 인권잡지는 인간의 존엄성에 다가가는 수없이 많은 갈래길을 찾아나서야 하겠지요. 그래서 운동권 잡지의 통폐합을 꿈꾸기보다는 더 많은 인권잡지가 생겨나고 더 많이 더 싸게 발간되는 날을 꿈꾸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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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정명(천둥)이 의식화되고 있다. (어릴 때 민란에도 참여했으니 정확히 말해 재의식화인 셈이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 그를 의식화시키는 건 불순세력이나 이념서클, 늘 웃기만 했던 선배가 아니라 당대 현실이다.

 

2.
<추노> 이후 되도록 빼놓지 않고 보는 드라마가 있다. 같은 사극이지만 결은 좀 다른 <짝패>다. 
 
솔직히 작가가 김운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군대에서 채널 선택권이 있을리 만무했다. 매일 수상기 앞에서 허리를 펴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무릅에 주먹쥔 손을 올려놓은 차렷 자세로 드라마를 시청해야 했는데 그때 일일드라마가 김운경의 <서울의 달>이었다. 

한석규, 최민식, 김원희(아, 김원히). 지금으로 치면 초호화 캐스팅이지만 그때만 해도 다들 무명이었다. 채시라 정도가 톱클라스였을 뿐. 하여튼 나는 김운경도 김수현처럼 작가론이 나올만한 작가로 생각된다. (벌써 나와있는지도 모르겠다.) 

3.
대학시절 어떤 선배는 내게 "사극은 리얼리즘일 수 없고 반동적이기 쉽다"란 말을 한 적 있다. 나도 상당부분 동의했던 것 같다. 그때 사극이란 <용의 눈물>이나 <여인천하>처럼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다툼이나 궁중암투가 주요 소재였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사극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짝패>의 불순세력 이름은 '아래적'이다. 내가 돌아온다와 아래로라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는 게 주관적인 내 해석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꺽정>도 있었고 <다모>도 떠오르지만 왜 이렇게 지금 시대의 불평등과 차별, 양극화와 같은 예민한 문제를 다룬 사극이 완성도 높은 서사와 긴장감을 갖고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누가 분석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소설, 문학의 빈자리를 드라마가 채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4.
뭐, 그래도 결국 텔레비전 드라마일 뿐 아니겠냐고? 모든 고전은 당대 시정잡배가 즐기는 통속물이었다. 지금 한국의 드라마 또는 사극이 그럴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나도 천정명처럼 재의식화가 절실하다. 홍세화 선생인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끊임없는 재의식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관념화, 보수화되기 십상이다.  

아이가 둘이다. 나이를 먹을 수록 버릴 수 없는 것, 소중한 것이 늘어난다. 세상은 왠지 더 복잡한 듯 보이고 몸과 발은 점점 무거워진다. 아는 것, 경험한 것이 늘어날 수록 놀라움과 분노, 설레임은 줄어든다.  

늦지 않게, 천둥이처럼 저작거리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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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방사능이 한반도에 날아오는 것과 그에 대한 무대책을 걱정하는 선배에게 친구가 일침(?)을 놨다고 한다. "담배나 끊어~"

그런데 걱정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 아닐까? 곧 방사능 대거유입을 우려하는 기사가 떴다. 정부는 안전타령만 하고 있는데 꼭 2008년 광우병 사태를 보는 느낌이다. 편서풍 타령만 하며 한국에 올 가능성이 없다던 정부가 슬그머니 오긴 오지만 인체에 무해한 수준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니 당췌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다. '방사능 비'에 대해 걱정하며 7일 내릴 비를 피해야 하냐고 물으니 "흙먼지나 대기오염 물질 등 때문이라도 당연히 비는 굳이 맞지 않는 것이 좋은데, 다만 거기에 극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더해지는 것"이란 한심한 답이 돌아왔다는 대목에서는 엄모 앵커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란 멘트가 떠오른다. 

담배의 유해성, 흡연의 심각성을 하도 많이 접해서인지 담배를 필 때마다 자해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어차피 모두들 죽어가지만 담배를 피는 일은 '느린 자살'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그런 매력 때문에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방사능은 광우병이나 흡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방사능 비에 우산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아이가 생기고나서 심야운전이 조심스러워졌다. 그전에는 언제 어느 순간에 세상을 등져도 아쉬울 것 없었고 그렇게 살자했는데 어쩌다 생긴 아이는 이제 내리는 빗방울도 두렵게 한다. 이런 마음이 광화문에 유모차를 끌고 촛불을 들게 했던 것이다. 엠비는 왜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가.




"비는 굳이 맞을 필요 없잖나", "노르웨이 분석은 조악"


2011-04-04 14:30:54

 



기상청 등 정부가 오는 7일 후쿠시마 방사능이 곧바로 일본 남부를 거쳐 한반도에 상륙할 것이라는 독일, 노르웨이 등의 기상예보를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국민에게 아무런 대응 지침도 내리지 않고 "안전할 것"이라고만 강조, 국민 불안과 불만을 증폭시키고 있다.

김승배 기상청 대변인은 4일 정부종합청사에서 브리핑을 통해 "7일 오전께 일본 지역을 중심으로 고기압이 발달함에 따라 지상 1~3㎞ 높이의 중층 기류는 일본 동쪽에서 동중국해를 거쳐 시계방향으로 돌아 우리나라에 남서풍 형태로 유입되고 상당한 양의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오는 7일 비를 피해야 하느냐고 묻자 "흙먼지나 대기오염 물질 등 때문이라도 당연히 비는 굳이 맞지 않는 것이 좋은데, 다만 거기에 극미량의 방사성 물질이 더해지는 것"이라고 어정쩡한 답을 했다. 정부가 굳이 경보를 내리지 않더라도 국민들이 알아서 대처하라는 얘기인 셈.

그는 더 나아가 "봄철에는 이같은 기압 배치와 같은 원리의 남서풍 현상이 자주 나타날 수 있다"며 앞으로도 유사한 사태가 되풀이될 것임을 시사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편서풍 안전신화'를 주장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기자회견에 배석한 한국원자력기술원(KINS)의 윤철호 원장은 "우리나라 쪽으로 부는 흐름이 있다고 해도 후쿠시마에서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방사성 물질은 주변 지역에서도 그 농도가 점점 옅어지고 있는 만큼 역시 우리나라에 들어오더라도 미미한 수준일 것"이라이라며 후쿠시마 원전 2호기의 원자로 내부 물질의 상당량이 유출돼 곧장 우리나라를 향해 날아와도 우리 국민이 받는 영향은 연간 허용 방사선량(1mSv)의 3분의 1 수준인 0.3mSv에 불과하다는 분석 결과를 다시 강조했다.

그는 더 나아가 6~7일 한국 상륙 시뮬레이션을 발표한 노르웨이 대기연구소에 대해 "해당 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면, 스스로 조악한 분석이라고 참고만 하라고 경고하고 있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연구소 전망이 맞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신뢰도를 깔아뭉개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

그는 하지만 독일기상청이 4일 동일한 예상을 한 데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김승배 기상청 대변인이 4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7일 후쿠시마 방사능이 일본 남부를 돌아 한반도에 유입될 것임을 시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 김승배 기상청 대변인이 4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오는 7일 후쿠시마 방사능이 일본 남부를 돌아 한반도에 유입될 것임을 시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당국의 이같은 태도는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3주째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사능 유출이 계속되면서 2주간만 방사능이 유출됐던 체르노빌 사태보다 상황이 더욱 심각하게 돌아가고, 더욱이 앞으로도 수개월간 방사능 유출이 계속될 것이 확실시되는 심각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없이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비록 기준치 이하의 방사능이 한반도에 유입된다 할지라도 방사능이 몇달간 계속 유입될 경우 방사능이 누적되면서 인체와 토양, 식수 등에 심각한 폐해를 입힐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지껏 유입된 방사능은 북극을 거쳐 내려와 상당히 희석됐으나 이번에 유입되는 방사능은 후쿠시마에서 남서풍을 타고 곧바로 유입돼 방사능 농도가 더없이 높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더군다나 비가 내릴 경우에는 대기속의 방사능보다 몇배나 높은 방사능이 검출된다는 기본상식조차 묵살하고 계속 "안전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어 국민적 불안과 불만은 더욱 깊어가는 양상이다.
박태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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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스가 대두한 뒤 홀로코스트 위기가 임박한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망명하지 않았던(또는 망명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을 거듭 떠올리고 있다."

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나는 인간에 대해 모른다...

 

[기고] 기묘한 평온, 공황의 다른 모습 

  

»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어제(3월18일)는 맑게 갠 좋은 날씨였다. 나는 아내와 함께 도쿄 시내에 가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ㄱ시에서 도쿄 중심부까지 가는 데 전철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집에서 ㄱ시의 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어느 사이엔가 매화가 피고 벚꽃 봉오리가 부풀어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서로 몸을 기대듯이 하고 산책하는 고령의 부부가 스쳐 지나간다. 길옆 풀밭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동그랗게 무리지어 제비꽃과 튤립을 심고 있다. 선생님 구호에 따라 손을 잡고 마음껏 소리치며 동요를 부른다. 언제나 변함없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나는 이 풍경이 내일, 아니 바로 다음 순간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바뀌어버리는 게 아닐까 내심 긴장하고 있다.

전철은 의외로 비어 있었다. 조명을 끈 역은 어둑했다. 지나가는 행인도 부쩍 줄었다. 모두 말이 없었다.

나는 한국영사관에 볼일이 있었다. 아내가 동행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런 때는 가능한 한 떨어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급한 용건은 아니었으나 나온 김에 도쿄 시내와 영사관 모습을 봐둬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영사관에 들어가 보니 그리 넓지 않은 대기실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대부분 임시여권을 발급받으러 온 사람들인 듯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한국적)이나 일본인과 결혼한 한국인 자녀들은 한국 여권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 앞에 줄을 선 한국인 여성은 고교생 정도로 보이는 아들의 여권을 신청했다. 그 앞의 남성은 일본인인 듯한데, 한국인 아내와의 사이에 난 아이의 여권을 신청할 모양이었다. 한국어를 못해 힘든 모양이었다. 휴대전화로 아내에게 “출생신고는 언제 했지?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어서 아직도 멀었어” 하는 얘기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모두가 “될 수 있으면 빨리 받을 수 있는 걸로” 임시여권을 신청했다. 한시라도 빨리 일본을 떠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굼뜬 편이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이미 자국민에게 철수 지시를 내렸다. 내 지인들만 봐도 이미 몇 명이 황급히 일본을 떠났다.

조명 꺼진 전철역 썰렁
드문드문 행인들은 말 없어
한켠에선 봄꽃 심는 아이들…
한국영사관엔 여권신청 긴 줄
처참한 원전, TV선 보기 힘들고
다급한 ‘큰일’ 입밖 내는 이 없어…
가스곤로 사 집으로 오는 길
시커먼 건물 위로 검붉은 노을
“불길한 건 예뻐” 아내 말 맴돌고…


오랜만에 도쿄 시내에 나온 터에 외식이라도 해볼까 했으나, 언제 전철 운행이 멈추고 교통대란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도중에 우리는 대형 가전제품 가게에 들렀다. 혹시 전지를 살 수 있을까 해서였다. 역시 전지는 다 팔리고 없었으나 대신 프로판가스 곤로와 가스통을 샀다. 예상외의 행운이었다. 이젠 정전이 길어져도 물을 끓이거나 밥을 할 수 있게 됐다. 그 가전점에서 집으로 가는 지역 일대는 정전중이어서 짐을 들고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이미 도쿄의 슈퍼에서는 전지만이 아니라 생수, 쌀, 빵, 라면 등이 모습을 감췄다. 주유소에는 급유 순서를 기다리는 자동차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사람들 표정과 말투는 기묘할 정도로 평온하지만, 이 정도면 이미 의심할 여지 없이 공황상태다.

폭발을 거듭하며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 원자력발전소에 경찰과 소방차가 물을 끼얹고 있다. “어떻게든 냉각시키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정부도 전문가들도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 “큰일”이 어떤 건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자신들도 잘 모르든지, 아니면 너무 겁이 나서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며 간 나오토 정권의 무능을 비판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올 지경이 됐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민당 정권이라면 좀더 잘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원전 사고는 자민당 장기정권 시절의 쌓이고 쌓인 병폐들이 마침내 최악의 형태로 분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됐건 일본 정치에 큰 기대를 품고 있진 않다. 기대가 너무 크면 그 틈을 노리고 파시즘이 대두할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종적인 사망자 수는 수만명에 이르지 않을까. 전쟁을 예외로 하면 일본 사회가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대량사망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구원의 손길은 재난지에 가 닿지 못하고 텔레비전은 도호쿠 지방의 과묵한 이재민들 모습을 공허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다.

그 한켠에선 원전이 언제 파국을 맞아도 이상할 것 없는 줄타기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원전 피해를 너무 소극적으로 발표하고 있다는 의혹이 날로 짙어지고 있다. 자제하던 매스컴까지 요즘엔 정부와 도쿄전력에 대한 비판 강도를 높이고 있다. 원전에서 100㎞권 안에 있는 센다이시에서 지진 피해를 당한, 내가 아는 젊은 벗은 ‘안전’을 강조하는 정부와 도쿄전력 발표를 믿고 어린아이를 위험에 노출시킬 순 없다는 결심으로 이미 사흘 전에 야마가타현을 경유해 간사이 지방으로 탈출했다. 그는 센다이에 남아 있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가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외국의 내 지인들은 구체적인 논평이나 수치를 대면서 한시라도 빨리 가능한 한 서쪽으로 피신하라는 충고를 메일로 보내오고 있다. 광주의 ㅅ교수는 “살 집을 마련해둘 테니 빨리 한국으로 건너오라”는 친절한 연락까지 해왔다. 그러나 나와 아내는 의논 끝에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물론 앞날을 낙관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만 도망가는 게 미안하다거나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도 아니다. 지금 내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하긴 어렵다. 다만 나치스가 대두한 뒤 홀로코스트 위기가 임박한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망명하지 않았던(또는 망명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을 거듭 떠올리고 있다.

집에 돌아와 창밖을 보니 전기가 끊어진 거리는 어둡게 가라앉았고 그 상공에 검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걸 보고 “예쁘기도 해라” 하고 아내가 말했다. 오히려 불길한 색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잠시 망설이다 그 생각을 말했더니 “불길한 건 예뻐요” 하고 아내는 말했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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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3-2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 선생님은 경계에 선 증인으로 남은 삶을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 글을 읽는데 문득드네요.

나무처럼 2011-03-22 11:52   좋아요 0 | URL
증인으로서의 삶... 그러게요.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는 참 의미있는 삶이겠지만 한 개인에게는 너무 가혹한 짐이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