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친구와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화장실에 갔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엄청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왔다.  

뭔가를 그리워하는듯한 얼굴로.  

 

그녀 : 나 저기 비데 붙어있는 따뜻한 좌변기에 계속 앉아있었어. 

            집에 갈때 추울텐데...저 변기라도 타고 가고싶다. 

나 : 그건 또 무슨 발칙한 발상이야, 창피하게. 킬킬킬...  

 

그러나 나는 그녀의 차원 높은 발상을 찬양하며 집에 오자마자 이 그림을 그렸다. 

싸이 홈피에 올렸던 이 그림은 엄청난 댓글 줄줄 달게 되었으며

그림의 주인공인 그녀도 양 볼을 붉히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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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멋진날 2009-06-1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 왜 전 사진이 안 보이죠? ㅠㅠ

유쾌한마녀 2009-06-18 19:29   좋아요 0 | URL
이젠 보이죠??ㅎ

어느멋진날 2009-06-19 12:25   좋아요 0 | URL
ㅇㅇ 이건 이제 보이는데, 위에 닭발 사진이 안보여요 ㅠ

제주감귤 2009-06-2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력이 기발하군요

유쾌한마녀 2009-06-20 09:45   좋아요 0 | URL
제 친구가...ㅋ
 
똥카페
신동민 지음 / 청림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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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카페'와 '싸구려 커피'. 

책 똥카페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싸구려 커피' 노래가 연상되는 동시에 자취하던 대학 동기 녀석들이 떠오르면서 이상한 감정(?)에 싸인다. 

'너 왜 그리 사니' 이런 식의 핀잔과 함께 녀석에 대한 답답함이란 감정이 기본 바탕을 깔아주고, 

그래도 친구들이라고 미워할 수 없는, 그냥 허허 웃음만 나오는 애정어린 관심,  

가끔 친구들과 자취방에 놀러가면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놨는지 방문을 여는 순간 나 또한 나태해지는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 등등 4차원 세계에서 날아온듯한 요상한 감정들이 뒤섞인다.  

노래 '싸구려 커피'에서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자취생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가사의 주인공이다. 

가사에는 어쩔 수 없는 무기력감에 온몸이 찌들어버린 생활을 생생히 보여주는 문장들이 나열되어있다.   

마치 자취생은 인간이 아닌 숨쉬며 살아있는 것 자체가 목적인 생물인듯.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라는 가사를 통해서 발버둥 쳤으나 희끄무레한 빛 조차 구경 못하고 끝내 방전되어 어쩔 수 없이 사그라질 수 밖에 없는 현상이 반복되는 안타까운 탁한 회색빛의 현대인을 볼 수 있으며,

'저게 하늘이라고 머리위를 뒤덮고 있는건지'라는 가사를 통해서 감정이 메말라버린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들의 회색빛 꿈을 지적하는 자취생의 북받치는 한숨을 느낄 수 있으며, 

'잇몸에 피가 나게 닦아도 당췌 치석은 빠져 나올줄을 몰라' 가사를 통해서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도 소박한 꿈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짜증과 함께 두 어깨를 짓누르는 무기력감을 느낄 수 있다. 

 

똥카페 작가의 솔직한 글에 감탄하며, 아니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으로만 뭉실~ 알 수 있는 감정을 정확히 글로 표현하여 뚜렷이 알 수 있게 해준 작가의 표현에 감탄하며 현대인 대부분이 똥카페에서 보여지는 자취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궂이 생활 양식의 자취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 마음의 자취 생활

현대사회의 최대 병리 현상인 경쟁의 과열로 인해 지쳐서 의지의 끈을 놓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의한 나태함.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해야 하기에 조심스레 경쟁의 바다에 살짝 발가락 담궜다가 세찬 물살에 휘말려 힘없이 빠르게 떠내려가는 무기력감

기댈 곳 없이 쓰러지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자책아닌 자책에 멍들어가는 좁은 가슴.  

 

한심하게 사는것 처럼 보이는 자취생들에게 차마 난 돌을 던질 수가 없다. 

 

(↓아래 링크는'싸구려 커피 - 장기하와 얼굴들' 뮤직비디오 입니다. ) 

serviceapi.nmv.naver.com/flash/NFPlayer.swf 

♪ 싸구려 커피 - 장기하와 얼굴들 ♪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마리쯤 쓱~ 지나가도
무거운 내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에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아직 덜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지를 않다
수만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하고 달라 붙었다가 떨어진다
뭐 한 몇년간 세숫대야에 고여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그냥 가만히 보다 보면은
이거는 뭔가 아니다 싶어
비가 그쳐도 희끄므레죽죽한
저게 하늘이라고 머리위를 뒤덮고 있는건지
저건 뭔가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너무 낮게 머리카락에 거의 닿게 조그만 뛰어도
정수리를 쿵! 하고 찌을거 같은데
벽장속 제습제는 벌써 꽉차 있으나마나
모기 때려잡다 번진 피가 묻은 거울을 볼때마다
어우! 약간 놀라
제 멋대로 구부러진 칫솔 갖다
이빨을 닦다 보면은 잇몸에 피가 나게 닦아도
당췌 치석은 빠져 나올줄을 몰라
언제 땄는지도 모르는
미지근한 콜라가 담긴 캔을 입에 가져다 한모금
아뿔사 담배 꽁초가
이제는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몰라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쓱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에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번 본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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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감귤 2009-06-2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의일같지않군요

유쾌한마녀 2009-06-20 09:43   좋아요 0 | URL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소재입니다.

제주감귤 2009-06-2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사회가 이렇다보니..

유쾌한마녀 2009-06-20 09:56   좋아요 0 | URL
시원~하게 뻥 뚫렸으면 좋겠네요 ^^
 
노자
이태영 지음 / 여래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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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는 ‘無爲自然’을 추구했던 중국 고대의 사상가이다. ‘無爲’는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自然’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즉, 무위자연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자가 살던 시기는 봉건질서가 문란해진 극도의 혼란기로 규범이 무너진 상태였는데 노자는 예의나 법 따위의 인위적인 것들로 인해서 혼란이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자연의 순리에 맞는 삶을 추구했다. 노자의 사상이 오늘날 환경 파괴나 인간성 상실, 사회적 문제 등에 대해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으나, 춘추시대에서 현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대가 많이 바뀐 만큼 무작정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노자의 사상을 비판해 보겠다.


먼저, 노자는 사회적인 개념을 간과했다. 그가 주장한 무위자연은 억지로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이 혼자 산다는 전제에서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맞지 않다. 더군다나 관료제라는 기틀 속에서 운영되는 요즘,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료제의 무너짐과 동시에 사회 체제 붕괴를 야기하는 것이다. 이미 사회가 법 따위 등의 인위적인 것들로 흠뻑 젖어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무위자연을 한다면 근본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노자는 현실 도피적이었다.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주장처럼 그도 마지막에는 망할 징조가 보이는 본국을 버리고 도피하는 삶을 살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면하고 풀어가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문제 해결을 자연의 자정작용에 맡겨두고 자신은 숨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 속에서 은거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현대에서 그런 모습은 현실을 회피하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보인다. 결자해지라고 했다. 인간이 저지른 문제는 인간이 풀어야하지 자연의 자정작용에 오로지 맡겨두기만 한다는 것은 책임회피밖에 되지 않는다. 책임 회피를 하는 사람은 지금 사회에서 매장당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은 피라미드식의 사회가 구성되어있다. 아래층의 기반을 바탕으로 위층을 지지하는 벽돌이 자기의 임무를 회피하기만 한다면 피라미드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 벽돌은 버려지게 되고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다른 벽돌이 와서 그 자리를 메꾸어 피라미드를 유지할 것이다.



세 번째로, 노자는 교육을 인정하지 않았다. ‘敎育’에 대한 정의가 시대마다, 학자마다 다양하지만 뭉뚱그려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자의 시각으로 본 교육은 無爲를 내세우면서 ‘스스로 道, 즉 자연의 질서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기본적인 입장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교육에 대한 입장도 부정적이다. 오늘날 교육은 현대 사회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앞서 말했던 관료제 사회도 기술 교육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이미 인간의 기계화가 되어버린 오늘날, 부품 끼워 맞추기식의 인재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정규 교육과정을 다 밟고 더 나아가 고등 교육과정까지 밟아도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십장생(십대도 장차 백수)이라는 신조어가 나오는 요즘 교육마저 없다면 사회는 인재부족에 허덕이다 끝내는 허물어질 것이다. 물론,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또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큰 흐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노자는 욕심을 줄여 무욕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경지로 삼았다. 현대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크게 발전해나가서 보다 풍부한 색채를 가진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만 보려 한다면 현대의 문제점 중 하나인 인간의 감정이 메말라 가는 현상을 더 촉구하게 될 뿐이다. 물론 욕구를 도에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것 또한 중요하겠지만, 무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상이 오늘날 횡행한다면 인간미가 없는 사막 같은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다섯 번째로 노자는 자연을 조작하고 발전하는 과학을 반대했다. 인간이 자연을 망가뜨리고 발전하여 오늘날 자연 파괴로 인한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 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러나 이미 자연이 황폐해지고 자원이 고갈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지금에 와서 과학을 반대한다는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살아가기 힘든 상황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 기술은 미약하게나마 자연을 복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과학으로 인해서 자연이 망가졌으나, 이제는 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되살릴 수 있다. 만약 지금 과학을 반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모두가 망가진 자연을 회피하고 그저 자연스레 정화되기만을 기다린다면 이미 망가진 자연은 더 부패할 것이며, 그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더욱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노자가 살던 혼란하던 시대에서 세상이 無爲自然을 했다면 혼란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을지도 모르지만 너무나 변해버린 현대에서 그의 사상을 오로지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비례식처럼 한쪽에서 대응되는 법칙 그대로 다른 편에 그대로 적용하고 풀어나갈 수 없는 것이 인간사회이기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상을 추구했던 노자의 사상은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현대에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 처음의 에덴동산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가인이 죄를 저지른 후 에덴동산은 꿈의 낙원이 되었다. 에덴동산이 아름다웠다고 그때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죄를 저지른 이상 불가능하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은 현실성이 떨어지고 그만큼 어리석어 보인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점진적으로 문제를 개선해 가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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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감귤 2009-06-2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감하십니다 노자를 비판하시다니...ㅎㅎㅎ

유쾌한마녀 2009-06-20 09:43   좋아요 0 | URL
제가 좀 건방졌죠??^^;

제주감귤 2009-06-2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쁘게 말하면 그렇고, 좋게 말하면 과감하고 ....ㅎㅎ
 
노자의 도덕경 이야기 - 명언과 역사로 보는 알짬 고전 시리즈 3
중국공자기금회 지음, 남종진 옮김 / 다산미디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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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는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발전만을 추구해 왔다.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도구를 사용한 때부터 발전이 시작 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남보다 더 우월한 위치를 향한 발전이 지속되어 오늘날에 이른 지금, 고장이 난 열기구를 탄 마냥 위태로운 현상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곤두박질만 기다리는 것처럼 되었다.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해서 급기야 골드만삭스에서 한국이 2050년 1인당 국민 소득이 세계 2위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며, 21세기를 지배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경제나 과학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교육 열풍은 점점 거세져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을 만큼 최고 수준이며, 그에 따른 병리 현상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이젠 해외까지 점령하기 시작하고 있는 추세다. 현 입시 위주의 교육 정책을 기이한 교육열의 우선 원인으로 삼기 전에 좁은 영토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세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적 자원 위주로 육성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교육이 가장 빠른 길이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본다면 그리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오르막길만 이어지는 것 같던 발전이 터덕거리며 하향을 예고하듯이, 교육도 예외일 수는 없다. 미리 단점을 짚고 돌아서 근본에서부터 검토해 나간다면 최소한 최악의 상황은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사상가로 불리는 老子의 시각으로 교육과정을 보겠다.

  ‘敎育’에 대한 정의가 시대마다, 학자마다 다양하지만 뭉뚱그려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자의 시각으로 본 교육은 無爲를 내세우면서 ‘스스로 道, 즉 자연의 질서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에 대한 정의부터 다르다. 전자의 경우 학생이 교사에게 피동적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길러짐을 당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교사가 등장하지 않고 반대로 학생이 내적 동기에 의해 주체적으로 행하는 성격을 보이는 반대적 성향이다. 그동안 등장했던 여러 가지 교육과정들, 특히 대표적인 지식 중심 교육 과정, 경험 중심 교육과정, 학문 중심 교육 과정,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다루겠다.

  먼저 지식 중심 교육 과정은 교과 중심 교육 과정이라고도 하며 전통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쳐 온 교육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교육 내용은 문화유산의 전달이 주가 되고 교과 설명 위주의 교수법이 사용되므로 교사가 수업의 주체가 된다. 더불어 교사가 절대적인 권위를 쥐게 됨에 따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식의 전달과 중앙집권적 통제가 용이하다. 교육의 3 요소인 교사, 학생, 교육 내용이 노자의 시각과 모두 다르다. 노자의 시각으로는 교육에서 無爲를 강조했기 때문에 인위적인 교사가 필요치 않고, 피동적인 자세였던 지식 중심 교육 과정의 학생과는 달리 노자가 말하는 학생은 스스로 깨닫는 주체적인 자세를 가진다. 지식중심 교육 과정에서 말하는 교육관의 학생은 언제나 피동적일 수밖에 없고, 학생의 입장에서 교사에게 끊임없이 배워야 하기 때문에 보다 높은 자리를 바라보며 높은 교육열을 낳는 원인이 되는 교육과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노자의 교육관은 교육 내용 또한 문화유산이 아닌 道에 한정하고 있다. 기성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강조하며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것에 반해 노자는 자연의 질서를 깨닫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교육은 자연을 지배하여 자연과 그 속의 인간이 함께 자멸해가는 것을 가르치지만, 노자는 자연에 인간이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질서에 순응해 가는 것을 가르쳐 상생의 삶을 가르친다.

  두 번째로 경험 중심 교육 과정은 생활 중심 교육 과정이라고도 하며 학생이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학습자의 경험을 교육 내용으로 보는 이론이다. ‘교육은 경험의 재구성 과정’이라는 명제에 따라 학생이 생활에서 가지는 교육적 경험을 교과과정으로 조직한다. 교과 중심 교육 과정이 실생활과 너무 떨어져있다는 점을 비판하며 등장한 이론이기 때문에 교육 내용을 학생들의 생활과 긴밀하게 연결하여 학생들의 경험이 성장하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교육 과정과 노자의 교육관에서는 학생이 주체가 되어 적극성을 띈다는 점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교육 과정은 보다 많은 경험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에 반해 노자는 경험적 지식을 반대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즉, 교육 방법상의 차이인데 노자는 배우거나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깨달음을 교육 방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경험 중심 교육관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지식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한정된 사고로 세계를 보는 오류를 낳을 수 있는 단점이 있지만, 노자의 교육관은 세계를 자기중심적으로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편견 없는 시각, 자연이 다 같이 어우러지는 것을 가르친다. 또한 노자가 생각하는 교육관은 교육 내용이 道에 한정되어 뚜렷하지만, 경험 중심 교육 과정은 학생의 흥미, 욕구에 따라야 하므로 유동적이어서 기본적인 분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 차이점이 있다.

  세 번째로 학문 중심 교육 과정은 교과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적인 사실·개념·이론·법칙 및 그 교과의 탐구방법을 중심으로 구성하는 교육과정이다. 경험을 너무 강조하는 경험 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여, 단편적 지식의 전수와 주입식 교수방법을 사용하던 교과 중심 교육 과정과는 달리 교과의 개념이나 법칙 등을 학습자들이 스스로 발견하는 것을 중요시 하고 있다. 이 교육 과정은 노자의 교육관과 비교해 봤을 때 학생이 주체가 된다는 점과, 공식이 아닌 idea로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했던 두 교육과정에 비해 학습방법이 노자가 말하는 ‘깨달음’에 좀 더 가깝다는 점을 유사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성찰을 더 중시했던 노자와는 달리 학문 중심 교육 과정은 자신이 아닌 대상에 대한 기본 개념과 학습 경험을 중시했기 때문에 교육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일부 시행되고 있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은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을 받은 후 11, 12 학년에서 학생들의 진로, 적성, 능력에 따른 선택을 존중하여 편성·운영되는 학생 중심의 교육 과정 운영 체제로 제 7차 교육 과정의 핵심적인 실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학생의 선택에 의한 교육과정이라는 점에서 학생이 주체적이라는 측면이 노자의 생각과는 유사하지만 그 외에 교과·학문·경험 중심 교육과정이 10 학년 이하의 교육 과정에 기본 바탕으로 깔려있고, 아무리 선택 중심 교육과정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정해진 교육 과정 내에서 학생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색채를 띈 ‘선택’이라는 의미도 궁극적으로는 ‘의도적’ 인 범주 안에 있어서 그 색채가 흐리다. 때문에 앞에서 말했던 교육과정들의 단점들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위 네 개의 교육 과정을 노자의 시각과 비교해서 봤을 때 공통점과 차이점이 골고루 있었다. 이 외에도 교육 방법의 측면에서 봤을 때 잠재적 교육 과정은 의도적이지 않은 은연중의 경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無爲를 강조했던 노자의 생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며, 교육 목표 측면에서는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는 인간 중심 교육 과정이 노자의 사상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노자의 교육관과 일치하는 교육 과정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러한 교육과정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도나 법규에 의해서 교사가 학생에게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 즉 학교가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끊임없이 발전해 가는데 사회와 함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학교 교육이 사회와는 반대로 노자의 생각처럼 근본으로 돌아가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사회와 교육이 함께 고공행진을 잠시 멈추고 노자가 말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며 인간이 자연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 온 세상에 퍼진다면 그제야 그나마 노자의 교육관과 가까운 교육 과정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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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멋진날 2009-06-18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문교육과라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유쾌한마녀 2009-06-18 16:55   좋아요 0 | URL
그래요??^^ 이거 너무 쑥쓰러운데요ㅠ ㅋㅋㅋ

제주감귤 2009-06-20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네요....

유쾌한마녀 2009-06-20 09:42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너무 어렵게 썼나봐요 ㅠ^^;;

제주감귤 2009-06-2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제가 이쪽으로는 잘 몰라서....

유쾌한마녀 2009-06-20 09:56   좋아요 0 | URL
괜찮아요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보급판 문고본)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친구집에 갔다가 이 책이 꽂혀있는걸 보고

반가웠다ㅡㅎㅎ

전에 이 책을 재밌게 봤었는데

잠시 이 책에 대해서 잊었었기 때문이다~~ㅋㄷㅋㄷ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너무 반가웠다.ㅎㅎㅎㅎ

죽어가는 노교수에게 이야기를 듣는

20년전 교수의 학생/

그 학생은

20년전의 교수의 학생이 아니라

20년동안 변함없는 교수의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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