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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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래도 나는 성공할 수 있겠지

 

연금술사의 인내심으로 나는 언제나 또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고 시도해 왔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만족과 자만심을 기꺼이 희생할 것이다. 그 옛날 연금술사들이 걸작을 만들어 낼 용광로의 불을 지피기 위해 가구와 지붕의 대들보를 쏘시개로 사용했듯이 말이다. 걸작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렵군. 그저 몇 권으로 된 책인지, 구성이 안정되고 짜임새 있는 그야말로 책다운 책인지, 수시로 떠오르는 영감이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그것을 그저 모아 놓은 것은 아닐테고 ······. 친구여, 그러고 나니 내가 천 번도 더 거부했던 악덕의 적나라한 고백만이 남는구려. 하지만 그 악덕은 나를 지배하고 있고 그래도 나는 성공할 수 있곘지. 전체로서(이 문제에 있어서 사람은 하느님만이 아신다는 태도를 취해야 해!) 이 작품의 완성에 성공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한 부분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한다는 뜻이다 ······. 완성된 일부분들을 입증해서, 그리고 나 자신이 완수하지 못할 것들을 잘 알고 있음을 입증하면서.

 

 

스테판 말라르메

폴 발레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1869년 11월 16일

 

(441쪽)

 

 

언젠가는 읽고 싶었던 책 중에는-『독서의 역사』가 있다.

 

내가 쓰지 않은 책 중에는-지금까지 내가 읽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읽고 싶었던 책 중에는-『독서의 역사』가 있다. 그 책을 나는 바로 거기, 말하자면 도서관의 이쪽 구획을 비추는 불빛이 끝나고 다음 구획의 어둠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똑똑히 볼 수 있다. 그 책이 어떤 모습인지 나는 정확히 안다. 표지를 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크림빛 각 책장의 부드러운 감촉까지 상상할 수 있다. 호색가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나는 책 커버 밑에 숨은 감각적인 짙은 색의 천 장정과 금박을 입힌 글자도 짐작할 수 있다. 책 제목이 씌어 있는 속표지, 재치 넘치는 인용구, 그리고 감동적인 헌사도 잘 안다. 또 나는 그 책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두툼한 인덱스도 곁들여 있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는데, 그런 사실이야말로 내게는 대단한 기쁨을 안겨다 준다.(442쪽)

 

 

결국에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인간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

 

각 장(章)을 넘기는 나는 아득한 옛날에 존재했던 독서가의 조상들을, 그 중 일부만 유명할 뿐 대다수는 눈길 한번 끌지 못했던, 그리고 어쨌든 나 또한 속하게 될 독서가라는 가족의 조상들을 소개받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의 관습과 그 관습의 변화상, 그리고 옛날의 동방 박사처럼 죽어 있는 기호를 살아 숨쉬는 기억으로 변형시키는 힘을 확보할 때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변모를 배우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승리와 박해와 은밀한 발견들을 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독서가인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인간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444쪽)

 

(나의 생각)

이 대목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지막 대목'을 불현듯 떠올리게 만든다. 알베르토 망겔이 찰스 다윈의 그 문장을 약간이라도 모방할 의도가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찰스 다윈이 쓴 그 유명한 문장 또한 그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어느 유명한 지질학자'의 논문에서 베낀(혹은 흉내낸) 것이라면 너무 지나친 억측일까? 유명한 고생물학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는 뉴턴과 동시대의 인물인 '그 유명한 지질학자'의 방대한 논문에 완전히 매료되어 무려 '여섯 번을 되풀이하여 읽어 본 다음에야' 비로소 '새로운 시각으로'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자신의 책에서 솔직히 고백한 적이 있었다.

 

 * * *

 

온갖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숲속에서는 새가 노래하고 곤충은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축축한 땅속을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번잡스러운 땅을 살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한 개개의 생물은 제각기 기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서로 매우 다르며 매우 복잡한 연쇄를 통해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그런 생물이 모두 지금 우리 주위에서 수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한 법칙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말한다면, '생식'을 수반하는 '성장', 거의 생식 속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는 '유전', 생활의 외적 조건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작용에 의한, 또 용불용에 의한 '변이성', 생존경쟁과 나아가서는 '자연선택'을 초래하고, 마침내 '형질의 분기'와 열등한 생물을 '멸종'시키는 높은 '증가율' 등이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자연계의 싸움에서, 또 기아와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사항, 즉 고등동물의 산출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생명은 최초의 창조자에 의해 소수의 형태로, 또는 하나의 형태로 모든 능력과 함께 불어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 그리고 이 행성이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회전하는 동안 이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경탄스러운 무한의 형태가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는 이 견해에서는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다윈, 『종의 기원』(1859년), <제14장 요약과 결론 中에서

 

우리는 사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고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물이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여름철에 잎이 무성한데다 꽃이 활짝 피었거나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으며 여러 갈래로 뻗은 수많은 가지가 쾌적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그러나 모든 구성 요소를 갖춘 이런 나무가 보잘것없는 씨앗에서 발아하여 자연의 손길로 나날이 조금씩 새로운 모습으로 자라나서 마침내 이처럼 멋지고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또 다른 즐거움으로 생각된다. ······ 마찬가지로 이 지구를 오늘날 완결된 형태, 곧 지구가 여러 층으로 구분되며 각 층이 그 자체로 완벽한 놀라운 모습을 갖추었음을 알아보는 것은 진정한 기쁨이고 마음에 아주 흡족한 즐거움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맹아기의 지구에서 이 모든 모습을 알아보고 그런 자연의 틈을 낱낱이 관찰하여 자연의 제일원리로 융합한 다음, 하느님의 지혜가 어떻게 혼란에서 사물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단순한 것에서 오늘날 우리가 깨닫는 바와 같은 아름다운 구조를 이끌어냈는지 관찰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더 큰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 토머스 버넷, 『지구신성론』(1680∼1690년) 중에서



마치 논리적인 인과 관계나 역사적인 일관성을 무시하려는 듯


······ 하지만 『독서의 역사』에 기록된 역사는 포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말하자면 '독서의 역사'의 본가지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이야기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주제는 또 다른 주제를 끌어들이고, 하나의 일화는 보기에 따라 전혀 관계 없을 듯한 이야기까지 내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마치 논리적인 인과 관계나 역사적인 일관성을 무시하려는 듯, 그리고 독서가의 자유에 대해서는 바로 그 독서라는 기교에 대한 글에서 정의를 내리려는 듯 방향 감각 없이 앞으로만 나아간다.(444쪽)

 


책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드 베리는 아주 열정적으로 책을 수집했다. 그가 소장한 책은 영국의 다른 주교들의 책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그 책들을 침대 주변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책을 밟지 않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행운을 감사하게 여겼던 드 베리는 학자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아닌 것을 그의 것이라 이야기했고 형편없는 시구를 인용하면서도 마치 오비디우스의 시구인 양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책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책에서 나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예견한다. 책에는 전쟁을 암시하는 전조들이 설명되며 평화의 법도 나온다. 모든 존재들은 결국에는 부패하고 썩게 마련이다.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삼키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며, 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치유법을 내리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으로 파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버지니아 울프도 학교에서 낭독한 한 과제물에서 드 베리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간혹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최후의 심판일이 동터 오고 위대한 정복자들과 변호사들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대가-불멸의 대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그들의 왕관과 월계수와 이름-를 받게 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우리가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그런 질투심으로 '이봐, 이들에게는 포상이 필요없어. 그들에겐 줄 것이 없어. 그들은 책 읽기를 사랑하잖아' 라고 말할 것이다.") (446쪽)



책을 너무나 사랑했던 나머지

 

······ 그녀는 385년경에 태어나 439년 베들레헴에서 죽었다. 그녀는 책을 너무나 사랑했던 나머지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책은 모조리 필사를 해서 귀중한 서재를 만들었다. 한 학자는 5세기 그녀에 대한 어느 글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며 책 읽기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깊어 그리스도교 초기 저술가들의 삶을 마치 후식을 먹듯이 탐독하곤 했다고 적고 있다. "그녀는 돈을 주고 산 책뿐만 아니라 어쩌다 접하게 되는 책까지도 어찌나 꼼꼼하게 읽었던지 이 세상에 그녀가 모르는 단어나 사상은 하나도 없었다. 배움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너무나 진지해서, 그녀가 라틴어로 쓰인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사람들은 그녀가 그리스어는 하나도 모른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반대로 그리스어로 쓰인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라틴어는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447쪽)



오스카 와일드의 충고

 

와일드에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을 아는 것 못지않게 중요했다. 신문 『폴 몰 가제트』지의 정기 구독자들을 위해 그는 1886년 2월 8일에 '어떤 것은 읽지 말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 이런 충고의 말을 전했다.

 

절대로 읽지 않아야 할 책은 이런 것들이다. 톰슨의 『사계절』, 로저스의 『이탈리아』, 페일리의 『증거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한 모든 교부(敎父)들의 저술, 『자유론』을 제외한 존 스튜어트 밀의 모든 책들,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볼테르가 남긴 희곡 전부, 버틀러의 『유추』, 그랜트의『아리스토텔레스』, 흄의『잉글랜드』, 루이스의『철학의 역사』, 논쟁적인 모든 책들, 그리고 무언가를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든 책들 ······.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읽으라고 충고하는 행위는 대체로 무익하거나 해로운데, 왜냐하면 문학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가르치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詩)에는 입문서가 없고,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 중에는 항구적으로 배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읽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 주는 것은 크게 다른 문제여서 나는 감히 그것을 대학교육보급운동의 임무로 추천하고자 한다.

 

(448쪽)



나에게 그렇게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어떻게 항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장(章)이 아니라 세 개의 장에 걸쳐 우리의 저자는 '독서가의 발견'을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다. 모든 텍스트는 한 삶의 독서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첫 부분을 '한가한 독서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할 때, 그 첫머리에서부터 등장하는 인물은 이제 곧 시작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충분한 독서가인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나에게 그 책을 이야기하고, 그 작품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고, 그 책의 결함을 고백한다. 어느 친구의 충고를 좇아 세르반테스는 자신이 직접 책을 추천하는 내용의 시를 몇 편 썼다(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돈키호테』는 보통 유명 인사들로부터 받은 칭송을 책 표지에 담고 있다). 세르반테스는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킨다. 그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방어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바로 그런 행동으로 인해 독서가인 나는 오히려 무장 해제를 당하는 셈이다. 나에게 그렇게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어떻게 항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게임에 가담하기로 동의한다. 그 허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그 책을 덮지 못하고 만다.(450쪽)



하이퍼텍스트

 

(우리의 저자에 따르면) 하이퍼텍스트란 용어는 1970년대 컴퓨터 전문가인 테드 넬슨이 컴퓨터 기술로 가능해진 비연속적인 이야기 공간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 꼭대기도 없고 바닥도 없는 네트워크에서는 어떠한 위계 질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의 저자는 소설가 로버트 쿠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쿠버는 『뉴욕 타임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하이퍼텍스트를 묘사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단락, 장, 그리고 다른 전통적인 텍스트 분할이 이제는 위임받은 권한도 서로 똑같고, 수명도 똑같은 창문 크기의 텍스트와 그래픽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의 독자는 거의 모든 지점에서 텍스트로 들어갈 수 있고 언제든지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거나 삽입, 수정, 확장, 삭제 등을 요구할 수 있다. 독서가(아니면 작가)는 언제나 하나의 텍스트를 계속 파고들거나 다른 이야기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이들 텍스트 또한 종말이 없는 셈이다. "모든 것이 중도에 놓여 있다면, 독서가나 작가나 언제 일을 마무리지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쿠버는 묻는다. "만약 저자가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를 시작하고, 또 원하는 모든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이제는 그렇게 함이 의무가 아닐까?" (458쪽)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밤, 그것도 아니면 모레 밤에

 

다행히도 『독서의 역사』에는 끝이 없다. 우리의 저자는 이 책 말미에 독자 여러분들이 아직 미래에 일어날 독서 행위와 놓쳐 버린 주제, 적절한 인용, 사건과 등장 인물에 대한 더 많은 사색을 덧붙일 수 있도록 백지 여러 장을 남겨 두었다. 거기에는 약간의 위안이 담겨 있다. 나는 그 책을 내 침대 곁에 놓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밤, 그것도 아니면 모레 밤에 그 책을 펼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모습도 그려 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라고.(4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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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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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와 시력

 

인류의 1/6이 근시인데 독서가 중에는 그 비율이 월등히 높아 24%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 루터, 새뮤얼 피프스, 쇼펜하우어, 괴테, 쉴러, 키츠, 테니슨, 존슨 박사, 앨릭잰더 포프, 케베도, 워즈워스, 단테, 개브리얼 로세티,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키플링, 에드워드 리어, 도로시 L. 세이어스, 예이츠, 우나무노, 타고르, 제임스 조이스, 이들은 모두 시력이 약했다. 많은 경우 사정이 더욱 나빠 호머에서 밀턴, 그리고 제임스 서버와 보르헤스까지 유명한 독서가 중 상당수는 만년에는 맹인이 되기도 했다. 30대 초반에 시력을 잃기 시작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던 1955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도서관 관장에 임명되었던 보르헤스는 한때 자신에게 허용되었던 책을 빼앗겨 버린 실패한 독서가의 기이한 운명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그 누구도 눈물을 뿌리거나 책망하지 말자

하느님의 권능의 선언을

이처럼 장엄한 아이러니로

나에게 암흑과 책을 동시에 내리셨나니.

 

'망각과 잠을 닮은 창백하고 모호한 재'의 흐릿한 세계에 파묻혀 사는 이런 독서가의 운명을 보르헤스는 양식과 마실 것으로 둘러싸인 채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 가야 했던 미다스 왕의 그것과 비교했다.(420∼421쪽)

 

 

안경의 발명

 

그런 변화가 언제 일어났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1306년 2월 23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의 설교단에서 피사 출신의 조르다노 다 리발토가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서 그는 신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도구의 하나인' 안경의 발명이 벌써 20년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나는 안경을 발견하고 만들었던 사람을 누구보다도 먼저 만났고 함께 대화도 나누었다"고 강조했다.(423쪽)

 

 

안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15세기 들어서도 상당한 세월이 흐르기까지 독서용 안경은 사치품에 속했다. 비싸기도 했을 뿐더러 책 자체가 극소수의 사람들이 소유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인쇄술이 발명되고 책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뒤부터는 안경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행상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면서 '값싼 대륙풍 안경'을 팔고 다녔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구텐베르크의 최초의 성경이 출간되고 겨우 11년이 지난 1466년에 안경 제조업자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뉘른베르크에는 1478년에, 프랑크푸르트에는 1540년에 안경 제조업자가 등장했다. 더욱 많고 더욱 훌륭한 안경이 더욱 많은 독자들을 더욱 훌륭한 독서가로 만들었고, 더욱 많은 책을 구입하도록 했다는 말도 가능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안경은 지식인이나 도서관 사서, 학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자리잡게 되었다.(424∼425쪽)

 

    

신은 절대로 문학으로 자신을 바쁘게 만드는 법이 없었다

 

그리스, 로마, 그리고 비잔티움에서는 학자 겸 시인-서책(書冊)이나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상징되는데-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로 여겨졌지만 그 역할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국한되었다. 신은 절대로 문학으로 자신을 바쁘게 만드는 법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이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은 절대로 없다. 신의 손에 책을 쥐어 준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처음이었고, 14세기 중반 이후 상징적인 그리스도교 책에는 항상 또 다른 이미지, 즉 안경이 동반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의 전지전능함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을 근시안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할 것이지만, 교부(敎父)들-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아우구스티누스-과 카톨릭 교회법으로 받아들여진 고대 저자들-키케로, 아리스토텔레스-은 간혹 지혜의 안경을 낀 채 학술 서적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426쪽)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이 안경은 주인을 책망하고 있다. 여기, 세상을 직접 보려 들지 않고 책장의 죽은 단어를 응시함으로써 세상을 간접적으로 살피려는 사나이가 있노라고. 브란트가 그린 그 얼빠진 독서가는 "내가 바보선(船)에 가장 먼저 오르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책이 인생의 전부여서 황금보다 더 귀중하다. 여기 나는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있다. 비록 한마디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백하기를 학문적인 책에서 이것저것 인용하는 유식한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가 "그 책 우리 집에도 있는데" 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책은 많이 긁어모았지만 지식은 쌓지 못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429쪽)

 

 

얼간이 시리즈

 

브란트의 책이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1509년 인문주의 학자 가일러 폰 카이저스베르크는 브란트의 책에 등장하는 얼간이들을 바탕으로 일요일마다 한 명씩 빗댄 설교 시리즈를 시작했다. 브란트의 책 제1장을 기초로 한 첫 번째 설교는 당연히 책벌레 얼간이에 대한 것이었다. 브란트는 이 얼간이에게 자신을 묘사해 보라며 단어들을 빌려 주었다. 이 묘사를 이용하여 가일러는 책에 빠진 얼간이를 일곱 가지 형태로 나누었는데, 얼간이의 머리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는 것으로 갖가지 얼간이를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가일러에 따르면 첫 번째 종은 책이 마치 값비싼 가구나 되는 것처럼 장식을 위해 책을 수집하는 얼간이를 상징한다. 이처럼 과시용으로 책을 축적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미 A.D. 1세기에 라틴 철학자인 세네카가 비난하기도 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책을 공부의 도구가 아닌 식당방의 장식으로 이용한다"고 가일러는 강조한다. ······

 

두 번째 종은 현명해지려는 욕심에서 지나치게 많은 책을 읽는 부류의 얼간이에게 울린다. 가일러는 이런 얼간이를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일으키는 위통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지나치게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어 오히려 방해받는 그런 장군에 비교한다. ······

 

세 번째 종은 책을 모으기는 하되 진정으로 읽지는 않고 자신의 값싼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건성으로 들춰보기만 하는 얼간이를 부른다. 가일러는 이런 얼간이를 마을을 돌면서 남의 집 앞에 걸린 상징물이나 표시물을 찢어 내면서도 그것을 자세히 살피려 드는 그런 미치광이에 비교한다. ······

 

다섯 번째 종은 책을 값비싼 표지로 장정하는 얼간이를 경고한다(여기서 다시 가일러는 은근히 세네카를 인용하는데, 세네카는 "책의 장정이나 상표에서 쾌락을 얻는" 수집가를 경고했다. 이런 무식쟁이의 집에 가면 "서재도 욕실처럼 부유한 가정의 필수적인 장식이기 때문에 천장까지 닿는 선반 가득히 웅변가와 역사학자들의 전집이 꽂힌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여섯 번째 종은 고전은 한 번도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철자나 문법, 수사학에 대한 지식은 쥐뿔도 없으면서 엉성한 책을 써서 출판하는 얼간이를 부른다. 이런 얼간이는 자신의 알맹이 없는 낙서를 위대한 저작물 옆에 세워 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독서가에서 작가로 변신한 인물이다. ······ (429∼432쪽)

 

대중들 앞에서의 낭독이 왜 유익한지

 

학자들과 육감적인 보통 사람들을 구분하며 신체의 강인함과 정신력을 대립시키는 일에는 세심한 논증이 요구된다. 한쪽 편에는 근로자들이나 책에 접근할 기회를 봉쇄당한 노예들이 차지하는데, 인류의 대다수에 해당하는 이들은 가진 것이라곤 뼈와 근육밖에 없다. 다른 한 쪽에는 사상가, 엘리트 필사자, 권력과 결탁한 지식인 등 소수가 서게 된다. 세네카는 행복의 의미를 논하는 대목에서 소수에게만 지혜의 성채를 허용하면서 다수의 의견을 멸시했다. "가장 참다운 것은 대다수로부터 환영을 받아야 하지만 인민들은 그러기는커녕 최악을 선택한다. ······ 인민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 다수가 승인한 것을 옳다고 판단하고,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일치 단결을 위해서만 사는 대중들의 행동을 삶의 모델로 받아들이는 것은 해롭기 이를 데 없다"고 그는 말했다.(434쪽)

 

  

우리가 희미하게 섬광이나 그림자로 느꼈던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될 때

 

시간과 장소, 우리의 기분과 기억, 경험과 욕망에 따라서 독서의 즐거움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마음의 긴장을 풀어 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조이게 만든다. 때로는 신경을 너무 팽팽하게 잡아당겨 우리 독자들은 마음이 긴장을 덜 느끼기는커녕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책장 속에서 펼쳐지는 세상이 우리의 의식으로 녹아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마치 돈키호테처럼 경이감에 빠져 그런 허구적 풍경 속을 목적 없이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독서가는 아주 팽팽한 상태에서 책을 읽게 된다. 심지어 모든 의심을 접어 둔 상태에서도 우리는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식하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모를 때조차도 우리는 왜 읽는지를 알고 있다. 이때 우리 맘 속에서는 텍스트의 환영과 책 읽기 행위가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말을 발견하기 위해, 즉 이야기 자체를 위해 글을 읽는다. 우리는 독서 행위 자체를 위해, 즉 종말에 닿기 위해 글을 읽지는 않는다. 우리는 주변을 망각한 채 추적자처럼 무엇인가를 열심히 탐색하며 읽는다. 우리는 또 책장을 건너뛰어 가며 산만하게도 읽는다. 그리고 업신여기듯, 존경하듯, 분노하듯, 태만하게, 열정적으로, 질투하듯, 갈망하듯 책을 읽기도 한다. 또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솟구치는 즐거움으로 책을 읽는다. 레베카 웨스트는 『리어왕』을 읽은 뒤 "이런 감정은 대관절 무엇일까?" 라고 묻는다. "내 인생에서 그토록 엄청난 황홀경을 느끼게 만든 지고한 예술 작품의 힘은 무엇일까?" 우리는 모른다. 그것을 건성으로 읽기 때문이다.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공간을 부유하는 것처럼 우리는 편견에 가득 찬 시선으로 악의적으로도 글을 읽는다. 또 우리는 텍스트의 결함을 고쳐 가면서 관대하게 읽기도 한다. 그러다가 간혹 운이라도 좋으면 누군가가 아니면 무엇인가가 "우리의 무덤 위를 짓밞은 것처럼", 혹은 어떤 기억이 우리의 마음 깊숙이 숨어 있다가 순간적으로 되살아난 것처럼 숨막히는 전율로 책을 읽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뭔가를, 아니면 우리가 희미하게 섬광이나 그림자로 느꼈던 무엇인가를 인식하게 될 때 일어나는데, 귀신 같은 형태로 떠올랐다가 그것이 뭔지를 깨닫기도 전에 다시 우리의 깊은 내면으로 침잠해 버리는 그것은 우리를 한층 더 노숙하고 현명하게 만든다.(437∼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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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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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불태우는 사람들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지우고 과거를 파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서적 2만여 권이 불태워지는 동안 선전 부장이던 파울 요셉 괴벨스가 환성을 지르는 10만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여러분들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이 왜설스런 것들을 불길로 집어던지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거야말로 전세계를 향해 낡은 정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막강하고 상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정신의 불사조가 일어날 것입니다."

 

당시 열두 살 소년으로 훗날 런던의 유대학을 위한 레오 백 연구소 소장이 된 한스 파우커도 그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화염 속으로 책을 집어던질 때는 엄숙함을 더하기 위해 이런저런 연설이 이어졌다고 그때를 회고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책들을 던지기 전에는 검열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다. "정신의 파괴적 분석에 기초를 둔 무의식적 충동이라는 허풍에 맞서서,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기꺼이 불길에 맡기겠노라." 스타인벡, 마르크스, 졸라, 헤밍웨이, 아인슈타인, 프루스트, H.G. 웰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잭 런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한 수백 명의 저자들이 이와 비슷한 묘비명으로 경의를 받았다.(407∼408쪽)

 

 

피노체트의 판단

 

예를 들면 1981년에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사 정권은 칠레에서 『돈키호테』를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호소와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공격이 담겨 있다는 판단에서였다(피노체트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412쪽)

 

 

독서가가 지닌 거대하고 다양한 힘을 제한하려고 시도하는 존재들

 

다른 사람들의 책 읽기를 금지하겠다고 나서는 권위주의적인 독서가들, 읽어도 좋은 책과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을 가리겠다는 광적인 독서가들, 쾌락을 위한 책 읽기는 거부하고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사실만 반복해서 이야기하기를 고집하는 금욕적인 독서가들, 이 모든 독서가들은 독서가가 지닌 거대하고 다양한 힘을 제한하려고 시도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검열관들은 불길이나 법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제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책들을 해석할 수 있다.(415∼416쪽)

 

 

교묘하게 종속시킴으로써

 

모든 독서가는 나름대로 책 읽기의 방법을 창조해 내는데,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독서가는 그 텍스트를 어떤 교의(敎義)나 전횡적인 법, 사사로운 이익, 노예 소유자의 권리나 전제군주의 권위 등에 교묘하게 종속시킴으로써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416∼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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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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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에 새기는 이미지가 제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라베는 그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현재보다 더 도움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가 한때 느꼈던 환희는 흐릿해져만 가고 결코 되돌아오지 않아요. 그 추억은 그런 일이 벌어졌던 그 당시에 유쾌했던 것만큼이나 괴로운 것이지요. 눈앞의 다른 쾌락적인 감각들이 너무도 강한 나머지 어떤 추억이라도 예전에 경험했던 기분을 되살려 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새기는 이미지가 제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그것들은 우리를 악용하고 속이려 드는 과거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쩌다가 생각하는 바를 글로 남기게 되면 훗날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 영원 같은 사건들 속으로, 여전히 살아 끜틀거리는 그 사건들을 헤집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세월이 흘러 글씨가 적힌 종잇장을 들게 되면 우리는 옛날과 똑같은 장소로, 우리들 자신이 한때 빠졌던 그 기분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요." 루이스 라베가 볼 때 독자의 능력은 과거를 재창조해 내는 것이었다. (382쪽)

 

 

자신이 읽던 책의 수많은 조상들을 읽고 있었다

 

릴케는 아울러 자신이 읽던 책의 수많은 조상들을 읽고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읽는 책들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한때 다른 독서가가 소유했었던 책을 손에 들고 있다는 즐거움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즉 책장 여백에 갈겨 쓴 단어 몇 개나 책 앞뒤 백지에 휘갈긴 사인, 책갈피에 꽂힌 나뭇잎, 사연이 담겼을 포도주 자국들이 내뱉는 속삭임을 통해 다른 누군가의 영혼을 떠올리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책들이 수많은 다른 책들의 연속선상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비록 선조격인 그런 책들의 표지를 한번도 보지 못했고 그 책들의 저자 또한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이 지금 손에 잡고 있는 책에서는 그런 책들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이루고 있다.(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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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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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처럼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A.D. 1세기 말의 어느 날 저녁,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에실리우스 세쿤두스(미래의 독서가들에게는 A.D.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사망한 그의 박학한 삼촌 대(大) 플리니우스와 구분하기 위해 소(小) 플리니우스로 알려졌다)는 의분을 느끼면서 로마에 있는 어느 친구의 집을 나섰다. 자신의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플리니우스는 자리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으려고(아마도 그가 훗날 책으로 묶게 될 편지 뭉치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변호사인 클라우디우스 레스티투트스에게 그날 일어난 사건들을 글로 써서 보냈다. "방금 내 친구 집에서 화나는 일이 있어 책 읽기를 그만두었다네. 그 문제에 대해 자네에게 직접 말할 수 없어 당장 편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때 읽고 있던 텍스트는 어느 모로 보나 매우 세련된 것이었네. 그런데도 재치 있는 사람 두세 명이 벙어리처럼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들은 입을 여는 법도 없었고 손을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앉은 자세를 바꾸려고 다리를 뻗는 일도 없었네. 그런 근엄한 표정을 짓고 학자연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게으름과 자만, 재치와 양식(良識)의 결핍으로 얻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루 종일 시간을 쏟아부은 나에게 비애만 안겨 주고,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고자 했던 사람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니 말야!"

 

그로부터 스무 번의 세기가 흐른 지금의 우리로서는 플리니우스의 절망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의 시대에는 작가들의 낭독이 꽤나 유행했던 행사였으며, 다른 의식에서와 바찬가지로 낭독에도 작가와 청중 모두에게 엄중한 에티켓이 요구되었다. 청중들에게는 비평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 기대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가는 텍스트를 수정하곤 했다. 미동도 않던 청중이 플리니우스를 그렇게 분개시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356쪽)

 

(나의 생각)

저토록 유명한 플리니우스에게도 저런 황당한 일이 심심찮게 있었던 모양인가 보다. 하물며 오늘날을 살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수십억 명에 달하는 '보통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한 블로거가 (수많은 대중을 향해 큰 소리로 낭독하는 셈이나 마찬가지 행위인) '사이버 공간에 글을 올리는 행위'를 마치고 난 뒤에, 그 글의 작성자 스스로 '참기 힘든 비애'를 느꼈다고 해도 나는 이상할 게 눈꼽만큼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그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확신에 찬 모습보다는 어딘지 약간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어느 독서가의 연기를 칭송하면서 플리니우스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낮추고 높였으며, 고상한 주제에서 저급한 주제로, 단순한 주제에서 복잡한 주제로, 혹은 가벼운 주제에서 심각한 주제로 넘어가는 일에도 능수능란했다. 유쾌한 목소리는 또 다른 매력으로 작용했으며, 낭독에 매력을 더하는 겸손함과 얼굴의 홍조와 예민함으로 인해 그 목소리는 더욱 도드라졌다. 나도 이유는 잘 모르지만, 확신에 찬 모습보다는 어딘지 약간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작가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358쪽)

 

 

대중들 앞에서의 낭독이 왜 유익한지

 

플리니우스는 대중들 앞에서의 낭독이 왜 유익한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들고 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명성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작가 본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텍스트를 듣다 보면 청중들도 책으로 묶인 작품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동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작가나 서적상, 출판업자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수요가 창출된다는 말로 그는 이 같은 자아 몰입적인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그의 관점에서는 대중들 앞에서 텍스트를 읽는 행위야말로 그 자체가 출판의 첫 단계였던 셈이다.(360∼361쪽)

 

지방 고유의 언어야말로 

 

그래도 작가들은 즉흥적으로 쏟아지는 대중의 격려를 얻으려고 계속 노력했다. 13세기 말 단테는 '일반 대중의 언어', 즉 지방 고유의 언어야말로 라틴어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면서 그 이유를 3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에덴 동산의 아담이 사용했던 최초의 언어라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라틴어의 경우 학교에서 배워야만 하기 때문에 '인공적'인 반면 지방의 고유 언어는 자연스럽다는 점, 마지막으로 극소수만 말하는 라틴어와는 달리 지방 언어는 모든 사람에 의해 두루 쓰여지기 때문에 보편적이라는 설명이었다. 단테는 비록 지방 고유 언어에 대한 글을 역설적이게도 라틴어로 쓰긴 했지만 말년에 라벤나에 있는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저택에서 자신의 『신곡』몇 구절들을 자신이 그토록 옹호했던 '지방 언어'로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362∼363쪽)

 

 

나 혼자 읽을 때는 아무 결점이 보이지 않던 문장도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도 자신의 『비망록』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몰리에르가 자기 작품을 하녀에게 읽어 주었다면 그 이유는 큰 소리로 읽는 행위만으로도 자신의 작품을 자기 앞에 새로운 각도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관심을 작품 한 행 한 행에 집중시킴으로써 작품에 대한 판단을 좀더 엄격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내가 쓴 글을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읽어 주곤 한다. 그 낭독을 들을 상대방으로는 아무라도 좋겠지만 내가 신경써야 할 만큼 영리한 인물이어서는 곤란하다. 나 혼자 읽을 때는 아무 결점이 보이지 않던 문장도 큰 소리로 읽으면 허점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367쪽)

 

(나의 생각)

이런 대목을 읽으면 '최소한의 퇴고 과정도 없이' 글을 함부로(?) 사이버 공간에 버젓이 올리는 사람들 생각이 난다. 그들을 도대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그런 글들을 읽는 데도 이젠 신물이 난다. 그런 쓰잘 데 없는 글을 읽을 바엔 차라리 그 아까운 시간에 제대로 검증받은 '고전'을 펼쳐 그 속에 담긴 주옥같은 글을 한 줄이라도 더 읽는 게 백 번 낫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것도 꽤나 자주.

 

 

디킨스의 낭독회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쓴 그의 두 번째 작품 『종소리』의 낭독회를 열고 난 뒤 디킨스는 부인인 캐서린에게 쓴 편지에서 "만약 당신이 지난 밤 마크레디(디킨스의 친구)를 보았다면, 내가 작품을 읽어 내려갈 때 그 친구가 소파에 앉아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모습을 보았다면, 당신도 내가 느꼈던 것처럼 힘을 가진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느끼게 되었을 거요"라며 몹시 기뻐했다.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짓누를 힘, 감동을 안겨 주고 동요시킬 수 있는 힘, 그의 작품들의 힘, 그의 목소리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블레싱턴 후작 부인에게 『종소리』의 낭독회에 대해 "당신까지도 몹시 흐느끼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에 저는 한껏 들떠 있어요"라고 적고 있다.(369쪽)

 

 

디킨스는 훨씬 더 전문가다운 연기인이었다

 

디킨스는 훨씬 더 전문가다운 연기인이었다. 그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면-말투, 강조, 심지어 이야기를 낭독하기 적합하게 삭제하거나 수정한 것까지도-누구나 그 변형된 텍스트를 유일한 해석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벌였던 그 유명한 낭독회 여행을 보면 이런 점이 더욱 명백해진다. 클리프턴에서 시작하여 브라이턴에서 끝난 최초의 장거리 여행은 40여 개 도시에서 80여 차례 낭독회를 갖는 것으로 꾸며졌다. 그는 '창고, 무도회장, 서점, 사무실, 공회당, 호텔과 펌프실에서' 글을 낭독했다. 처음에는 높은 책상 앞에서, 나중에는 관중들이 자신의 몸짓을 더 명확히 볼 수 있게 좀더 낮은 책상 앞에서 낭독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 한 편을 듣기 위해 모인 청중들도 자기 친구들이 그 작품에서 받았던 인상을 그대로 받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갖고 있었다. 청중들은 디킨스가 바라던 대로 반응했다. 어느 남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자기 앞에 놓인 의자의 등받이 위로 쓰러져 격한 감정에 몸을 맡겼다. 디킨스가 다른 주인공이 다시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느낄 때면 이제는 다른 사람이 웃음을 거두고 두 눈을 닦다가 그 인물이 등장하자마자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니 그의 낭독에 대해서는 아마 플리니우스도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이런 결과는 고된 훈련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디킨스는 한 작품의 낭독과 몸짓을 연습하느라 적어도 2개월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 그는 글을 낭독할 때 자신이 어떤 반응을 비쳐야 하는지도 궁리하고 있었다. ······ 그 결과 소설들은 마치 그를 통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낭독회가 끝나면 뜨거운 찬사가 쏟아졌는데, 디킨스는 이런 찬사에 대해 한 번도 감사의 마음을 표했던 적이 없었다. 청중들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무대를 떠나 땀에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 고작이었다.(370∼371쪽)

 

 

글을 쓴다는 것은 마술같은 행위로 비쳐지기 때문

 

일부 독자들은 미신적인 마음에 끌려 낭독회를 찾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대체 작가란 인간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마술 같은 행위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소설이나 시를 창작할 줄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작은 우주의 창조자 아니면 작은 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젖게 한다. 그런 사람들은 "폴로니우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저자 혜존(蕙存)" 식의 헌사(獻辭)라도 받을 희망에 저자의 코밑으로 책을 밀어넣으며 서명을 요구한다. 이런 사람들의 극성에 떼밀려 윌리엄 골딩은(1989년 토론토에서 열린 문학 축제에서) "언젠가는, 나의 소설 중에서 윌리엄 골딩이라는 사인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 큰 횡재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독자들의 호기심은 꼭두각시 극장의 무대 뒤편을 들여다보고 싶어하거나 곧잘 시계를 분해하는 어린이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들은 『율리시스』를 쓴 그 손에, 심지어 조이스가 언급했듯이 "그 손은 다른 일도 많이 했는데도" 굳이 그 손에 입을 맞추고 싶어한다. (279쪽)

 

 

"당신은 셸리를 정말로 보았나요?" 라고 물으면

 

스페인 작가인 다마소 알론소는 대중 낭독회에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 그는 대중 낭독회를 "속물 같은 위선과 우리 시대의 치유 불가능한 천박함을 드러내는 것" 정도로 여겼다. 홀로 소리내지 않고 읽으면서 서서히 책의 진가를 발견하는 것과, 군중이 꽉 들어찬 원형극장에서 순식간에 어떤 작가의 얼굴을 익히게 되는 경우를 구분하면서, 알론소는 후자에 대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조급증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야만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문화는 점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풀이했다.

 

토론토, 에든버러, 멜버른 아니면 살라망카에서 열리는 작가들을 위한 축제에서 저자들의 낭독회에 참여하는 독자들은 자신들도 예술 활동의 한 부분이 되디라는 기대를 갖는다. 전혀 예기치 않았고 전혀 연습도 없이, 그러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벤트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자신들까지 창조의 순간을 목격한 존재로 만들어 주기를 그들은 희망한다. 아담에게조차도 거부되었던 그 창조의 환희를 말이다. 그래서 먼 훗날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늙은이가 되었을 때 누군가가 로버트 브라우닝이 언젠가 빈정대는 투로 물었던 것처럼, "당신은 셸리를 정말로 보았나요?" 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그럼요"가 될 것이다.(372∼373쪽)

 

 

보호와 번식의 기관

 

판다의 위기에 관한 에세이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는 "동물원은 포획과 진열의 기관에서 보호와 번식의 기관으로 바뀌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가장 훌륭한 문학 축제를 통해, 가장 성공적인 대중 낭독회를 통해 작가들은 보호되고 번식된다. 보호된다는 뜻은 (플리니우스가 고백했듯이) 작가들에게 자신들의 작품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청중이 많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의미에서이고, 또 잔인한 표현일는지는 모르지만 (플리니우스와는 달리)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는 뜻에서 보호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번식된다는 뜻은 작가들이 독자들을 낳고, 또다시 독자들이 작가를 낳기 때문이다. 낭독회가 끝나고 책을 사는 관중들은 그 낭독회를 증식시키는 것이고, 작가 입장에서는 백지장을 채워 나가는 그 행위가 텅빈 벽을 향해 공허하게 떠들어내는 꼴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고무를 받아 더 많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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