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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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그 전설적인 명장(名匠)의 이름을 듣자 그는 침침한 파도 소리를 듣는 듯했고 한 날개 달린 형체가 파도 위를 날아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예언과 상징들로 가득한 중세 서적의 한 페이지를 여는 기이한 도안인가? 매처럼 생긴 사람이 태양을 향해 바다 위로 날아가다니 그게 바로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받들도록 되어 있었고 안개 같은 유년기와 소년기를 통해 꾸준히 추구해 오기도 했던 목표를 예언하고 있을까? 자기의 작업실에서 이 지상의 맥빠진 물질을 가지고서 새롭고 신비한 불멸의 비상체(飛翔體)를 빚어 내고 있는 예술가의 상징인가?

 

그의 심장이 떨렸다. 그의 숨결은 빨라졌고, 마치 그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고 있듯이 야성의 정령(精靈)이 그의 몸 뒤로 지나갔다. 그의 심장은 황홀한 두려움 속에서 떨었고 영혼은 날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이 세상 밖의 하늘을 날고 있었고 그가 아는 육신은 단숨에 정화되어 의혹에서 해방된 후 빛을 발하며 그 정령의 원소와 뒤섞였다. 황홀한 비상의 그의 눈을 빛나게 했고 그의 숨결을 거칠게 했으며 바람에 휩쓸리는 사지가 떨며 야성적인 빛을 발하게 했다.

 

『하나! 둘! …… 조심해!』

 

『오, 맙소사, 빠져 죽겠다!』

 

『하나! 둘! 셋, 가거라!』

 

『다음은 나! 다음은 나!』

 

『하나! …… 억!』

 

『스테파네포로스!』

 

그는 큰소리로 외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목이 아팠다. 드높이 하늘을 날고 있는 매나 독수리처럼 외침으로써, 자기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음을 통렬히 알리고 싶었다. 그것이 삶이 그의 영혼을 상대로 외치는 소리였으며, 결코 의무나 절망의 세계가 내는 그 둔하고 조잡한 목소리가 아니었고, 제대에서 창백한 성직을 수행하라고 그를 불렀던 그 비인간적인 목소리도 아니었다. 한 순간의 야성적 비상(飛翔)이 그를 해방했고 그의 입술이 억제하고 있던 승리의 외침이 그의 두뇌를 갈랐다.

 

 ── 스테파네포로스!

 

이제 생각하니 그것들은 시신이 떨쳐낸 수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밤낮없이 그가 걸어다닐 때 그를 둘러싸고 있던 그 공포, 그를 옥죄고 있던 그 의혹, 안팎으로 그를 무안하게 만들던 그 수치심, 이런 것들이야말로 수의요, 무덤에서 나온 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영혼은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 시절의 수의를 떨쳐버렸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옛날의 위대한 명장(名匠)처럼, 그도 이제는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

 

그의 핏속의 불길을 더 오래 억누를 수 없어서 앉아 있던 바윗덩어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뺨은 화끈거렸고 목은 노래로 고동치고 있었다. 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찾아가 보려는 열정으로 불타고 있던 그의 발에는 방랑의 열기가 일었다. 가자! 가자! 가자! 그의 심장이 외치고 있는 듯했다. 바다 위에서 저녁이 깊어지고, 평원에 밤이 내리면, 방랑자의 앞에 새벽이 번뜩이며 그에게 낯선 들판과 언덕과 얼굴들을 보여주리라. 어딜까?

(260-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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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었다.

 

『이런 것을 묻는다면 이상하겠지만, 왜 또 이사를 간다니?』

 

왜냐하면 말이야, 집주인이 말이야, 우리를 말이야, 내쫓으려고 하기 때문이란 말이야』처음 대답했던 그 누이가 대답했다.

 

맨 아래 남동생이 벽난로 저편에서『고요한 밤이면 흔히』라는 곡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그 노래를 따라 부르자 결국은 모두 합창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이 노래 저 노래로 이 합창곡 저 합창곡을 부르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 마지막 파리한 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최초의 어두운 저녁 구름이 나타나 밤이 되곤 했다.

 

그는 한동안 듣고만 있다가 결국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는 연약하지만 싱싱하고 천진난만한 그들의 목소리 이면에 지켜운 기색이 감도는 것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삶의 여정(旅程)을 지처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가야 할 길에 대해 피로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는 부엌에서 노래하는 목소리의 합창이, 여러 세대의 아이들이 부르는 합창의 끝없는 반향 속으로 메아리 치며 증폭해 가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메아리 속에서 빈번한 피로와 고통의 어조가 울리는 것도 들었다. 모두들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삶에 지친 듯했다. <모든 시대의 아이들이 체험했던 그 고통과 지겨움 그리고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망을, 마치 자연 그 자체의 목소리처럼, 발언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의 단편적 시구 속에서 뉴먼 역시 이런 어조를 들은 적이 있음을 그는 기억했다.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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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함정이란 죄를 짓는 길이었다. 그 함정에 빠져보리라. 아직은 빠지지 않았으나 순식간에 말없이 빠지리라.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는 닥쳐올 어느 순간에 자기 영혼이 겪게 될 말없는 타락을 감지하고 있었다. 영혼은 점점 그 함정으로 빠지고 있으나 아직은 빠지지 않았고, 아직 빠지지 않았으나 막 빠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톨카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 퇴색한 푸른색 성모 마리아 경당(經堂) 쪽으로 잠시 싸늘한 눈초리를 던졌다. 그 경당은 초라한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 꼴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우뚝 솟은 기둥 위에 새처럼 얹혀 있었다. 그는 왼쪽으로 돌아서 자기 집으로 통하는 골목을 따라갔다. 강가에 솟은 언덕 위의 텃밭에서는 양배추가 썩는 시큼한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그는 자기 영혼 속에서 그날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이 무질서이며, 아버지의 집이 처해 있는 난맥상과 혼란이며, 식물 생명체의 침체 상태 등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또 사람들이 <모자 쓴 사내>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농사꾼이 그들 집 뒤의 텃밭에서 외로이 일하던 것을 생각했을 때 그의 입에서는 짤막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또 그 모자 쓴 사내가 하늘을 사방으로 차례차례 살피다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삽으로 땅을 푹푹 찌르며 일하던 것을 생각하자 첫번째 웃음에 뒤이어 이내 두번째 웃음이 부지불식간에 터져나왔다.(250-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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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에게 거룩한 의도를 밝히시도록 내일 아침에 내가 미사를 올리도록 하겠다』교장이 말했다. 『그런데, 스티븐, 너의 주보성인이신 최초의 순교자께선 하느님에게 아주 유력한 분이란다. 네가 그분께 9일 기도를 올려 하느님께서 네 마음을 계몽하시게 해주마. 하지만 나중에 너에게 성소가 없었음을 알게 된다면 끔찍한 일이 아니겠니, 그러니 우선 성소가 있다는 것부터 먼저 확인하도록 해라. 한번 성직자가 되면 영원히 성직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교리문답에서도 배웠잖니, 신품(神品)의 성사는 오직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성사가 영혼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정신적 표지를 찍어놓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네가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도 그전이라야지 그 후는 안 된단다. 스티븐, 네 영원한 구제가 달려 있는 문제이므로 엄숙히 다뤄야 하느니라.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는 무거운 홀 문을 열고 이미 신앙 생활의 동료가 된 사람을 대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스티븐은 계단 위의 널찍한 공간으로 빠져나와 온화한 저녁 공기가 그를 어루만져 주고 있음을 의식했다. 핀들레이터 교회 쪽으로 네 명의 젊은이들이 서로 팔을 끼고 리더가 연주하는 6각 손풍금의 경쾌한 멜로디에 보조를 맞춰 머리를 흔들며 활보하고 있었다. 갑자기 듣는 음악의 처음 몇 소절이 으레 그렇듯이 그 멜로디도 그의 마음속에 쌓아놓은 환상적인 구조물을 스쳐가면서, 마치 갑작스레 밀려온 물결이 아이들의 모래성을 허물어뜨리듯이, 아무 고통도 주지 않으며 조용히 그 구조물을 허물어뜨렸다. 그 보잘것없는 곡조에 미소를 지으며 그는 눈을 들어 교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저무는 날을 침울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교장의 동료 의식에 맥없이 묵종하고 있던 손을 살그머니 빼냈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그의 어지러운 자기 성찰을 지워버리는 인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학교 출입구에서 저무는 날을 반영하고 있던 어떤 침울한 가면의 인상이었다. 그러자 이 학교 생활의 그늘이 무겁게 그의 의식을 스쳐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숙하고 질서정연하고 열정이라고는 없는 삶이요 물질적 걱정도 없는 삶이었다. 그는 수련원에서 첫날 저녁을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이며, 기숙사에서의 첫 아침에 잠이 깨면 얼마나 불안할 것인지 궁금했다. 클롱고우스 학교의 긴 복도 냄새가 그에게 다시 괴롭게 회상되었고 불타는 가스등의 조용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기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한꺼번에 솟은 불안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이어 열에 들뜬 맥박이 점점 빨라졌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 소움이 되어 그의 정돈된 생각들을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덥고 습하고 몸에 해로운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그의 허파는 늘어났다 오므라들었다 했다. 그리고 클롱고우스의 목욕탕 속에서 맥빠진 토탄 빛깔의 물 위에 감돌던 그 덥고 습한 공기를 다시 한번 냄새 맡는 기분이었다.

 

이런 것들을 기억하자 교육이나 신심보다도 더 강한 본능이 잠에서 깨어났고, 그가 그런 생활에 가까이 가려고 할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미묘한 적대적 본능을 발동시키면서 묵종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생활의 냉기와 질서가 그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그는 추운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줄을 지어 새벽 미사에 나가서 기도함으로써 뱃속의 허기를 극복하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학교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그렇다면 낯선 집에서 먹거나 마시는 일을 꺼리는 그의 뿌리 깊은 수줍음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버렸을 것인가? 또 어떤 질서 속에서도 자기야말로 다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던 그 오만한 정신은 또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예수회 소속 신부 스티븐 디덜러스.

 

그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 자신의 이름 글자들이 눈앞에 튀어 올랐고 뒤이어 확실한 윤곽도 없는 얼굴과 얼굴 색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색은 흐려졌다가 마치 엷은 벽돌 색이 변하면서 이글거리듯이 강렬해졌다. 그게 혹시 겨울 아침에 사제들의 면도한 턱밑 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그 생경하게 이글거리던 불그레한 색인가? 그 얼굴에는 눈이 없었고, 씁쓸하고 경건한 표정에 분노를 억누르고 있듯 홍조가 감돌기도 했다. 그게 혹시 어떤 애들이 랜턴 조스라 부르고 다른 애들은 폭시 캠블이라 부르던 예수회 사제의 얼굴이 망령처럼 떠오른 것이 아닐까? (247-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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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은 햇빛을 등지고 창가에 서서 한쪽 팔꿈치를 갈색 차양에 기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쪽 차양의 끈을 달랑달랑 흔들거니 동그랗게 고리를 만들거니 하면서 말을 하거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던 스티븐은 지붕 위로 기나긴 여름 해가 저물고 있는 광경이라든지 또는 이 성직자가 손가락을 천천히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한동안 눈으로 쫓고 있었다. 교장의 얼굴은 완전히 그늘져 있었지만 그의 등뒤에서 저물고 있는 햇살이 그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와 두개골의 곡선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이제 막 끝난 방학이니 해외에 있는 예수회 계통의 학교니 교사들의 전근 같은 신통찮은 화제애 대해 무겁고 정중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을 때 스티븐의 귀는 그 목소리 속의 액센트와 음정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무겁고 정중한 목소리는 이야기를 술술 계속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중단될 때마다 스티븐은 존경 어린 질문을 해서 다시 얘기가 시작되게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 이야기가 서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뒤이어 나올 교장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장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은 후 그는 그 전갈의 의미가 무엇일까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 보고 있었다. 학교 응접실에서 교장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초조히 앉아 있을 때 그의 눈은 벽에 걸린 수수한 그림들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고 마음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 부름의 의미는 거의 분명해졌다. 그래서 예상하지 않은 사정이 생겨서 교장이 들어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의 손잡이가 뒤틀리는 소리와 수탄 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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