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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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 가자! 가자!

 

팔과 목소리의 마력. 하얀 팔처럼 뻗어난 길들, 꼭 껴안아줄 것을 기약하는 길들. 그리고 달을 배경으로 서 있는 높다란 배의 검은 팔들과 먼 나라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 그 팔들은 <우리는 외롭다. 이리 오렴>이라고 말하듯 펼쳐져 있다. 그리고 목소리들은 팔들과 함께 <우리는 그대의 혈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혈친인 나를 부르고, 떠날 채비를 하며 그 기고만장하고 무서운 젊음의 날개를 흔들 때 허공은 그것들로 가득하다.

 

4월 26일 ── 어머니는 내가 새로 구한 중고 옷가지들을 정돈하고 있다. 내가 고향과 친구들을 떠나 내 자신의 삶을 살면서 심정이란 무엇이며 심정으로 느끼는 바는 또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도록 어머니는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아멘. 그렇게 되어야지. 다가오라, 삶이여! 나는 체험의 현실을 몇백만 번이고 부닥쳐보기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의 대장간 속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벼리어내기 위해 떠난다.

 

4월 27일 ── 그 옛날의 아버지여, 그 옛날의 장인(匠人)이여,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소서.

 

 

         더블린, 1904년.

   트리에스테, 1914년.

 

 

(389∼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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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 오늘 그라프튼 가(街)에서 덜컥 그녀와 마주쳤다. 군중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우리 둘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더러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면서 내게 대한 온갖 얘기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건 시간을 끌자는 것에 불과했다. 내게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누구에 관한 시를 쓰겠느냐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이 물음은 그녀의 마음을 더욱 혼란케 했으며 그래서 나는 미안했고 야비한 짓을 했구나 싶었다. 곧 대화의 안전판을 돌리고, 단테 알리기에리가 발명하여 모든 나라에서 특허를 얻어놓은 그 정신적 · 영웅적 냉각장치를 틀어놓았다. 내 자신과 내 계획에 대해서 빨리 이야기했다. 그 도중에 불행히도 혁명적 성격의 갑작스러운 몸짓을 했다. 나는 한 줌의 완두콩을 허공에 던지고 있는 녀석처럼 보였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사람들은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헀다. 그녀는 잠시 후에 악수를 하고 떠나면서 내가 말한 것을 실천하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니 그걸 우정 어린 소망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다. 오늘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약간? 아니면 많이?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그것은 내게 새로운 감정이었다. 그러니 그런 경우에는 그 나머지 것, 내가 생각한다고 여긴 모든 것, 내가 느낀다고 여긴 모든 것, 여지까지의 그 모든 나머지 것, 사실은 ……. 오, 포기해 버려, 이 녀석아! 잠이나 자며 잊어버려!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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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 확실히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린치는 모든 여인들이 과거를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내게 어린 시절이 있었다면, 내 어린 시절도 기억하리라. 과거는 현재 속에서 소모되고, 현재가 살아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미래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린치의 말이 옳다면, 여인의 조상(彫像)에는 언제나 천을 완전히 둘러야 하며 한 손은 유감스러운 듯이 자기 뒤를 만지고 있어야 한다.

 

4월 6일 나중에 계속해서 씀 ── 마이클 로바츠는 잊혀진 아름다움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팔로 그녀를 감쌀 때면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는 사랑스러움을 품속에 꼭 껴안는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있는 사랑스러움을 품속에 꼭 껴안고 싶다.

 

4월 10일  ── 아무리 애무해도 일깨울 수 없는 지쳐버린 애인처럼 꿈에서 꿈이 없는 잠으로 옮겨간 이 도시의 정적을 거쳐 무거운 밤의 장막 아래로 희미하게 들리는 도로 위의 말발굽 소리. 다리에 가까워지자 이제는 발굽 소리도 그리 희미하지가 않다. 그 소리가 어두워진 창문들을 지나고 있을 떄 순간적으로 정적이 화살을 맞은 듯 놀람으로 갈라진다. 발굽 소리가 이제는 멀리서 들린다. 무거운 밤중에 보석처럼 빛나는 발굽들이 잠이 든 들을 건너 어딘지 여행의 종착점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다. 누구의 가슴에 무슨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가고 있는 걸까?

 

4월 11일  ── 간밤에 써놓은 것을 읽어보다. 모호한 정서를 표현하는 모호한 말들. 그녀가 그것을 좋아할까? 좋아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도 그것을 좋아해야지. (387-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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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밤  ── 자유롭다. 영혼으로부터 자유롭고 공상으로부터 자유롭다. 죽은 자들의 장레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 그래,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와 결혼케 하라.

 

3월 24일  ── 어머니와의 논쟁으로 시작되다. 논제 : 성모 마리아. 내가 남자요 젊어서 불리했다.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예수와 아버지 간의 관계를 들어 마리아와 아들 간의 관계에 맞세우다. 종교는 산부인과 병원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귀엽게 보아주었다.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으며 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라고 했다. 사실이 아님. 읽은 것도 적으려니와 이해한 것은 더욱더 적음. 그러자 어머니는 내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러므로 언젠가 신앙을 되찾게 되리라고 했다. 그것은 죄악의 뒷문으로 교회를 빠져나갔다가 회개의 천창(天窓)으로 다시 교회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할 수는 없다.(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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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크랜리』그가 말했다. 『너는 내게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이냐만 물어왔어.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流配)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

 

크랜리는 그의 팔을 움켜잡고 레슨 파크 쪽으로 가기 위해 그를 돌려세웠다. 그는 거의 교활해 보일 정도로 웃으며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베푸는 듯한 애정을 가지고 스티븐의 팔을 꾹 눌렀다.

 

『간계를 쓰겠다고 했겠다!』그가 말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가난한 시인인 네가!』

 

『네가 나에게 그런 고백을 하게 만들었어』스티븐은 자기 팔을 누르는 힘에 전율을 느끼며 말했다. 『과거에도 나는 너에게 다른 많은 것들을 고백했잖니?』

 

『그래, 이 녀석아』크랜리는 여전히 기분 좋게 말했다.

 

『너는 나에게 내 두려움들을 고백하게 했어. 하지만 나는 너에게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들도 말해 주마. 나는 외로이 지내는 것,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쫓겨나는 것, 그리고 내가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면 무엇이나 버리는 것,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큰 잘못이고 평생에 걸친 잘못, 어떠면 영원히 계속될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크랜리는 다시 심각해져서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외로운 것, 아주 외로운 것. 너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너는 그 말의 뜻이라도 아니?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친구가 하나도 없음을 의미한다고』

 

『그런 위험 정도야 감수할 용의가 있어』스티븐이 말했다.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 가장 귀하고 가장 진실된 친구 이상이 되어줄 사람을 한 사람도 갖지 못하는데도?』 크랜리가 말했다.

 

그의 말은 그 자신의 천성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심금(心琴)을 울린 것처럼 들렸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 혹은 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던가? 스티븐은 얼마 동안 묵묵히 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싸늘한 슬픔이 그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즉 자기가 두려워하는 자신의 고독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다.

 

『너는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니?』드디어 스티븐이 물었다.

 

크랜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379-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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