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자극적이며 매력적인 광고 문구인가. 이 책의 띠지에 붙은 저 글은 아마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이방인>의 놀라운 첫 문장 만큼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충격적이다. 카뮈의 <이방인>만 하더라도 너무나 유명한 소설인데,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저런 '외관'을 지니고 새롭게 번역되어 나타난 책을 어느 누가 쉽게 외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책은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책을 미리 사서 읽기도 전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미리보기'를 듬뿍 제공한,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낯설게 다시 다가온 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독자들에게 이렇듯 매우 어리둥절한 방식으로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이방인>이라는 소설 자체가 기묘한 성격을 지녔다 싶어 더욱 흥미롭다.
<이방인>을 둘러싼 '뜨겁게 불타오른' 오역 논쟁을 한동안 두루 살펴본 덕분에, 이정서 님이 번역한 새움판과 김화영 님이 번역한 민음사판의 차이를 어느 정도 미리 알게 되었다. 그런데 '새움판 <이방인>'을 둘러싸고 대판 벌어진 '칼날이 번쩍이는 듯한' 격렬한 싸움을 지켜보는 일이 어느새 '소설 이방인' 못지 않게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 싸움의 배경에 '어떤 전리품'이 깔려 있든지에 관계없이, 나같은 독자로서는 이미 그 치열한 싸움에 자칫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무슨 화를 입을지도 모르겠다 싶었고, 이러다 무슨 큰 사단이 나지나 않을까 싶어 슬쩍 겁부터 났다.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모두 끝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해변 전체가 뒤에서 나를 압박했다. 나는 샘을 행해 몇 걸음 내디뎠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아직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85쪽)
나는 아마도 새움판 <이방인>을 미처 읽기도 전에 '이방인 오역 논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어떤 압박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잠시나마 떠올렸을 생각이 아마도 <이방인> 속에 담긴 앞의 인용문과 닮았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앞에서 인용한 대목은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가 '홀로' 다시 '아랍인'에게로 다가가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방인>이라는 책을 둘러싼 '이글거리는' 논쟁으로부터 나는 '그냥' 돌아서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의 호기심이란 그리 쉽게 억눌려 있기가 어려운 성질이었던지, 나는 결국 지난주 어느날 퇴근할 무렵에 일부러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겨 이미 눈에 익은 이 책을 집어들고 책값을 계산했고, 결국 <이방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도대체 <이방인>을 둘러싼 번역 논쟁이 왜 그토록 뜨겁게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지, 나는 무엇보다도 그 실체적 진실이 궁금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단편적인 조각들' 말고 '하나의 덩어리 전체'를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이방인』을 집어들자 말자 그 소설은 정말 단숨에 읽혔다. 그 소설을 읽던 날 밤엔 '온갖 부조리'로 가득찬 엄청나게 우울한 '세월호 참사' 소식이 벌써 사흘째 생방송 중일 때였다. 가슴이 먹먹한 안타까운 소식들이 전해질 때마다 연신 훌쩍거리는 아내와 함께 그 참담한 소식을 두 시간 이상씩이나 계속 지켜보는 일이 영 마뜩찮아 TV에서 물러난 나는, 그저 퇴근길에 사 온『이방인』이라도 붙잡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 책을 금새 읽고 나서도 '극심한 우울 모드'는 여전히 지속될 뿐이어서 언제 글 한 줄 쓰고 싶은 생각조차 도무지 들지 않았다. 이런 글은 써서 도대체 뭐하나 싶은 자괴감만 계속 머릿속을 맴돌 뿐.
그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햇볕이 내 뺨을 불태웠고, 눈썹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 특히나 그때처럼 나는 이마가 지근거렸고, 피부 밑에서 모든 정맥이 울려 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뜨거움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 더 옮겨 봤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85∼86쪽)
방금 인용한 대목은 소설 <이방인>의 '1부'를 장식하는 결정적 장면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 책의 역자를 떠올렸다. 카뮈의 <이방인>을 새롭게 번역한 역자는 아마도 (그가 보기에는 '부조리한' 오역으로 가득찬 김화영 번역본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어떤 뜨거움에 내몰려, 한 걸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오역 논란을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정말 놀라웠고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미 책을 읽기도 전에 얼마간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역자 노트'도 그에 못지않게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새롭게 나온 번역판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카뮈의 소설『이방인』은 그동안 결코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역자 노트'에서 예시된 이전의 번역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긍하게 되면 '그런 사정'을 얼마간 이해할 만하다 싶기도 했다. '역자 노트'에서 이 책의 저자가 상세히 밝힌 대로 '새로운 번역'에 따라 이 소설을 읽으면 <이방인>은 그렇게 어렵게만 읽히는 소설이 결코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매끄럽게 읽히고, 카뮈가 치밀하게 배치해 놓은 소설 속 문장들이 저마다 절묘한 호응을 주고받는 느낌마저 생생했다.
'새로운 <이방인>'과 '역자 노트'를 다 읽고 나니, 어쩌면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그토록 함축적이고도 절묘하게 그려낸 '부조리'가 '역자노트' 속에 기이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듯한 착각조차 들 정도였다.
우리는 마침내 저 멀리 해변 끝의 커다란 바위 뒤에서 모래 사이로 흐르고 있는 작은 샘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그 아랍인 두 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누워 있었는데, 기름때 전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평온하고 거의 만족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왔음에도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81쪽)
기존의 번역이 정말 역자의 주장대로 '인물들의 성격과 특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카뮈 작품에 대한 권위자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려온 김화영 님의 번역이 정말 '<이방인>이라는 걸작 소설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이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일개 독자로서 함부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싶다. 그래서 역자가 심혈을 기울인 '작가 노트' 내용들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수긍할 수는 있지만, 기존 번역에 대한 너무 지나친 비판을 담은 그의 주장에 대해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번역'에 명쾌한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식의 과격한 주장에는 누구라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역자의 지나치게 확신에 찬 주장들에 대해선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느낌부터 앞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존의 번역'이 '작품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엉터리 번역'이라는 주장은 누가 뭐래도 너무 심했다 싶다.
사정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번역은 기존의 번역보다 정말 매끄럽고 설득력이 넘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 그저 단순하게만 읽히던 문장들이 하나 하나 긴밀한 연계성을 띄고 되살아나 서로를 이끌고 잡아당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확인시켜주기까지 한다. 물론 수준높은 독자라면 '기존의 번역'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방인> 속에 담긴 '작품의 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역자의 열의에 가득 찬 새로운 번역을 따라가다보면 평범한 독자라 하더라도 카뮈의 문학적 천재성을 금새 느껴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쩌면 느닷없이 낯선 외국의 여행지를 홀로 다녀오고 난 뒤에, 뒤늦게 그 여행지를 안내하는 어느 여행 전문가의 친절한 TV 해설을 듣는 듯한 느낌마저 들지 모르겠다. 그만큼 역자의 설명은 그동안 이 작품의 해석을 어렵게 만든 여러 대목들을 환하게 밝힌 부분들이 적지 않다 싶고, 그래서 이 책은 기존의 번역 작품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번역들과 역자가 새롭게 찾아낸 여러 확신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기존의 번역들'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그가 내뿜는 입김은 불에 데일 듯 뜨겁다.
모든 것이 휘청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바다로부터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실려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86쪽)
카뮈의 <이방인>을 아주 오래 전에 '어렵게' 읽은 기억이 어렴풋한데 뒤늦게나마 '새로운 번역'으로 단숨에 읽고 나니 개운한 느낌조차 없지 않다. 이 책이 아무리 '오역 논란'으로 여전히 시끄럽다고 하지만, 일개 독자로서는 그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기존의 번역에 결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점에 얼마쯤 동감하고, 새로운 번역으로 카뮈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으면 나로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인내심이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두 팔을 높이 쳐들어 올리며 소리쳤고, 그로 인해 그의 소매가 아래로 처지면서 풀 먹인 셔츠의 주름이 드러났다. "도대체 이 피고가 기소된 것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서입니까, 사람을 죽여서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검사가 다시 일어서더니, 그의 법복을 바로 잡고는 선언했다. 이 두 사실의 범주 사이에 있는 깊고, 비장하고, 본질적인 관계를 지각하지 못하려면 존경하는 변호사님처럼 순진해야 할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는 힘주어 소리쳤다. "나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묻었음을 고발합니다." (133쪽)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엄청난 궁지에 내몰린 '새움판 <이방인>의 번역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을 아주 단순하게만 바라본다면, 그는 기존의 번역상의 오역들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번역을 내놓은 죄밖에 없다. 그런데 역자에게는 이미 '번역상의 문제' 말고도 다른 수많은 '나쁜 혐의'가 잔뜩 추가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역자는 어느새 카뮈의 <이방인> 속에 나타난 '부조리'를 얼마쯤 닮아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새움 번역판의 역자를 둘러싼 논란'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독특한 감정들이었다.
카뮈가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낸 '부조리'는 도처에 깔려 있다. <이방인> 속 부조리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부조리는 결국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생각이었다. '엄마의 죽음'과 '아랍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연장되고, 어떻게 예기치 않게 일찍 마무리되든 주인공 뫼르소는 그에 대해 '일반의 보편적 인식'과는 크게 동떨어진 사고와 행동을 보여준다. 그게 무에 그리 큰 대수로운 차이란 말인가 하는 식이다.
그걸 마치고는 나를 "여보게"라고 부르며 말을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내가 사형수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사형수인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 막고는 그건 같은 게 아니라고, 더구나 어떤 경우라도 그건 위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158∼159쪽)
이 짧은 대목 속에서도 '부조리'는 가득하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부조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결국 교도소의 간수가 '호출'하는 순간에 삶을 마감하게 되어 있는 사형수를 닮았다.(쇼펜하우어는 '시간은 교도관처럼 우리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한다'고도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천 년이라도 살 듯이 악착스레 삶에 매달린다. 그런 '부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뫼르소가 오히려 사제에게 '그건 같은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습조차 내겐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내놓은 <이방인>을 두고 화끈하게 불붙은 '오역 논쟁'을 지켜봐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여러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렸을 법하다. 그 가운데 내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본 일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단단하게 뿌리내린 '기성 권력이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의 위험성에 대한 고려였다. 그 단단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 힘과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혹은 거기에 돈키호테를 닮은 무모한 용기는 또 얼마나 필요하며, 슬기로운 지혜는 또 얼마만큼 요구되는 것일까.
이번의 오역 논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찰스 다윈을 잠시 떠올렸었다. 비록 이번 일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례이고 서로 비교 자체가 안 된다고 여길지 몰라도, 나는 '기독교의 창조론'이라는 난공불락의 '기성 권위'를 무너뜨린 찰스 다윈의 '위대한 도전'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참고할 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자연선택 이론'은 '인간의 유래'에 관한 '신의 권위'마저 완전히 박탈하고야 말겠다는, 일찌기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어려운 일을 너무나 아름답게 성취해 냈다. 그가 그토록 힘든 일을 그토록 손쉽게(?) 이뤄낸 비결은 과연 무었이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 평생을 바친 철저한 연구. 둘째,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한' 표현.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는 우리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했다. 바로 '태양과 죽음'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딱 어울릴 만한 명언이 아닐까 싶다. 이 말을 남긴 라로슈푸코를 무척이나 존경하며 그를 자주 인용했던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 그 또한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헤겔을 상대로 끊임없이 싸웠다. 그가 보기엔 헤겔의 철학이 엉터리로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가 말년에 이르도록 '당대 철학계의 거두'였던 헤겔을 뛰어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철학에 매진한 끝에 얻어낸 훌륭한 결실들은 결국 훗날에 이르러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쇼펜하우어가 '논쟁'의 대가라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도 쇼펜하우어가 했던 인상적인 말들을 몇 번씩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 철학자만큼 이번 '새움판 이방인 ' 논쟁에 어울릴 만한 적절한 표현들을 두루 언급한 인물도 드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떠올리고 새삼 찾아봤던 '쇼펜하우어의 글들'은 어쩌면 '새움판 이방인'에 딸린 '역자 노트'처럼 어딘가 본궤에서 너무 벗어난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숨겨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관심있게 읽어보신 분들을 위해서는 이런 사족도 전혀 값어치가 없지는 않을 듯싶어 덧붙여 본다. 아무쪼록 '접힌 부분'까지 펼쳐 읽으시는 분들이 적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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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것을 보라
불평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악으로 몰아가는 음울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저주한다. 이는 통찰과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비열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눈 속의 티끌을 대들보로 과장해 비난하는 것과 같다. 불평하는 자는 맡은 일마다 천국을 지옥으로 바꾸고, 더욱이 비열한 열정으로 모든 것을 극단으로 몰아붙인다. 반대로 고귀한 심성을 지닌 자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려 한다. 일부러 잘못을 눈감아주고 의도는 좋았다고 말해줌으로써 모든 일에 용서할 줄 안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나를 만들어가는 지혜' 中에서
증오와 아첨
증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첨이다. 증오는 오점을 씻어내려 하나 아첨은 그것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남의 원망에서 배울 점을 찾는다. 이는 호의보다 더 충실하다. 강력한 역풍은 맥빠진 순풍보다 낫다. 적의 덕택에 행운을 얻은 사람들도 많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경쟁자를 이기는 지혜' 中에서
예의는 호의를 얻는 마법약이다
예의를 지켜라. 그것만으로 호감을 얻는 데 충분하다. 예의는 교양에서 나오며, 모든 사람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묘약이다. 반대로 무례함은 사람들의 경멸과 반감을 산다. 무례함이 자만에서 오면 혐오스럽고, 조악함에서 오면 경멸스러우며, 무지에서 오면 유감스럽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혜' 中에서
진실을 말할 때는 말을 신중히 골라서 하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때는 신중히 말을 고르고 예의를 잊지 않기 바란다. 똑같은 진실이라도 말하는 방법에 따라 기분좋은 보고도 되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되기도 한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혜' 中에서
시간으로 자기를 길들이라
기회가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참고 기다리다 보면 계절은 숨어 있던 것을 무르익게 하고 완성의 기쁨을 맛보게 한다. 시간의 버팀목은 헤라클레스의 쇠곤봉보다 더 강하다. 신은 채찍이 아닌 시간으로 인간을 길들인다.
'시간과 나는, 또 다른 시간 그리고 또 다른 나와 겨루고 있다'는 위대한 말을 상기하라.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행운을 불러들이는 지혜' 中에서
대적하는 자에게 그대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누가 공격하면 공격을 받은 사람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명예 회복의 절차에 따라 자기 손으로 되찾지 않으면, 그 명예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절차는 아무래도 그 생명, 자유, 재산, 마음의 평정 등에 위험이 닥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남자의 행위가 성실하고 고귀하며, 심성이 순결하고, 두뇌가 대단히 뛰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비방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사람은 그저 지금까지 이 명예의 법칙을 어긴 일이 없으면 되고, 그 외에는 보잘것없는 인간 쓰레기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짐승 같은 자이건, 게으름뱅이, 도박꾼, 빚쟁이라도 무방하다)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곧 명예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즐기는 자는 대개 앞에서 말한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세네카가, "경멸해도 싼 놈팡이일수록 그 혓바닥이 고약하다"라고 한 것도 적절한 표현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이야말로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감정이 상하는 모양이다. 됨됨이가 상반된 사람은 서로 미워하게 마련이며, 볼품없는 자가 뛰어난 사람을 은근히 경멸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와 비슷하게 괴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적하는 자에게 그대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그대와 같이 성품이 뛰어난 자는
영원히 그들의 눈에 난 가시로다.
어찌 이들이 그대의 벗이 되랴!
《서동시집》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명예에 대하여' 中에서
각자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것
이것은 누구나 자기와 동질적인 것만을 이해하고 평가할 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이, 저열한 사람에게는 저열한 일이, 그리고 머리가 명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혼돈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각각 동질적인 것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바로 그것이 그와 가장 동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의 전설적인 인물인 에피카르모스(그리스의 희극 시인)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조금도 놀랄 건 없다.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그들은 자기 자신이 제 마음에 들어 의기양양한 것뿐이다.
그들은 자기가 실로 훌륭하게 보이는 것이다.
개에게는 개가,
그야말로 제일 아름다운 것 ······. 역시 그렇다, 소에게는 소가,
노새에게는 노새가, 돼지에게는 돼지가.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명예에 대하여' 中에서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마라.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마라. 그가 믿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완전히 그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면, 므두셀라만큼 오래 살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남하고 이야기할 때 아무리 호의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는 쉽지만, 잘못을 바로잡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때,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이치에 닿지 않더라도 제3자인 우리는 개입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서투른 연극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세상에 진리나 교훈을 전하려는 사람이 그 임무를 무난하게 마쳤다면 그것은 하나의 요행이며, 오해와 푸대접과 반항, 그리고 학대를 받게 마련이다.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는 오랜 처세의 가르침은 해야 할 말만 요령 있게 하고 그 해석은 남에게 맡기라는 뜻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력이 부족하므로, 그 자리를 떠난 뒤에야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격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되며, 그때 모든 것은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잖은 태도로 조용히 말하면, 무례한 말이라도 당장 눈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거울을 향해 짖어대는 개와 같은 짓을 곧잘 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악기에서는 운지법을 가르치고, 검술에서는 장검 사용법을 가르친다고 하자. 학생은 열심히 하려고는 하지만 배운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훈련을 거듭하면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하는 동안에 차츰 익숙해진다.
라틴어로 글을 쓰거나 이야기하기 위해 문법 규칙을 배울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다. 교양 없는 자가 관리가 되거나, 신경질이 심한 자가 사교가가 되거나, 대범한 자가 소심하게 되는가 하면, 고귀한 자가 익살꾼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