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 청춘 - 일하고 꿈꾸고 저항하는 청년들의 고군분투 생존기
청년유니온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새해 초, 다시 연장 근무 얘기가 나왔다. 그 동안은 1시간 내외의 초과 근무에 대해서 수당을 받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오는 게 관행이었다. 같이 근무하는 아해랑 힘을 합쳐 연장 근무 수당에 대해 의견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그 아해는 당연한걸 왜 묻냐는 식으로 나온다. 당직 서는 분에게 부탁하면 된다는 둥, 매번 이럴 수는 없다는 둥 꼼수를 부렸지만 소용없었다. 꼼수가 더 나올수록 '이기적으로' 근무하는 직원이란 딱지가 이마에서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잠자코 있었다. 부당한데 전에 사람들도, 지금 옆에 있는 아해도 다 하는걸 왜 나만 못하냐는 암묵적인 비난.


 '사람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기적이다,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사회가 정말 힘든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는 사회일까. (젊은 사람들을 비난하기 전에)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어야하지 않을까.'


 '레알청춘'에는 88만원 세대, 20대 위로론, 20대 개새끼론까지 20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벗어나 20대 본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격려 혹은 충고라는 이름으로 기대어린 말들'로 젊은 사람들의 입이 되어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년 유니온이 인터뷰한 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작 그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나 역시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기존에 갖고 있는 생각들을 뒤집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가는 청년들이 왜 매도되어야 할까. 오히려 적성에 잘 맞지 않음에도 그런 직장을 찾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더 먼저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시각도 제시한다. ' 경험할 기회, 자기의 적성에 맞는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지원해줘야 한다는 의식이 없다.' 


어떤 교사가 되고 싶냐고 묻기 전에 우리 사회가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교사를 바라는가.’

‘우리 사회가 바라는 아이들의 미래는 무엇일까’


 20대의 태반을 '돈'과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그 고민을 일거에 뒤집는 얘기도 나온다.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가 조화되지 못하고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 인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일과 사랑, 생계와 예술, 밥과 꿈... 전자는 생존이요, 후자는 실존이다. 생존을 잃은 상태가 죽음이라면 실존을 잃은 상태 또한 인류에게는 죽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는 탁월한 행운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실존을 빼앗거나 생존을 빼앗는다.'


 사실 '프리랜서라는 고상한 이름을 가진 비정규직 공장이자,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에게 이 책은 암울한 자화상으로 보일 것이다. 20대의 문제를 개인의 노력 여하로 환원하는 것 만큼 사회나 구조탓을 하는 것도 맥빠지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게 시작이라고 본다.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문제를 고치고 나아지게 하는 방법도 멀리 있지 않을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런거야.', '사회생활 경험이 없어서 뭘 잘 모르나본데.'란 관행에 치인다면 20대에게 불리한 판을 뒤집을 수는 없다.


 앞서 한 얘기는 싱겁게 끝났다. 누군가 이 상황을 우호적으로 보고해줬고 과장님은 흔쾌히 초과 근무에 대해 수당을 지급하라고 했다. 누군가의 선의로 노동의 대가를 받는건 썩 좋은 경험이 아니다. 응당 그래야하는걸 사람들 눈치보고, 이기적인건 아닐까 자책하고, 퇴직과 암울한 재취업까지 생각한 면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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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녹아도 흔적 없이 녹을 때지만 그늘진 곳엔 여전히 눈이 쌓여있었다.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미끄러울 수도 있으니 눈을 치우자는 얘기가 나왔다. 바람이 차다. 차도 너무 차 칼바람이라고 한다. 뜨뜻한 아랫목에서 그깟 빙판쯤이야 하면서 지지고 싶은 날이다. 과장님까지 움직이니 아랫목 타령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2년 전의 나였다면 안 할 궁리를 하며 딴청을 부렸을 것이고 1년 전의 나였다면 일을 하면서도 시종일관 궁시렁댔을 것이다.  

 

 온갖 장비들이 동원됐다. 삽, 괭이, 부삽, 쟁기. 도구들은 생김새와 쓸모가 다르건만 오로지 얼음을 깨는 용도로만 쓰였다. 삽을 눕혀서 몇번 해보다 끝으로 톡톡쳐보기도 하고 삽질하듯 얼음을 깼다. 괭이 역시 낮게 종종거리듯 얼음 위를 건드리며 균열을 냈다. 며칠 된 얼음은 이래도, 이래도 하면서 자꾸 버티며 쉽게 깨지지 않았다. 삽을 눕혀서 좀 세게 쳤더니 얼음이 조금씩 깨진다. 모여진 얼음은 싸리 빗자루로 쓸어모아 화단에 부었다. 누군가 내년 봄에 화단은 물 고플 일이 없을거라고 흰소리를 한다. 얼음 조각이 튀고 허리는 아프고 손발은 진즉 얼어 있다.

 

 노예처럼 살기로 작정한듯 찍소리 없이 지내고 있는 누구는 미친 분노를 쟁기에 실어 보도블록까지 깰 기세로 힘을 쓴다. 누구는 왔다갔다하며 설렁설렁 거들고 누구는 계속 주말 텃밭에서 오랫동안 일하는걸 이야기하며 '얼른 칭찬해줘, 잘한다고 해줘.'란 냄새를 진하게 풍겨댔다. 내가 신뢰하는 누구는 군말없이 일하다 가끔 담배 한대 피어물고 혹은 소리를 높여 일을 시키며 계단 아래까지 얼음을 깨내려갔다. 나는 그를 신뢰하므로 그가 담배를 피든 자꾸 나보고 그래서 점심 먹었다고 할 수 있겠냐고 채근을 해대도 그런가보다 한다.

 

 공구는 정확하다. 삽에 눈을 담아 화단에 뿌릴 때 앞이 아니라 옆으로 해서 넘겨야한다. 안 그러면 그러모은 얼음이 도로 땅에 떨어지거나 손목이 삐끗할 수 있다. 앞으로 해서 얼음을 버리다 손목의 힘줄 하나가 찌릿했다. 정교하지 않은 삽이 보내는 정교한 신호. 쟁기는 쟁기대로, 니퍼는 니퍼대로, 롱렌치는 작은 녀석이 헷갈리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쓸모만큼의 일을 한다. 소리가 이상하고 뭔가 어긋나면 문제점을 찾는다. 케이블선을 니퍼로 벗겨 스피커에서 나는 잡음을 해결하고 드릴이나 드라이버로 마무리한다.

 

 과장님은 나보고 더 있다가는 감기 들고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자꾸 들어가라고 한다. 다른 분은 그거 해서 밥 먹을 수 있겠냐고 한다. 나는 다만 입 하나로 일 거들며 대단한 치하를 하는 듯 구는 사람들이 주위에 없어선지 뭐든 상관없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얼음을 다 깨고 부직포를 깔았다. 11m에 13000원이다. 누구는 싸다고 하고 누구는 공금이 아니라면 싸겠냐고 싸울 기세로 덤빈다. 누구는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고 잘 다녔으면 좋겠다하고 누구는 다시 또 눈이 오면 어쩌냐고 오만상을 찌푸린다.

 

 다시 눈이 오면 부직포를 걷어내고 눈을 쓸어야 한다. 그 날도 춥고 손이 시려울 것이다. 하지만 비질을 하고 삽질을 하다보면 그쯤 추위야 별로 문제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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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1-09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에 주인공 공무원이 끌려나가 눈치우는 장면이 있는데 글을 읽다보니 그 장면들이 생각이 났어요. 예를 들어 이 글의 과장님에는 윤제문을 매칭하고, Arch님은....

다락방 2013-01-09 08:44   좋아요 0 | URL
저는 [나는 공무원이다] 보고 싶었는데 놓쳤거든요. 그래서 윤제문 말고 나오는 사람이 누군인지 몰라요. 다만 맥거핀님의 이 댓글을 읽고 아치님은...음...김하늘?? 이러면서 눈 치우는 김하늘 상상했어요. 하핫.

Arch 2013-01-09 10:59   좋아요 0 | URL
다른 부분은 모르겠고 '끌려나가는'건 딱인 것 같아요. 저는 김하늘 친구의 친구쯤 되지 않을까요라고 생각하고 검색했는데... 다락방님, 김하늘은 '7급 공무원'에 나와요! 그러니까 저는 윤제문은 모르겠지만 김하늘은 될 수가 없는거였어요. 그렇다고 제가 공무원이라는건 아니구요.

숲노래 2013-01-09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을 제대로 치우자면
눈이 내릴 때에 한 시간에 한 번씩 나와서 쓸어야
바닥에 쌓이지 않아요.
이동안 사람들이 밟더라도 어느 만큼 치울 수 있고요.
그런데 이게 아니라면...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요 ^^;;;

길에 얼음 얼 때에는 '뜨거운 바람 나오는' 어떤 연장이 있어요.
그 연장을 쓰면 잘 녹아서 빗자루만 있으면 되기도 한답니다~
이런 연장 있으면 사람들 고생은 덜 시키지요~

Arch 2013-01-09 11:01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은 눈을 치우는 101가지 방법까지 다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보자면 전 아직 입문도 아니고 왕초보네요. 뜨거운 바람 나오는 어떤 연장이라니, 와, 연장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네요. 얼음 깨는 재미도 쏠쏠했어요. 쫙하고 갈라지면 참 뿌듯하고.

조선인 2013-01-09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편히 다닐 겁니다. 짝짝짝

Arch 2013-01-09 11:01   좋아요 0 | URL
으쓱으쓱, 고맙습니다. 조선인님!
 

 '보고 싶다', '드라마의 제왕', ' 청담동 앨리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요새 내가 보는 드라마 목록이다. 12시면 곯아떨어지던 내가 12시 넘어서 새벽이 짙어질 때까지 드라마를 보고 앉았다. 한번 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드라마의 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몸을 혹사시키고 싶은 가학적인 충동과 낮 시간을 몽롱하게 지탱하고 싶은 안간힘이 주효하게 작용한 결과다. 드라마를 늦게까지 본다고 몸이 혹사되진 않는 모양이다. 일어나서 5분 만에 출근하는 타이트한 아침 시간은 도시의 속도감을, 낮 동안 잠과 싸우는 일은 현대 직장인의 고충을 느끼게 한다. 아, 무슨 개소리람.

 

 '보고 싶다'는 얽히고 섥힌 미스터리와 속도감 있는 진행, 아역 배우들의 호연 덕분에 초반에 완전히 빠져든 드라마다. 하지만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성폭행과 그 후유증, 죄책감과 진실 밝히기를 질질 끌면서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제왕'은  현실감 있는 대사와 앤서니 김이란 캐릭터와 장항준(장항선이라고 쓸 뻔)의 작품이란 사실에 무한 호감을 갖고 보기 시작했다. 시스템 혹은 관행과 싸우던 여주인공이 그게 항상 틀린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고은 작가의 분투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막 감정이입하고) 하지만 '경성의 아침'처럼 본격 멜로 라인을 잡고 사건이 에피소드식으로 휙휙 지나치니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 돼버렸고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는 이고은과 변해가는 앤서니 김 덕분에 드라마도 흐지부지해져버렸다.

 

 '청담동 앨리스'는 텐아시아 기사처럼 캔디와 신데렐라 이야기를 비튼 드라마다. 혹은 한겨레 21에서처럼 지금 청춘이 좌절하고 스펙을 쫓는 대신 화를 내야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혼자 막 그래, 이 드라마는 뭔가 달라 이랬는데 잡지에서 그게 뭔지 콕 집어줬다. 4회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드라마를 따라잡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응용한 '시계토끼' 부분에선 흥분하기까지 했다. 소이현은 너무 예쁘고 문근영은 그냥 문근영이었고 박시후도 그냥 박시후였지만 기존의 이야기를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흥미진진해질 수 있다는데 누구에게라도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청담동 앨리스'도 4회를 넘기고나니 처음의 패기는 어디로 가고 관습적인 설정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모순되는 상황들이 유야무야 무마되기 시작하자 매력을 잃고 말았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는 결혼에 이르는 여남과 집안, 혹은 이 시대의 풍속도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시시콜콜한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토씨 하나에 감정이 상하고 낭만과 괴리된 결혼 진행 과정을 가감없이 드러내는게 이 드라마의 강점. 이미숙은 역시 푸른 쉐도우고 여주인공은 참 예쁘다. 최화정은 라디오를 진행하는 것도 아닌데 맘에 쏙 들어오는 센스 있는 대사를 친다. 사랑:비즈니스란 도식은 낡았다. 사랑과 상대방의 조건이나 환경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자신들 사랑의 알리바이를 위해 사랑과 비즈니스란 구분을 통해 현실을 회피하는 것 같다.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으면 가끔 누군가 화장실에 가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지희가 일어나 화장실에 간다. 졸린 눈으로 변기에 앉아 일을 보고 물을 내린다. 조용한 새벽에 소란스럽게 물소리가 난다. 세면대에 가서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이 안 온다고 투정을 부린다. 눕자마자 잘거면서. 지희가 내 몸에 기대서 잠이 안 온다고 한다. 지희를 방에 눕히고 컴퓨터를 끈다. 남은건 적막, 스탠드를 켜고 책을 편다.

 

'안개에게 항구와 도시를 충분히 바라볼 시간을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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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1-03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 31일 밤에 우연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를 봤어요.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다 감정이입도 되고요^^;; 나머지 드라마들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지만 이 드라마에 아치님이 느끼는 정서에 공감이 가 반가워요^^

Arch 2013-01-04 14:03   좋아요 0 | URL
드라마는 왜 처음만 막 재미있다가 시큰둥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종편 방송이라 좀 그랬지만 김수현이 대사를 쓴 것처럼 속도감 있는 대화가 이 드라마의 장점 같아요. 때로는 저렇게까지 다 대사로 풀어내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저도 반가워요. blanca님!

2013-01-05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7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3-01-06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반갑! 새해 인사하러 들렀어요. 건강하시죠? 주변은 최악이지만 늘 건강하게 지내시고 새해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많기까지는 못 바라겠어요.^^;) 그런데......결혼 소식은......?

Arch 2013-01-07 11:42   좋아요 0 | URL
빵가게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제가 관여하기가 어렵... 유머인데 안 웃겨요.
빵가게님도 건강하시고 잘 지내셔요!
 

 '쇼트가 모여 씬이 생기고 씬이 모여서 시퀀스가 만들어진다. 영화는 이야기나 이미지의 총합이 아니라 감독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정성일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고백을 담고 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얘기가 나오면 안 읽는 대신 건너뛰고 싶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우연히 시네마 천국도 보게 되어 앞으로는 영화를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막 설레고 그런다. 특히 이런 부분, 

 

' 모든 예술 장르는 그 자체로 배워야 한다. 배움 없이 예술을 감각적으로, 즉흥적으로,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결국 규칙 안에서 벌이는 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칙을 알지 못하면 놀이를 할 수 없다.'

 

 내가 책과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게 못배워서라니. 어쩜 이렇게 유치하도록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지 한심하기도 하지만 배우면 나도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선택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느낄 수 있을 것 아닌가 싶어 흥분된다. 우선은 정성일의 조언대로 자꾸 잊혀지지 않는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는 것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영화는 스토리가 아니라 카메라로 찍는 것이란 사실, 영화가 서로 연관 없는 쇼트들의 연속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로베르 브레송이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보며)도 흥미롭다. 한편으론 누군가가 인정해줘서 의미 있어진 영화들은 정말 진짜일까란 의문이 남긴 한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건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알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그동안 '서양 미술사'나 '사진'을 읽어 왔으면서 이런 반응, 좀 생뚱맞다 싶기도 하다.

 어렵지만 멋진 말이 씌여진 책과 그 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 책.

 

 개정판이 계속 나오는 '영화의 이해'는 전에 페이퍼를 쓰면서 막 읽는다, 이제 영화를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 느끼고 본다고 설레발을 치며 담았던 책이다. 정설일의 책보다 읽는 재미가 덜하고 글이 산만한 감이 있다.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기본부터 차근차근 시작할 수 있고 삽화의 설명들이 재미있어서 꾹 참고 볼 참이다. 이러다 또 다음 페이퍼에서 막 흥분했다가 또 이 책을 소개하는 상황을 연출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영상 자료도 있다. 언제부터 바뀐지 모르겠지만 EBS 시네마 천국에서도 '영화의 이해'에 나온 영화의 역사나 형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문제는 일 끝나고 책상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근성이 필요한데 늘어져서 드라마 보느라 도끼 자루 말고 책등 주저앉는지도 모른달까.

 

 

 진화심리학에 거부감을 갖는건 모든 사안과 현상의 원인을 진화쪽에서만 찾으려는 고지식함 때문이다. 모든 학문 분야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진화심리학이 유독 그래보이는건 사회문화적인 성차를 공고히하려는 주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데이비드 버스의 책은 별로였는데 와,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게다가 처음에 막연하게 오해한, 개별 사안만 죽 늘어놓고 237가지 이유를 다 댔다며 요령을 피울까 오해했던 부분이 기우란 것도 대만족.

 

' 그 짓의 즐거움'에서 나도 잘 몰랐던 오르가즘의 생리적인 특징들이 좌르르 펼쳐지는거며 자기 집의 크리스마스트리의 조명 장식이 이웃집 창문 자식등과 동조해 깜박이고 있다며 아내를 질투하는 비합리적인 남편의 직관이 실은 사실이었다는 것, EBS가 좋아하는 뇌과학이니 호르몬이니 하는 것들로 한계짓지 않고 왜 애무하면 좋을까, 애착은 어떤걸까에서 시작해 살짝 양념처럼 곁들이는 뇌과학, 호르몬 부분도 괜찮았다. 어떤 편견이나 정해놓은 결론에 집착하지 않고 그동안의 연구 자료에 바탕을 두고 기술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진화론에선 이래'가 아니라 여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진화론과 감정, 문화, 성역할에 대해서 써내려간 글이어선지 설득력도 있다. 여자가 섹스를 하는 여러 이유를 밝히려다보니 이야기가 우왕좌왕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나만 그런게 아니었네', '그거 재미있겠네' 등의 감정이입이 되고 한번에 쭉 안 읽히는데도 머리맡에 두는걸 보면 표지만큼이나 책의 매력 또한 상당하다 할만하다. 내가 섹스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점도 좋았다.

 

  수많은 신간 중에 읽을 책을 고를 때면 몇몇 맘에 둔 작가의 신작, 누군가의 추천만큼 소중한게 없다. 새 책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낯익은 표지와 제목이 들어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심윤경 소설은 처음인데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결말이 좀 뻔하고 인물들이 왜 다 훈남 훈녀인가 싶기도 하고 돈에 대한 씀씀이와 규모에선 선뜻 실감이 안 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별다른 생각 안 하고 드라마도 안 보고 쭉쭉 읽히는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일상을 바탕으로 한 소설 속 인물이 도덕을 뛰어넘어 가족에게 책임을 물으며 맘껏 자유로운 것도 좀 신기했다. 이과 출신인 남편의 묘사는 평면적이고 마흔살이 다 되는 여자가 이렇게 철이 없어도 될까 싶기도 하다. 소설적인 공간으로 뛰어든게 아니라 현실에 발 담그고 있는 인물이라 그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어쩌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도 고민하는 내용이나 결이 너무 차이가 나니까 처음엔 신기하다 자꾸 이래도 되나 싶어지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나는 도덕적인게 아니라 도덕적인체 하는 기질이라 누군가의 민폐를 견딜 수 없는지도. 부코스키는 괜찮았는데 왜 혜나는 아닐까. 성별적인건가.

 

 아, 그런데 대선은 어떻게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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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2-20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선은 '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가겠지요...
아직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나 통일이나 사랑이나 꿈하고는
많이 먼 곳에 있나 봐요...

Arch 2012-12-20 20:50   좋아요 0 | URL
저는 부재자투표 때문에 초반 득표율이 그 모양인줄 알았어요. 아쉽다, 참.

다락방 2012-12-2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 저는 낄낄거리면서 읽었어요. ㅎㅎㅎㅎㅎ

Arch 2012-12-20 20:51   좋아요 0 | URL
지금 '의무감' 읽고 있는데 격하게 공감하고 있어요.

맥거핀 2012-12-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 씨의 저 말은 저도 기억이 납니다. 근데 영화에서 문제는 그 규칙을 책으로 배우는 데는 일정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 결국 많이 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내년부터는 술 약속과 보고 싶은 영화의 시간이 겹치면 100% 무조건 영화를 선택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했습니다.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라가는 거 안배웠냐?)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책은 계속 봐야겠죠. 너무 재밌으니까. 근데 말씀하신대로 혼자보면 좀 아리까리한 게 많아서, 영화책 읽는 소모임이라도 결성하고 싶은 심정.

Arch 2012-12-20 20:55   좋아요 0 | URL
서울을 떠나고 나서야 시네마테크에서 하는 회고전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진작에 정성일씨가 책을 썼어야 했어요. 요새는 막 드라마 보면서 컷 나누고 아우, 너무 단조로워. 카메라가 대사대로 움직여 이러는데. 제가 사는 곳에서도 회고전 비슷한걸 하는데 끝나고 난 후의 부끄러운 관람평 때문에 가서 보기가 꺼려져요. 넓은 극장에서 영화에 빠져 있다가, 혹은 졸다가 혼자 슬그머니 영화관을 나와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게 더 좋더라구요.

아리까리한대로 간직하고 있다가 그 감독의 다른 작품이나 다른 영화, 혹은 책, 혹은 극장에서 통화를 하는 여성의 대화 내용에서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개표율이 높아질수록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역별 특표율을 보니 낭패감이 든다. 투표 인증을 진작 올렸어야했는데 투표하고 나서 한바탕 청소로 기력을 다 써버려 한숨 잤더니 저녁이었고 저녁을 먹고 정리 좀 하니 밤이 돼버렸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투표하는 모습을 보니까 기운이 났는데 지금 상황은 어이쿠...

 잘 됐음 좋겠다.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됐음 좋겠다. 선거 때마다 이러나 싶어, 최선의 투표였음 더 좋았을걸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그분이 당선됐음 좋겠다. 옥찌들은 투표소 운동장에서 업어주기 놀이를 했다. 민은 오늘 일기에 누가 대통령이 될지 궁금하다고 했다. 내일 아침 민에게 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알려줄 때 신나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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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19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패감, 저도 듭니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잘되었으면좋겠다ㅠㅠㅠ

Arch 2012-12-19 23:16   좋아요 0 | URL
20% 밖에 안 남았는데... 남은 표가 모두 제가 지지하는 후보의 표였음 좋겠어요.

꼬마요정 2012-12-1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도 이번에는 사람이 당선될 줄 알았는데요..허허

Arch 2012-12-20 20:47   좋아요 0 | URL
꼬마요정님, 우리 힘내요!

hnine 2012-12-2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찌들이 저렇게 컸네요!
선거얘기는 에효...하고 싶지도 않고요 ㅠㅠ

Arch 2012-12-20 20:50   좋아요 0 | URL
많이 컸죠~
저도 선거가 참 그랬지만 어쩌겠어요, 다시 기다리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