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가 모여 씬이 생기고 씬이 모여서 시퀀스가 만들어진다. 영화는 이야기나 이미지의 총합이 아니라 감독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정성일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영화에 대한 애정어린 고백을 담고 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얘기가 나오면 안 읽는 대신 건너뛰고 싶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우연히 시네마 천국도 보게 되어 앞으로는 영화를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막 설레고 그런다. 특히 이런 부분, 

 

' 모든 예술 장르는 그 자체로 배워야 한다. 배움 없이 예술을 감각적으로, 즉흥적으로,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결국 규칙 안에서 벌이는 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칙을 알지 못하면 놀이를 할 수 없다.'

 

 내가 책과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게 못배워서라니. 어쩜 이렇게 유치하도록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지 한심하기도 하지만 배우면 나도 그 영화가 담고 있는 선택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느낄 수 있을 것 아닌가 싶어 흥분된다. 우선은 정성일의 조언대로 자꾸 잊혀지지 않는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는 것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영화는 스토리가 아니라 카메라로 찍는 것이란 사실, 영화가 서로 연관 없는 쇼트들의 연속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로베르 브레송이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보며)도 흥미롭다. 한편으론 누군가가 인정해줘서 의미 있어진 영화들은 정말 진짜일까란 의문이 남긴 한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건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알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그동안 '서양 미술사'나 '사진'을 읽어 왔으면서 이런 반응, 좀 생뚱맞다 싶기도 하다.

 어렵지만 멋진 말이 씌여진 책과 그 책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하는 책.

 

 개정판이 계속 나오는 '영화의 이해'는 전에 페이퍼를 쓰면서 막 읽는다, 이제 영화를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 느끼고 본다고 설레발을 치며 담았던 책이다. 정설일의 책보다 읽는 재미가 덜하고 글이 산만한 감이 있다. 형식주의와 사실주의에 대해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기본부터 차근차근 시작할 수 있고 삽화의 설명들이 재미있어서 꾹 참고 볼 참이다. 이러다 또 다음 페이퍼에서 막 흥분했다가 또 이 책을 소개하는 상황을 연출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영상 자료도 있다. 언제부터 바뀐지 모르겠지만 EBS 시네마 천국에서도 '영화의 이해'에 나온 영화의 역사나 형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문제는 일 끝나고 책상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근성이 필요한데 늘어져서 드라마 보느라 도끼 자루 말고 책등 주저앉는지도 모른달까.

 

 

 진화심리학에 거부감을 갖는건 모든 사안과 현상의 원인을 진화쪽에서만 찾으려는 고지식함 때문이다. 모든 학문 분야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진화심리학이 유독 그래보이는건 사회문화적인 성차를 공고히하려는 주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데이비드 버스의 책은 별로였는데 와,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게다가 처음에 막연하게 오해한, 개별 사안만 죽 늘어놓고 237가지 이유를 다 댔다며 요령을 피울까 오해했던 부분이 기우란 것도 대만족.

 

' 그 짓의 즐거움'에서 나도 잘 몰랐던 오르가즘의 생리적인 특징들이 좌르르 펼쳐지는거며 자기 집의 크리스마스트리의 조명 장식이 이웃집 창문 자식등과 동조해 깜박이고 있다며 아내를 질투하는 비합리적인 남편의 직관이 실은 사실이었다는 것, EBS가 좋아하는 뇌과학이니 호르몬이니 하는 것들로 한계짓지 않고 왜 애무하면 좋을까, 애착은 어떤걸까에서 시작해 살짝 양념처럼 곁들이는 뇌과학, 호르몬 부분도 괜찮았다. 어떤 편견이나 정해놓은 결론에 집착하지 않고 그동안의 연구 자료에 바탕을 두고 기술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진화론에선 이래'가 아니라 여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진화론과 감정, 문화, 성역할에 대해서 써내려간 글이어선지 설득력도 있다. 여자가 섹스를 하는 여러 이유를 밝히려다보니 이야기가 우왕좌왕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나만 그런게 아니었네', '그거 재미있겠네' 등의 감정이입이 되고 한번에 쭉 안 읽히는데도 머리맡에 두는걸 보면 표지만큼이나 책의 매력 또한 상당하다 할만하다. 내가 섹스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점도 좋았다.

 

  수많은 신간 중에 읽을 책을 고를 때면 몇몇 맘에 둔 작가의 신작, 누군가의 추천만큼 소중한게 없다. 새 책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낯익은 표지와 제목이 들어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심윤경 소설은 처음인데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결말이 좀 뻔하고 인물들이 왜 다 훈남 훈녀인가 싶기도 하고 돈에 대한 씀씀이와 규모에선 선뜻 실감이 안 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별다른 생각 안 하고 드라마도 안 보고 쭉쭉 읽히는 소설은 오랜만이었다.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일상을 바탕으로 한 소설 속 인물이 도덕을 뛰어넘어 가족에게 책임을 물으며 맘껏 자유로운 것도 좀 신기했다. 이과 출신인 남편의 묘사는 평면적이고 마흔살이 다 되는 여자가 이렇게 철이 없어도 될까 싶기도 하다. 소설적인 공간으로 뛰어든게 아니라 현실에 발 담그고 있는 인물이라 그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어쩌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도 고민하는 내용이나 결이 너무 차이가 나니까 처음엔 신기하다 자꾸 이래도 되나 싶어지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나는 도덕적인게 아니라 도덕적인체 하는 기질이라 누군가의 민폐를 견딜 수 없는지도. 부코스키는 괜찮았는데 왜 혜나는 아닐까. 성별적인건가.

 

 아, 그런데 대선은 어떻게 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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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2-20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선은 '더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가겠지요...
아직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나 통일이나 사랑이나 꿈하고는
많이 먼 곳에 있나 봐요...

Arch 2012-12-20 20:50   좋아요 0 | URL
저는 부재자투표 때문에 초반 득표율이 그 모양인줄 알았어요. 아쉽다, 참.

다락방 2012-12-20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 저는 낄낄거리면서 읽었어요. ㅎㅎㅎㅎㅎ

Arch 2012-12-20 20:51   좋아요 0 | URL
지금 '의무감' 읽고 있는데 격하게 공감하고 있어요.

맥거핀 2012-12-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 씨의 저 말은 저도 기억이 납니다. 근데 영화에서 문제는 그 규칙을 책으로 배우는 데는 일정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 결국 많이 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 그래서 내년부터는 술 약속과 보고 싶은 영화의 시간이 겹치면 100% 무조건 영화를 선택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했습니다.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라가는 거 안배웠냐?)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책은 계속 봐야겠죠. 너무 재밌으니까. 근데 말씀하신대로 혼자보면 좀 아리까리한 게 많아서, 영화책 읽는 소모임이라도 결성하고 싶은 심정.

Arch 2012-12-20 20:55   좋아요 0 | URL
서울을 떠나고 나서야 시네마테크에서 하는 회고전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진작에 정성일씨가 책을 썼어야 했어요. 요새는 막 드라마 보면서 컷 나누고 아우, 너무 단조로워. 카메라가 대사대로 움직여 이러는데. 제가 사는 곳에서도 회고전 비슷한걸 하는데 끝나고 난 후의 부끄러운 관람평 때문에 가서 보기가 꺼려져요. 넓은 극장에서 영화에 빠져 있다가, 혹은 졸다가 혼자 슬그머니 영화관을 나와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게 더 좋더라구요.

아리까리한대로 간직하고 있다가 그 감독의 다른 작품이나 다른 영화, 혹은 책, 혹은 극장에서 통화를 하는 여성의 대화 내용에서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