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다', '드라마의 제왕', ' 청담동 앨리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요새 내가 보는 드라마 목록이다. 12시면 곯아떨어지던 내가 12시 넘어서 새벽이 짙어질 때까지 드라마를 보고 앉았다. 한번 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드라마의 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몸을 혹사시키고 싶은 가학적인 충동과 낮 시간을 몽롱하게 지탱하고 싶은 안간힘이 주효하게 작용한 결과다. 드라마를 늦게까지 본다고 몸이 혹사되진 않는 모양이다. 일어나서 5분 만에 출근하는 타이트한 아침 시간은 도시의 속도감을, 낮 동안 잠과 싸우는 일은 현대 직장인의 고충을 느끼게 한다. 아, 무슨 개소리람.

 

 '보고 싶다'는 얽히고 섥힌 미스터리와 속도감 있는 진행, 아역 배우들의 호연 덕분에 초반에 완전히 빠져든 드라마다. 하지만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성폭행과 그 후유증, 죄책감과 진실 밝히기를 질질 끌면서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제왕'은  현실감 있는 대사와 앤서니 김이란 캐릭터와 장항준(장항선이라고 쓸 뻔)의 작품이란 사실에 무한 호감을 갖고 보기 시작했다. 시스템 혹은 관행과 싸우던 여주인공이 그게 항상 틀린 것만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고은 작가의 분투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막 감정이입하고) 하지만 '경성의 아침'처럼 본격 멜로 라인을 잡고 사건이 에피소드식으로 휙휙 지나치니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 돼버렸고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는 이고은과 변해가는 앤서니 김 덕분에 드라마도 흐지부지해져버렸다.

 

 '청담동 앨리스'는 텐아시아 기사처럼 캔디와 신데렐라 이야기를 비튼 드라마다. 혹은 한겨레 21에서처럼 지금 청춘이 좌절하고 스펙을 쫓는 대신 화를 내야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혼자 막 그래, 이 드라마는 뭔가 달라 이랬는데 잡지에서 그게 뭔지 콕 집어줬다. 4회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드라마를 따라잡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응용한 '시계토끼' 부분에선 흥분하기까지 했다. 소이현은 너무 예쁘고 문근영은 그냥 문근영이었고 박시후도 그냥 박시후였지만 기존의 이야기를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흥미진진해질 수 있다는데 누구에게라도 감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청담동 앨리스'도 4회를 넘기고나니 처음의 패기는 어디로 가고 관습적인 설정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모순되는 상황들이 유야무야 무마되기 시작하자 매력을 잃고 말았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는 결혼에 이르는 여남과 집안, 혹은 이 시대의 풍속도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시시콜콜한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토씨 하나에 감정이 상하고 낭만과 괴리된 결혼 진행 과정을 가감없이 드러내는게 이 드라마의 강점. 이미숙은 역시 푸른 쉐도우고 여주인공은 참 예쁘다. 최화정은 라디오를 진행하는 것도 아닌데 맘에 쏙 들어오는 센스 있는 대사를 친다. 사랑:비즈니스란 도식은 낡았다. 사랑과 상대방의 조건이나 환경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자신들 사랑의 알리바이를 위해 사랑과 비즈니스란 구분을 통해 현실을 회피하는 것 같다.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으면 가끔 누군가 화장실에 가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지희가 일어나 화장실에 간다. 졸린 눈으로 변기에 앉아 일을 보고 물을 내린다. 조용한 새벽에 소란스럽게 물소리가 난다. 세면대에 가서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이 안 온다고 투정을 부린다. 눕자마자 잘거면서. 지희가 내 몸에 기대서 잠이 안 온다고 한다. 지희를 방에 눕히고 컴퓨터를 끈다. 남은건 적막, 스탠드를 켜고 책을 편다.

 

'안개에게 항구와 도시를 충분히 바라볼 시간을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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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1-03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 31일 밤에 우연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를 봤어요.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다 감정이입도 되고요^^;; 나머지 드라마들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지만 이 드라마에 아치님이 느끼는 정서에 공감이 가 반가워요^^

Arch 2013-01-04 14:03   좋아요 0 | URL
드라마는 왜 처음만 막 재미있다가 시큰둥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종편 방송이라 좀 그랬지만 김수현이 대사를 쓴 것처럼 속도감 있는 대화가 이 드라마의 장점 같아요. 때로는 저렇게까지 다 대사로 풀어내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저도 반가워요. blanca님!

2013-01-05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7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3-01-06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반갑! 새해 인사하러 들렀어요. 건강하시죠? 주변은 최악이지만 늘 건강하게 지내시고 새해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많기까지는 못 바라겠어요.^^;) 그런데......결혼 소식은......?

Arch 2013-01-07 11:42   좋아요 0 | URL
빵가게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결혼은 인륜지대사라, 제가 관여하기가 어렵... 유머인데 안 웃겨요.
빵가게님도 건강하시고 잘 지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