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생은 아기 돌보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자기 주위 친구들 보니까 다들 우울하고 힘들어해서 언니 생각이 났다고 한다. 나는 힘들긴 해도 즐겁고 행복하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덧붙이길 이 나이에 아기를 낳아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젊었을 때 아기를 낳았다면 이만큼 안정적이고 여유 있지는 않았을거라고 말이다. 젊었을 때는 다른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도 생각했을거고 나 하나도 벅차고 고민이 많던 시기라 아이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얘기였다.

 

 

 다음날, 말을 탄 건지 날이 흐려서 그런지 전과 다르게 아기가 칭얼대고 우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낮잠을 1시간 넘게 자던 아기는 30분도 안 돼 깨고 맘마도 업어주는 것도 맘에 안 드는지 계속 울었다. 밤에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우는데 무슨 일이 난 게 아닐까, 어디 아픈가 걱정하다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달래고 어르다 그것도 소용이 없어 그냥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뒀다.

 

 

 책임감은 영어로 responsibility이다. 책임감은 곧 응답하는 능력, response와 ability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어느 기사에 나온 말처럼 아기의 욕구와 상황에 응답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책임감 없는 학대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악을 쓰며 우는 아기를 보며 아동학대와 나 사이에 한끝 차이도 안 난다는 자책감에 우울했다. 몸이 쑤시고 스트레스로 어깨까지 아프니 더 우울했다. 지금 아기를 낳아서 여유가 있고 아기를 통해 성숙해지긴 개뿔.

 

 밤에도 몇 번을 깨며 피곤에 피곤을 한 무더기로 안겨준 아기는 다음 날 생글생글 웃으며 엄마를 바라봤다. 머릿속으로는 ‘응답해, 응답해’라고 외쳤지만 진짜 썩소도 안 나왔다. ‘엄마는 이렇게 피곤한데 너는 잘 잤다고 웃는구나, 오늘은 또 어떻게 할거냐.’ 무표정한 얼굴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며 다시 맘을 다잡았지만 오후가 되도록 맘이 말랑말랑해지지 않았다.

 

 결국 난 비교적 순한 아기를 만나서 괜찮았던거지 사람 자체가 성숙해서 책임감있게 아기를 돌본게 아니었다. 아기와 함께 성장하리란 청운의 꿈은 잠시 접고 시시때때로 환하게 웃고 눈 마주치며 사랑스러운 눈빛 쏴주는 연습이나 해야겠다. 세파에 시달려(?) 어찌나 얼굴 근육이 굳어버렸는지 웃어도 환한 표정보다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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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a가 4고를 해서 3만원이 넘는 돈을 땄지만 한달 동안 내가 모아놓은 돈만 10만원이 넘었다. 게다가 요새 난 맞고 상승세라 기세등등했기에 a를 약간 ‘봐준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락 짜증이 밀려왔다. 싸는 족족 a가 다 가져가서 내가 먹은 다음에 피 한 장을 준다고 했는데 내 화투장을 가져가버린거다. 일렬로 화투장을 잘 맞춰놓았는데 흐트러지고 나니까 완전 돌아버리겠는거다.(헐) 맞고를 끝내고 점수 계산을 하면서 방금 전 화가 화르르 다시 타올랐다. 대체 왜! 화낼 일 하나 없고 평온한 일상에서 그게 그렇게 화가 났을까.

 

 

 화의 시작은 단톡방이었다. 대화는 무난했다. 평소에는 잘 참여를 안 하는데 100개가 넘는 대화 알림이 떠서 읽어내려가다가 한번 껴본 것. 공모사업을 준비하며 자신이 어떤걸 해야할지 잘 알게 돼서 좋다는 얘기, 신혼여행을 니스로 간대고 너도 나도 니스에서는 어디를 가봐야 한다는 얘기, 시민단체 대왕급이라고 할만한 곳에 근무해서 알 수 있는 알짜배기 얘기, 술 먹느라 바빠서 얘기를 잘 못하겠다는 얘기 등. 니스를 안 가봤으니 어딜 가봐란 얘기도 못하고 공모사업에 대해서도 모르니 끼어들 수 없었다. 그저 요즘 아기만 돌보니 아기 발 사진을 올려놓고 아기가 사랑스럽다, 지금 참 행복하다란 얘기를 늘어놨다.

 

 

  정말, 행복해서 행복한거라고 했다. 집안일 틈틈이 아기를 돌보고 같이 눈을 맞추면 웃고 웃어주고 아기 잘 때 짬내서 책과 페북을 보는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는 예민하지 않아 아기의 요구와 리듬에 맞추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맞고 치면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게 싫다며 폭발하고만 것이다. 화투장 하나 가져간걸로 화날 정도로 쪼잔하게 살기 싫다고 징징대면서 a에게 니스가 어딘지 아냐고 소리질렀다. a는 니스가 어디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기가 좀 더 자라면 여행 다녀오라고, 화투장 가져간 건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a는 초점을 잘못 잡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니스가 가고 싶은 것도, 화투장 때문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집안일과 육아는 아무리 맘을 고쳐먹고 주문을 걸어도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행복하다 (다중인격?) 아기를 보고 퇴근한 a랑 맛난 저녁을 함께 먹는 건 정말 행복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남들은 일로 성장하고 견문을 넓히며 그냥 그 자체로 행복이라고 할만한 걸 쥐고 있는데 나는 되게 노력해서 지금이 좋다고 외치는 기분이랄까. 꼭 행복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삶의 목적이고 이유가 될 수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말이다.

 

 

  손쉽게 행복하고 남들이 인정할 정도로 행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아기로 일이 밀려서 속상한 것 보다 새로운 자극과 반응에 목말라서 씁쓸했다. 하는 일과 의미에 비해 집안일과 육아는 사회적으로 비경제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인정을 못받는다. 이런저런 양가 감정 덕분에 혼란스러웠고 그럼에도 잘 하고 있는거라고 위안을 하는 순간 끝을 놓치고 말았다.

 

 

  아침에 똥을 싸고 아침을 왜 안 차렸냐고 묻는 a한테 울고불며 내가 이러려고 집에서 애 보냐고 소리지르다 잠에서 깼다. 개가 안 나오는 개꿈이다. 아침을 챙겨먹고 있는 a 옆에서 내가 살살 미쳐가는 것 같다고 하자 우리밀 빵이라 찰기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한다. 퍼뜩 깨달은 게 있다고 설레발 치고 싶지만 그러기엔 꿈에서 기를 뺐겨버렸다. 순하고 보드라운 아기 냄새 맡으며 진정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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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16-04-29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게 있다면 `내가 먹을 밥을 차리고, 내가 입었던 옷을 빨고, 내가 사는 공간을 치우는`거라고 생각해서, 내 밥 차릴 때 남편 숟가락 얹는다는 기분으로 살림을 합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않지만, 모든 독립된 성인이라면, 이걸 해야 하는데, 남편은 왜 이걸 배우지 않을까,라고 의아해하면서 하죠. 그래서, 반찬투정은 금지되었습니다.

Arch 2016-05-01 22:38   좋아요 0 | URL
저희집도 마찬가지예요. ^^ 하, 저는 제가 이렇게 주부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직 어색합니다. 저는 제 아이가 만약 짝지를 만난다면 꼭 살림할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며칠 전부터 코가 간질거리더니 연신 재채기를 한다. 오늘 좀 재채기가 잦아드나 했더니 눈이 뻑뻑하고 간지럽다. 출산 후 체질이 변한다고 하던데 그런건가. 알레르기면 어떡하지? 벌써 알레르기인건 아니고? 하, 머리카락이 숭숭 빠지고 잇몸이 가라앉고 관절마다 기름칠을 덜 한 것처럼 뻑뻑한데다 알레르기까지. 아기를 낳으면 이렇게 된다는 걸 알았어도 아기를 가질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기를 낳지 않았다면 저녁 숲처럼 고요하게 잠든 아기가 엄마보다 일찍 깨서 눈을 마주치며 방긋방긋 웃는걸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아기가 깨어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일어나진다. 우리는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아기의 모든 요구와 반응에 일일이 신경쓰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아기 리듬에 맞춰서 생활하고 있다. 우유를 먹일 때와 갑자기 처리해야할 일이 있을 때 갓 5개월인 아기가 우유통을 안 떨어트리고 밥을 다 먹는 정도?

 

 

 오늘 아기는 예방접종을 맞았다. 처음엔 안 울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조금 지나서 앙하고 운다. 예방접종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아예 안 맞히는 것보다 부작용이 덜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선택해서 맞추고 있다. 의학적인 지식이 있는 게 아니라 선택한다는 말이 맞진 않다. (내가 만난) 의사들은 예방접종은 무조건 맞춰야 한다는 주의고 접종하지 말라는 측은 이런저런 부작용과 80년대 이후로 더는 발생하지 않는 병 때문에 예방접종을 맞는 건 아니라고 얘기한다. 의사들은 예방접종의 위험성이나 최신 정보에 어둡고 반대측은 과학적이고 설득력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

 

 

 며칠 동안은 아기가 없나 싶을 정도로 먹으면 자고, 혼자서도 잘 놀더니 어제부터는 소리지르고 우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기들은 몇 번이나 변한다고 하더니 과연. 아기를 낳아서 아기 얘기만 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데 깨어있는 시간 동안 거의 아기랑 있다 보니 아기 얘기만 한다.

 

 

 10대 때는 내가 뭐가 될지 궁금해서, 20대는 뭐든 할 수 있으니 덤벼란 식이어서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서른을 넘기고 보니 욕을 알고(?) 고스톱으로 돈 좀 따면서(?)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된 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곳에서 한적하게 살다보니 나른해진달까. 그나마 일을 할 때는 일을 배우고 조금씩 나아지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아기가 자라는걸 지켜보는 것 말고 기대할만한게 없어선지 그날이 그날인 채로 그냥 산다. 요즘 나는 늙고 힘 없어져 축 처진 절인 배추 같다.

 

 

 얼마 전 시니컬한 성격 검사에서 나는 ‘칙칙한 타입’이란 결과가 나왔다. 욕망이 크지 않고 현실에 순응하며 그럭저럭 사는 타입. 어쩌면 지금보다 어렸을 때 치기어린 짓을 많이 한 건 누구보다 날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재미없고 지루한 성향이란걸 미리 간파해 이것저것 저질러 봤다. 끝까지는 못가고 방황 중간 어디쯤에서 어중간하게 걸쳐있었다. 20대엔 늘 나를 설명할 말을 찾아다녔다. 언젠가 처음부터 나답게 정착해서 살았으면 어땠을까란 후회를 한 적이 있다. 그래도 여전한 결론은 결국 종착지는 ‘나다운 지금’이지만 그때처럼 막 살지 않았다면 지금 더 후회했을 것이란 것. 그리고 지금처럼 아기를 맘껏 사랑하고 아껴주지 못했을 것이다. 내 그릇만큼 좌충우돌한 경험으로 지금 좀 더 자유롭다. 처진 배추로 김장도 할 수 있고 말이다. 물론 군내 나는 묵은지가 될 수도 있지만. 아니지! 묵은지 김치찌개가 얼마나 맛있는데. 나 왜 이럼? 코 막히고 눈이 잘 안보이니 살짝 헤롱해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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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한 인터넷 사용에 옆집 와이파이를 빌려쓰는 처지라

아니 사실은 아기 보느라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 손바닥만큼 인터넷을 할 수 있어서

지금에야 소식을 올린다.

 

20대 후반과 그 이후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서재.

이렇게 말하면 좀 거창하지만 일하느라, 연애하느라 서재에 글을 못쓸 때가 많았다고 적지만

거즘 글이 잘 안 써져서 쓸 말이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서재를 통해 만났던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같이 여행을 갔던 기억이 지금도 가장 뭉클하다.

 

무슨 얘기가 떠오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서재였는데

이제는 페북하느라, 메신저로 사람들이랑 얘기하느라, 재미있는 드라마 보느라 서재에 글을 쓰는게 소원해지고 말았다.

그 시절, 서재에서 정돈되고 차분하게 생각을 풀 수 있는 게 내게는 참 중요했는데.

 

아, 넋두리를 하려고 했던게 아닌데.

 

아기가 태어났다. 100일이 좀 넘었고 지금은 볼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옥찌들이랑 같이 지냈던게 엊그제 같은데 내가 아기를 낳고 같이 사는 게 잘 믿겨지지 않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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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6-03-1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축하드려요.
엄청 예쁘네요. 백일된 애기가 이목구비가 너무 뚜렷한 것이 ♡.♡

다락방 2016-03-14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치.

아가야, 안녕?

hnine 2016-03-1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축하드립니다.
아기가 두손을 모으고 있네요 ^^
눈썹 라인이 눈에 들어와요. 복숭아 같은 얼굴도.
옥찌 민이와의 예습 (!) 경험이 있으니 아마 아치님 아기도 잘 키우실거라 믿습니다.

머큐리 2016-03-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이렇게 이쁜 아이라니... 놀랄뿐입니다...^^

붉은돼지 2016-03-1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죠~
제 딸은 이제 9살이지만 아직도 보면 신기합니다. ㅎㅎㅎㅎㅎ

2016-03-15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16-03-1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 감사드려요. 축하 받는게 여전히 쑥쓰럽지만 서재에는 알리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
 

 아이를 갖은 후 전에 없던 기호와 갈망이 생겼다. 


 넘어지거나 골반을 압박한다고 자전거를 탈 수 없다. 무거운걸 들거나 뛸 수 없으니 행동에 제약이 온다. 탄산이나 커피믹스가 자꾸 땡기고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정말 숨도 안 쉬고 들이마시고 싶다. 엎드려서 뭘 하면 허리가 아파서 좋아하는 자세가 아닌데도 그냥 허리 아플 때까지 엎드려서 책을 보고 무엇이든 끄적거리고 싶다. 두 발을 지면 위로 띄우는(점프 점프) 춤을 추고 싶고 날씬해보이는 옷을 입고 싶다. 찐득거리는 섹스를 오랫동안 하고 싶고 평소에는 귀찮아서 엄두도 내지 않은 과감한 체위를 시도해보고 싶다.


 배가 불러오고 아이와 엄마에게 안 좋다는 게 많으니까 결핍감은 한없이 커진다. 대개의 경우 적정한 선에서 타협을 한다. 동냥하듯 맥주 한모금을 마신다거나 며칠에 한번씩 먹는다는 의식을 안 하려 노력하면서 커피 한잔쯤은 가볍게 먹는다. 자전거 타는 것보다 걸어다니면서 저녁 무렵 노을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섹스는 상대의 입장도 이해해야하고 어쩐다고 하지만 그렇게 큰 갈망이 생기지 않아 욕망과 별개로 전혀 시도하지 않는 영역으로 남았있다.


 자질구레하고 적절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가장 큰 곤란함은 내 정체성이 아이 엄마로 고정되고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해야하며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의욕이 많이 꺾인 것을 들 수 있다. 호르몬 영향인지 일을 마무리해야하는 시점이라 그런건지 모든 사안에 흥미를 잃었다. 끈기는 부족해도 새로운 일과 사람에 눈을 반짝이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심드렁한 나만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왠만한건 귀찮고 귀찮지 않더라도 흥미를 잃어버려서 대개 처음부터 포기를 해버린다. 하려고 했던 작업도 줄이고 줄여서 최소한의 명분만 살리는 식으로 하다보니 초심은 커녕 중간쯤의 마음도 유지하기 어렵다. 억울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내 몸과 맘이 이렇게 변할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변해버려서 아차 싶은 마음. 몸이 무겁다거나 호르몬 영향이란 핑계가 단골메뉴가 된지는 오래됐다. 점점 불러오는 배가 신기하고 무섭다.


 신트림이 계속 넘어오고 앉아있기가 불편해 닭들을 보러 갔다. 퇴근 전에 문 닫는걸 잊어버릴까 닭장에 넣으려고 했는데 완강히 저항한다. 철망 뒤로 넘어가더니 아무리 나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수탉은 닭장 근처에서 꼬꼬거리며 암탉들에게 위험 신호를 준다. 작은 병아리들은 짹짹거리며 엄마 뒤를 쫓아다닌다. 암탉들은 저물기 전에는 절대 집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식이다. 안 들어가면 뭐할건데. 파헤칠 흙도 이제 없잖아.


 술을 진탕 먹고 취해서 원숭이처럼 까불고 싶다고 했다. 몸 상태와 상관없이 맘대로 잠을 자고 무리해서 일하고 싶기도 하다. 술을 안 먹어서 술자리에서 살짝 소외감을 느끼고 금세 피곤하거나 잠이 잘 와서 사람들과 오랫동안 어울릴 수 없는 건 있다. 하지만 그 덕에 환절기에도 아직 감기 걸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 말수가 살짝 줄어든 덕분에 남들이 대화하는 사이의 행간을 읽는 재미도 있다.


 저물기 전에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 닭들처럼, 날이 어둑해야 횃대에 오르는 닭처럼 나도 살짝 철망 너머로 갔다 오고 싶은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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