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로운 출발이었다. a가 4고를 해서 3만원이 넘는 돈을 땄지만 한달 동안 내가 모아놓은 돈만 10만원이 넘었다. 게다가 요새 난 맞고 상승세라 기세등등했기에 a를 약간 ‘봐준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락 짜증이 밀려왔다. 싸는 족족 a가 다 가져가서 내가 먹은 다음에 피 한 장을 준다고 했는데 내 화투장을 가져가버린거다. 일렬로 화투장을 잘 맞춰놓았는데 흐트러지고 나니까 완전 돌아버리겠는거다.(헐) 맞고를 끝내고 점수 계산을 하면서 방금 전 화가 화르르 다시 타올랐다. 대체 왜! 화낼 일 하나 없고 평온한 일상에서 그게 그렇게 화가 났을까.

 

 

 화의 시작은 단톡방이었다. 대화는 무난했다. 평소에는 잘 참여를 안 하는데 100개가 넘는 대화 알림이 떠서 읽어내려가다가 한번 껴본 것. 공모사업을 준비하며 자신이 어떤걸 해야할지 잘 알게 돼서 좋다는 얘기, 신혼여행을 니스로 간대고 너도 나도 니스에서는 어디를 가봐야 한다는 얘기, 시민단체 대왕급이라고 할만한 곳에 근무해서 알 수 있는 알짜배기 얘기, 술 먹느라 바빠서 얘기를 잘 못하겠다는 얘기 등. 니스를 안 가봤으니 어딜 가봐란 얘기도 못하고 공모사업에 대해서도 모르니 끼어들 수 없었다. 그저 요즘 아기만 돌보니 아기 발 사진을 올려놓고 아기가 사랑스럽다, 지금 참 행복하다란 얘기를 늘어놨다.

 

 

  정말, 행복해서 행복한거라고 했다. 집안일 틈틈이 아기를 돌보고 같이 눈을 맞추면 웃고 웃어주고 아기 잘 때 짬내서 책과 페북을 보는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는 예민하지 않아 아기의 요구와 리듬에 맞추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맞고 치면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게 싫다며 폭발하고만 것이다. 화투장 하나 가져간걸로 화날 정도로 쪼잔하게 살기 싫다고 징징대면서 a에게 니스가 어딘지 아냐고 소리질렀다. a는 니스가 어디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기가 좀 더 자라면 여행 다녀오라고, 화투장 가져간 건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a는 초점을 잘못 잡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니스가 가고 싶은 것도, 화투장 때문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집안일과 육아는 아무리 맘을 고쳐먹고 주문을 걸어도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행복하다 (다중인격?) 아기를 보고 퇴근한 a랑 맛난 저녁을 함께 먹는 건 정말 행복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남들은 일로 성장하고 견문을 넓히며 그냥 그 자체로 행복이라고 할만한 걸 쥐고 있는데 나는 되게 노력해서 지금이 좋다고 외치는 기분이랄까. 꼭 행복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삶의 목적이고 이유가 될 수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말이다.

 

 

  손쉽게 행복하고 남들이 인정할 정도로 행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아기로 일이 밀려서 속상한 것 보다 새로운 자극과 반응에 목말라서 씁쓸했다. 하는 일과 의미에 비해 집안일과 육아는 사회적으로 비경제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인정을 못받는다. 이런저런 양가 감정 덕분에 혼란스러웠고 그럼에도 잘 하고 있는거라고 위안을 하는 순간 끝을 놓치고 말았다.

 

 

  아침에 똥을 싸고 아침을 왜 안 차렸냐고 묻는 a한테 울고불며 내가 이러려고 집에서 애 보냐고 소리지르다 잠에서 깼다. 개가 안 나오는 개꿈이다. 아침을 챙겨먹고 있는 a 옆에서 내가 살살 미쳐가는 것 같다고 하자 우리밀 빵이라 찰기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한다. 퍼뜩 깨달은 게 있다고 설레발 치고 싶지만 그러기엔 꿈에서 기를 뺐겨버렸다. 순하고 보드라운 아기 냄새 맡으며 진정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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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16-04-29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게 있다면 `내가 먹을 밥을 차리고, 내가 입었던 옷을 빨고, 내가 사는 공간을 치우는`거라고 생각해서, 내 밥 차릴 때 남편 숟가락 얹는다는 기분으로 살림을 합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않지만, 모든 독립된 성인이라면, 이걸 해야 하는데, 남편은 왜 이걸 배우지 않을까,라고 의아해하면서 하죠. 그래서, 반찬투정은 금지되었습니다.

Arch 2016-05-01 22:38   좋아요 0 | URL
저희집도 마찬가지예요. ^^ 하, 저는 제가 이렇게 주부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직 어색합니다. 저는 제 아이가 만약 짝지를 만난다면 꼭 살림할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