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사진가 - 사진과 그림으로 기록한 인간의 땅 아프가니스탄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디디에 르페브르 사진.글, 에마뉘엘 기베르 그림.글, 권지현 옮김 / 세미콜론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디디에라는 프랑스 사진작가가 '국경없는 의사회'의 아프가니스탄 의료봉사를 따라가서 겪은 내용을 사진과 만화로 엮은 책이다. 

책은 무거운데 반해 사진은 작아서 눈을 부릅뜨고 봐야 하는 것도 있으나, 전쟁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사람들의 처참함이나 실상등을 접할 수 있다. 사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사진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분들은 만화를 곁들여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어나갔다. 한 편의 여행기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목숨을 담보로 했다는 의미에서는 여행기 그 이상이다. 

국경없는 의사회가 하는 일을 구체적인 사진으로 접할 수가 있는데 사진이다보니 그 참상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이없는 부상이나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곳, 아프가니스탄. 같은 하늘 아래에 이런 곳이 병존한다는 게, 지금도 그 지옥같은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는 게, 그리고 그 사실을 곧잘 망각하고 산다는 게 어이없는 일이다. 그걸 이 책이 일깨워준다. 

이 책의 주인공인 디디에가 겪은 황당한 사기 사건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실감나게 드러나있어서 읽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동시에 만족시킨다.   

한마디로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종합 세트 같은 다큐멘터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책 값이 좀 비싸서 쉽게 장만할 수 없다는 게 무척 아쉽다. 나 역시 직장에서 전직원에게 개인별로 돌아간 얼마간의 포상금이 없었다면 감히 구입하지 못할 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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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의 루앙프라방 - 산책과 낮잠과 위로에 대하여
최갑수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때론 리뷰보다 책 속에 있는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기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책이 그렇다.

<당신은 여행을 잘하고 있다> 

당신 이마 위에 떠 있는 별자리의 이름이 궁금하다면,  

잊고 있던 사람이 문득 떠오르고 그에게 엽서가 쓰고 싶어졌다면,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얼마 남지 않은 통장의 잔고가 전혀 걱정이 안 된다면, 

그보다 집에 두고 온 화분이 더 걱정이 된다면, 

더러워진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지르고 과일을 껍질째 깨물어 먹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일요일인 줄 알았는데 오늘이 월요일이라면, 

낯선 언어로 씌어진 표지판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인다면, 

황홀한 풍경 앞에서 카메라 꺼내는 걸 잊어버린다면, 

버스를 잘못 탔는데 '끝까지 가보지 뭐'하는 생각이 든다면, 

어느 시끄러운 TV Bar에서 한 무리의 술 취한 미국 여행자들과 함께<프리즌 브레이크>를 보면서도 그들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냥 바나나 한 다발이 옆에 놓여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지구에 완벽한 곳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도 살면서 아름다운 것 하나쯤 남겨두고 가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돌아가기 싫다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면,  

당신은 여행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 이런 심정이라면 나는 늘 여행하며 살고 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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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1일 투어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태국의 고대도시 아유타야를 가게 되었다. 운전수와 가이드 포함 16명이 미니밴에 타게 되었는데 앞좌석의 보조석에 남편을 앉히면서 vip석 운운하며 가이드가 너스레를 떨었다. 1시간쯤 달렸을까.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어린이용 보조석에 앉아온 남편이 약간의 불만을 호소했다. 운전수 바로 뒷좌석에서 유유자적하던 나는 순간 그 자리가 내 자리임을 간파, 불편을 감수하며 계속 그 자리에 앉아가겠노라는 남편을 설득, 드디어 보조석에 내가 앉게 되었다. 평소 미래형 인간이라며 작은 키 인간의 여러 장점을 누누이 강조해왔던 터라 이런 기회에 내 신체적 조건을 십분 활용하여 다른 키 큰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리라는 야무진 꿈까지 꿔가며...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경우라면 이런 보조석도 고맙기 그지없는 자리가 될 것이다. 앞 유리에 머리가 닿을 듯 가깝고 목받침대가 없어서 긴장을 풀 수 없다는 점을 빼고는 그래도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의자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다. 내 옆자리인 조수석에 앉은 태국인 가이드 아저씨가 안전벨트를 매면서 나 한테도 안전벨트를 매라고 권했다면, 혹은 이런 불편한 자리에 앉아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 한마디라도 했더라면, 아니 나를 가운데 두고 운전수와 가이드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아니 내가 무슨 투명인간이냐고) 나는 내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며 끝까지 이 자리를 지키면서 타인을 배려한 나 자신을 신통해했을 거다.

“ 내 좌석이 아주 불편하고 위험하다. 당신은 이 좌석에 앉은 내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한마디 쏘아주니 순간 가이드 아저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한마디 귀엽게(?) 덧붙였다. “그냥 농담이다.” 잠시 후 아유타야에 도착한 순간, 내 눈에는 이 고대도시의 유적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이드의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이동하기위해 승차가 시작되자 나는 보조석으로 돌아와 앉았다. 이번엔 최대한 웃는 얼굴로 가이드에게 한마디 던졌다. “이번엔 내가 이 자리에 앉지만 다음에는 당신이 이 자리에 앉아라.”, “ok."

그렇게 내가 조수석에 앉게 되자 하는 수 없이 보조석에 앉게 된 가이드 왈, “ 그 자리는 가이드 자리다. 문도 열어드려야 하고 설명도 해야 되기 때문이다.”,“그래? 그 일 내가 하면 된다. 내가 하지 뭐.” 하니까 목에 건 가이드 신분증을 빼는 척한다. 그래 그것도 내게 줘, 하는 눈빛을 보냈다. 완승이다.

조수석에 앉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전망 시원하지 에어컨 빵빵 나오지.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vip석이지. 하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콕으로 돌아가기 위해 승차하게 되었을 때는 씩씩거리던 마음도 어느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이로 우열을 가리기로 마음먹고 나이를 물었다. 어라. 나 보다 나이가 많은 57살이란다. 우리 큰오빠가 생각나서 그냥 져주기로 마음먹고 보조석에 앉아서 가는데, 잠은 솔솔 쏟아지는데 머리는 기댈 곳이 없어 사방으로 떨어지고, 전방에서 햇볕은 정면으로 쏘아대고...아, 이 좌석은 아니다! 나는 손님이란 말이다! 우리나라 학생들도 지네들 위험하다고 전세버스의 보조석에는 절대로 앉지 않는단 말이다!

주유를 위해 다시 차가 정차를 하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다. 마지막은 조수석이 내 차례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다른 사람들이 차에 모두 오르기를 기다리는데 드디어 가이드가 앞문 쪽으로 왔다. “ This time, your turn!"

카오산 거리로 돌아왔다. 숙소로 걸어가면서 딸아이가 말한다.

“앞으로 절대로 엄마한테 대들지 않을게.” 내가 좀 독하긴 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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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이상 머물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중국의 윈난, 베트남의 사파, 인도의 우띠, 일본의 교토, 터키의 사프란볼루, 스위스의 바젤, 그리고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이 될 것이다. 바젤, 윈난, 교토를 빼면 모두 심심해서 발작을 일으킬 지도 모르지만. 

루앙프라방에서 4일을 머물며 무엇을 했나. 매일 저녁 몽족 야시장 탐색하기, 몽족 마을 트레킹, 슬로보트 타고 동굴 탐사, 라오스 전통 공연 관람, 새벽 탁발 구경, 동네 골목길 누비기 등. 


 

 

 

 

 

 

 

 

 

 

그러나 루앙프라방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솜사나무 주변을 맴돌거나, 게스트하우스 계단에 우두커니 앉아 옆 집 밥짓는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거나, 혹은 옆집 새댁이 애기 목욕시키는 거 지켜보기와 같은 소소한 것들을 해 볼 일이다. 온동네 사람 들으라고 크게 켜놓은 라오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일 또한 나쁘지 않다. 30분만 게스트하우스 계단에 앉아 있어도 동네 사람 다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유명하다는 새벽 탁발도 내게는 그리 뜻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인 새벽 6시. 맨발로 탁발에 나선 스님들의 행렬이 장관을 이룬다하여 스님 보다 많은 관광객들이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모습도 그렇고, 탁발을 하는 스님들의 얼굴에서 언뜻 언뜻 비치는 무심함과 피곤한 기색도 그렇고, 단체여행객들의 공양 행위 역시 진지해보이지 않았다. 그냥 일상일 뿐이었다. 큰스님을 선두로 맨끝에는 동자승들이 눈을 부비고 뒤따르고 있었는데, 별달리 할 일도 없던 나는(나는 거의 사진을 찍지 않는다.) 그 스님들이 몇 분이나 되나 숫자만 세었을 뿐이었다. 202명 정도가 되었다. 난 왜 이런 엄숙한 행위에 감동을 하지 않는거지?  

한창 여행에 폼을 잡던 시절엔 4박 5일짜리 여행을 위해서도 론리플래닛에서 나온 영문여행안내서를 구입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열흘정도 여행이라도 그냥 국산을 애용하기로 하고 있다. 워낙 다양한 여행안내서가 국내에서 출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여행안내서에서 간과하는 부분이 하나 있음을 가끔 발견하곤 하는데 바로 공연 문화에 대한 소개가 소홀하다는 점이다. 이곳 루앙프라방에서도 그랬다. 

숙소에서 우연히 발견한 론니플래닛판 라오스가이드북을 펼쳐보다가 전통공연을 하는 상설공연관이 있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바로 왕궁박물관내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도 외국에서는 전통공연 하나쯤은 봐줘야한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던지라 즉시 실행에 옮기기로하고 저녁에 있는 공연 예매를 하러 갔다.  

우리의 예술회관 같은 공연장 입구에서 허름한 옷차림을한 늙수그레한 아저씨 한 분이 표를 팔고 있었다. 서너 가지의 등급으로 되어있는 좌석표는 요금 구분이 되어있어서 잠시 망설이고있자니 아저씨가 우리를 공연장으로 안내하며 따라오라한다. 나는 당연 제일 싼 좌석이 눈에 들어오는데 어라, 이게 뭐야 등받이도 없는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네. 무대와의 거리는 또 왜 그렇게 멀리 떨어뜨려놨는지 절대로 앉아서는 안될 것 같은 세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더러 의자에 앉아보라고 하면서 한등급 한등급 급수를 높여가면서 안내를 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런 예매를 하겠는가 싶었다. 나이 든 아저씨의 권유를 못이기는 척하며 두 번째로 비싼 표를 끊겠다고 하니 아저씨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그래 라오스의 공연문화 진흥과 발전을 위해 기부하는 셈치자고 생각하니 순간 뿌듯함마저 일었다. 요금도 그렇다. 당시에는 등급에 따라 확연히 구분되어서 차액이 크게 보였지만 이렇게 요금도 제대로 기억 못하는 걸 보니 우리에게는 그렇게 큰 액수라고는 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그러면 공연은?  너무나 화려한 공연 문화에 눈을 버릴대로 버린 우리네 같은 관광객에게는 소박한 옛시절을 떠올리게 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성의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는 나름대로의 자부심 같은 것도 엿볼 수 있었다. 부디 자존심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행자들은 이런데 안 와보고 다들 어디에 있나? 이곳 루앙프라방의 여행자들을 크게 나누어보면 두 분류가 되는데, 서양인이냐 아니면 한국인이냐, 할 정도로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많은데 이런 공연장에 우리 넷과 한 명의 아가씨 밖에 없다니 이건 분명 국내산 가이드북의 한계 때문일 게다. 

야시장은 매일 밤, 누구 말처럼 마술처럼 펼쳐졌다가 마술처럼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끝나버린다.  몽족이 손수 만든 공예품도 있고 주변 나라에서 수입해온 물건도 있는데, 재밌는 건 며칠 전 인사동에 나갔다가 몽족들이 팔고 있는 똑같은 스카프를 발견했다는 거다. 그 스카프는 방콕 카오산 거리에도 걸려 있었다. 하여튼 물건 가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는 우리는 그 가격이 바가지인지도 모르고 그냥 깎는 척하다가 사왔다는 거다. 

그 야시장에는 서적 코너도 있었는데, "라오스 어린이에게 책을 선물하세요. 라오스 어린이들은 너무 가난하여 책을 전혀 읽어보지 못하거나 한 권의 책도 가져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해주세요. 호텔의 웨이터에게도 팁 대신 책을 주세요."라는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다. 낮에 몽족 마을에 갔을 때 볼펜을 뿌리다시피한 게 살짝 마음에 걸려서 모처럼 좋은 일 좀 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하루 방 값에 해당하는 가격 만큼 책을 구입했다. 그래야 4권이지만.  

그 중 한 권은 거리에서 악기를 들고 있던 한 할아버지에게 돌아갔다.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악기는 우리의 해금과 너무나 비슷하게 생겨서, 반가운 마음에 할아버지의 연주도 청해 듣고 악기도 만져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해금보다 활이 훨씬 부드럽고 소리도 경쾌하고 크게 울려나왔다. 의사소통만 되었더라면 좀 더 연주를 들어보는 거였는데, 아쉬웠다. 

해금 한두 번 만져봤다고 이제 어디가면 해금만 눈에 들어온다. 중국, 홍콩, 베트남, 라오스...또 어디에 있을까. 이곳 루앙프라방에서는 거지도 해금을 연주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서양 바이올린의 원조가 해금류의 악기라는데...

아침밥을 두 번 해결했던 식당이 있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생긴 주인아주머니가 인상적이었는데 음식 역시 깔끔하고 맛있었다. 그런데 이 식당은 매일 오전 6시에 문을 열어 오후 2시 30분 까지만 영업을 하고는 문을 닫는다. 참 신선한 충격이라고나 할까. 세련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써야 어울릴 것 같다. 

모퉁이에서 5,000kip하는 과일주스를 팔던 젊은 부부의 미소가 그립다. 허구헌날 주스를 팔면서 그렇게 환하고 착한 순정의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아침부터 밤까지 노점에서 바게뜨와 커피를 파는 젊은 몽족  부부의 미소도 그랬었는데. 그들은 분명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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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엥에서는 강변에 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갈로로 숙소를 잡았다. 어디까지나 고급스러워 보이는...40달러, 4인실. 그저 그런 두 개보다 괜찮은 거 하나 잡아서 함께 쓰자는 거였는데 결과적으로 방은 시원찮았고 남편이나 안샘 모두 불편을 겪어야했다. 물론 문만 열면 한 폭의 수려한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어서 눈의 호사로서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비엔티안에 본사를 두고 있는 폰트래블(한국인 운영)에서 1일 투어를 신청해 동굴 탐사와 카약킹에 나섰다. 일인당 10달러. 자동차 타이어에서 나온 검정 튜브를 타고 물에 잠긴 동굴을 15분 정도 들어갔다 나오는 것인데 재미는 있었다. 엉덩이가 물에 잠긴 채 밧줄을 잡아가며 어두운 동굴로 들어서면, 평소 한국인을 많이 상대해오던 가이드는 <만남>을 시작으로 ‘정말로 사~랑~해’를 거쳐 노래를 몇 곡 더 선창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동굴 탐사를 마친 후 햇볕에 젖은 옷을 말리며 과일야채꼬치구이와 바나나, 볶음밥으로 된 점심을 먹고 있으면 슬쩍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 종일 밥도 주고 물놀이까지 시켜주고 겨우 10달러라니...

체육교사인 안샘은 유쾌한 사람이다. 힘을 돋궈주는 사람이다. 카약을 함께 타고 물살을 따라 노를 젓고 있으면 뒤에서 들려오는 안샘의 우렁차고 맑은 목청에 저절로 노를 젓는 팔에 힘이 실린다. 너무 힘이 실려서 양쪽 엄지손 아래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세 식구에 끼여 함께 여행하면서 끝까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은 안샘에게 이 글을 통해 고마움을 전한다. 
 
물 좋고 산 좋은 이 방비엥엔 이상한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방석이다. 식당이나 카페 마다 의자 대신 방석이 놓여있고, 삼면의 벽에는 또 한가하게 텔레비전이 걸려있고, 그 화면에선 온종일 만화영화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보기에 따라서는 민망하기도 하고 퇴폐적이기도 한 참으로 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저 방석에 앉아서 아니 거의 누워서 하루 종일 뭉기적거리는 기분은 어떨까. 저렇게 몇 시간씩 누워서 시간을 죽이지 못하는 너무나 반듯한(?) 나는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방석에 눈길을 던졌다. 두어 번 밥 먹느라고 앉아보긴 했다.

다음에 다시 라오스에 가게 된다면 이 방비엥은 글쎄 다시 가게 될까? 이곳은 가슴 벅찬 세계 각국의 젊은 피들의 해방구가 된 지 오래인 듯하다.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젊음이 사방팔방으로 퉁겨져나와 작은 시골 동네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는 예전에 파라다이스라는 유원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근방의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위한 해방구 같은 곳이었다. 호수를 만들어 작은 보트를 띄우기도 하고 음주와 가무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미군 위안용 유원지였다. 이곳은 미군들에게는 말 그대로 천국 같은 곳이었겠지만(이름마저 파라다이스라니)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감내해야할 치부 같은 곳에 불과했을 것이다.

여행자의 천국인 이 방비엥이 내겐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어릴 적에 보았던 털복숭이 미군들에 대한 영상이 자꾸 이곳의 여행자들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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