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은 있어서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하던 책을 도서관에서 만났다.
















프랑스에서 20여 년을 거주한 분이 '좋아서' 하게 된 이탈리아어 공부 얘기. '내 반평생 직접 경험한 진리, 고통과 인고의 시간 없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 나는 이 문장에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영문과 아니면 대학을 보내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회유와 겁박. 내가 영문과에 가야 할 이유를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1. 앞으로는 너희가 살아갈 세상에서 영어가 많이 그리고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2. 너는 성격이 내성적이니 좀 외향적으로 바꿔야 한다. 영어를 공부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영문과에 진학했는데 아버지의 말씀 중 1번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영어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2번은 외국어를 배우는 데, 특히 영어로 밥벌이를 하는데는 치명적인 결점이라는 걸 아버지는 하나도 모르는 채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영문과에 합격했다. 4남매 중 막내인 나는 가족 중에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입학 선물로 동네 시계방에 나를 데리고 가서 금색의 세련된 일제 세이코 손목시계를 6~7만 원 주고 사주셨다. 당시 대학 입학금이 36만 원이었다. 당신의 배우자인 엄마에게도 시계 한번 사주신 적 없는 분이었다. 얼마 후 카세트 테이프 라디오, 책 3권과 몇 개의 카세트테이프로 구성된 영어회화 세트를 사다 주셨다. 편애의 절정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영어가 책 몇 권 읽고 테이프 몇 개 듣는다고 되는 게 아니랍니다.


그후 영어로 밥벌이를 시작하기까지 외롭고 고단한 영어와의 싸움이 있었다. 술에 만취하거나 노망이 든 노인네들이 허구헌날 과거를 되씹고 되씹듯이 나 또한 어디선가 썼던 영어와의 싸움 얘기를 또 하고 있다. 아마 노망이 들면 더 하지 않을까 싶다.


밥벌이용 외국어만 아니라면 외국어 공부는 참 매력적이다. 어렸을 적 보았던 낯선 언어의 책이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미얀마어 비슷한 문자였는데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 생각난다.


스페인어. 2010년. 금연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남편이 느닷없이 담배를 끊겠다고 한다. 기특한 생각에 '당신이 담배를 끊으면 나는 스페인어를 공부하지요.'라고 선언했다. 몇개월의 노력 끝에 남편은 금연에 성공했지만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여전히 영어가 목에 걸린 가시였다. 약속을 지켰더라면 지금쯤 스페인 실력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기억력이 짧은 남편은 나의 다짐을 담배 연기처럼 날려버렸다. 기억하려나...


힌디어. 두번째 인도/네팔 여행 때 힌디어 몇 마디를 공부했다. 네팔 어느 식당에서 힌디어 한두마디 사용했더니 자기네들끼리 '이 사람 힌디어 할 줄 알아.' 하는 것이었다. 신기했겠지.


외국어의 잘 함과 못 함은, 외국어를 사용해서 돈을 버느냐, 외국어를 사용해서 돈을 쓰느냐에 달린 것이다. 돈을 쓰기 위한 외국어는 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 듣기 마련이다. 돈을 벌기 위한 외국어는 찰떡같이 말하려면 그 길이 험난하고 고통스럽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돈을 쓰기 위한 이탈리아어 공부를 전심전력으로 해낸다. 그 결과를 책으로도 썼다. 이 분의 열정과 노력에 자연 경의를 표할 수밖에.


더불어 볼로냐의 어학원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볼로냐 한 달 살기를 꿈꾸고 있던 차였다. 볼로냐에서 감히 이탈리아어를 배워보겠다고 덤비진 않겠지만 혹시 모를 일. 거의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던 영어였지만 다른 외국어 하나쯤은 사람들과 어울려 유쾌하게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외국어로 돈 벌 일도 없을 테고, 흰머리 휘날리는 할머니의 발음이 좀 이상한들, 뭐 그럭저럭 봐주지 않을까. 혓바닥과 입술 모양을 달리해서 발음하는 외국어의 맛을 즐겨본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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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3-09-19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너무나도 공감가는 외국어 이야기.
그저 재미로, 아무런 욕심 없이, 조금씩 야금야금 익히는 외국어는 재미있지요.
하지만, 외국어 하나를 제대로 익히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예요.

nama 2023-09-19 19:38   좋아요 0 | URL
외국어 공부의 슬픔과 기쁨이라고 할까요. 아니 고통과 보람?
재미도 있고, 위로도 되고, 공감도 되는 책이지요.
다 읽고나면 ‘나도 한번 도전해볼까?‘하는 의욕도 생긴답니다.^^
 

한겨레신문 토요판에는 <우리 책방은요> 코너가 있는데 매주 전국 곳곳에 숨어 있는 독립서점을 소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서점이 호기심을 자아내서 어떤 동네에 가게되면 한번쯤 찾아가보고 싶어진다. 그중에는 일부러 일삼아 찾아가보고 싶을 정도로 끌림이 강한 경우도 있다. 바로 이런 경우. 


영월의 산 속에 있는 서점. 인디문학1호점. 누가 갈까? 하면서 가보는 서점이다.


얼마나 깊은 산중에 있을까 몹시 궁금했다. 개울 따라 이어진 야영장이 맞은 편에 도열해 있는 길을 따라 달리다보면 어떤 펜션에 이르고 그 옆 산길을 조금 오르다보면 바로 나타난다. 오지라고짐작했는데 오지는 아니었다. 다만 대중교통으로 가는 건 무리일 듯싶다.




산속으로 난 길을 조금 올라가면 바로 나오는 팻말.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단어, 서점.




저 단출한 건물 안에 서점이라는 한 세계가 담겨 있었다. 11시 오픈이라서 일부러 시간 맞춰 왔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른쪽 끝으로 돌아가니 주인장이 신을 듯한 슬리퍼가 빈 소주병에 꿰어진 채 벽에 세워져 있었다. 블라인드로 가려진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니 막 쪽잠을 잔 듯한 주인장이 나왔다. 정시에 문을 여는 은행도 아니고 누가 이런 산 속의 서점을 정시에 오겠는가...하는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픈 시간에 개의치 않는 저 편안함이 부러웠다.




서점 메뉴판. 왠지 막걸리집이 생각났다.




작은 공간이지만 빼곡하지 않아서 좋았다. 한 권만 파는 서점도 있다는데 저 정도면 내가 살 책은 반드시 있을 터.





책은 문장이지. 아무렴.





명성이 자자한 1권을 아직 못 읽었지만 2권 먼저 읽자. 지금, 여기가 중요하니까





저건 평소 내 생각인데...





ㅋㅋㅋ 그렇다. 책 읽느라 그딴 거 볼 시간이 없지, 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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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를 달리는 남자 - 어느 문화인류학자의 인도네시아 깊이 읽기
김형준 지음 / 이매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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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얘기를 읽는 게 의미가 있을까...싶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재밌다. 몇년에 걸친 세 차례의 현지조사 이야기는 예의 일반적인 여행기보다 더 생생하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따끈따끈한 여행기가 패스트푸드라면 이 현지조사 이야기는 정성 듬뿍 들어간 한식 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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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우체부길 고영훈의 스토리텔링 인도네시아 문화유산답사기 1
고영훈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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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6월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가 뽑은 올 상반기 최고의 책이 될 것 같다. 인도네시아 여행 전에 도서관에서 대충 읽고는 '아무래도 구매해야겠다.' 싶었는데 친구가 생일선물로 책을 고르라기에 주저않고 이 책을 골랐다. 친구 덕분에, 인니 여행 덕분에 찰지게 읽은 책이 되었다. 여행 전에는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며칠 여행했다고 이해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와 지리과목은 보기도 싫었는데 삼십 넘어 시작한 여행이 이 과목에 학구열을 일깨워주었다. 대학 시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지도 못한 영어에 대한 해결책을 여행에서 찾았다면 그 후의 삶에서 영어에 대한 원망은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괴로움의 대상 자체였던 영어로 30여 년 간 밥 벌어 먹어야 했다는 게 생각할수록 송구스럽고 아이러니하다. 역시 나는 머리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 듯 몸을 움직인만큼만 조금씩 나아질 뿐이다. 책도 몸으로 읽어야 머리로 들어온다. 거짓말 못하는 몸 때문에 책 읽는 속도가 더디다. 머리로만 읽은 책들은 몸에 남지 않는다는 걸 이제서야 겨우 깨닫는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서쪽 끝 아냐르에서 동쪽 끝 빠나루깐을 잇는 1,000킬로미터의 도로에 붙여진 이름이 우체부길이다. 이 도로를 건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다엔델스. 1808년부터 3년 동안 제 33대 총독으로 재임했는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우체부길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12,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잔인성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이 우체부길을 따라가면서 이 길에 얽힌 역사를 하나씩 짚어가는 게 이 책의 골자이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인도네시아 역사에 어렴풋이나마 흐름이 잡히는 것같고 흥미도 생긴다. 굳이 남의 나라 역사를 꼭 알아야하는 건 아니지만 친구 하나 사귄 듯한 뿌듯함이 느껴져서 좋다. 물론 친구의 아픔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책에 소개된 영화를 통해서 아픔을 들여다보았다.



액트 오브 킬링



<액트 오브 킬링>은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비밀리에 벌어진 100만 명 규모의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 속 실제 대학살의 가해자들이 직접 살인의 장면을 재연해 낸 충격의 다큐멘터리로, 학살의 가해자들이 스스로 살인(KILLING)을 재연(ACT)한다는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인간의 도덕성과 악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세계적인 거장 '베르너 헤어조크'와 '에롤 모리스'가 제작에 참여하였고, 올해 연작 <침묵의 시선>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알라딘 상품 소개글에서 인용)



영화는 학살의 가해자들이 스스로 영화를 찍는 장면과 그 과정을 찍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자그만치 5년에 걸쳐 찍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등장인물(주인공)의 심경의 변화를 추적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처음 영화를 찍기 시작할 때의 뻔뻔함(전두환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이 후반으로 갈수록 피해자의 입장을 연기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절절하게 알게 되는 깨달음으로 변한다. (전두환 일족은 죽을 때까지 깨달을 수 있을까?)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또다른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The Look of Silence, 2014)은 피해자편이라고 한다. 감독은 가해자 편에 있는 사람들과 피해자 편에 있는 사람들을 함께 인터뷰했는데  


' 가해자 편에 있는 사람들은 공산당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이고 애국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희생자 편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해됐다는 것이다.' (p.164)


1965년 9월 30일 발생한 공산쿠데타를 진압하면서 희생된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50만 명 비공식적으로 100만 명이며, 같은 인도네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학살이라고 한다.


어떤 기시감?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 꼭 우리 나라 이야기 같지 않은가.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광주민주항쟁 등.



별 준비없이 다녀온 인도네시아 여행. 책을 읽고나니 더욱 더 허술한 여행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저 유명한 솔로(Solo) 라는 도시에서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남의 결혼식장에 가서 음식만 축내고 왔었다. 다시 가게 된다면 이 책을 한번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 인도네시아 여행의 시작과 끝을 장식해준 이 책, 옥에 티라면 뒷부분으로 갈수록 오타가 심하고 입말이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실렸다는 것. 이를테면 '그라고'. 여행 끝에는 약간 정신이 흐려지기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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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외교관의 여행법 바람구두 여행문고 1
박용민 지음 / 바람구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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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에 읽었으나 가치를 몰라봤던 책. 인도네시아 얘기가 알차게 실려있다. 다행인 건 그래도 책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 책을 읽었다고 읽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준, 겸손하게 만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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