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딱딱한 아가씨군0)
작품이 무서울수록 그만큼 교화적이다. 굴욕을 강요할수록 그만큼 고상함을 가장한다. 더 많이 은폐할수록 그대로 드러낸다는 환상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 필요한 것은 공포이다. 비합리성과 위협에 기반한 사회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면 그러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ㅡ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中
프랑코 모레티가 << 공포의 변증법 >> 에서 드라큘라를 " 드라큘라는 진짜 독점 자본가이다. " 라고 해석했을 때, 나는 이 전복적 상상력'에 격하게 박수를 쳤다. 그는 마르크스 << 자본 1 >> 의 텍스트를 끌어들인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자본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 살 수 있으며,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을수록 더 오래 사는 죽은 노동이다 1) " 즉, un-dead 인 드라큘라라는 캐릭터는 인격화된 자본(가)인 셈이다. 인격화된 드라큘라의 등장에 " 산 자는 죽은 자 때문에 고통받는다 2) ". 프랑코 모레티 3)가 보기에 드라큘라가 산 자의 목에 이빨을 꽂고 빨아먹는 피는 돈에 대한 은유다.
말 그대로 피 같은 돈'이다. 드라큘라가 귀족 계급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브람 스토커의 << 드라큘라 >> 에서 그는 금을 투자하는 사업가로 소개된다. 그뿐이 아니다. 하수인으로 등장하는 조나단 하커는 부동산업자이고, 인격화된 자본인 드라큘라 백작이 즐겨 읽은 책은 애덤 스미스의 << 국부론 >> 이다. 피를 훔친다(착취한다,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인 셈이다. 또한 흡혈귀가 강할수록 살아 있는 사람은 약해진다는 설정은 독점 자본이 강할수록 서민은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처럼 << 드라큘라 >> 원전은 프로이드적 분석보다는 마르크스적 해독이 더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상위 1%인 드라큘라가 보기엔 99%는 자신에게 피를 공급하는 수급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99%의 죽음을 원치 않는다. 피는 필요한 만큼만 착취한다. 99%를 살려두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다. 그것은 연민도 아니고 자비도 아니다. < 수요 공급의 원칙 > 에 충실할 뿐이다. 며칠 전, 2급 교육 공무원 향욱 씨'가 민중은 99%가 개·돼지'라고 말한 후 먹을 것만 주면 된다고 말했을 때 내 머리 속에서 번개처럼 반쩍거린 이미지는 드라큘라'였다. 향욱 씨가 " 개 돼지로 보고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살게만 해 주면 된다. " 고 당당하게 말하는 태도는 필요한 만큼만 피를 빠는 드라큘라의 소비 습관을 닮았다. 좀비와 드라큘라의 차이는 명확하다. 좀비는 과식을 하고 드라큘라는 소식을 한다.
드라큘라에게 중요한 것은 먹잇감을 살려두는 것이다. 99%를 개·돼지로 취급하는 1%가 역설적으로 저출산 현상을 심각하게 보는 데에는 개·돼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피(=돈)를 수혈할 수 있다는 데 핵심이 있다. 그가 2급 공무원이라는 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는 " 1%에 소속되기 위한 2% 공무원의 욕망 " 이다. 그는 1%를 동경했고, 이 동경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속한 혈계를 경멸했던 것처럼 보인다. 영화 << 아가씨 >> 에서 출세를 위해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조진웅(이모부 역)을 닮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향욱 씨의 " 과잉의 확신과 결핍의 무지 " 는 << 맨스플레인 >> 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설명을 듣는 사람(기자)이 설명을 하는 사람(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수/혹은 올바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술자리에 모인 기자들은 여성 기자 2명이었다. 가부장 사회에 익숙한 경상도 사내, 그것도 고속 승진으로 거듭난 엘리트 사내에게는 여성 기자들의 반박에 고개를 숙인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은 아닐까 ? 평상시에 그는 남자는 설명하는 위치에 있고 여자는 이해하는 위치에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냐는 말이다. 영화 << 아가씨 >> 에서 사용된 반전은 남자는 설명하고 여자는 설득당한다는, 익숙한 서사 4) 를 뒤집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맨스플레인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사태는 계급 인식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 여자에게 지기 싫어하는 남자의 똥고집이 만든 아수라장인지도 모른다. 남성 몰락을 다룬 영화는 수직 - 이미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영화에서 남자는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죽고 여자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는다. 영화 << 킹콩 >> 은 몰락하는, 수직성의 비극을 다룬다. 그 낙차가 클수록 비극은 더욱 강조된다. 그런 점에서 1% 상부층 진입을 코앞에 둔 2%인 그가 이번 사태로 100% 밑바닥으로 추락한다는 점에서 웅장한 비극이다.
영화 << 아가씨 >> 에서 김태리(하녀 역)는 김민희에게 방중술을 가르치며 묻는다. " 더 가르쳐 드릴까요, 아가씨 ? " 나는 이 대사를 나향욱 씨에게 돌려드리고 싶다. " 더 가르쳐 드릴까요, 아저씨 ? "
0) << the traitor >> 2막 2장. " 아아, 딱한 아가씨군 " 을 패로디
1) 마르크스, << 자본 1 >> 비봉출판사, 296쪽
2) 마르크스 자본론 서문에서 발췌
3) 프랑코 모레티의 << 공포의 변증법 >> 에 대한 내 별점은 ★★★★★★ 만점에 1점 더 주겠다. 로빈 우드의 <<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 와 함께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평론집니다.
4) " 설명하는 남자 vs 설득당하는 여자 " 라는 구조는 자크 랑시에르가 << 무지한 스승 >> 에서 " 설명하는 스승 vs 이해하는 학생 " 과 유사하다. 랑시에르에 의하면 현대 교육은 스승과 학생을 수평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위계로 설정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자코트 실험'에서 밝혀졌듯이 학생은 무지하지 않으며 스승은 반드시 유식할 필요도 없다. 그는 이 사례를 들어 수평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영화 << 아가씨 >> 에서 김민희는 책 읽는 학생이다. 반면, 이모부인 조진웅은 스승이다. 전형적인 스승과 학생의 관계이다. 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반전을 숨기고 있다. 독자인 우리가 이 영화의 반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데에는 < 맨스플레인 - 서사 > 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아가씨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주체가 아니라 새롭게 쓰고 해석하는 주체다. 중국집 가게 이름 같은 " 나향욱 " 은 자신을 설명하는 남자(가르치는 스승)으로 설정한 후 여성 기자를 설득당하는 여자(이해하는 학생)으로 인식한다. 기자가 반론을 제기하자 입장을 번복하지 않은 이유는 " 쪽팔리다 " 는 데 있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는 가부장 고집. 그에게 쪽은 남근이며 리비도'다. 쪽을 판다는 것은 거세를 의미한다. 사실..... 쪽이란 " nothing " 에 불과하다. 그는 그것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