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터 키튼과 팡시울











 


버스터 키튼 영화를 보다 보면 가거도 우럭도 아니면서 울컥하게 되는 감정의 변곡점을 만나게 된다. 감독이 관객을 웃기려고 만들었으니 서해 갯벌 피조개처럼 피식 쪼개면( 쪼개다 :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웃다 ) 되지만 버스터 키튼 영화는 오롯이 웃기에는 너무 고급스럽고 진지하다. 그 당시에는 특수효과가 전무해서 모든 장면은 사고를 염두에 두어야 했으니 웃기려고 만든 장면들은 사실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이 동영상 맨마지막에 나오는, 그 유명한 전설적 장면에서 집채 한 단면의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었다. 그러니까 스티로폼 따위로 관객을 속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집을 지을 때 사용되는 목재였다. 한치의 오차만 벗어났어도 버스터 키튼은 사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관객을 웃기기 위해서 두려움과 싸워야 했던 광대'였다. 그의 코미디가 숭고해지는 지점이다.  그를 볼 때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광대 팡시울1)의 마지막 무대가 생각난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두려움의 결과'이다. 



                           

1)  나, 페루애는 한때 " 팡시울 " 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팡시울은 보들레르 시집 << 파리의 우울, 비장한 죽음 편 >> 에 등장하는 광대로 왕이 총애하는 어릿광대'였다. < 그 > 는 어릿광대였으나 현명한 영감이었고 총명했다. 보들레르는 팡시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팡시울은 찬탄할 만한 광대이며, 거의 국왕의 친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직업상 희극에 몸을 바치고 사람들에게는 진지한 일이 숙면적인 매력을 갖는 법이어서, 국가라거나 자유라는 관념이 일개 익살 광대의 뇌수를 폭압적으로 사로잡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광시울은 불만을 품은 몇몇 귀족들의 음모에 가담했다. 임금을 폐하고, 사회에 물어보지도 않고 사회의 이전을 도모하고 싶어 하는 이 우울증 기질의 분자들을 권력에 밀고하는 갸륵한 인간들은 어디를 가나 있게 마련이다. 문제의 귀족들은 광시울과 더불어 체포되었으며, 꼼짝없이 사형에 처해질 판이었다.




국왕은 그의 죽음을 잠시 유보하고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를 기회를 준다. 팡시울은 그 무대 위에서 지상 최대의 쇼를 펼치고, 그 무대 위에서 죽는다. 나는 이 극적인 익살광대의 소동극에 매력을 느꼈다. 역린'은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질서를 무질서로 전복하는 행위'이다. 팡시울의 목적은 질서의 세계를 혼돈으로 만드는 것이다. << 다크 나이트 >> 의 조커는 바로 그 어릿광대 팡시울'을 연상하게 만든다. 브루스 웨인'이 신트로피 : 무질서에서 질서를 대표한다면 조커는 네트로피 : 질서에서 무질서'를 대표한다. 전자가 인간의 개입을 통한 예측 가능한 세계라면 후자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인 우연과 혼돈의 자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돈에 집착하는 것은 화폐'가 미래 설계의 실현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본가인 브루스 웨인은 예측 가능한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법(징벌), 질서, 화폐, 도덕(선과 정의), 제도 따위는 예측 불가능한 카오스 세계에서 벗어나 예측 가능한 확률을 높이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관객인 우리가 조커의 동선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이유는 법과 질서 그리고 상식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은행을 털 때 그 행위가 돈을 강탈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지레짐작하지만 조커는 예측 가능한 세계에 속한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화폐를 모두 불태운다. 그에게 있어서 예측 가능한 세계는 파괴되어야 할 가짜'이기에 화폐'는 의미가 없다. 조커는 병실에 누운 투페이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 정해진 질서를 뒤집으면 모든 건 카오스(혼돈)이 되지 !  나는 카오스의 화신이야. " 조커의 번호가 제로(0)인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무정부주의자(아니키스트)이면서 무산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악'이 아니라 noth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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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











조국과 허클베리 핀





어두워져 모닥불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자, 꽤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ㅡ 허클베리 핀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담배는 1군 발암 물질이거든요. 그래서 지상파 방송에서 영화를 송출할 때 흡연하는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죠. 잘생긴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 멋있어 보이잖아요. 청소년들이 이를 모방하다가 결국에는 골초가 되죠.  그러니 흡연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에 대해 저는 그다지 불만 없습니다. 뭐, 솔직히 누가 요즘 지상파 방송에서 하는 외화'를 봅니까 ? 하여튼 담배는 호환 마마와 쌍벽을 이루는 공공의 적'이죠. 지정된 흡연 장소가 아니라면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됩니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청소년에게 담배를 판매하면 법의 응징을 받습니다. 


며칠 전에 마이클 커티즈 감독이 1960년에 연출한 << 허클베리 핀의 모험 >> 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영화에서 꼬맹이 허클베리 핀 골초1)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개, 깜놀 !!!  대한민국이었다면 귀싸대기를 올렸을 겁니다. 암요,  동네 양아치도 윗사람 등에 배신의 칼을 꽂을지언정 윗사람과 맞담배는 안 피우죠. 허허, 이것 참. 이봐, 허클베리 핀 ! 흡연은 청소년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마크 트웨인의 원작 소설'이 1886년에 출간되었으니 그 당시에 담배는 남녀노소 즐기는 기호 식품이었나 봅니다.  감독은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보니 


시대에 역행하는 < 소년 골초 > 를 만들었겠지요. 그런데 어제 데이비드 린의 << 여정, 1955 >> 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또 또다시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약방의 감초로 등장하는 이태리 꼬마'도 골초더군요. 그러니까 1960년대에는 꼬마들이 담배를 피워도 흉이 되지 않는 시대였던 겁니다.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꼬마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입으로 담배를 피도 되나, 안 되나 ?  문득, " 논란의 조국 " 이 떠오르더군요.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그때의 입시 특례 제도는 특정 계급에게 유리한 룰이었습니다만, 


그때의 기준에서 보자면  학종 특례 제도는 매우 선진화된 입시 제도였습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  조중동은 그 당시에 학종 특례 제도를 선진화된 입시 제도'라고 칭찬하는 기사를 쏟아낸 장본인'입니다. 그렇다면 그때는 맞는데 지금은 틀린 것입니까 ?  그것이 내로남불입니까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기준을 제시하는 현대의 윤리 기준도 내로남불입니까 ?  말해보시라요, 네에 ??!   현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허클베리 핀의 모험)가 흡연을 하는 장면 묘사'가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해서 번역할 때 흡연 장면(or 문장)만 뽑아 삭제'해도 될까요 ? 


조국의 내로남불이 위선'이라며 이 불공정한 세상이 지옥이라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가겠어 !    << 허클베리 핀의 모험 >> 에서 주인공 허클베리 핀'이 흑인 인종 차별에 항의하며 주먹 불끈 쥐며 한,  그 유명한 말입니다.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군요. 이제 그만 글을 닫도록 하겠습니다.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덧대기

해마다 히트 상품을 선정한다. 몇 년 전에는 " 허니버터칩 " 이 그해의 히트상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히트 상품 선정단의 일원'이라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최고 히트상품은 " 기레기 " 라는 신조어'에게 왕관을 씌워줄 것 같다. 허니버터칩은 한해 반짝 하다 요즘은 낯짝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기레기'라는 프레임은 꽤 오랫동안 장수할 히트상품으로 보여진다. 질문의 수준이 믿을 수 없어서 자꾸 그 기자의 낯짝을 보게 된다. 기레기, 라는 21세기 상품. 히트다, 히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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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O K E R 











 






<< 베트맨 >> 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는 조커 캐릭터를 따로 떼어 만든, 조커의 기원'을 담은 영화 << 조커 >> 가 곧 개봉(10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원작 << 베트맨 >> 보다 앞선 시기의 이야기를 다뤘으니 프리퀼(Prequel)이자 원작의 파생상품에 가까우니 스핀오프(Spin-off)의 성격을 띠는 후속작'이다. 개인적으로 " 조커 " 라는 캐릭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모처럼 기대되는 개봉 예정작'이 나왔다. 더군다나 조커 역을 호아킨 피닉스'가 맡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기립박수를 쳤다.  병리학적 인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 호아킨 피닉스 만한 배우를 찾기란 드물뿐만 아니라 어릴 적 구순구개열(흔히 언청이라 부른다)에 의한 입술 흉터를 가지고 있는 호아킨 피닉스와 조커는 서로 닮은 흉터를 간직한 운명론적 쌍생아'가 아닐까 ?  조커는 베트맨의 반대말'이다. 베트맨이 자본가 계급을 상징한다면 조커는 노동자 계급을 상징한다. 또한 베트맨이 남근을 상징하는 방망이(bat : 박쥐라는 뜻과 함께 야구방망이라는 뜻도 있다)를 손에 쥔 남성 자경단을 대표한다면 조커는 찢어진 입술을 가진 여성성'을 대표한다. 인간의 신체 기관 중 입술은 여성 성기와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조커는 베트맨의 대척점에 놓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 베트맨 >> 이라는 영화의 핵심이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조커의 서사'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다음은 2012년 8월 4일에 작성한 글 << 베트맨보다는 조커에게 경배를, 부제 0에 대한 모든 것 >> 에서 부분 발췌한 내용이다. 예고편만 놓고 보면 조커에 대한 나의 캐릭터 분석은 정확한 편이다. 그는 죽어가는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는 아들로 등장한다. 




옛날부터 조커/광대'는 왕의 노리개로 내시'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 여자 같은 남자를 조롱할 때 흔히 쓰는 말이 내시 같다는 말이다. ) 이성복 시인이 아, 입이 없는 것들이라고 한탄했다면,  나는 " 아, 부, 부부부부부부불알'이 없는 것들 ! " 이라고 외치겠다. 영화 속 조커는 좆이 없는 존재다. 이러한 사실은 상처 입은 입을 보면 답이 나온다. 입을 90도 각도로 틀면 입이 여성 성기'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 속 조커의 입술이 유난히 강조된 이유는 바로 조커가 여성(성을 간직한 남성)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입술이 폭력적인 아버지에 의해 찢어졌다는 것은 조커가 아버지에 의해 강간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찢어진 입은 강간, 낙태, 임신중절'을 연상케한다. 조커는 남성 폭력에 의해 강제로 적출된 낙태아'이다. 지금 그녀는 복수를 하기 위해 배트맨과 싸움을 신청한 것이다. 말 그대로 방망이를 든 사내와 세기의 성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bat는 말 그대로 야구 배트'를 의미하지 않은가 ? 몽둥이란 폭력적 가부장의 대표적 오브제가 아니었던가 ? 라캉은 여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여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 "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여자는 0'이다. 그러므로 조커는 여자다. 왜냐하면 카드에서 조커는 숫자 0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조커'가 승리하기를 바랐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응징하기 위해 나타난 조커 ! 얼마나 멋진가. 남근을 닮은 그 몽둥이'를 부러뜨리기 위해 그녀는 돌아온 것이다. 배트맨은 bat가 아니가 bad다. 그는 나쁜 놈이다.  

 ㅡ << 베트맨보다는 조커에게 경배를, 부제 0에 대한 모든 것 >> 201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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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9-01 2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커를 배트맨의 또 다른 자아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는데, 곰곰발님의 해석과 좋은 대조가 되는 듯 합니다.^^:)
 

                                          


격발이냐 불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섹스 피스톨즈





- 리오 브라보, 1959




                                                                                                    영화 속에서 " 총 " 은 " 딱딱한 페니스 " 에 대한 은유'이다(섹스 피스톨즈'라는 이름의 미국 롹밴드도 있다). 격발은 사정이며 불발은 발기 불능'이다. 그리고 총알은 강철로 만든 정자'이고 리볼버 회전식 탄창은, 음.... 그러니까, 그게 일종의 불알'이다. 


그것은 남성의 욕망이자 그 욕망이 반영된 페티시'다. 영화 << 다이 하드 >> 에서 도시를 순찰하는 흑인 형사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총을 겨누지 못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성 불능에 대한 은유이다. 그와 무전기로 대화를 나누며 동병상련을 느끼는 존 맥클레인 형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무능한 남편으로 아내와는 이혼 위기에 처해 있으며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아내는 남편의 성을 숨긴 채 처녀적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한다. ​ 그러니깐 아내는 < 홀리 맥클레인 > 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결혼 전 이름인 < 홀리 제네로 > ​로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맥클레인 형사는 나카토미 빌딩 로비에 있는 방문자 명단에서 아내가 처녀적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린다. 맥클레인'이라는 성'은 말 그대로 아내로부터 제거(거세)된 상태인 것이다.  지금 그의 페니스는 발기와 거세 사이에 있다.  잘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꼴린 것도 아닌 상태.  마치 휴대폰 표시창에 방전을 알리는,  깜박거리는 아이콘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남근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는 자세를 고추세우며 외친다. " 우린, 죽지 않아 !!!!! " 영화 << 다이하드 >> 는 서부 LA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마천루 서부극이다. 


< 총 > 이 중요한 오브제로 활용되는 서부 영화 장르는 발기된 불알후드의 세계를 다룬다. 주인공은 총구에 불을 품어냄으로써 남성다움을 과시'한다. 퐈이야 ~             그러니까 웨스턴 무비는 기본적으로 남근 선망 판타지에 기반을 둔 장르인 셈이다. 서부 영화의 아이콘이었던 배우 존 웨인과 하워드 혹스 감독이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1952 >> 에 대하여 격렬한 어조로 비난한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윌 케인 보안관(게리 쿠퍼 분)이 히마리 없는 거세된 남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형사가 트라우마로 인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총을 겨누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 다이 하드 >> 의 흑인 형사를 닮았다. 


윌 케인 보안관은 악당과의 대결보다는 마을 사람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또한 그는 부보안관에게 애인을 빼앗긴 상관이며 그와의 몸싸움에서도 가까스로 이긴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남성'이다.  존 웨인과 하워드 혹스가 보기에 월 케인 보안관은 겁쟁이'다.  그래서 그들이 손을 잡고 만든 영화가 << 리오 브라보, 1959 >> 이다.  영화 << 리오 브라보 >> 는 << 하이 눈 >> 제작진에게 보내는 발기한 남성-들의 딱딱한 답장'인 셈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보안관(존 웨인 분)은 악당과 시시때때로 대결하는데, 그는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의 선의를 모두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독고다이 정신으로 수많은 악당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둔다. 게리 쿠퍼 보안관이 고뇌하는 햄릿 유형이라면 존 웨인 보안관은 돈키호테'다. 다시 말해서 게리 쿠퍼 보안관이 당기되 쏘지는 않는다는 " 인이불발 " 을 실천한다면,  존 웨인 보안관은 " 일단격발 一旦擊發 " 을 주장한다.  전자가 지루라면 후자는 조루다. 이처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영화를 감상하며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시각적 쾌락 너머의 지적 유희'이다.  불알후드의 극렬 다이오드적 시네마틱 극성 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고개 숙인 남성의 히마리 없는 불발'에 애정이 간다. 무릇 총이란 위험한 무기'로 언제나 격발이 가능하기에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남근도 총이다(아님 말고). 당기되 아무때나 쏘지는 마라, 잉글랜드 토끼가 비웃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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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8-22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나온 ‘섹스 머신’이 생각나네요. 하체로 총을 쏘잖아요.. ㅎㅎㅎㅎ 중학생 때 그 영화를 처음 봤는데, 정말 잊지 못할 캐릭터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8-22 17:10   좋아요 0 | URL
인상에 남는 캐릭터였죠. 섹스 머신.... 보고 싶네요. ㅎㅎㅎ
 












미워도, 원 모어 타임 플리즈 ! "










                                                                                                       한때 시네마 떼끄가 우후죽순처럼 들쑥날쑥하던 때가 있었다. 퀄리티를 놓고 보면 죽(竹)인지 쑥인지 알 수 없는 죽 쑨 시설도 많았지만 지하 골방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말로만 듣던 세계 명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장 비고의 << 품행 제로 >> 를 그곳에서 보았으며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 거울 >> 도 그곳'에서 보았다. 영화의 원형을 경험한다는 것은 묘한 감동을 준다. 서부극은 시네마 떼끄의 단골 상영작 목록이었다. 존 포드의 << 역마차 >> 에서 존 웨인은 서부 영화의 원형에 가까웠다. 서부인은 적과 싸울 뿐만 아니라 거친 자연과도 싸운다. 존 웨인은 현대극 이전의 존 맥클레인이었고 존 람보'였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역경을 헤쳐나가며 적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는 홀연히 떠난다. 영광은 잠시뿐, 굴비는 짜다 !  서부극은 앞모습으로 시작해서 뒷모습으로 끝나는 장르'였고 나는 그 영웅들의 뒷모습을 좋아했다. 


앞모습은 초라해 보일지라도 뒷모습이 당당한 남자야말로 진짜 사나이'가 아닐까 ?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 은 전통 클래식 웨스턴 무비'와는 사뭇 다르다. 은퇴한 보안관을 연기하는 게리 쿠퍼는 늙고 지쳐 보인다. 그의 뒷모습은 당당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며 불안해 보인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자고 애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악당 프랭크 일당이 공동체의 위협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무질서의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보안관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프랭크 밀러 일당과 싸워 이긴다. 이 승리에 크게 환호하는 사람도 없고 적으로부터 마을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주인공의 자부심도 없다. 보안관은 경멸인 듯 아닌 듯 마을 광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그곳을 떠난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보인다.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가 나를 매혹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입이 바짝바짝 마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다른 서부극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이 직립의 애티튜드는 장렬하다기보다는 나약해 보였다. 


오래전 내 기억 속에서 이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흠뻑 빠졌다. 게리 쿠퍼가 연기한 윌 케인 보안관은 서부극 영웅의 전통적인 영웅이 아니다. 그는 고독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절망하고 고뇌하며 다가오는 죽음에 불안해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 영화 속에서 은퇴한 보안관은 적과의 " 대결 " 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 대화 " 를 시도하지만 그가 이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거대한 권력과 무소불위의 힘 앞에서는 약해지는 인간의 추악한 속성'이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이 과정을 통해서 서부영화 장르의 허망한 판타지를 낱낱이 고발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정의롭고 정직하다. 프랭크 밀러 일당 네 명 중 두 명은 에이미(그레이스 켈리 분)'가 처단한다. 주류 서부 영화가 주로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남성(게리 쿠퍼)를 구원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진보적이고 전복적이다.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혹은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동일한 텍스트를 반복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텍스트를 경험하는 행위'다.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어제 본 영화와 오늘 본 영화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쁨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사람은 항상 새로운 사람이다. 영화도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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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21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 무삭제 장 자끄 베네의
<베티 블루> 세 시간을 아무런 자막
도 없이 그림만 보며 황홀해 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리고 보니 링클레이터의 <비포어
선라이즈>도 시네마떼끄에서 본
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8-21 17:08   좋아요 0 | URL
제 친구가 프랑스 유학 갔을 때 티븨에서 베티블루 무삭제판 상영했다고 편지에다 구구절절 적었더군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