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질을 하면서 의아했던 게 숱한 리뷰 중 시집에 관한 건 흔치 않다는 것이다. 알라딘을 벗어나 각종 문학 사이트 같은 곳엔 시가 넘쳐난다. 시인만 해도 삼만 명이 넘는 나라라니 어련할까?  시인이 많은 나라니 예비 시인도 엄청 많을 것이고, 그런 분들이 시를 읽고 리뷰를 올린다면 산문에 비해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할 줄 알았다. 한데, 의외로 시인과 예비시인이 많은 나라치고 시집 리뷰는 드문 편이다.  잘 쓰는 시인들을 존경하다 못해 경이롭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못내 서운하다. 많은 독자들이 시집에 관한 리뷰나 페이퍼를 올려 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내 욕심일 뿐이다. 시를 모르면서 좋아만 하는 욕심... 

  젊은날부터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웬만하면 사모았다. 당선시들 중 내 취향에 맞는 몇몇 작품들을 만날 때면 심사위원들이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어쩜 이리 내 취향에 맞는 시의 구름을 불러내 풀썩이는 내 영혼에 단비를 내려주실까, 하는 맘에... 좋은 시를 발견하는 그 눈이야말로 천상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믿고, 좋은 시에 공감하는 나도 어쩌면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보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년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시는 짓는 게 아니라 절로 써진다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그분이 오셔야 시가 된다는 것. 더 쉽게 말하자면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만들어진 시인은 시인이라 불릴 수는 있겠지만 시인은 아니라는 것. 그 사실을 시인 자신들이 더 잘 안다는 것.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천재가 못돼서 시 못 쓰거나 안 쓰는 사람들은 좋은 시를, 취향에 맞는 시를 그저 감상하면 된다. 안 써도 되니 맘 고생 안 해도 되고,  영혼의  요기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한데 올해 신춘 당선시집을 곁에 두고 읽자니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시가 없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천재 시인들이 사라졌을 리도 없고, 심사위원들의 눈썰미도 삐뚤어졌을 리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게 있다. 참신하고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신춘시들을 접수하기엔 내가 너무 늙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스스로를 책망하면서도 자꾸 의문이 드는 건 왜일까?  

 그나마 맘에 드는 두 시는 골목의 각질(강윤미, 문화일보), 모른다고 하였다(권지현, 세계일보) 두 편이다. 두 편의 시, 우연하게도 제목부터 시적이다.   

골목의 각질 - 강윤미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 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했다

전봇대, 우편함, 방문, 화장실까지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로 붙어 있다 붙어 있던

자리에 붙어 있다 어쩌면

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일 것이다
 

 

모른다고 하였다 - 권지현

우루무치행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북경공항 로비에서 삼백삼십 명의 여행자들은 

여섯 시간째 발이 묶인 채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현지여행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행가방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떠들어대거나 서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워올리건 말건

나는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다 

 

비행기는 언제 올지 오지 않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연착한다는 안내표시등 한 줄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연신 줄담배를 피우고

나는 로비를 몇 바퀴나 돌고

하릴없이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마침내는 쪼그리고 앉아 지루하게 졸았다

항의하는 나를 마주한 공항여직원

가슴께에 걸린 얼굴사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어

내가 가야할 길마저 희미해 보였다

 

비행기는 오지 않고

결리는 허리뼈를 아주 잊을 때까지 오지 않고

우루무치행 비행기는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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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30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천재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니까 시집을 읽고 감성이 통하는 시를 발견해도 리뷰를 쓰기는 어렵더라고요. 서평단 리뷰 부담에 오히려 책읽기나 리뷰쓰기가 더 안되는 것도 있고요.ㅜㅜ

다크아이즈 2010-01-30 10:49   좋아요 0 | URL
이런, 순오기님이 서평단인지도 몰랐다는... 언제 서재에 적응될까요? 천재들의 속삭임을, 읽는 이 맘대로 해석하는 거야말로 시적인 거 아닐까요?ㅎㅎ

穀雨(곡우) 2010-01-29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랑 담 쌓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은 벌써 늙다리가 되도 한참이겠는걸요.
리뷰도 그렇지만 글쓰기의 최고봉은 시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끼적여봅니다.

다크아이즈 2010-01-30 10:49   좋아요 0 | URL
곡우님은 일단 글을 잘 쓰시기 때문에 시집 안 읽으셔도 패스! 제가 일단 꽂히면 주욱~ 신뢰해버립니다요. ㅎㅎ


꼼미 2010-02-04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 주신 두 편의 시 잘 읽고 갑니다. 전 최근에 읽고 있는 시집 전동균의 "거룩한 허기"를 읽고 몇번을 울먹였더랬어요. 그리고 그 시집 뒤에 붙은 신형철의 해설을 읽고는 제가 지금까지 만난 (어쩌면 김현을 포함하더라도) 최고의 해설이자 비평이라고 생각했죠. 참으로 기막힌 아픔과 감동과 기쁨이었죠. 그저 나만의 사견이자 감상일지라도요...

다크아이즈 2010-02-04 07:06   좋아요 0 | URL
꼼미님 덕에 거룩한 허기, 를 담게 되네요.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신형철이 쓴 해설들은 시보다 그 해설 때문에 시를 읽게 한다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지요. 시인들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신형철의 해설이 붙은 시집을 만나는 건 독자로서는 굉장한 복인게지요. 언젠가 신형철 해설이 굉장하다니까 로쟈님이 잘 아신다고 책 사인회 정보를 알려주셨던 것 같은데, 여긴 지방이라 갈 수도 없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