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연 작, 바다 이야기 시리즈 중에서>
베레모를 쓰지 않은 선생님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간혹 두피에 땀이 챌 때나 엉긴 이마머리칼을 정리하기 위해 모자를 고쳐 쓴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결코 사람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 보인 적은 없었다.
어느 날 한 수강생이 물었다. 왜 빵모자를 쓰시냐고. 당연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치장 자체도 거추장스러우니 편리를 위해 모자를 찾는다는 그런 대답.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선생님은 ‘단 한 순간도 화가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모자를 쓴다’라고 답하셨다. 흔히 ‘화가 빵모자’로 불리는 베레모는 선생님께는 자신을 향한 채찍이자 정체성을 확인하는 매개체였다. 다시 말해 선생님의 자존심이자 예술혼의 상징이었다.
진정한 예술가였던 선생님은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화단뿐만 아니라 예술계에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먼저 가신 선생님은 내 초등학교 은사셨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갓 스물을 넘겼을 선생님은 초임 발령지로 우리학교에 오셨다. 삼십 년이 훨씬 지났지만 우리반 담임이셨던 선생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책이 귀하던 그 시절 선생님은 아침마다 동화책을 읽어주셨다. 선생님 덕분에 ‘엄마 찾아 삼만 리’(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마르코는 어린 내 상상력을 자극하던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탈리아에서 대서양을 건너 저 먼 아르헨티나까지, 오직 엄마를 찾아 떠나던 마르코의 험난한 여행기를 선생님은 실감나는 톤으로 구연했다. 하숙방 한 벽면을 장식했던, 약관에 공모전에 입상한 솟을대문 그림도 잊을 수 없다. 어린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신세계이자 경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 년 만에 전근을 가신 뒤, 선생님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십여 년 전, 그림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 등록한 문화센터에서 선생님과 해후했다. 지도강사와 수강생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만남이었다. 다시 만난 선생님은 그야말로 나의 사표였다. 어쩌다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따로 할 이야기를 쟁여놓으신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셨다. 늦게까지 술잔을 마주해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꼿꼿한 모습이셨다. 취한 사람 상대하지 마라. 시류에 휩쓸리지 마라, 뜻대로 안 된다고 너무 힘겨워하지 마라, 올곧음을 항상 마음에 새겨라. 스승은 언제나 옳은 말만 하는 잔소리꾼이셨다. 나는 그 말씀들이 싫지 않았다. 내게 하는 훈육의 형식이었지만, 선생님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내면의 소리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그림이 주목 받기 시작했을 땐 그 누구보다도 기뻤다. 선생님 그림의 주제는 한마디로 고독이었다. 감상하는 이 누구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화폭엔 정갈한 구체성이 담겨 있었다. 담대한 여백과 잎 없는 큰나무줄기는 허무와 내면의 고독을 말해주는 상징 코드 같은 것이 돼버렸다. 잎조차 없는 도시의 나무들, 한 방향으로 세찬 바람결을 맞는 소나무 등에서 나는 개별자 안에 서성이는 불안들을 감지하곤 했다. 캔버스의 반을 차지하는 흰 이불 호청이 주는 순백의 공허, 뒷짐 지고 허리 구부러진, 한낮의 적요를 감내하는 할머니, 무료한 해변의 적막을 견디는 소년, 그 뒤를 앞서거나 뒤따르는 누렁이와 흰둥이. 선생님 그림에 등장하는 구체적 대상들은 온전한 고독에 이르는 한 예술가의 막막한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 병세가 완연해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것이 내가 본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선생님은 남은 삶 ‘이기적으로 살란다’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예술혼에 다다르기 위한 선생님의 강인한 다짐으로 이해했다. 그 다짐 굳히기도 전에 선생님은 너무 빨리 떠나시고 말았다. 선생님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빵모자 쓰고 섬세한 필치로 둥치 굵은 나무에 고독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 더러 지치면 지나가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마르코의 감동적인 여정을 구연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부디 선생님께 평화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