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1년 10월
구판절판


쉐 막스, 조앵빌, 1947

작가는 이 사진을 의자 위에서 찍었다. 덕분에 작가의 앞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의 등이 보이고 그보다 먼 전경으로는 한껏 멋진 춤사위를 보여주는 세 남녀가 함께 찍혔다. 놀라운 것은 춤을 추는 저 남자가 외발이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의 춤이 멋졌다고 했다. 여자 둘은 유치원 때부터 서로 친구였다고 하나, 청년은 이날 이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 춤춘 게 전부였다고! 놀라운 인연에 놀라운 광경이다. 극적인 순간을 잘 포착했다.

끊어진 실, 1950

알자스 지방의 한 섬유공장이다. 사장님이 직접 공장의 이모저모를 설명해 주고 있을 때, 작가는 양해를 구하고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자신이 찍어야 할 장면을 잡아채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오로지 사진에 집중하게 된다. 이 순간도 그랬다. 끊어진 실을 잇고 있는 여인의 자태는 마치 하프 연주를 하는 것마냥 우아하게 보인다. 실 한가닥에 집중하는 모습에서 총기가 느껴진다.

쥘과 짐, 1947

마른 강가의 작은 마을에서 두 작은 섬을 연결하는 나무 다리 위에 세 젊은이가 모여 있었다.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였다. 소녀는 누워 있는 소년에게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고, 다른 한 소년은 비스듬히 누워 강 건너편을 보고 있다.
이 사진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쥘과 짐'을 떠올리게 한다. 덕분에 나도 영화를 찾아 보았다. 낯이 익은 제목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보고서 사진을 다시 보니 정말로 세 남녀의 교차된 사랑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작가란 멋진 창조자다.

퐁데자르의 연인, 1957

센 강둑에서 두 연인이 입을 맞추고 있다. 배는 노도 없고 강둑에 매달려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강렬한 불꽃이 튀는 순간 방해받지 않을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록 사진 작가의 눈에 포착될 만큼 열린 공간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최고의 사랑스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영화 포스터로 써도 좋을 만큼 배경도 구도도 훌륭한 사진이다. 연인들 역시 최고이고!

자전거, 1954년 성탄절

자전거 파는 가게 앞에 한 소녀가 아빠의 손을 잡고서 자전거를 내려 보고 있다. 소녀의 손을 꼭 잡은 아버지의 행색을 보니 분명 주머니 사정이 가난했을 것이다. 소녀는 자전거가 몹시 갖고 싶었겠지만 차마 소리 내어 욕망을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 형편에는 무리일 거라고 미리 포기하는 듯한 얼굴이다. 하지만 아쉬움까지 감출 수는 없다. 소녀가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짠하다.

푸시킨 궁, 1986

아직 레닌그라드라 불리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 꼬마가 할머니와 함께 푸시킨 궁에 왔다.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느라 바쁜 할머니와 달리 소년은 지루함이 가득하다. 빨리 돌아가자고 할머니의 다리를 잡아 끈다. 그 와중에도 눈빛만은 전시회장 곳곳을 누비는 할머니! 어딘가 조카를 데리고 구경가면은 자주 연출되는 모습이다. ^^
바닥의 곡선 무늬와 배경의 격자 무늬가 조화롭게 어울린다. 직접 가보고 싶은 곳이다.

감자튀김 가게 아가씨들, 1946

1946년이면 파리가 해방되고 일년이 지난 시점이다. 전쟁의 상처는 컸지만 해방의 기쁨도 그 못지 않았다. 감자튀김 가게 아가씨들의 얼굴에선 새 희망이 가득하고 활기가 차고 넘친다. 마음에서 우러난 기쁨과 상냥함이 사진에서 느껴진다. 줄을 서서라도 먹고 싶은 가게였을 것 같다.

오늘의 여왕, 1949

'오늘의 여왕'은 1949년에 한 라디오 방송국이 만든 프로그램이다. 원하는 후보자에게 기회를 주어 여왕 대접을 해주는 내용이었다. 기회를 얻은 사람은 하루 종일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후한 대접을 만끽한다. 바로 그 여왕님께 오늘 하루 여왕이 된 기쁨을 표현해 보라고 하자 이런 포즈를 취해 주었다. 온몸과 온맘으로 기뻐하는 내색이 역력하다. 나로서는 말괄량이 삐삐가 떠올랐다.^^

베네치아, 지우데카 섬, 1981

사진 속에는 루이 15세 스타일의 소파를 수선하고 있는 장인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사내가 있다. 더 재밌는 것은 그 사이의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이 모습을 찍고 있는 작가 윌리 로니스가 잡혔다는 것이다. 물론 사진 작가도 그것을 알고서 셔터를 눌렀다. 동시간에 함께 있었다는 절묘한 기록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쇼파를 수선하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거울 속에 잡힌 작가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대장간, 1950

르노 자동차 공장 설립 50주년 기념 책자를 위한 사진이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책자에는 이 사진이 실리지 않았다. 관계자들은 이 사진에서 에밀 졸라의 소설 분위기를 읽었지만, 공장의 현대적인 면이 강조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대장간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릴 만큼, 이 사진에서는 20세기보다 18세기 산업혁명이 먼저 떠오른다.

규소폐증에 걸린 광부, 1951

광산촌에서 은퇴한 광부를 담은 사진이다. 규소폐증에 걸려 시한부인생을 선고 받은 모델은 연신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이미 망가진 폐에 독이 되겠지만, 여생이 얼마 되지 않은 그로서는 피우고 싶은 담배라도 맘껏 피우고 싶었을 것이다. 일흔은 되어 보이는 모습이건만, 사진 속 남자는 이때 47세에 불과했다고 한다. 사진을 찍고 몇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직 눈빛도 형형했는데 안타깝다.

뮐레 가, 1934

1910년 생인 작가는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니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아직 충분히 아마추어로 불릴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은 극적인 느낌이 있다. 비내리는 파리의 밤에 홀로 서 있는 택시의 모습이다. 점점 커지는 조명 불빛이 내게로 다가와 꽂힐 것만 같다. 확대해서 방에 걸어두고 싶은 사진이다.

어린 파리지앵, 1952

윌리 로니스를 무척 유명하게 만들어준 사진이다.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바게뜨 빵을 들고 신이 나서 달려가는 꼬마 아이의 상기된 얼굴에서 벅찬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이 사진은 어느 정도 연출되었다고 한다. 빵집 앞에서 줄을 서 있던 아이의 어머니께 아이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요청을 했고, 아이는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서 같은 길을 세 번 달려야 했다. 모르고 본다면, 아니 알고 보았을 때에도 연출이라곤 알아차릴 수 없는 그런 생동감 넘치는 사진이다. 꽤 시간이 흐르고 이 소년의 장모님이 작가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이 사진을 표지로 쓴 사진집 때문에 반가움을 표시한 것이다. 덕분에 작가는 오랜만에 이 사진을 찍은 거리를 다시 거닐었고, 옛 모습 그대로의 빵집도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시간이 흘러 소년은 결코 소년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말이다.

이야기가 많이 숨어 있는 재밌는 사진집이다. 강렬한 사진에 비해서 이야기는 소박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묘사했다. 무려 99세까지 산 장수 사진 작가는 수십 년이 지난 옛 사진들을 설명하면서, 그보다 또 수십 년 전의 사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기억을 회고한다. 작가가 떠올리는 '그날들'에는 무수한 사람들의 인생이 담겨 있다. 그 하나하나의 날들에서 나의, 우리의 '그날들'을 더불어 추억해 본다. 사진이 주는 멋진 선물이다.

이 사진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사진집 하나를 또 주문했다. 마주칠 그 사진들에서 또 어떤 '그날들'을 보게 될지 몹시 기대가 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2-08-04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흑백사진의 매력이 듬뿍!
그날들에 새겨진 누군가의 인생에 경배를 하고 싶어지는 사진들~~~

마노아 2012-08-03 10:26   좋아요 0 | URL
흑백사진이 주는 그윽함과 멋스러움이 참 좋아요.
집에 이런 사진 하나 걸려있음 좋겠어요.^^

네꼬 2012-08-02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덕분에 좋은 책 알았네요. 장바구니로 고고씽. 고마워요!

마노아 2012-08-03 10:27   좋아요 0 | URL
우헤헷~ 오늘의 영업(?) 성공이네요. 네꼬님 좋아하시니 저도 기뻐요.^^
 
별 다섯 인생 -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알라딘 생활을 시작한 것은 2006년이었고, 물만두님을 알게 된 것도 아마 그 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분이라는 것과,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소박하고 친근하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분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물만두님이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책상 위에 엎드려서 꾸벅 절을 하는 모양새로 정수리가 주인공인 사진이었는데, 그 목덜미를 보고서는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페이퍼 중간에 외출을 하지 못한다거나, 핸드폰을 쓰지 않는다거나, 누군가 보내준 어떤 선물을 동생 만순이에게 준다고 하는 것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물만두님의 글은 더 의미있게, 더 깊이있게, 더 절절하게 다가오곤 하였다.

 

이 책은 2003년부터 2007년 1월까지의 기록이다. 맨 뒤에 부록처럼 발췌한 글이 더 나오기 때문에 내가 읽었던 몇몇 글이 겹치지만, 본문의 글은 딱 하나 빼고는 내게는 첫 만남이다. 내가 몰랐던, 미처 만나지 못했던 물만두님의 이야기가 이리 있었구나 새삼 생각하며 짠한 마음이 더 피어오른다.

 

서재에서 왕래하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던 것은 물만두님의 사랑스럽고 건강한 가족분들 때문이었다. 헌신적이지만 자식을 나약하게 만들거나 의지만 하게 두지 않으신 부모님과, 언니와 누나를 사랑으로 대하지만 좀처럭 삭지 않는 유머감각을 갖춘 동생분들이 함께 이루는 조합은 가히 환상이었다. 철마다 꽃사진을 찍어서 몸소 나오지 못한 딸에게 꽃구경을 시켜주는 어머니,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 중 가장 좋은 냄새는 화장품 냄새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난 뒤 몸에 배어 있는 냄새라는 것을 짚어주시는 아버지는 그야말로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림같은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제사상에 올릴 닭의 똥구멍을 막겠다고 닭 모가지를 꽂아놓기도 하는 둥, 시트콤에서 나올 법한 연출도 적지 않게 해주시는 아주 역동적인 가족들이다. 또 무인도에 가져갈 책 한 권을 고르라는 말에 책을 왜 가져가냐며, 살아남을 수 있는 연장을 고르겠다는 현실적인 대답을 해주는 만순양의 매력도 무시할 수가 없다.

 

물만두님의 글들은 우리가 같이 겪었던 지나온 시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라, 그때그때에 물만두님이 느꼈던 감정들이 보다 생생하게 다가온다. 사회적 이슈나 사건에서 겪은 좌절과 아픔, 또 매일매일 숨쉬는 삶의 아름다움과 절박한 고마움들이 오늘 하루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탈하게 지나온 나 자신에게 새로운 감사와 반성을 반복하게 한다.

 

94쪽

세상에 나처럼 한심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또 있을까 싶다가도 이런 내가 없어지면 슬퍼할 가족이 있어 나는 오늘도 힘을 낸다. 힘을 낸다고 해서 나올 힘도 아니지만 그래도 우울하게 지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내게는 우울도 사치다. 감히 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 앞에서 기운 빠진 못난 모습으로 그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기 때문에…….

175

“햇빛 따스한 아침 숲 속 길을 걸어가네.”

CF에서 들은 이 노래를 오늘 종일 흥얼거렸다. 나는 햇빛도 숲 속도 걷지 않았지만 그 좋은 느낌은 잘 알고 있다. 살아 있어서 좋다는 건, 백 번의 불행이 닥쳐와도 단 한 번의 행복이 그 백 번의 불행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삶이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해피데이’라고 하는 건가.

182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

그 누구의 시간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으랴

내 마음 가는 대로 이제는 한 박자 쉬어 보련다.

물론 나중에 가서 쉬지 말걸 하면서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나의 독서가 의무가 아닌 예전처럼 기쁨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천천히 가련다.

217

내가 남긴 날들보다 나를 기다리는 날들이여, 내가 너희를 더 기쁘게 맞이하마. 이제야 그걸 알다니. 나이 든다는 건 좋은 거란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오라, 나를 기다리는 날들이여!

232

어떤 사람은, 자라나는 아이들이 꿈이 없다고 한 말이 안타까웠다고 했다. 나는 반대다. 꿈이란 게 무엇일까. 의사, 박사, 대통령이 되는 거? 그런 꿈을 꿀 바에야 차라리 꿈 없이 살라고 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하면 그건 꿈이 아니라고 하겠지. 농부가 되겠다고 하면 더 큰 꿈을 가지라고 하겠지.

269

나는 오늘 죄인이 되어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픈 사람은 죄인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슬프다. 윤리로 희망을 살 수 있다면…… 윤리로 생명을 살 수 있다면……. 또 다른 생명을 내놓을 사람들을 위해서 울었다. 아무도 생각해 주지 않는 그늘에서 오늘도 웅크리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271

나는 개구리. 돌에 맞은. 그런데 죽지도 않는다. 얼마나 맞아야 죽을까. 나는 진짜 개구리가 아니어서 그런가. 그래. 그래도 아프다. 마음이 죽는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버려 두시길.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는가 보오.

305

나는 비록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없을지라도 지금부터 더 좋은 기억을 쌓아갈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다가오는 매일이 반갑다. 첫사랑은 단 한 번뿐이겠지만 내 남은 하루하루는 매번 첫사랑의 느낌일 테니까.

 

벌써 한 해가 더 지나갔다. 물만두님이 떠나신지... 그날 페이퍼를 통해 부고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문장을 읽는 순간 와락 눈물이 터져나오던 기억이 난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다가도 불현듯 생각이 나서 또 울컥했던 마음도 떠오른다.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 그 사이 물만두님의 글을 엮은 책이 두 권 나왔고, 여전히 그분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많은 분들이 서재를 다녀가신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순간 눈물이 쏟아졌지만, 이 또한 차차 고운 추억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애써 위안해 본다.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었다. 만돌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고책이 잔뜩 올라왔는데 추리 소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물만두님의 유족이 마음이 힘들어 책을 정리하시나... 뭐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그분에게서 책을 구매했는데 공교롭게도 주소가 물만두님 집과 비슷했다. 다만 아파트는 아니었는데 계속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거래를 마쳐보니 계좌 주인의 이름도, 또 책을 발송한 사람의 이름도 다르고 홍씨도 아니어서 내가 혼자 착각하고 마음 아려했구나...로 결론내렸다. 웃길 수도 있는 해프닝이었지만, 물만두님의 생각하면 또 다시 아련해지는 경험이다.

 

건강히 사시지 못했지만, 많은 아픔을 지니고 계셨지만, 당신의 책 제목처럼 별 다섯 인생을 사셨던 아름다운 분을 기억한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또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던 고운 그분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오래오래 고마운 사람으로 추억할 것이다.

 

물만두님, 지금 계시는 곳에서는 아픔 없이, 눈물도 없이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맘껏 웃으며 즐기며 지내시길 소망합니다.

 

덧글)소중한 책에 옥의 티가 있다. 안타깝다.

 

62쪽

3줄 만순이과>>만순이와

마지막 줄 만순이과>>만순이와

75쪽 2줄

그 나이 에 >>그 나이에

96쪽 4줄

엉덩이뼈가 달아서>>>닳아서 아닐까??

134쪽 마지막 줄

부부동반 모임이과>>>모임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셰프의 딸 - 맛있고 심플한 삶, 코즈모폴리탄의 이야기
나카가와 히데코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이력이 무척 흥미롭다. 일본 태생의 귀화 한국인이며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 셰프이고 어머니는 플로리스트이다. 아버지가 서독의 일본대사관 전속 요리장으로 파견되면서 일곱 살에 서독으로 이주해서 3년을 지냈다가 일본으로 귀국했다. 대학을 독일어학과로 진학하면서 교환 유학생으로 '동독'을 택했다. 서독은 이미 경험했던 바, 타고난 호기심과 도전 정신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갔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홀연히 스페인으로 떠났다가 1994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가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요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심지어 한국궁중음식 연구원에서 3년간 공부한 최초의 일본인 수강생이라니, 놀라운 스펙트럼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력이 성인이 되기 전부터 생에 펼쳐져 있었으니, 이런 사람이 평범하게 사는 것도 어쩐지 사회에 못할 노릇이랄까. 남들이 좀처럼 접하지 못할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았으니, 그것을 어디에든 풀어놓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니 저자가 요리 교실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 경험들을 이렇게 책으로 담아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본인이 생각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주변에서 충분히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요리사의 길을 꿈꾸지 않았지만 어릴적부터 자연스럽게 요리하는 아버지를 관찰하며 또 요리에 흥미를 가지는 시간을 보내왔다. 손때 묻은 레시피 노트는 이제 집안의 가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어린 두 아들이 외할아버지와 엄마의 뒤를 이어 요리사의 길을 걸을 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훌륭한 보물이 될 것이다. 수기로 쓴 노트이기에 더 값어치 있어 보인다.

 

아버지는 이미 요리의 장인이고 달인이지만 어릴 적부터 아이에게 그 값어치를 강조하지 않으셨다. 대신 몸소 프로 요리사의 원칙을 지키면서 나태해지지 않는 것으로 아이에게 훌륭한 유산을 물려주셨다. 수프를 내기 전에는 접시를 데워두어야 한다는 지나가는 말들은 강조하지 않아도 아이의 머리속에 잘 각인되고는 한다. 이모는 커피나 차를 내오실 때도 찻잔을 미리 더운 물로 한 번 헹군 뒤 물을 따르셨는데 그 생각이 떠오른다. 한 번도 실천해보지는 않은 것 같지만...;;;

 

독일에서 귀국한 뒤에 저자는 본격적으로 '셰프의 딸'로서 활동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셰프의 조수' 노릇이랄까. 아버지의 피가 흐른 탓인지, 그렇게 정해진 운명인지, 신기하게도 커다란 도마를 앞에 두고 정신을 집중해서 사과 껍질을 벗기고 은행잎 모양으로 썰 때면 학교에서 있었던 싫은 일, 괴로운 일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전략은 확실히 성공했다. 조수 역할을 통해 요리를 만드는 즐거움,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기쁨, 요리와 마주하는 신성한 가치까지도 모두 알게 하신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우신 분이다.

 

 

플로리스트 엄마는 아주 꼼꼼한 분이셨고 오래된 물건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 두시는 분이었다. 저자가 도시락 생각이 나서 우편으로 부탁하자 바로 바다를 건너온 미니 도시락. 어른 숟가락으로 크게 두 번 뜨면 사라질 밥 두덩이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다. 오래되어 옛스럽기는 하지만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고전미가 있다.

 

식탁에서는 애들을 절대 혼내면 안 된다는 일본 어머니의 한 마디도 인상 깊다. 식사만은 언제나 즐겁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이 한 마디는, 밥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우리의 전통 가르침과도 통한다. 물론, 절대로 쉽지 않음을 알지만!

 

저자의 어머니는 365일 내내 손수 만든 간식이 없는 날이 없게 하셨다고 한다. 세상에! 정성과 노력도 대단하지만, 그런 게 가능한 삶이란 경제적으로 얼마나 풍족한 것일까? 최소한 삼시 세끼 걱정은 절대 없는 삶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저자의 화려한 이력을 생각할 때 남다를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쯤에서는 좀 질투가 나려고 한다.

 

저자는 '엄마의 맛'을 언급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맛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엄마가 곧잘 해주셨던 감자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감자를 소금 간 약간 해서 으깬 다음 갖은 야채와 함께 마요네즈로 버무린다. 그리고 식빵에 발라서 먹으면 무척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먹어본지 한참이다. 지난 여름에 한 번 해주셨는데 다이어트 중이라 먹지 못했다.ㅜ.ㅜ 크리스마스를 기념 삼아 좀 해달라고 졸라보련다. 6^^

 

대학 시절 기숙사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이 가득했는데, 그들이 서로 자국의 요리를 만들어 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무척 흥미다 돋고 부러운 추억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가사 선생님이 졸업생이 일본에서 자국 요리를 대접할 기회가 생겼는데 할 줄 아는 음식이 없어서 김밥을 말았다는 소식에 무척 안타까웠다는 얘기를 하신 게 떠오른다. 지금이야 워낙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으니, 급하면 레시피를 긁어와서 어떻게든 시도는 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이런 날을 대비해서 나만의 필살 요리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리를 해보았지 시리즈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가....;;;;;

 

저자가 동독 유학 시절에 식재료 배급에 깜짝 놀란 사건도 이채로웠다. 일본에서 보내온 카레가루로 모처럼 포식할 기회가 왔는데 한 동양인 유학생이 카레가루를 나눠줄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누군가 했더니 북한에서 왔다고 한다. KAL기 폭파 사건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지라 위화감에 거절하고서 마음이 불편했다고... 동족이라 그런지 괜히 더 짠하다. 그이도 피해자일 텐데 말이다. 먹는 것 가지고... 흑흑...ㅜ.ㅜ

 

집으로 돌아갈 무렵 짐을 쌀 때 기숙사 친구가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 얘기하는 부분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언젠가 동서독이 통일 되면-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통일이 당연한 거라고 여기지도 않고, 아예 아웃 오브 안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참으로 아프고 씁쓸한 일이다.

 

바르셀로나 시장의 모습이란다. 확실히 남부 유럽이란 생각이 든다. 침 넘어가는 과일들이다.

 

남편과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도 음식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에 에피소드가 떠오른다고 하는 셰프의 딸. 내게도 그런 음식이 있던가..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니 떠오르는 게 있다. 오래 전 남자친구가 우리가 맞은 첫번째 크리스마스 때 배고픈데 내내 걷기만 해서 붕어빵이라도 사오라고 했더니 정말 붕어빵을 사와서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네. 그 녀석이 며칠 전 통화에서 와이프가 임신 6주라고 했다. 하하하... 역시 씁쓸하다. 끙!

 

 

저자가 운영하는 요리 교실의 간판이다. 구르메 레브쿠헨. 저자의 작은 아들이 흰 도자기 접시에 그린 그림이다. '구르메'는 프랑스어로 '미식가, 식도락가'라는 의미다. '레브쿠헨'은 독일어로, 진저브레드 같은 독일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과자를 뜻한다고... 아아, 진저브레드도 처음 듣는 것을...;;;

 

아무튼, 저자의 코즈모폴리탄스러운 이력이 들어나는 간판 되시겠다. 귀엽고 정감이 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면서 보아서는 정체를 알기 어려울 듯하다. 그 비밀스러움이 또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책 속에서 소개된 음식들은 파트가 끝나면 레시피가 뒤쪽으로 실렸다. 여러 요리들이 있었지만 감히 시도해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내 수준은 아직 '작품'을 모방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책을 꽤 오랜 시간 걸려서 읽었다. 바쁜 일이 많이 겹치기도 했지만, 한 번에 주르륵 읽기보다는 조금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기도 했다. 맛있는 메뉴가 많이 등장했지만 눈으로만 맛볼 수가 있어서 때로는 고문이기도 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음식은 '죽'이다. 아픈 사람에게는 최고의 영양식, 더불어 만드는 사람에게는 꽤 정성을 요구하는 따뜻한 음식 말이다.

 

요리하는 사람은 정직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리가 맛에 있어 정직한 것처럼 말이다. 여러 나라의 색깔이 들어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등돌리지 않고 하나로 섞여서 제 멋을 내고 있다. 저자의 삶이, 그리고 요리의 맛이 그래 보인다. 과하게 힘주지 않고 오버하지도 않는 담담한 말투는, 비록 번역이라는 중간 과정을 한 차례 거쳤지만 진솔함을 담아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간에 보다 어울리는 책이기도 하다.  

덧글) 오타가 있다.

165쪽 4줄 스페인이 EU 회원국이 되어 값는 하고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1-12-1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겠네요. 일본인들 특유의 장인정신도 엿보이고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니 자식이 요리에 대해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겠어요.
마노아님 한참 제빵에 몰두하던 이야기, 저도 이 리뷰 읽다보니 생각나요. 그런데 저 위의 레시피를 보니 전문가라서 그런지 그리 간단해보이지 않아요. 벌써 집에 없는 재료가 등장하면 저는 움찔 ^^ 저의 초간단 요구르트 케이크 레시피가 초라해보이네요 ㅋㅋ
마노아님의 붕어빵 에피소드도 재미있고요. "붕어빵이라도 사와라"고 말하면 남자들은 정말 충실하게 붕어빵을 사오지요. 정말 붕어빵이 먹고 싶어서 "붕어빵 사와라"해도 정말 붕어빵만 사면 될까? 수십번 생각해보는 게 여자들이고요.
음식 하나에 웃음 나기도 하고 눈물 나기도 하고... 요리사는 정말 책 쓸 소재가 많을 것 같지요?^^

마노아 2011-12-12 16:13   좋아요 0 | URL
일본인 특유의 장인정신이 늘 부러워요. 굉장한 자산으로 보여요. 그런 것들이 일본을 튼튼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오늘 모처럼 자극 받아서 팬케이크를 구웠는데 엄마가 한 입 드시더니 포크를 내려놓으시네요. 이번에도 실패예요..;;;;
저 레시피는 그나마 좀 짧은 레시피였어요. 저는 읽으면서도 @.@;;;; 상태가 되었답니다.ㅎㅎㅎ
남자와 여자의 언어는 참 다르고 그래서 재밌어요. 분란도 많지만요.
요리하는 사람, 참 로맨틱하게 보여요.^^

2011-12-12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1-12-1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일까 궁금했는데 정말 흥미로운 책이네요.^^
결혼하고 살면서 가끔 엄마의 맛이 생각나요. 어떤 음식이든 만들어 놓고 왜 나는 엄마가 만들었던 그 맛이 아닐까를 생각하거든요. 남편은 제가 만든 것을 먹으며 시어머니의 음식맛과 다른 걸 느끼는 것 같기도 하구요. 각기 엄마의 맛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아요. 저희 엄마도 늘 손수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하셨는데 전 귀찮아서 잘 안해주거든요.

마노아 2011-12-13 10:52   좋아요 0 | URL
엄마가 최고의 요리사는 아니지만 엄마의 맛이 주는 그 향수와 추억, 그리고 정성을 따라잡을 수 있는 음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시어머니가 음식을 잘하면 며느리는 꽤 스트레스를 받을 거예요.. (>_<)

꿈꾸는섬 2011-12-13 20:21   좋아요 0 | URL
저희 시어머니는 조미료를 많이 사용하셔요. 건강에 좋지 않다고 드시지말라고 해도 맛이 안난다고 꼭 넣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처음엔 남편이 제 음식 맛에서 느끼지 못하는 조미료 맛을 이제는 시댁가서 느끼죠. 이제는 제 음식맛에 길들여져서 시어머니 음식보다 제가 해주는 게 더 좋다고 아부를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구요. 저희 시어머니께선 제가 있으면 절대 음식 안 하세요.ㅜㅜ 저도 누군가 해주는 음식이 먹고 싶은데 말이죠. 그래서 더 친정이 좋은가봐요.

마노아 2011-12-13 23:41   좋아요 0 | URL
울 엄니도 사실 조미료를 좀 많이 쓰셔요. 언니는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아서 무미하지만 엄마는 많이 쓰니까 아무래도 맛은 더 있죠. 형부가 그래서 엄청 좋아했다가 이제는 조미료의 힘을 알아차렸어요. 그래도 기본 손맛이 있어서 조미료를 빼도 엄마 맛이 더 맛있을 거예요.
시어머니와 친정 엄마의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해주는 시어머니들이 필요해요. 꿈섬님은 며느리 생기면 꼭 그렇게 해주세요.^^
 
외로워서 그랬어요 - 열일곱을 위한 청춘 상담, 2011년 문광부 우수문학도서
문경보 지음 / 샨티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경보 선생님의 책은 이전에도 자주 나를 울렸다. 이번에도 피해갈 수 없는 코스였는데 하필 그런 책을 지하철 안에서 읽은 게 실수였다. 그날은 언니가 준 메이크업 상품권으로 모처럼 풀메이크업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나는 내내 훌쩍였고, 화장을 마친 뒤에도 콧물이 나와서 혼이 났다.  

문경보 선생님은 대광고등학교에서 22년 동안 국어 교사를 맡으셨다. 내가 교생실습을 갔던 곳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글은 더더욱 현장감 있게 그려지고 다가온다. 건강의 악화로 한 템포 쉬어갈 짬을 만든 선생님은 상담심리학을 공부하셨고, 이젠 학교를 떠나서 전문 상담가의 길을 걷고 계시다. 이 책에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집단 상담 프로그램 '효도의 길'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부모님을 비롯한 보호자를 모신 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미리 작성한 편지글을 읽을 때면 학생도 참관한 가족도 모두 눈물 바람이 되기 일쑤였다. 

진수가 쓴 글은 짧았다. 글씨는 당연히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 엉망인 글씨를 쓰기 위해 뇌성마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진수가, 손을 사용하기가 부자연스러운 진수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나는 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저를 평범한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이렇게 평범하게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힘드셨어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110쪽

평범하게 사는 일이 모두에게 어렵긴 하지만,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진수에게는 '평범'이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아득한 거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을 온몸을 던져 일궈주신 할머니의 헌신과 그에 대한 고마움이 짧은 글속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지금 있는 학교에서도 뇌성마비를 앓는 학생이 있는데 수업시간에 엄청 집중해서 듣고 시험기간이 닥치면 엄마가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서 모두 필사를 해주신다. 그리고 그걸 통째로 외어와서 시험을 본다고 하는데, 학급에서 줄곧 탑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에 결석하지 않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그 위에 더 큰 노력을 더하고 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아들! 울지 마! 난 네가 담배보다 소중해. 왜 담배 때문에 우리 아들이 울어야 해? 괜찮아. 울지 마. 엄마 괜찮아!” -141쪽

고생고생하며 자신을 키우신 엄마에게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편지를 읽다가 울어버린 아들에게 뒤에서 듣고 계시던 엄마가 벌떡 일어나 괜찮다고 말하는 이 장면도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맞는 얘기다. 담배보다 당연히 아들이 더 소중하다. 야단만 치고 다그칠 일이 아니라 먼저 보듬어주고 품어주는 게 우선이었다. 레벌루션 넘버0에서 아들이 교사에게 맞아 이빨이 나갔는데도 으레 아들 잘못이겠거니 여기며 왜 맞았는지 묻지도 않던 아빠가 떠오른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선순위를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지 되짚어 볼 일이다.  

저는 제 아들들이, 그리고 여기에 앉아 있는 노민이 친구들이 모두 앞으로 더 건강하고 물질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부모님 때문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들들의 등에서 히말라야 산을 오른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린 것처럼, 여러분 자체로 우리 부모들은 이미 충분히 부자가 되어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우리 부모들에겐 최고의 보석이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건강한 부자들이 되기 바랍니다.-150쪽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두 아들이 번갈아 가며 업고서 등산을 했던 이야기가 나온 뒤 아버지가 아들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전해주신 얘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들려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너 왜 그 학교에 가고 싶니, 너 왜 그 학과에 진학하고 싶니,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이런 질문들을 받는 학생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다. 열정보다 중요한 것이 열정을 쏟는 방향이라고, 또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모님께 보석이라는 것도 꼭 알아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건강한 부자가 되기를! 그것이 물질적인 의미뿐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로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추천사에도 나오지만, 선생님의 상담 공부는 아직 시작 단계인지라, 때로 열정이 앞서서 아주 적합한 조언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이면에 깔린 학생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뜨거운 우정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에 열일곱 새파란 청춘들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마음에 기대었을 것이다. 

제목처럼, 아이들의 많은 일탈들은 외로움에서 기인했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싶게 가혹했고, 세상은 이 상처입은 아이들에게 늘 차가운 등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그 아이들에게 슈퍼맨처럼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줄 능력이 누구에겐들 있을까. 그렇지만 그 아이들의 거친 손을 보듬어 주며, 네가 외로워서 그랬구나, 속상해서 그랬구나...라며 그 마음부터 인정해주고 다독여주는 일은 고맙고 따뜻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런 위로는 어린 학생들 뿐아니라 이미 다 큰 어른들도 늘 마음으로 필요로 한다. 그만큼 외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은 학생들에게도, 학부모에게도, 교사에게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감동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제 비록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셨지만, 다른 자리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외로운 청소년들에게 힘이 되어줄 길을 모색하고 계실 것이다. 다음엔 교단 에세이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우리를 찾아주지 않으실까.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무르며 가슴 적시는 이야기를 해주셔야하니, 당신의 건강도 꼭꼭 챙기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렇게 새 힘을 얻은 제자들이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내게 훌륭한 멘토가 있었다는 걸 그 아이들의 아이들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덧글)예쁜 책에 오타가 몇 개 있다.  

51쪽 세 번째 줄 사의 화원 >>천사의 화원
72쪽 쌩까고 지네요. >>>지내요.
152쪽 윤향기 작사작곡>>>윤항기
185쪽 처리해야 한 가지 일>>>처리해야 할 한 가지 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11-09-30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악, 단락이 또 제멋대로 이동했어..ㅜ.ㅜ

개인주의 2011-09-3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학생들이랑 가까운 곳에 있습죠..
학생들 지켜보면..ㅆㄱㅈ 생각이 들다가도
금방 '불쌍한 것들' 생각이 들어요.
교사와는 다르니까 친근하게 혹은 만만하게 일상을 까놓는 위치다 보니..-ㅗ-
고놈들....외로움.
털어버릴 수 있는 대안이 없어서 더 외로워하고 날카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당..
이럼서..
애들 보면 짜증냄.;


마노아 2011-10-02 23:11   좋아요 0 | URL
학교 현장에선 그 두 마음이 늘 부딪혀요.
한숨도 나오고 안타깝기도 하고요.
우리 마음도 갈대 같아요.^^;;

같은하늘 2011-10-0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이들도 이런 시기를 거쳐갈텐데...
미리미리 읽어보고 공부(?)해둬야 할라나 보다.

마노아 2011-10-02 23:12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이에요. 문경보 샘의 다른 책들도 같이 읽어보셔요.^^
 
공차는 아이들
김훈 글, 안웅철 사진 / 생각의나무 / 2006년 8월
절판


안웅철 작가가 사진을 찍고 김훈이 글을 썼다.
껍데기를 벗기면 책 속 표지와 좌우가 반전된 것을 알 수 있다.
저리 붙여 놓으니 꼭 그 노래가 떠오른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표지 뒷면으로 가서 떡하니 마주칠 것 같은 표지 속 인물들이다.

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2006년에 김훈은 크레타 섬을 여행 중이었다고 한다.
사진 속 돌 무더기 앞의 김훈 작가가 엄청 부럽다. 그 어디서나 그의 포스는 남다른 빛을 발휘한다.

책의 앞머리와 뒷머리를 장식한 문장이다.
저렇게 보니 축구가 인생 그 자체다.

아이는 인간과 세상 전체를 끌어안고 있다. 아이의 머리도 둥글도 눈도 둥글고 공도 둥글다.
//
생명의 힘으로 차올린 공이 풍경 위에 떠 있다.
허공 속에서 공은 많은 천체들과 함께 운행하는 인간의 별처럼 보인다.
높이 뜬 공이 풍경 전체를 사람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공을 향해 벌린 인간의 두 팔은
비바람 속에서 자족한 나무의 모습이다.

//

아이의 해맑은 눈망울이 정말 둥글다. 보는 것만으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두 팔 버린 인간의 모습도, 그늘진 사진 속에서 경이롭기만 하다.
인간이 있기에 완성되어 보이는 사진들이다.

아이들은 주변의 모든 공간을 놀이터로 바꾸는 능력이 있다.
노는 아이들을 들여다보면 놀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임을 알 수 있다.
놀이는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
아이의 얼굴에 천진한 웃음이 가득하다. 오로지 공밖에 보이지 않는, 놀이에 집중한 모습이 보기 좋다. 저렇게 뛰어놀아야 하는 아이들인데, 저런 모습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발바닥의 굳은살이나 닳아진 구두의 뒤축에는 체중이 시간을 통과해나간 무늬가 찍혀 있다.
//
오늘같이 살이 익을 것 같이 뜨거운 날에는 안면 몰수하고 저렇게 물 속에 뛰어들어가 놀고 싶다. 그 안에 공까지 있으면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실컷 놀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돌아오는 길이 난처하겠지만...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감이 느껴져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 구석의 두 아이가 엄청 예쁘다. 두 팔을 뒤로 젖히고 힘껏 발을 차보지만 공을 빗나간 듯 보인다. 그 앞의 쬐만한 여자아이도 공을 향해 제 몸을 움직이고 있다. 조준은 잘하지 못해도 그 자체로 충분히 신나고 근사해 보이는 아이들이다. 짧은 팔다리이기 때문에 더 예쁜 모습도 분명히 있다.

이 풍경 속에서 공을 차는 인간들은 타워크레인에 짓물려 있지 않다. 크레인 아래서, 사람들은 강건하다.
//
공차기는 속박과 비상 사이의 떨림이다.
그래서 공을 차는 인간은 때때로 하늘을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

//

요새는 크레인의 철골 구조를 보면 가슴이 묵직해진다. 입가에 맴도는 말들을 다 뱉을 수가 없다.

아래 사진은 아마도 족구? 족구할 때 쓰는 공은 무얼까? 축구공은 아닐 것 같은데 배구공? 아니면 족구용 공이 따로 있나?
군인들은 족구나 축구 하는 시간이 각별한 여가일 것 같은데, 그것도 취미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잠시 안쓰러웠다.

공을 찬 아이의 동작이 문득 멈추어 있고, 공은 갈 곳이 없는데
공을 찬 아이의 그림자와 돌아서서 가는 아이의 그림자가
같은 시간의 햇살에 길게 빗겨 있다.

//

이 사진은 어쩐지 사연이 있어 보였다. 같이 놀았을 아이 중 하나가 돌아서 가고 있다. 뒤에 공차던 아이가 놀렸던 것일까? 그래서 토라져 돌아가는 것일까? 그림자는 같은 방향이지만 아이의 마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아서 어쩐지 몹시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분명히 다음 날은 다시 공을 차며 씩씩하게 놀았을 것만 같다.
공의 힘을 빌려, 놀이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1-07-1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이 책 참 좋게 보았던 기억이 나요.^^
다시 들춰봐야겠어요.

마노아 2011-07-18 22:58   좋아요 0 | URL
김훈 작가의 육성이 들리는 것 같았어요. 사진도 좋고 글도 좋구요.
괜찮은 사진집을 보고 나니 기분이 참 좋아요.^^

양철나무꾼 2011-07-1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으면서...김훈은 소설보다 이런 글들이 더 좋다고 느꼈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 사진...님의 해석도 좀 좋아요.

외롭고 쓸쓸하시다지만, 덕분에 전 한껏 훈훈해지는걸요~^^

마노아 2011-07-19 11:10   좋아요 0 | URL
듣고 보니 그러네요. 김훈은 순수 창작 소설보다 어딘가 기대어서 얘기할 때 더 빛나던 작가였어요.
그러니까 모델이 있는 소설(이를테면 칼의 노래처럼...) 말이죠.
누군가는 그게 서사가 약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럴지도 몰라요.^^;;
아무튼, 이렇게 짧고 굵게 마주치는 그의 글들이 참 좋습니다.^^

꿈꾸는섬 2011-07-20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 너무 좋은데요. 전 몰랐던 책이에요. 찾아보고 싶어요. 근데 품절이네요. 도서관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마노아 2011-07-20 02:19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이 품절되면 너무 안타까워요. 도서관에는 이 책이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