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낳은 후궁들 표정있는 역사 8
최선경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소 TV를 즐겨보지 않는데 요즘은 사극 보는 재미가 솔솔 납니다. 주말 KBS의 <대조영>을 비롯해 MBC의 <이산>, SBS의 <왕과 나>가 재미있습니다. 판타지 사극이라 스스로 칭한 <태왕사신기>도 있으나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이 1% 정도 가미된,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두 허구인지라 별 재미가 없습니다. 아니, 10대 때부터 궁궐보다는 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광개토대왕을 왕위쟁탈에 목숨을 건 나약한 임금으로 그리고 있으니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속이 상합니다. 저렇게 만들 걸 왜 하필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입니다.

<왕과 나>는 조선 9대 왕인 성종의 스토리보다는 당시 내시였던 김처선이 주된 역할을 합니다. 김처선은 문종 때부터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자그마치 6명의 왕을 섬긴 조선전기 최고의 환관이었습니다. 연산군 때 극간을 하다 참혹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왕과 나>에서는 자을산군(훗날 성종)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때 소화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훗날 연산군을 낳은 폐비 윤씨가 바로 이 여인입니다. 김처선, 윤소화(폐비 윤씨), 성종 이 세 사람이 드라마 <왕과 나>의 주요 인물입니다.



폐비 윤씨의 이야기는 사극의 단골 소재입니다. 아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진실을 알게되면서 폭군으로 전락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익숙합니다. 폐비 윤씨는 조선시대 후궁이 왕비로 책봉된 몇 안 된 사례 중 하나입니다.

『왕을 낳은 후궁들』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궁이 왕비로 책봉된 경우는 문종비 현덕왕후와 예종비 안순왕후, 성종의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 숙종비 희빈 장씨가 전부입니다. 성종 4년(1473) 윤씨는 훗날의 정현왕후 윤씨(훗날 중종을 낳음)와 함께 후궁으로 간택됩니다. 당시 폐비 윤씨는 29세, 정현왕후 윤씨는 12세였습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는 구혜선이, 정현왕후 윤씨는 이진이 맡았습니다. 그 외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역은 양미경이, 성종의 친모인 인수대비(소혜왕후) 역은 전인화가 맡았습니다.

인수대비 한씨는 조선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유학자였습니다. 여성 한학자로서 도덕적 유교사회의 여성상을 정리하여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나름의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쓴 책대로 왕실을 지켜가는 것을 이상으로 살았을 테지만 그녀가 신봉한 유교적 질서와 예법은 다른 여성, 특히 며느리에게는 큰 고문일 수밖에 없었다. (p.62)

『왕을 낳은 후궁들』의 저자 최선경은 여성의 관점에서 이렇게 평했습니다. 인수대비와 성종, 폐비 윤씨와 연산군의 이야기는 고부간 갈등의 되표적인 사례로 전해내려 옵니다. 훗날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며칠만에 죽게 만듭니다.






<이산>의 주인공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 이산입니다. 드라마 제목을 '정조'라 하지 않고 '이산'이라 했으니 아마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출 모양입니다.

정조는 세종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현군이며 업적을 많이 남긴 왕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그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으며, 즉위과정에서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즉위 후에도 끊임 없는 살해 위협을 받았는데, <이산> 지난 주 내용이 바로 성인이 된 정조의 침실에 자객이 침입하여 이산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오늘 드라마를 보아야겠으나, 이덕일이 쓴 『조선왕 독살사건』을 보면 정조를 시해하려 한 것이 세 차례 있었는데, 첫번째 사건은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이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켰다고 합니다. 대궐에 암살단을 난입시킨 것은 조선의 국가 체제가 갈 데까지 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후 두 차례 더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정조와 당시 노론 세력은 이미 군신관계가 아니라 정적 관계였던 것입니다. 정조는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왕과 나>의 성종이 재임기간 동안 정비 세 명과 후궁 열 명을 두었고, 그 자손만도 16남 12녀로, 여색을 즐겼던 왕임에 비해 <이산>의 정조는 민생정치를 펴려했던 그의 이미지와 비슷한 대체로 정숙하고 근검절약했던 왕비와 후궁과 함께 했습니다. 한 명의 왕비와 네 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정조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 들어 후궁으로 삼았던 경우는 의빈 성씨가 처음이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이산>은 의빈 성씨(한지민 역)를 주요 인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누이, 즉 정조의 고모인 화환옹주와 대결 구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화환옹주는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장본인 중의 하나입니다.





『왕을 낳은 후궁들』은 여성문화유산 해설사라는 독특한 이력의 저자 최선경이 쓴 것으로, 후궁들의 이야기만을 담은 매우 보기 드문 역사책입니다. 조선사회의 축첩 제도가 여성의 적을 여성으로 만든 비인간적인 제도였는데, 이 책은 후궁들을 왕실 암투의 진원지이지 악의 화신으로까지 그렸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의 시각에서 재조명한 점이 돋보입니다.

폐비 윤씨는 자신에게 사약을 내린 성종을 원망하기보다는 다른 두 후궁 엄씨와 정씨를 저주했다. 반면 장희빈은 그 책임을 숙종에게 물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자신의 아들을 성불구자로 만든 것은 숙종과 왕실에 대한 복수이자 부계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다. (p.120)

이러한 참신한 시각을 가졌다는 점 외에도 이 책은 사극을 보기 전에 배경지식으로 참 유용합니다. <왕과 나>를 보기 전에 2편 '조선 최초의 왕비 살해사건 -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편을, <이산>을 보기 전에 6편 '아들을 버린 어머니 -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편과 7편 '대비가 된 후궁 -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편을 읽으면 참 많은 도움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리라이팅 클래식 7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이맘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올해는 무척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 모두 그렇습니다. 행복하면서도 고단한 날들의 연속, 아마 연말까지 가야 그 끝이 보일 것 같습니다.

철학책은 대단한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지식의 수동적 습득이 아니라 철학자의 사유 과정을 좇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저는 철학책을 진지하게 읽을 형편이 아닙니다. 나의 사유는 수시로 끊기며 정신은 늘 피로합니다. 철학의 통과의례라고 불리우는 칸트를 통과하기에 지금의 제 사정은 여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입니다. 진은영이라는 저자 덕택에 완전히 저 세상 얘기 같던 칸트의 말들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좀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칸트적 사유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오성'의 영역인데 반해 느끼는 것은 '직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그토록 힘주어 얘기하는 '오성'을 저는 그저 조금 느낄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한 발전입니다.

그린비의 《리라이팅 시리즈》 제7권 -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읽었습니다. 고미숙의 《열하일기》를 통해 고전에 대한 거부감이 일소되고, 고병권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철학을 사랑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느낌과 감동을 그대로 이어, 진은영 판 《순수이성비판》을 읽었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성취감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 쓴다고 해도 칸트의 텍스트 자체가 가지는 난해함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철학은 철학자의 사유의 체계를 따라 밟아나가는 것인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철학자만의 사유의 틀을 좇는다는 것은 그만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의 언어를 통해 그의 사유의 틀을 잠시라도 빌려와 사유하는 것 - 철학하는 진정한 재미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전공자가 아닌 대개의 사람들이 '철학하기'를 포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칸트와의 조우(遭遇)

진은영이라는 입담 좋은 가이드가 없었다면 제 평생 칸트와의 여행을 시작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오전 4시 55분에 "일어나실 시간입니다!"라는 시종의 말에 벌떡 일어나, 오후 네 시에 언제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코스를 산책했다는, 마치 자명종과도 같았다는 칸트의 무미건조한 라이프 스타일. 어렵사리 교수직을 맡고도 11년 동안 이렇다할만 저작도 없이 침묵으로 보냈던 재미없는 철학 교수. 혼자 심사숙고 끝에 나이 쉰 일곱에 재미없는 책 한 권 출간했으나, 누구는 마치 '상형문자'와도 같다고 하고, 누구는 '신경을 쇠약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화를 내며 덮었다는 그 책. 소심함과 약간의 비겁함. 볼품없는 왜소한 체구. 엉뚱한 돈욕심. 이러한 그와 그의 작품들을, 순전히 '자발적으로' 가까이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병권에 의해 니체가 근거리로 다가왔듯이 - 물론 그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진다는 의미입니다. - 진은영에 의해 칸트를 친구로 맞을 준비를 하게 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니체보다 칸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규칙적인 생활, 반복되는 일상, 그러나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사유체계를 만들어갔던 그 저력 - 마치 우보천리(牛步千里)하는 듯한 여일(如一)함. 화려한 기교는 없으나 독일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버린 그 힘. 어딘지 모르게 내가 닮고자하는 삶에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문제를 만드는 능력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텍스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철학하기'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반성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문제보다는 답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철학책을 읽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고, 또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더라,에서 그치는가 하면, 그래도 좀 더 나아가 누구의 생각이 옳다는 식으로 답을 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칸트의 이 책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수십페이지 요약본을 보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들뢰즈는 말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플라톤주의자, 데카르트주의자, 혹은 칸트주의자로 남을 수 있는 것은 그 철학자들의 개념이 우리들의 문제들 안에서 다시 활성화될 수 있으며, 우리들만의 고유한 개념들을 창조하는 데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문제는 '문제'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누군가가 문제를 내고 그 답을 찾는, 일종의 노예상태를 벗어나, 스스로 문제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
초월적인 존재의 가정 없이 사물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흄의 강력한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칸트는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스스로 그만의 답을 찾습니다. 이성이니 오성이니 직관이니 감성이니, 그가 선택한 단어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칸트에게 다가가는 첫 번째 문입니다.

무능력한 사람이란 이미 주어진 문제에 대해 답을 못 찾는 사람이 아니라, 도무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거나 잘못된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민왕과의 대화 - 미완의 개혁군주, 이야기마당에 서다
이기담 지음 / 고즈윈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정말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체력이 곧 경쟁력이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이럴수록 생각은 더욱 단순해집니다. 제 좌우명인 <방법은 없다>가 이럴 때 유용합니다.
오늘 독서노트 주제와는 상관없는 좀 엉뚱한 얘기기는 하지만 산적한 일을 기분 좋게 처리하고 한 주를 여는 월요일 아침을 의욕적으로 맞이하고자 제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을 먼저 반추하고 출발하려 합니다.
어떤 말을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위력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제 그 말처럼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조금 힘든 일이 있을 때 노신 선생의 말을 떠올립니다. 혁명의 시대를 살다간 노신 선생조차 "완전히 가시덤불 뿐이어서 전혀 걸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노신 선생의 산문을 엮은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삶>이란 기다란 길에는 두 개의 큰 난관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기로>입니다. (...) 그러나 나는 울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습니다. 먼저 기로에 앉아 한숨을 쉬거나 한잠 자고나서 갈만하다고 생각되는 길을 골라 계속 걸어갑니다. 혹시 성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서 음식을 얻어 요기를 좀 할지는 모르나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도 길을 모르리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범을 만나면 나는 나무에 기어올라갑니다. 그놈이 기다리다 못해 배가 고파 가버린 다음에 내려옵니다. 만약 그놈이 가지 않으면 나는 나무에서 굶어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은 다음에 시체마저도 그놈에게 먹히지 않기 위하여 죽기 전에 내 몸을 나무에 비끄러 매어 놓습니다. 그런데 만일 나무가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별 수 없이 그놈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도 그놈을 한입 뜯고 죽을 겁니다.
둘째는 <막다른 길>입니다. (..) 그러나 나는 기로에서 하던 방법대로 뛰어들어가서 가시덤불 속을 걸어갑니다. 나는 아직 완전히 가시덤불 뿐이어서 전혀 걸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원래 막다른 곳이라는 게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노신 선생은 이렇게 말한 뒤 고통을 이기는 데에는 <방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방법이 없으니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온몸으로 부딪쳐 보라는 말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서설이 길어졌습니다. 각설하고, 오늘의 책은 이기담이 쓴 <공민왕과의 대화>입니다.

TV를 거의 보지 않는데 우연히 몇 번 <신돈>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보석이 공민왕으로 분하고 손창민이 신돈으로 나오는 역사 드라마인데, 항간의 평가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재미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요승으로 낙인이 찍힌 신돈,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사랑,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어떻게 그려갈지 모르겠으나 그 주제만으로도 눈길을 끌 만하다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 고려의 왕인 공민왕의 사당이 있습니다. 공민왕의 사당 안에는 위패 대신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그 영정을 보면 공민왕 곁에 노국공주가 함께 있습니다. 조선의 종묘에 고려의 왕이라, 게다가 원나라 노국공주의 영정까지... 공민왕이 지닌 역사적 의미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공민왕의 개혁 - 거기서 빠질 수 없는 노국공주와 신돈에 대한 얘기까지를 저자와 공민왕과의 대담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저자가 묻고 공민왕이 대답하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읽기가 참 편합니다.
공민왕의 평생의 화두이자 목표였던 '개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가 주된 내용입니다.

공민왕은 그 당시 대개의 왕족이 그러했듯이 원에 질자(=볼모)로 가서 한동안 있게 됩니다. 거기서 노국공주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 덕택에 고려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원에 있는 동안 조국 고려를, 그리고 원의 힘과 또한 그 종말의 기운을 보게 된 공민왕은 고려에서 개혁의 칼을 빼듭니다. 다행히 그 곁에는 노국공주가 있습니다. 원의 공주이면서 철저한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연인 그 이상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노국공주. 그러나 출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갑니다.
노국공주 사후 공민왕은 신돈을 앞세워 개혁을 이어갑니다. 절의 노비 출신이어서 정식 승려조차 될 수 없었던 신돈에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내어주고 개혁을 진두지휘하게 합니다. 그렇게 6년이 흐른 후, 그러나 왕은 하루아침에 그를 수원에 유배시켰고, 불과 사흘 만에 처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노국공주와 신돈의 얘기가 전부는 아닙니다. 공민왕의 23년 재위 기간 중 신돈과의 일은 마지막의 일이며 그것도 6년 여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 전에 공민왕 곁에 노국공주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연경 볼모 시절부터 함께한 조일신으로 대표되는 측근 세력과 이제현으로 대표되는 신흥 유학자 집단이 늘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변란을 피해 불타버린 개성의 복구를 기다리며 흥왕사에 있을 때 자칫 죽임을 당할 뻔 했던 그 때,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가라"고 호통쳤던 노국공주를 빼놓고서는 공민왕을 얘기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공민왕 개혁의 하이라이트 역시 신돈과 함께한 그 6년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을 통한 토지개혁, 성균관 중수와 유학 개편, 과거제도 개혁을 통한 신진 세력의 등용 등. 따라서 공민왕을 얘기할 때 으레 노국공주와 신돈이 따라다니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연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노국공주도 죽고, 지치고 힘들었을 때 유일한 개혁 카드였던 신돈조차 제손으로 처형하고, 그리고 불과 4년 뒤 공민왕마저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책을 덮어도 공민왕의 말이 맴돕니다.
"나는 지쳤고, 측근들도 없었소. 하지만 개혁에 대한 꿈을 꺾을 수는 없었소. 하여 신돈을 선택한 것이오."

오직 새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순수했던 초야 신진 세력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사적 집단을 형성하고, 어려운 시절 함께 했던 측근들조차 세력을 형성하여 오히려 왕을 위협하게 되자 왕은 그들 모두에게 칼을 댑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근들 지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개혁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신돈. 현실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특출한 인물이었던 신돈이 바로 적임자였던 것입니다.

대내적으로 개혁 주도 세력이 성숙하지 않았고, 대외적으로 원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던,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고, 시도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던 그 때, 그래서 개혁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그 때, 공민왕은 그의 재위 기간 내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공민왕은 줄기차게 개혁을 이끌었고, 그러나 그 개혁은 끊임없이 저항을 받았습니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이 미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미완의 개혁으로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바로 그 개혁에 저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개혁을 저지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주간의 국어여행 - 2009년 최신 개정판
남영신 지음 / 성안당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우리말의 맞춤법은 어렵고 까다롭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말보다 더 쉬운 말은 무어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영어가 그러한가요? 아니면 일본어, 중국어가 그러한가요? 다른 나라 말을 익히기 위해 문법과 맞춤법을 공부하는 노력의 반만 투자하더라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쓰기에 큰 불편함이 없다고 하여 굳이 속속들이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런 글이라도 정기적으로 쓰고 있기에 그때그때 사전을 찾아보며 헷갈렸던 표현을 바로잡는 정도입니다. 다행히 인터넷 국어 사전이 있어 종이 사전을 일일이 들출 필요도 없이 매우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이듯이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만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말글을 제대로 쓰고 표현하기 위해 맞춤법과 문법에 조금이라도 투자할 용기가 있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교양서가 아닙니다. 국어 관련 시험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책입니다. 예를 들어 국어능력검정시험, 국어상담사, 문장사 등. 그러기에 내용이 일단 풍부합니다. 소리 표기 방법, 두음 법칙, 어법에 맞는 표기법, 띄어쓰기, 준말 표기, 합성법, 파생법, 신조어의 인식에 대해, 표준어, 표준 발음, 품사, 조사, 어미, 문장 성분, 문장의 종류, 서법과 부정법, 사동과 피동, 시제, 높임법 등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고루고루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문법책처럼 결코 딱딱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목에서 '여행'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마치 여행을 하듯이 매일 조금씩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말글에 대한 흥미가 커지게 만듭니다. 28일(=4주) 동안 조금씩 볼 수 있도록 각 장은 1장,2장...이 아닌 제1일~제28일과 같은 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장을 넘기면 제1일차 "젓가락과 숟가락, 같은 가락인가 다른 가락인가"가 보입니다. 소리 표기 방법에 대한 얘기인데, 왜 젓가락에는 사이시옷을 쓰고 숟가락에는 디귿 받침을 쓰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2일차 내용은 "룡천과 용천, 류인원과 유인원"이라는 제목으로 두음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음 법칙만큼 까다로운 규칙이 없는데 그 실례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념'처럼 쓸 때는 '념'으로 쓰는데 '공염불'로 쓸 때는 왜 '염'자로 쓰는지 혹시 알고 계시나요? 도우미는 '도우미'로 적는데 지키미는 왜 '지킴이'라고 적어야 될까요?
이런 식으로 제28일차까지 이어집니다.

책은 정말 쉽고 재미있습니다. 우리말 맞춤법을 이 정도로 설명한 책은 아마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고 쉽게 설명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제대로 쓰기는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두음 법칙의 예를 들겠습니다. 두음 법칙의 기본은 '토박이 말에는 적용되지 아니하고 한자어를 읽고 쓰는 데만 적용되는 규칙이다' 정도인데, 세세하게 들어가면 다음과 같이 복잡해집니다.

- 원래 한자가 '녀, 뇨, 뉴, 니'로 소리 나야 하는 것이 낱말의 첫소리에서 '여, 요, 유, 이'로 소리가 바뀌면 바뀐 대로 적는다.
- 모음이나 'ㄴ' 받침 뒤에 오는 한자 '렬, 률'은 소리대로 '열, 율'으로 적는다. 첫소리가 아니지만 두음 법칙을 원용하여 소리대로 적는다.
- 원래 두음 법칙에 따라서 적던 낱말이 접두사처럼 쓰이는 다른 한자 뒤에 붙어 나오게 되면 낱말의 첫소리가 아니더라도 두음 법칙을 적용해서 적던 대로 적는다.

이렇듯 두음 법칙에 관해서만도 열 가지 정도의 규칙이 있는데 이를 모두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은 법칙도 법칙이지만 많이 보고 또 봐서 눈으로 익히고 감(感)으로 익히는 일도 병행해야 합니다. 우리말에 대해 보다 더 애정을 가지고 익혀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 이렇게 결론이 허무할 수가.

사실 이렇게 끝내려고 한 것이 아닌데 읽는 분께는 죄송하지만 급하게 마무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수험생은 아니지만 하는 일이 교육 관련 일이라 오늘은 평소보다 좀 일찍 출근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급하니 글도 맘처럼 써지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를 뒤흔든 독립 선언서 세계를 뒤흔든 선언 2
스테파니 슈워츠 드라이버 지음, 안효상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세계를 뒤흔든 독립 선언서》를 읽었습니다. 예전에 사두었던 '세계를 뒤흔든 선언' 시리즈 중의 하나입니다. 전체 네 권 중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 불복종〉,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등 세 권은 이 자리를 통해 이미 소개드렸습니다.

시리즈 순서로 보자면 〈공산당 선언〉에 이어 둘째권에 해당되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서야 '겨우' 읽어봤습니다. 왠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보여주는 오만한 제국의 모습에서 더 이상 '독립'이라는 말을 연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배로부터 독립해야할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폭압적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 〈독립 선언서〉인데, 지금의 미국의 모습에서 과거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이런 의미에서 〈독립 선언서〉는 죽은 문서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독립 선언서〉의 3대 권리가 비록 인간의 보편적인 이상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사유 재산의 보존과 이윤 추구를 위한 가면처럼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편견일까요. 17세기 후반의 북미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보자면 억지라고 볼 수도 없을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마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거대한 공룡의 모습만 보입니다. 지금의 미국은 본받아야 할 모델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지못해 복종할 수밖에 없는 - 그래서 언젠가는 그로부터 독립해해야 할 점령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의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다른 이들의 속박과 불행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독립 선언서〉는 고물상의 폐지와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패권과 오만한 모습이 오버랩된 인상을 걷어내고 조금 냉정하게 바라보면 〈독립 선언서〉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박물관의 고문서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역사적으로 '혁명적인' 개념을 담고 있는 선언이기에 그 여파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그러한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이다"
정당하지 못한 정부는 인민(people 또는 men 의 마땅한 번역어가 없어 가치중립적인 '인민'이라는 번역을 사용함)의 동의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는 '혁명권'이 포함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선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나아가 최초의 〈독립 선언서〉가 자유로운 경제 활동과 사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노예마저도 사유 재산으로 인식했던 노예 농장주들의 주도로 만들어졌지만, 링컨은 이를 노예제의 폐지로까지 확대 해석하고, 마틴 루터 킹에 의해 흑백 통합의 민권 사상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 역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 선언서〉전문(前文)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심지어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의 호치민이 〈독립 선언서〉의 문구를 직접 인용하며 베트남 민족 독립 선언을 만들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
〈독립 선언서〉의 원래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의 아메리카 13개 연합 주의 만장일치 선언〉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은 실제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날이 아니라 〈독립 선언서〉가 대륙회의에 의해 승인된 날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