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낳은 후궁들 표정있는 역사 8
최선경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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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TV를 즐겨보지 않는데 요즘은 사극 보는 재미가 솔솔 납니다. 주말 KBS의 <대조영>을 비롯해 MBC의 <이산>, SBS의 <왕과 나>가 재미있습니다. 판타지 사극이라 스스로 칭한 <태왕사신기>도 있으나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이 1% 정도 가미된,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두 허구인지라 별 재미가 없습니다. 아니, 10대 때부터 궁궐보다는 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광개토대왕을 왕위쟁탈에 목숨을 건 나약한 임금으로 그리고 있으니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속이 상합니다. 저렇게 만들 걸 왜 하필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입니다.

<왕과 나>는 조선 9대 왕인 성종의 스토리보다는 당시 내시였던 김처선이 주된 역할을 합니다. 김처선은 문종 때부터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까지 자그마치 6명의 왕을 섬긴 조선전기 최고의 환관이었습니다. 연산군 때 극간을 하다 참혹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왕과 나>에서는 자을산군(훗날 성종)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때 소화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훗날 연산군을 낳은 폐비 윤씨가 바로 이 여인입니다. 김처선, 윤소화(폐비 윤씨), 성종 이 세 사람이 드라마 <왕과 나>의 주요 인물입니다.



폐비 윤씨의 이야기는 사극의 단골 소재입니다. 아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진실을 알게되면서 폭군으로 전락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익숙합니다. 폐비 윤씨는 조선시대 후궁이 왕비로 책봉된 몇 안 된 사례 중 하나입니다.

『왕을 낳은 후궁들』에 따르면, 조선시대 후궁이 왕비로 책봉된 경우는 문종비 현덕왕후와 예종비 안순왕후, 성종의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중종비 장경왕후, 숙종비 희빈 장씨가 전부입니다. 성종 4년(1473) 윤씨는 훗날의 정현왕후 윤씨(훗날 중종을 낳음)와 함께 후궁으로 간택됩니다. 당시 폐비 윤씨는 29세, 정현왕후 윤씨는 12세였습니다. 드라마 <왕과 나>에서 폐비 윤씨는 구혜선이, 정현왕후 윤씨는 이진이 맡았습니다. 그 외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역은 양미경이, 성종의 친모인 인수대비(소혜왕후) 역은 전인화가 맡았습니다.

인수대비 한씨는 조선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유학자였습니다. 여성 한학자로서 도덕적 유교사회의 여성상을 정리하여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나름의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쓴 책대로 왕실을 지켜가는 것을 이상으로 살았을 테지만 그녀가 신봉한 유교적 질서와 예법은 다른 여성, 특히 며느리에게는 큰 고문일 수밖에 없었다. (p.62)

『왕을 낳은 후궁들』의 저자 최선경은 여성의 관점에서 이렇게 평했습니다. 인수대비와 성종, 폐비 윤씨와 연산군의 이야기는 고부간 갈등의 되표적인 사례로 전해내려 옵니다. 훗날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며칠만에 죽게 만듭니다.






<이산>의 주인공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 이산입니다. 드라마 제목을 '정조'라 하지 않고 '이산'이라 했으니 아마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출 모양입니다.

정조는 세종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현군이며 업적을 많이 남긴 왕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그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으며, 즉위과정에서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즉위 후에도 끊임 없는 살해 위협을 받았는데, <이산> 지난 주 내용이 바로 성인이 된 정조의 침실에 자객이 침입하여 이산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오늘 드라마를 보아야겠으나, 이덕일이 쓴 『조선왕 독살사건』을 보면 정조를 시해하려 한 것이 세 차례 있었는데, 첫번째 사건은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이 암살단을 궁중에 난입시켰다고 합니다. 대궐에 암살단을 난입시킨 것은 조선의 국가 체제가 갈 데까지 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후 두 차례 더 암살 시도가 있었습니다. 정조와 당시 노론 세력은 이미 군신관계가 아니라 정적 관계였던 것입니다. 정조는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왕과 나>의 성종이 재임기간 동안 정비 세 명과 후궁 열 명을 두었고, 그 자손만도 16남 12녀로, 여색을 즐겼던 왕임에 비해 <이산>의 정조는 민생정치를 펴려했던 그의 이미지와 비슷한 대체로 정숙하고 근검절약했던 왕비와 후궁과 함께 했습니다. 한 명의 왕비와 네 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정조 자신이 스스로 마음에 들어 후궁으로 삼았던 경우는 의빈 성씨가 처음이지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드라마 <이산>은 의빈 성씨(한지민 역)를 주요 인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누이, 즉 정조의 고모인 화환옹주와 대결 구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화환옹주는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장본인 중의 하나입니다.





『왕을 낳은 후궁들』은 여성문화유산 해설사라는 독특한 이력의 저자 최선경이 쓴 것으로, 후궁들의 이야기만을 담은 매우 보기 드문 역사책입니다. 조선사회의 축첩 제도가 여성의 적을 여성으로 만든 비인간적인 제도였는데, 이 책은 후궁들을 왕실 암투의 진원지이지 악의 화신으로까지 그렸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의 시각에서 재조명한 점이 돋보입니다.

폐비 윤씨는 자신에게 사약을 내린 성종을 원망하기보다는 다른 두 후궁 엄씨와 정씨를 저주했다. 반면 장희빈은 그 책임을 숙종에게 물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자신의 아들을 성불구자로 만든 것은 숙종과 왕실에 대한 복수이자 부계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다. (p.120)

이러한 참신한 시각을 가졌다는 점 외에도 이 책은 사극을 보기 전에 배경지식으로 참 유용합니다. <왕과 나>를 보기 전에 2편 '조선 최초의 왕비 살해사건 -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편을, <이산>을 보기 전에 6편 '아들을 버린 어머니 -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편과 7편 '대비가 된 후궁 -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편을 읽으면 참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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