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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 백과사전을 통째로 집어삼킨 남자의 가공할만한 지식탐험
A.J.제이콥스 지음, 표정훈,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평점 :
설니홍조(雪泥鴻爪)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이나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 시간이 지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눈이 녹으면 그 위의 발자국은 흔적이 없지요. 옛 지식이 이러하지 않나 싶습니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의하면 우리의 기억은 48시간만 지나도 처음의 반의 반도 남지 않습니다. 하물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책과 담을 쌓으며 시시껄렁한 지식만 주워 듣는다면 우리의 머리는 심한 소갈(消渴) 증상을 보일 것입니다.
한때는 똑똑했으나 학교를 졸업하고 천천히 바보의 길을 밟아가다 나이 서른다섯에 이르러 황당할 정도로 멍청해진 사내가 있었습니다.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의 원리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고, 여행짐을 꾸릴 때도 D.H. 로렌스의 소설을 챙겼었는데, 대중연예 잡지 기자가 되고부터 시시껄렁한 지식으로 두개골을 채웠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룹의 멤버 이름, 어느 스타가 부분 가발을 썼는지, 누가 가슴 수술을 했는지 따위의 한심한 지식만, 그것도 조각조각 널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합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다 읽어버리자! 세상의 모든 지식을 집중 학습하여, 비록 극심한 전문화의 시대이기는 하지만, 종합적인 지식을 완벽하게 갖춘 아메리카 대륙 최후의 제너럴리스트가 되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남자가 되어보자!
제 목 :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지은이 : A.J. 제이콥스 / 표정훈, 김명남 옮김
펴낸곳 : 김영사 / 2007.12.21 초판 발행, 초판 1쇄를 읽음 (25,000원)
이 황당한 목표를 세우고, 마침내 1년 만에 그 목표를 달성한 희한한 사나이가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을 완독한 기념으로 책을 냈습니다. 9,500명의 저자가 쓴, 33,000쪽, 65,000개의 항목, 24,000개의 그림과 자그마치 44,000,000개의 단어로 가득찬 《브래태니커 백과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고 합니다.
설명만 들으면 황당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선 슬그머니 호기심도 일어납니다. 백과사전을 통째로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그것을 책으로 쓰다니,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감이 잡히지 않을 겁니다. 이 책의 성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A.J.제이콥스가 쓴 '브리태니커 독서유감'입니다.
저의 <독서유감>이 책 읽은 것을 빙자하여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듯이,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각 항목을 핑계삼아 일기 쓰듯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과사전의 65,000개 항목을 모두 쓰기는 감당이 안 되었던지, 이 책에는 고작(?) 397개만 담겨 있습니다(제가 직접 세어 본 거라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이 책을 결정적으로 재미있게 만듭니다. 백과사전을 통째로 요약해놓았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이 책을 읽겠습니까?
저자는 익살끼가 넘쳐납니다. 660쪽이나 되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인데도 시종일관 재미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올리는 인기 블로거의 1년치 블로그를 한번에 읽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백과사전의 각 항목을 따라가며 읽었지만 책을 덮고 나서 남은 지식은 별로 없고, 오히려 저자 부부의 가정사만 기억에 남습니다. 저자 못지 않게 만만찮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실은 저자가 고1이었을 때 아버지가 먼저 백과사전을 모두 읽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선언하는 모양이 우습니다. 저자 부부가 사력을 다해(!) 임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자그마치 17개 항목(이것도 제가 직접 세어본 거라 틀릴 수 있음)에서 그들의 임신을 위한 노력과 실망, 그리고 마침네 임신에 이르기까지의 소회를 담고 있습니다.
- 아기를 갖기 위해 노력 중인 우리 부부는 가벼운 사태라도 임신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피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필사적이 되어가고 있다. 줄리의 친구들은 15만 개의 알을 낳는 암컷 낙지처럼 아이를 쑴풍쑴풍 잘도 낳고 있다. 그 놀라운 생산력이라니! 현관에서 남편과 스치기만 해도 임신이 되는 것 같다. (중략) 우리는 줄리의 배란 주기를 나스닥 단타 투자자들처럼 치밀하게 체크하며 따른다. (중략) 나는 아빠가 되고 싶어 죽겠다. (산아제한 birth control 설명 중)
- 하지만 내 기분이 진짜 처진 이유는 얼마 전에 또 줄리가 임신 음성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감정 emotion 설명 중)
- 줄리의 친구 하나가 임신했다. 그 친구의 생식 세포는 이제 배수 염색체들을 갖춘 접합자가 된 것이다. 줄리의 친구들은 왜 하나같이 생식력이 놀랍도록 뛰어나지? 줄리와 나는 서글픈 기분에 휩싸였다. (배우자 gamete 설명 중)
- 줄리는 임신하지 않았다. 나의 시애틀 여행은 실패였다. (중략) 죽고 싶다. (노새 mule 설명 중)
- 줄리와 나는 아직 생기지 않은 우리 아이의 이름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름 names 설명 중)
그러다가 드디어 하늘도 감동하여 임신을 하게 됩니다.
- 통화를 하던 줄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임신이다! 나의 씨앗이 드디어 제자리를 잡고 세포 분열을 시작한 것이다. 줄리가 만일 햄스터라면 지금 당장 출산했을 것이다. 세포 분열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말이다. 정말 위대한 날이다. 만세! (퀴들리벳 quodlibet 설명 중)
Q 항목 507쪽입니다. 처음 임신에 대한 시도가 나오는 곳이 B 항목 61쪽이었습니다다. 책을 읽고 있는 저도 한심합니다.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기껏 이런 남의 가정사만 줄기차게 들여다 본 꼴이 되었습니다. 이 외에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아,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이름을 올리는 방법! 혹시 아시나요?
1. 참수당한다. (브리태니커는 목이 뎅겅 날아간 사람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2. 북극을 탐험한다. (불운으로 끝나는 원정이라면 더욱 좋다.)
3. 노벨상을 탄다. (분야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타기만 하면 된다.)
4. 거세를 한다. (남자 전용)
5. 군주의 애인이 된다. (여자 전용. 남자보다 고통이 없다.)
쩝,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역시 또 한심합니다. 660쪽이나 되는 책을 읽고서 이런 것밖에 기억나지 않다니...
그러나 사실 얻은 게 많습니다. 지식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습니다. 지식을 얻겠다고 백과사전을 통째로 읽겠다는 발상이 다소 억지스럽고, 또 백과사전을 읽어봐야 지식쪼가리나 늘 뿐이지 지혜가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며 부정적으로 보던 생각은 초반에 사라졌습니다. 지식을 종횡으로 엮어 아메리카 대륙 최후의 제너럴리스트가 되겠다는 황당한 목표, 그것을 이루기 위해 1년 넘게 쉼없이 노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중간중간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마침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마지막 항목 '지비에츠 Zywiec'에 이르렀을 때 진심으로 맘 속에서 우러나는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는 지식 여행 과정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엮어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운 경험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學而時習之 不亦悅乎! 지식이 아니라 유쾌한 그의 삶에 어느덧 감화되었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