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3 - 접곡의선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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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명(明)나라 태조의 이름은 주원장(朱元章: 1328~1398)입니다. 어렸을 때 아명은 중팔(重八)입니다. 주중팔. 그는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 동쪽(옛 지명으로는 호주 종리濠州鐘離) 출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알려져 있다는 말은 그의 출생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는 말입니다. 혹자는 여러 이유를 들어 그가 고려인이었다고도 합니다. 근거는 무척 희박합니다.



주원장이 17세 되던 해 기근과 전염병으로 부모 형제를 모두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난이 날로 심해지자 황각사도 더 이상 유지가 힘들어 승려들을 내보내게 됩니다. 절에 들어온 지 50일밖에 안 된 주원장도 탁발승이 되어 목탁을 두드리며 유리걸식을 합니다. 여러 곳을 떠돌다가 3년 후에 다시 황각사에 들어왔는데 얼마 후 곽자홍의 홍건군에 가담하라고 친구인 탕화에게서 편지를 받습니다. 곽자홍의 봉기군에 가담한 주원장은 혁혁한 공을 세워 곽자홍이 죽은 후 봉기군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경쟁세력이었던 진우량은 강서,호남,호북 일대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을 지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습니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20만 대군을 파양호에서 섬멸하고, 서달(徐達)을 대장군으로 상우춘(常遇春)을 부장군으로 임명하여 25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감행합니다. 드디어 1368년, 그의 나이 마흔에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가 되었는데,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했습니다.

당시 중원 각 지역을 장악한 군벌들, 예를 들어 진우량이나 장사성은 각각 한(漢)과 오(吳)의 후예라고 자칭했는데 주원장은 이와 전혀 무관하게 국호를 명(明)이라 했습니다. 출신이 천하니 굳이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이름의 明은 당시 백련교에서 자주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백련교의 다른 이름이 명교였습니다. 국호를 명으로 한 것은 아마 이민족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에서 환하게 빛을 밝힌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주원장이 처음 가담한 홍건군은 명교도로 구성된 군대였습니다.

백련교는 송나라 원나라때 자주 당국의 탄압을 받았고 비밀결사를 만들어 정부에 대항했습니다. 원나라와 명나라 때 백련교도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청나라 때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9년간 이어진 이 반란은 청나라가 망해가는 징조였습니다.

초기의 백련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염불과 계율을 중시한 반승반속(半僧半俗)의 비밀단체였습니다. 백련교는 중국 역사상 각종 '이단', '좌도', '사교'의 종합세트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종교입니다. 영화 《황비홍》은 백련교도들의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원장과 백련교(명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의천도룡기》 3권에서 드디어 주원장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기근과 전염병이 돌던 시절 장무기는 누군가에게 잡아 먹힐 위험에 처합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사람마저 잡아 먹어야 했던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황각사의 땡추스님 주원장과 그의 일행들 - 탕화, 등유, 화운, 오량, 오정, 서달 등 훗날 명나라 개국공신들을 모두 만납니다. 그 전에 등장했던 상우춘까지, 이들은 모두 무림의 세계에서 사파로 지탄받는 명교도들입니다(역사상 실존인물들입니다). 잠깐의 만남과 헤어짐이지만 아마 훗날 장무기가 명교의 교주가 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 시기 장무기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태사부님은 마교 사람들과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상우춘이나 서달 같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교 출신이면서도 설공원 따위의 명문정파 제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의리과 기백이 충천하지 않은가? (p.289)

스스로는 명교라 불렀으나 무림에서 그들을 마교라 불렀습니다. 장무기는 뜻하지 않는 여행을 통해 현실이 정과 사로 단순히 구분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의천도룡기》를 읽으면 중국 원명 교체기의 역사와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의천도룡기》는 한결 더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니 시대상이니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 《의천도룡기》는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비리비리한 주인공 장무기가 제발 빨리 절대 무공을 익혀 원의 압제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무림을 어지럽히는 사파들을 응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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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端 2012-03-0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천도룡기를 읽고 보고 하면서 의문이 드는 것 중에 하나였는데요.
명교는 조로아스터교를 의미하는데, 백련교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의 지파 중 하나였다는 것이지요.(실제로 중국에는 불교와 도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당대이후 중국에 유입된 종교들은 경교(기독교 아리우스파), 명교(조로아스터교), 회회교(이스람교)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백련교는 당대이전에도 있었다는거지요.

백련교의 뿌리는 한말(삼국지의 무대가 되었던 시대) 황건적의 종교적 바탕이 되었던 오두미도라고 보는 것이 역사계의 정설입니다. 물론, 오두미도를 열었던 장각이라는 인물이 사상적 기반으로 하였던 것은 선진시대 도가의 노장사상과 중국의 전통적인 천관념의 결합체가 도교라고 하겠습니다.

도교는 진나라 이후 한대에 와서 황제내경과 도덕경을 기반으로 민간에 퍼져있던 상제관과 장생불사를 기원하는 신선관 등을 결합시켜 황정경이라는 경전을 만들고 종교적 색채를 띄게 되는데 이 것이 백련교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영뭉문의 작가 '김용'은 어떤 이유에서 이 각각의 다른 종교를 하나로 파악했을까요?

첫째로는 백련교라는 것이 워낙에 비밀스러운 점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조교체기에 밖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역사를 보아도 백련교라는 말은 극히 혼란스러운 시기에만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교체기의 주기는 200에서 300년 정도인데 그동안은 어디서 뭘 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백련교와 연결되어 있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 천지회는 아편전쟁이후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고 중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부청멸양의 깃발을 들었던 의화단도 같은 맥락하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의화단은 이쾌권이라는 권법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알려주는 주문을 외우면 총탄에 맞아도 죽지않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각각의 집단들은 모두 부패한 조정에 대항했고, 종교적 신심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거죠. 또 평화기에는 외부활동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몇 백년의 간극을 넘어서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할만한 것이 우리나라의 미륵사상과 정감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시작시기가 통일신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정여립의 난에까지 이어지고 지금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김용선생이 활동하던 국민당 독재시기에 백련교라는 명칭이 껄끄러운 역사적 상황 때문에 백련교를 명교로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해 봅니다. 물론, 잘못된 이해 떄문일 수도 있지요.

오늘날 중국정부가 '빠룬궁'을 경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