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6 - 명교의 비밀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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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답답합니다. 《의천도룡기》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명교 34대 교주 장무기입니다. 교주가 되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까, 마치 정조 이산이 기득권 세력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거쳐 드디어 왕의 자리에 올랐던 것처럼. 정조는 왕이 되자 과감한 개혁을 펼칩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그렇게 어렵사리 교주가 되고도 장무기에게는 과감한 결단력이나 웅대한 기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의 눈물>, <연개소문>, <대조영> 등 카리스마 있는 주인공을 내세운 사극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참으로 나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의 천성은 연약하고 심리는 참으로 복잡합니다. '가늠할 수 없는 꿈의 크기', 이는 드라마 <대조영>의 슬로건입니다. 한 회분의 드라마가 종료되고 엔딩 타이틀로 나오는 이 말에 <대조영>의 모든 성격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만약 장무기에게 만약 이러한 타이틀을 붙인다면,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속마음',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는 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무공은 한없이 높아 천하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음에도 번번히 고난을 겪습니다. 결단력이 없고 상황 판단이 지나치게 자의적입니다. 특히 애정 관계는 삼각관계를 넘어 자그마치 네 명의 아가씨(조민, 주지약, 은리, 아소) 사이에서 정신을 놓습니다. 분위기는 조민(원나라 여양왕의 딸)에게 가장 마음이 끌리는 듯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정말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성공한 정치 지도자의 첫째 조건은 '인(忍)'이다. 이 '인'은 자신을 극복하는 인, 사람을 받아들이는 인[容忍], 그리고 정적(政敵)에 대한 잔인(殘忍)을 포함한 것이다. 두번째 조건은, 결단이 명쾌(明快)했다는 것이다. 세번째 조건은, 강한 권력욕(權力欲)이다. 장무기는 이런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결여되어 있었다. 오히려 주지약과 조민에게는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 장무기는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좋은 친구는 될 수 있다." (1977년 3월, 김용)

장무기에게는 애초부터 권력욕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타고난 심성이 온순하여 결단력도 없습니다. 정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이러하니 책을 읽다가 속이 뒤집힐 수밖에요. 조민과 주지약이 훨씬 판단력이 빠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렇게 답답한데, 그럴수록 오히려 더 끌립니다. 무림 최고의 고수인 그를 오히려 품어 줘야할 것 같은 모성애가 발동합니다(난 남잔데...).

《의천도룡기》 6권과 7권에서는 장무기의 애정관계가 복잡하게 그려집니다. 역사적 상황으로 보자면 원의 폭압에 항거하는 집단들이 대거 반란을 도모하는 때입니다. 주인공 장무기의 명교 집단과 6권 중반에 갑자기 등장하는 진우량 세력이 대표적입니다. 책에서 진우량은 개방파의 중간 보스(?)로 등장합니다. 명나라가 건국될 즈음 주원장과 파양호에서 일대 격전을 치뤘던 진우량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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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18 - 장 담그는 가을날
허영만 지음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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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영화 《식객》 시사회 초대권을 얻었습니다. 10월 30일 오후 7시, 단성사에서 《식객》을 보았습니다. 단성사 확장 공사 이후 처음 가봤습니다(단성사 수리한 것이 도대체 언제적 이야긴데^^). 혹시 배우들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원작자 허영만 선생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배우들이야 영화 속에 다 나오고, 허영만 선생도 마지막에 까메오로 출연했으니 모두 본 셈입니다.

저를 주위에서 보아 오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전 음식에 대해 무례할 정도로 관심이 없습니다. 때 되서 배고프면 아무 것이나 먹으면 그만이지 굳이 맛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365일 하루 세끼 김밥만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동료들을 따라 이곳저곳 찾아다니기는 하지만 제 의지로 어디를 가자고 할 때는 과음한 다음날 해장국 먹자고 선동할 때 뿐입니다.

이러한 제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은 만화 《식객(현재 18권까지 출간)》을 보고 나서부터입니다. 굶으면 굶었지 정성 없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는 주인공 성찬은 맛만 따지는 미식가가 아닙니다. 혀 끝의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가 아닙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요, 음식의 역사와 그에 얽힌 사연을 알고 보니 음식이 조금씩 달라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으로만 보니 음식 맛이야 분간할 수 없지만, 그에 얽힌 이야기가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즐거움을 줍니다.

그렇다고 저의 가치관이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가치 우선 순위에서 음식은 여전히 후순위이니까요. 다만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온 음식문화를 그저 등 뜨습고 배부른 자의 사치라고만 생각했던 제 생각에 균열이 생긴 것만은 분명합니다. 책 보는 취미는 고상하고 맛을 찾는 행위는 저급한가요? 다만 그 좋아하는 취향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연중에 가졌던 음식, 음식 문화, 좋은 음식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대부분 《식객》을 읽는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거나, 아니면 최소한 저처럼 음식에 대해 무례하게 굴지는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 그러할 거라 미루어 짐작합니다. 그런 분들의 책을 본 후의 느낌은 저와 전혀 다를 것입니다. 맛의 세계를 제대로 표현했다, 우리나라 요리만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요리에 인생을 담았다고 평가하는 글들을 보았습니다. 맛의 세계를 모르니 비록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저 음식 문화에 대한, 아니 그런 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 대한 편견만이라도 깰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영화는 만화의 여러 단편들을 오묘하게 엮어 한 편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비록 봉주를 극악무도한 사람으로만 그리고, 진수의 직업이 조금 바뀌기는 했지만, 때로는 원작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다소 어설프게 보였지만 민족주의 코드를 적절히 배합하여 사람들의 원초적 애국심을 유발하고, 짐승(소)으로 하여금 사람의 눈물을 쏙 빼내기도 했습니다.





전 그저 조금 유치하지만 볼만하네, 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훌쩍훌쩍 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시사회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리는 한결같이 영화가 좋았다고들 했습니다. 허영만 원작의 《타짜》만큼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개인적 취향으로는 《타짜》보다 《식객》이 좋습니다. 《타짜》의 그 음습한 분위기보다는 《식객》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가 더 좋습니다.

영화 《식객》은 11월 1일에 개봉한다고 하고, 만화 《식객》은 최근 18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식객》 만화를 초기와 후기로 나눠 단순 비교하자면 초기작은 재미와 감동을, 후기작은 정보와 감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18권에는 5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된장, 닭 한 마리, 미나리, 불고기와 와인,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는 김연용의 《아버지의 바다》를 각색하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음식은 갱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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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5 - 광명정 전투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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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는 역사성, 문학성을 떠나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주제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말에 TV 시리즈물과 영화, 그리고 만화까지 《의천도룡기》를 원작으로 한 몇몇 작품을 보았습니다. TV 시리즈물은 분량이 워낙 방대해 일부만 봤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 가장 오래된 시리즈물로는 1978년판 《의천도룡기》(그림1)입니다. 1978년이면 벌써 30년 전입니다. 장무기역으로 정소추가 나오는데, 위 사진은, 지금은 60대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정소추 아저씨의 한창 때 얼굴입니다.
같은 해 홍콩에서 만든 극장판 영화에서는 이동승이 장무기 역할을 맡았습니다.(그림2)
극장판으로는 1993년에 만들어진 이연걸 주연의 영화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완성도는 차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 없었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꽤 많은 사람들이 본 것 같습니다.(그림3)
그래도 원작에 가장 충실한 작품으로는 한결같이 1986년판 TV 시리즈물(그림4)을 꼽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양조위. 우리나라에고 꽤 많은 팬들이 있습니다. 지금 보기에는 그래픽이나 특수효과가 다소 떨어지지만 원작에 충실한 만큼 스토리가 탄탄하여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작으로는 소유붕이 장무기 역을 맡았던 2003년 판(그림5)이 있습니다. 40부작입니다. 그 외에 20권 짜리 만화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몇 권 보았습니다.

그런데 원작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어서 그런지 드라마나 영화, 심지어 만화조차도 그리 재미를 못 느꼈습니다. 가장 잘 만들어졌다는 1986년판 시리즈조차도 원작과 비교해보면 상당 부분 생략되었고, 특히 소설에서 맛볼 수 있는 세심한 심리 묘사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빠졌다가 막상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여지없이 깨지고 맙니다. 짝사랑하던 환상 속의 여인을 나이가 들어 우연히 동네 슈퍼마켓에서 세수도 안 한 꾀죄죄한 몰골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보았을 때의 느낌이랄까, 아무튼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신 분들은 굳이 드라마나 영화, 만화를 찾아 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4권 <구양진경>에서 장무기는 드디어 구양신공을 익혀 십여년 그를 따라다녔던 몸 속의 죽음의 그림자를 완전히 쫓아냅니다. 5권 <광명정 전투>에서는 장무기가 명교의 교주로 등극하여 명교와 6대 문파들 간의 지긋지긋한 반목과 전쟁을 없애고 오로지 오랑캐(몽골) 조정을 타도해 선량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겠다고 선언합니다.

교주가 된 장무기는 명교의 8가지 교령을 발표하는데, 제1령이 명교 신도는 누구든 벼슬아치나 군주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백성의 어려움을 구하고 선행을 베풀고 악을 제거하는 데 전념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해서도 안 된다고 못박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명교를 이탈하여 이 령의 규제에서 벗어난 후 비로소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개국공신들에게 정식으로 벼슬과 작위를 내립니다.

책 읽는 분들을 위해 더 이상의 상세한 줄거리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리뷰는 《의천도룡기》를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한 주변 지식을 전하는 게 주목적이니까요.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좀 멀어 출퇴근 때 광역버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제겐 더 없이 유용한 독서 시간이자 휴식 시간입니다. 퇴근 길에는 몸이 피곤하여 졸 때가 꽤 있습니다. 그러나 《의천도룡기》를 가지고 다니면서부터는 한 번도 졸지 않았습니다. 졸음도 싹 달아나게 만드는 재미가 있습니다. 어제 퇴근할 때 6권을 읽기 시작했으니 오늘은 아마 6권 남은 부분을 모두 읽을 것 같습니다. 어서 출근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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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3 - 접곡의선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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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나라 태조의 이름은 주원장(朱元章: 1328~1398)입니다. 어렸을 때 아명은 중팔(重八)입니다. 주중팔. 그는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 동쪽(옛 지명으로는 호주 종리濠州鐘離) 출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알려져 있다는 말은 그의 출생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는 말입니다. 혹자는 여러 이유를 들어 그가 고려인이었다고도 합니다. 근거는 무척 희박합니다.



주원장이 17세 되던 해 기근과 전염병으로 부모 형제를 모두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난이 날로 심해지자 황각사도 더 이상 유지가 힘들어 승려들을 내보내게 됩니다. 절에 들어온 지 50일밖에 안 된 주원장도 탁발승이 되어 목탁을 두드리며 유리걸식을 합니다. 여러 곳을 떠돌다가 3년 후에 다시 황각사에 들어왔는데 얼마 후 곽자홍의 홍건군에 가담하라고 친구인 탕화에게서 편지를 받습니다. 곽자홍의 봉기군에 가담한 주원장은 혁혁한 공을 세워 곽자홍이 죽은 후 봉기군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경쟁세력이었던 진우량은 강서,호남,호북 일대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을 지칭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했습니다. 주원장은 진우량의 20만 대군을 파양호에서 섬멸하고, 서달(徐達)을 대장군으로 상우춘(常遇春)을 부장군으로 임명하여 25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을 감행합니다. 드디어 1368년, 그의 나이 마흔에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가 되었는데,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했습니다.

당시 중원 각 지역을 장악한 군벌들, 예를 들어 진우량이나 장사성은 각각 한(漢)과 오(吳)의 후예라고 자칭했는데 주원장은 이와 전혀 무관하게 국호를 명(明)이라 했습니다. 출신이 천하니 굳이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이름의 明은 당시 백련교에서 자주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백련교의 다른 이름이 명교였습니다. 국호를 명으로 한 것은 아마 이민족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에서 환하게 빛을 밝힌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주원장이 처음 가담한 홍건군은 명교도로 구성된 군대였습니다.

백련교는 송나라 원나라때 자주 당국의 탄압을 받았고 비밀결사를 만들어 정부에 대항했습니다. 원나라와 명나라 때 백련교도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고 청나라 때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9년간 이어진 이 반란은 청나라가 망해가는 징조였습니다.

초기의 백련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염불과 계율을 중시한 반승반속(半僧半俗)의 비밀단체였습니다. 백련교는 중국 역사상 각종 '이단', '좌도', '사교'의 종합세트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종교입니다. 영화 《황비홍》은 백련교도들의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원장과 백련교(명교)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의천도룡기》 3권에서 드디어 주원장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기근과 전염병이 돌던 시절 장무기는 누군가에게 잡아 먹힐 위험에 처합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사람마저 잡아 먹어야 했던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황각사의 땡추스님 주원장과 그의 일행들 - 탕화, 등유, 화운, 오량, 오정, 서달 등 훗날 명나라 개국공신들을 모두 만납니다. 그 전에 등장했던 상우춘까지, 이들은 모두 무림의 세계에서 사파로 지탄받는 명교도들입니다(역사상 실존인물들입니다). 잠깐의 만남과 헤어짐이지만 아마 훗날 장무기가 명교의 교주가 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 시기 장무기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태사부님은 마교 사람들과 절대 상종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상우춘이나 서달 같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교 출신이면서도 설공원 따위의 명문정파 제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의리과 기백이 충천하지 않은가? (p.289)

스스로는 명교라 불렀으나 무림에서 그들을 마교라 불렀습니다. 장무기는 뜻하지 않는 여행을 통해 현실이 정과 사로 단순히 구분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의천도룡기》를 읽으면 중국 원명 교체기의 역사와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의천도룡기》는 한결 더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니 시대상이니 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 《의천도룡기》는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비리비리한 주인공 장무기가 제발 빨리 절대 무공을 익혀 원의 압제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무림을 어지럽히는 사파들을 응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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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端 2012-03-0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천도룡기를 읽고 보고 하면서 의문이 드는 것 중에 하나였는데요.
명교는 조로아스터교를 의미하는데, 백련교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의 지파 중 하나였다는 것이지요.(실제로 중국에는 불교와 도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당대이후 중국에 유입된 종교들은 경교(기독교 아리우스파), 명교(조로아스터교), 회회교(이스람교) 등 다양합니다.
그런데 백련교는 당대이전에도 있었다는거지요.

백련교의 뿌리는 한말(삼국지의 무대가 되었던 시대) 황건적의 종교적 바탕이 되었던 오두미도라고 보는 것이 역사계의 정설입니다. 물론, 오두미도를 열었던 장각이라는 인물이 사상적 기반으로 하였던 것은 선진시대 도가의 노장사상과 중국의 전통적인 천관념의 결합체가 도교라고 하겠습니다.

도교는 진나라 이후 한대에 와서 황제내경과 도덕경을 기반으로 민간에 퍼져있던 상제관과 장생불사를 기원하는 신선관 등을 결합시켜 황정경이라는 경전을 만들고 종교적 색채를 띄게 되는데 이 것이 백련교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영뭉문의 작가 '김용'은 어떤 이유에서 이 각각의 다른 종교를 하나로 파악했을까요?

첫째로는 백련교라는 것이 워낙에 비밀스러운 점조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조교체기에 밖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역사를 보아도 백련교라는 말은 극히 혼란스러운 시기에만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중국의 왕조교체기의 주기는 200에서 300년 정도인데 그동안은 어디서 뭘 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둘째로 백련교와 연결되어 있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 천지회는 아편전쟁이후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고 중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부청멸양의 깃발을 들었던 의화단도 같은 맥락하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의화단은 이쾌권이라는 권법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알려주는 주문을 외우면 총탄에 맞아도 죽지않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각각의 집단들은 모두 부패한 조정에 대항했고, 종교적 신심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거죠. 또 평화기에는 외부활동을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몇 백년의 간극을 넘어서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할만한 것이 우리나라의 미륵사상과 정감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시작시기가 통일신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정여립의 난에까지 이어지고 지금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김용선생이 활동하던 국민당 독재시기에 백련교라는 명칭이 껄끄러운 역사적 상황 때문에 백련교를 명교로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정을 해 봅니다. 물론, 잘못된 이해 떄문일 수도 있지요.

오늘날 중국정부가 '빠룬궁'을 경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와인 잘먹고 잘사는 법 97
김국 지음 / 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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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의 품질이 오크통 속에서의 숙성 연한에 결정된다면 와인의 가치는 포도를 수확했던 해의 포도에 의해 결정된다. 와인이 오로지 포도만으로 만들어지는 자연의 선물인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와인을 만든 포도를 수확한 해의 날씨가 어떠했는지, 비는 어느 정도 내렸는지, 수확할 때 비를 맞지는 않았는지, 햇빛은 맑고 깨끗했는지 등 포도를 재배했던 해의 자연환경이 바로 와인의 성적표다. 이것을 프랑스에서는 밀레짐(millesime)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빈티지(vintage years)라고 한다. (《와인》,p.61)

그래서 위스키 병의 라벨에는 오크통 속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를 나타내기 위해 '12년산' '17년산'이라고 표시하는 것처럼 와인병에도 와인의 밀레짐, 빈티지가 적혀 있습니다. 만일 2003년이라고 적혀 있다면 2003년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와인을 생산해 내는 지역별, 포도 품종별로 각 해의 빈티지를 점수표로 매겨 놓은 빈티지 차트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깊숙히 들어가면 포도주 마시기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그냥 제입에 맞으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라고 자연스레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같이 와인을 마신다는 유럽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와인은 4~5유로 내외, 우리 돈으로 채 오천 원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로 치면 소주나 맥주와 다를 바 없습니다. 와인 중에는 정말 값비싼 것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주전자를 들고가 큰 통에서 덜어 사오는 와인도 있습니다. 옛날 찌그러진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오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 와인이 매우 대중화되었습니다. 술이라면 맥주밖에 먹지 않던 저도 근래에 와인을 마실 기회가 많았습니다. 어제도 와인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와인은 부담스러운 술입니다. 술 자체가 부담스럽기보다는 그 술에 얽힌 문화가 그러합니다. 술을 따르고, 흔들고, 향을 맡고, 마시는 일련의 행위 중 내가 무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없나 하는 두려움,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감, 대충 주위에서 주워 들은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정말인지 의심스러워 곁눈질해야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혀 개의치않고 소주, 맥주 마시듯 벌컥 벌컥 마시는 분도 계십니다.

성격 털털한 분이라면 대충 드시고, 혹시라도 와인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면 <잘~먹고 잘 사는 법> 시리즈 제97권 《와인》편이 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문고판에 140쪽 분량이니 출근길에 단숨에 읽고 퇴근길 와인 한 잔 하면서 아는 체 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와인의 역사에서 종류,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마시는 방법, 와인에 대한 잘못된 상식 등 우리가 알아야 할 대부분의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과 별 관계는 없습니다만, 어젯밤에 참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집안(?)에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을 갖춘 오디오 마니아 김갑수님의 음악 감상 공간에 갔었습니다.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는 책을 냈던 시인이자 오디오 마니아인 김갑수님의 지하 음악 감상실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별세상에 들어왔구나하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벽면을 가득 메운 2만여 장의 LP판이 우선 시선을 압도하고, 하츠필드, 알텍A5, AR3, 던텍 소버린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오디오 기기들로 인해 시대를 거꾸로 돌려 놓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이 기기들을 빈티지라 불렀습니다.

빈티지는 위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원래 포도주의 재배환경을 표시한 것으로, 양질의 포도주를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마실 수 있는 포도주이지만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권력과 부를 가진 소수의 사람만 누릴 수 있는 고급 음료였습니다. 그러한 '빈티지'라는 말이 오디오 기기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오래된', '오리지널', '명품'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비록 지금이 과거에 비해 훨씬 기술력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빈티지는 제 나름의 경지에 다다른 기기라고 합니다. 50~60년대 오디오 메이커를 창립한 사람들 대부분이 돈을 벌어보자는 장삿속보다는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음을 제대로 내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드는 데 큰 가치를 두었다고 합니다. 소울 마란츠, 알텍의 랜싱, 일렉트로 보이스의 알버트 칸은 당대 최고의 엔지니어 였으며, AR사의 에드가 빌처는 음악애호가요 미술학도요, BOSE사를 창설한 보스 박사는 MIT 공대 음향학과 교수였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제품이니 얼마나 많은 노력과 기술이 들어갔겠습니까. 그러나 70년대 들어와 그런 식으로는 더 이상 제품을 생산할 수 없게 되어, 리어카에서 붕어빵 찍어내듯 싼 제품을 찍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붕어빵 찍어내듯 만들기 전의 최고의 기기들을 빈티지라 합니다.

희귀하니 가격도 상상 외로 비쌉니다. 그러니 이런 기기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고 별 호사스런 취미를 가졌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기에 그가 돈 많은 부잣집 자식이 아닌가 생각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떠돌이 자취생이었고 지금도 아주 넉넉하진 않다고 합니다. 보증금 300만원짜리 월세 집에 살면서 2,000만원짜리 스피커를 머리맡에 두고 살았다는 그에게서 마니아 또는 오다쿠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천착이요 집착이요 허망일 수도 있지만, 2만여 장의 LP판을 매일같이 들으면서도 아직 음악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그의 말이 저에게는 깨침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문을 닫고 볼륨을 높이면 언제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 같은 공간을 나오니 벌써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정지된 듯했지만 바깥 세상의 시간은 여전히 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러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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