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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ㅣ 리라이팅 클래식 7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04년 10월
평점 :
작년 이맘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올해는 무척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 모두 그렇습니다. 행복하면서도 고단한 날들의 연속, 아마 연말까지 가야 그 끝이 보일 것 같습니다.
철학책은 대단한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지식의 수동적 습득이 아니라 철학자의 사유 과정을 좇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저는 철학책을 진지하게 읽을 형편이 아닙니다. 나의 사유는 수시로 끊기며 정신은 늘 피로합니다. 철학의 통과의례라고 불리우는 칸트를 통과하기에 지금의 제 사정은 여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입니다. 진은영이라는 저자 덕택에 완전히 저 세상 얘기 같던 칸트의 말들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좀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칸트적 사유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오성'의 영역인데 반해 느끼는 것은 '직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그토록 힘주어 얘기하는 '오성'을 저는 그저 조금 느낄 뿐입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한 발전입니다.
그린비의 《리라이팅 시리즈》 제7권 -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읽었습니다. 고미숙의 《열하일기》를 통해 고전에 대한 거부감이 일소되고, 고병권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철학을 사랑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느낌과 감동을 그대로 이어, 진은영 판 《순수이성비판》을 읽었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성취감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쉽게 풀어 쓴다고 해도 칸트의 텍스트 자체가 가지는 난해함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철학은 철학자의 사유의 체계를 따라 밟아나가는 것인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철학자만의 사유의 틀을 좇는다는 것은 그만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의 언어를 통해 그의 사유의 틀을 잠시라도 빌려와 사유하는 것 - 철학하는 진정한 재미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전공자가 아닌 대개의 사람들이 '철학하기'를 포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칸트와의 조우(遭遇)
진은영이라는 입담 좋은 가이드가 없었다면 제 평생 칸트와의 여행을 시작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오전 4시 55분에 "일어나실 시간입니다!"라는 시종의 말에 벌떡 일어나, 오후 네 시에 언제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코스를 산책했다는, 마치 자명종과도 같았다는 칸트의 무미건조한 라이프 스타일. 어렵사리 교수직을 맡고도 11년 동안 이렇다할만 저작도 없이 침묵으로 보냈던 재미없는 철학 교수. 혼자 심사숙고 끝에 나이 쉰 일곱에 재미없는 책 한 권 출간했으나, 누구는 마치 '상형문자'와도 같다고 하고, 누구는 '신경을 쇠약하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화를 내며 덮었다는 그 책. 소심함과 약간의 비겁함. 볼품없는 왜소한 체구. 엉뚱한 돈욕심. 이러한 그와 그의 작품들을, 순전히 '자발적으로' 가까이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병권에 의해 니체가 근거리로 다가왔듯이 - 물론 그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진다는 의미입니다. - 진은영에 의해 칸트를 친구로 맞을 준비를 하게 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니체보다 칸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규칙적인 생활, 반복되는 일상, 그러나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사유체계를 만들어갔던 그 저력 - 마치 우보천리(牛步千里)하는 듯한 여일(如一)함. 화려한 기교는 없으나 독일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버린 그 힘. 어딘지 모르게 내가 닮고자하는 삶에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문제를 만드는 능력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텍스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철학하기'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반성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문제보다는 답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철학책을 읽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고, 또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더라,에서 그치는가 하면, 그래도 좀 더 나아가 누구의 생각이 옳다는 식으로 답을 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칸트의 이 책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수십페이지 요약본을 보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들뢰즈는 말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플라톤주의자, 데카르트주의자, 혹은 칸트주의자로 남을 수 있는 것은 그 철학자들의 개념이 우리들의 문제들 안에서 다시 활성화될 수 있으며, 우리들만의 고유한 개념들을 창조하는 데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문제는 '문제'를 만드는 능력입니다. 누군가가 문제를 내고 그 답을 찾는, 일종의 노예상태를 벗어나, 스스로 문제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
초월적인 존재의 가정 없이 사물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흄의 강력한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칸트는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스스로 그만의 답을 찾습니다. 이성이니 오성이니 직관이니 감성이니, 그가 선택한 단어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이 칸트에게 다가가는 첫 번째 문입니다.
무능력한 사람이란 이미 주어진 문제에 대해 답을 못 찾는 사람이 아니라, 도무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이거나 잘못된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