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민왕과의 대화 - 미완의 개혁군주, 이야기마당에 서다
이기담 지음 / 고즈윈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정말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체력이 곧 경쟁력이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이럴수록 생각은 더욱 단순해집니다. 제 좌우명인 <방법은 없다>가 이럴 때 유용합니다.
오늘 독서노트 주제와는 상관없는 좀 엉뚱한 얘기기는 하지만 산적한 일을 기분 좋게 처리하고 한 주를 여는 월요일 아침을 의욕적으로 맞이하고자 제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을 먼저 반추하고 출발하려 합니다.
어떤 말을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위력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실제 그 말처럼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조금 힘든 일이 있을 때 노신 선생의 말을 떠올립니다. 혁명의 시대를 살다간 노신 선생조차 "완전히 가시덤불 뿐이어서 전혀 걸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노신 선생의 산문을 엮은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삶>이란 기다란 길에는 두 개의 큰 난관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기로>입니다. (...) 그러나 나는 울지도 않고 돌아서지도 않습니다. 먼저 기로에 앉아 한숨을 쉬거나 한잠 자고나서 갈만하다고 생각되는 길을 골라 계속 걸어갑니다. 혹시 성실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서 음식을 얻어 요기를 좀 할지는 모르나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도 길을 모르리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범을 만나면 나는 나무에 기어올라갑니다. 그놈이 기다리다 못해 배가 고파 가버린 다음에 내려옵니다. 만약 그놈이 가지 않으면 나는 나무에서 굶어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은 다음에 시체마저도 그놈에게 먹히지 않기 위하여 죽기 전에 내 몸을 나무에 비끄러 매어 놓습니다. 그런데 만일 나무가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별 수 없이 그놈에게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도 그놈을 한입 뜯고 죽을 겁니다.
둘째는 <막다른 길>입니다. (..) 그러나 나는 기로에서 하던 방법대로 뛰어들어가서 가시덤불 속을 걸어갑니다. 나는 아직 완전히 가시덤불 뿐이어서 전혀 걸어갈 수 없는 곳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원래 막다른 곳이라는 게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노신 선생은 이렇게 말한 뒤 고통을 이기는 데에는 <방법은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방법이 없으니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온몸으로 부딪쳐 보라는 말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서설이 길어졌습니다. 각설하고, 오늘의 책은 이기담이 쓴 <공민왕과의 대화>입니다.
TV를 거의 보지 않는데 우연히 몇 번 <신돈>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정보석이 공민왕으로 분하고 손창민이 신돈으로 나오는 역사 드라마인데, 항간의 평가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재미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요승으로 낙인이 찍힌 신돈, 노국공주와 공민왕의 사랑,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어떻게 그려갈지 모르겠으나 그 주제만으로도 눈길을 끌 만하다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 고려의 왕인 공민왕의 사당이 있습니다. 공민왕의 사당 안에는 위패 대신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그 영정을 보면 공민왕 곁에 노국공주가 함께 있습니다. 조선의 종묘에 고려의 왕이라, 게다가 원나라 노국공주의 영정까지... 공민왕이 지닌 역사적 의미가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공민왕의 개혁 - 거기서 빠질 수 없는 노국공주와 신돈에 대한 얘기까지를 저자와 공민왕과의 대담 형식으로 엮었습니다. 저자가 묻고 공민왕이 대답하는 형식입니다. 그래서 읽기가 참 편합니다.
공민왕의 평생의 화두이자 목표였던 '개혁'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가 주된 내용입니다.
공민왕은 그 당시 대개의 왕족이 그러했듯이 원에 질자(=볼모)로 가서 한동안 있게 됩니다. 거기서 노국공주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 덕택에 고려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원에 있는 동안 조국 고려를, 그리고 원의 힘과 또한 그 종말의 기운을 보게 된 공민왕은 고려에서 개혁의 칼을 빼듭니다. 다행히 그 곁에는 노국공주가 있습니다. 원의 공주이면서 철저한 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연인 그 이상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노국공주. 그러나 출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갑니다.
노국공주 사후 공민왕은 신돈을 앞세워 개혁을 이어갑니다. 절의 노비 출신이어서 정식 승려조차 될 수 없었던 신돈에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내어주고 개혁을 진두지휘하게 합니다. 그렇게 6년이 흐른 후, 그러나 왕은 하루아침에 그를 수원에 유배시켰고, 불과 사흘 만에 처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노국공주와 신돈의 얘기가 전부는 아닙니다. 공민왕의 23년 재위 기간 중 신돈과의 일은 마지막의 일이며 그것도 6년 여에 불과합니다. 또한 그 전에 공민왕 곁에 노국공주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연경 볼모 시절부터 함께한 조일신으로 대표되는 측근 세력과 이제현으로 대표되는 신흥 유학자 집단이 늘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변란을 피해 불타버린 개성의 복구를 기다리며 흥왕사에 있을 때 자칫 죽임을 당할 뻔 했던 그 때,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가라"고 호통쳤던 노국공주를 빼놓고서는 공민왕을 얘기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공민왕 개혁의 하이라이트 역시 신돈과 함께한 그 6년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전민변정도감을 통한 토지개혁, 성균관 중수와 유학 개편, 과거제도 개혁을 통한 신진 세력의 등용 등. 따라서 공민왕을 얘기할 때 으레 노국공주와 신돈이 따라다니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연인이자 정치적 동반자였던 노국공주도 죽고, 지치고 힘들었을 때 유일한 개혁 카드였던 신돈조차 제손으로 처형하고, 그리고 불과 4년 뒤 공민왕마저 의문의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책을 덮어도 공민왕의 말이 맴돕니다.
"나는 지쳤고, 측근들도 없었소. 하지만 개혁에 대한 꿈을 꺾을 수는 없었소. 하여 신돈을 선택한 것이오."
오직 새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순수했던 초야 신진 세력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사적 집단을 형성하고, 어려운 시절 함께 했던 측근들조차 세력을 형성하여 오히려 왕을 위협하게 되자 왕은 그들 모두에게 칼을 댑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근들 지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개혁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신돈. 현실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특출한 인물이었던 신돈이 바로 적임자였던 것입니다.
대내적으로 개혁 주도 세력이 성숙하지 않았고, 대외적으로 원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던,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고, 시도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던 그 때, 그래서 개혁이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그 때, 공민왕은 그의 재위 기간 내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공민왕은 줄기차게 개혁을 이끌었고, 그러나 그 개혁은 끊임없이 저항을 받았습니다. 결국 공민왕의 개혁이 미완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미완의 개혁으로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바로 그 개혁에 저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개혁을 저지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