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아미 - 제2차 세계대전 일급비밀부대 이야기
릭 바이어.엘리자베스 세일스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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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전 뉴스를 통해 2차 세계대전때 음향과 시각효과로 독일군을 혼란시키 부대가 있었고, 그 부대에 대한 비밀이 해제되어 부대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과연 그런 부대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2차세계대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던 참에, 이 책을 접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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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의 글쓰기
이준기.박준이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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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마치 발가벗겨지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대부분의 책들에서 지적하는 잘못된 글쓰기의 방식이 대부분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으려 한다.


얼마 전 아시아 출판사에서 나온 이남희 작가의 [나의 첫 번째 글쓰기 시간]이란 책을 읽었다. 마치 초등학교때 내 글쓰기를 지도해 주었던 담임선생님이 생각이 나듯이 친철하고 차근차근하게 글쓰기의 방법을 설명해 주는 책이었다. 조금은 초보적인 부분들이 많았기에 후속작을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같은 작가는 아니지만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보통사람의 글쓰기]라는 책이 나왔다. 작가는 이준기작가로서 신문기자생활을 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제목은 [보통사람의 글쓰기]이지만, 솔직히 보통사람의 기준은 조금 넘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 하는 보통사람이란 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보통사람에게 맞는 글쓰기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선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 방식의 가장 큰 강조점은 '구체적인 글쓰기'이다. 저자는 국어시간에 배웠던 포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을 적극 지지한다. 표현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몽뚱그려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라고 충고한다. 저자는 이것을 생각을 조각내는 법이라고 말한다.


"쪼개고, 부수고, 나눠라. 구체적으로 글을 쓰려면 생각을 잘게 조각내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 '소년은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문장을 보자. '불우하다'만으로 충분한가. '불우하다'라는 표현은 덩어리가 지나치게 크다. 불우한 가정에는 저마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소년은 부모의 고함 소리를 들으며 짐승처럼 숨죽여 잠들곤 했다'처럼 '가정이 불우한 이유는 무엇인지', '얼마만큼 불우했는지', '소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불행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잘게 쪼개 생각하고, 문장에 정확히 옮겨 적어야 한다." (P14)


다른 하나는 '글자를 덜어내기'이다. 저자는 글을 쓸때 군더더기의 단어들을 덜어내고 최소한의 단어로 간략하면서도 의미가 통하게 쓰라고 권유한다.


"글은 덜어낼수록 좋아진다. 의미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면 글은 짧을수록 좋다.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주어, 동사와 뜻이 같은 부사어, 습관적으로 쓰는 지시어나 최상급 표현이 글을 난삽하게 만든다. 독자가 알 필요가 없거나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말들을 문장에서 걷어내면 글이 한결 깔끔해진다." (P34)


나의 글쓰기는 이 부분에서 특히 걸린다. 문장과 느낌을 강조하려다 보니 지나치게 형용사나 부사, 최상급, 반복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문장에서 부사어는 별사탕과 같이 적게 쓸수록 좋다고 말한다.


"건빵에 든 별사탕은 몇 개 안 들어 있어서 별미다. 뻑뻑한 건빵을 먹다가 먹는 별사탕만큼 단 것도 없다. 그 맛을 잊지 못해 별사탕 한봉지를 사 먹으면 막상 그 맛이 안 난다. 부사어는 문장의 별사탕이다. 적게 쓸수록 달다." (P36)



특히 저자는 문자에 맞는 아름다운 표현이나 미문 등을 강조한다. 솔직히(여기서 또 강조어를 사용했다 ㅠㅠ)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라는 말도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잘 쓰는 표현인데 ㅠㅠ)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 난이도가 있는 부분이라고나 할까. 저자가 시를 좋아해서인지 시를 많이 인용하는데 김영랑의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란 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시인 김영랑은 '햇볕', '햇살', '햇빛'이라고 쓰지 않고 기어이 '햇발'이라 썼다. 흐르듯 구르는 '햇살'의 'ㄹ' 받침을 탐내면서도 '햇살'에 만족하지 않았다. 공기가 혀끝과 윗잇몬을 가볍게 쓸고 지나가는 'ㅅ'소리는 붙었던 입술이 가볍게 터지며 공기가 해방되는 'ㅂ'소리에 비하면 거칠고 날카롭다. 그래서 김영랑은 '햇살'이라고 쓰지 않고 기어이 '햇발'이라고 섰다. (P32)


보통사람으로써 이 정도 글쓰기 경지는 너무나 어렵게 느껴진다. 저자는 또 미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대신 진정으로 정확한 글은 아름다운 글이라고 말을 한다.


"글 역시 숱한 오래를 받는다. 아름다운 문장은 모호하고 불명확하다는 오해가 대표적이다. 미문을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글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미문의 의미 전달력을 의심한다. 그러나 미문과 명확한 문장은 충돌의 개념이 아니다. 잘 쓴 문장은 아름다우면서도 명확하다. 정확한 수사는 늘 명확함에 기여한다. 신형철과 이동진의 평론이 그렇다. 가장 정확하게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름다워진 글이다. 이런 글을 보고 '현란하다'거나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평하는 이는 문장의 정수를 모르는 사람이다."(P79)


그동안 국소설을 읽으면서도 너무나 현란한 미문들이 오히려 의미전달이 안되고, 모호한 개념으로 만드는 경우들이 많아 미문에 대해 호감을 가지지 않았었다. 특히 작년에 유명 작가의 표절사태 이후 언론에서 한국문단의 고질병을 '미문에 대한 집착'으로 보도하면서 미문에 대한 더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듣다보니 겉멋이 드는 미문이 아닌, 진정한 아름다움의 미문은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녹음이 푸르르다' 따위의 화려한 장식으로 눈속임하려는 작가는 대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글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다. 미문이 아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글을 정확하게 쓰는 연습이다. 지울수록 의미가 선명해지는 수사들이 있다면 공들여 쓴 표현이라도 과감히 지워야 한다. 걷는 데 방해가 되는 레이스 장식은 과감히 떼 버려라. 글쓰기는 생각쓰기다. 생각과 느낌을 정확하게 옮길 수 있으면, 글은 저절로 아름다워진다.(P81)"


 

 

 

요사이 공개적인 서평을 자주 쓰다보니 진심이 담긴 구체적인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짐을 느낀다. 타인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일기장에 글을 쓸때는 글이 자유로우면서도 진심이 담긴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보는 글을 쓸 때는 그것이 쉽지가 않다. 거기에 여기저기 드러나는 문법적이 오류까지... 글쓰기가 점점 어렵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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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라면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철학이나 심리학 강의와 이와 관련된 학술모임 등을 많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런 강의나 모임에 들어가면 처음에 꼭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 있었다. 교수나 선배가 '여기 기독교인 있으면 손들어 봐요!'라고 말을 한다. 꼭 몇 사람이 손을 든다. 그러면 그들은 손을 든 사람을 마치 진화하지 못한 구석기 시대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기독교나 신앙이 왜 허구인지에 대해 한참을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절대진리인냥 여기는 몇 권의 책을 제시해 준다.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는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인문학에 접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시기에 읽은 가장 기억나는 책이 버트란트 러셀의 [종교는 필요한가]라는 책이었다.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범우사 출판사의 책으로 읽었는데, 원제는 "Why I am Not a Christian"이었다. 나름 직역하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 책에서 러셀은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인간은 원자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적인 존재이고, 그런 물질적인 존재에게 영혼이나 사랑 같은 것은 들어갈 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것은 화학반응이 만들어낸 감정이 만들어 낸 허구이며, 특히 기독교 신앙은 이런 허구적인 감정 중에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의식이 만들어 낸 감정이라고 비하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정치 지도자나 성직자들이 이용해 인류 역사상 수많은 폐해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물론 니체의 책들도 빼놓지 않고 추천하는 책들 중의 하나였다. 니체의 여러 저서 중에서 러셀과 비슷한 맥락의 책은 [도덕의 계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이야기한다. 지배자들은 자신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그 종교로 노예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이나 도덕은 강자가 자신의 지배를 위해 만든 허구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중에 위와 같은 맥락을 주장하는 여러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의 종교에 대한 여러 편의 글들을 모아 놓은 [종교의 기원(열린 책들)]이란 책에서, 프로이트는 종교는 원시시대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시의 의식이 인간의 무의식에 남아 유전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토템과 타부]라는 책에서는 친부 살해라는 의식이 유전되어 기독교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신앙의 허구에 대해 지적하는 책들은 이런 지도층의 음모론보다는 진화론에 근거를 두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리처드 도킨스이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란 책에서 인간 안에는 오랜 기간 진화 과정에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유전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생존한 유전자의 대표적인 유전자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히 지협적이고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곳 집단 전체의 공멸을 가져오는 것을 유전자가 알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유전론적 진화론을 통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바로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다. 그는 인류는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신을 창조했고, 그것이 유전을 통해 전해왔다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신앙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획기적인 이론의 책 중에 최근 번역되어 출간된 [부정 본능(부키)]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수많은 동식물 중에서 유독 인간만이 지적인 존재로 진화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그 열쇠로 '부정본능'이란 것을 제시한다. 다른 동물은 진화 심리학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마음이론'을 통해 다른 동물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삶의 의욕을 멈추고 도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만은 죽음을 부정하고, 죽음 이후의 영생의 개념을 가지면서부터 진화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부터 읽기 시작하는 니콜라스 웨이드의 [종교 유전자] 역시 종교를 진화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책이다. 종교를 진화의 관점에서 해석한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교가 유익하기 때문에 후손들을 통해 계속 유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니콜라스 웨이드 역시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적자생존의 원칙을 통해 종교를 설명하려면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종교가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적 중에 하나는 종교를 부정하고 그 폐해를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유익해서 진화가 되었다고 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 도킨스처럼 종교는 유익하지도 않는데 유전을 통해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스티븐 핑커'와 '리처드 도킨스'가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종교가 유익하지도 않으면서도 진화 과정에서 유전되었다고 주장하는가? 이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앞에서 러셀이나 니체가 주장하는 사제 계급의 음모론이나, 대학시절 선배들이 주장했던 신앙을 유아적 성향으로 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저자는 이 두 이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이것을 비판한다.



 

"만일, 핑커가 말하는 것처럼, 종교적 행동이 적응과 무관하다면 그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핑커는 종교가 일반 사람에게는 유해했지만 성직자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퍼져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핑커는 종교가 성직자 계급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렵-채집 사회는 평등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몇몇 부족의 샤먼을 제외하고는, 종교적 전문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의례는 공동체 전체의 활동이었으며, 모든 사람이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P126)



 

"도킨스는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죽거나 죽이는 것을, 스스로 가진 유도 시스템에 따라 불에 뛰어드는 나방의 그릇된 행동과 비슷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 나방의 행동이 비적응적인 것처럼, 종교적 행동 역시 비적응적이다. 그렇다면, 실수로 종교를 만들어 내게 된 초기의 우위적 특질은 무엇인가? 그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연장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단순한 규직을 가진 어린이의 뇌가 선택적 유리함을 가진다." 도킨스에 따르면, 종교적 신념은 부모의 영향을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에게 전달되어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반복된다. 따라서 종교는 부모가 말하는 것을 믿는 아이의 성향으로부터 우연한 부산물로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약간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의미 없는 정보였다면 생존 경쟁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2000세대에 걸쳐 아프리카를 탈출한 이후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일까?" (P129)



 

그동안 종교적인 논쟁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될 수 있는 한 서평을 자제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 문제나 종교 문제만 나오면 극단으로 치우쳐 논쟁이 아닌 진흙탕 싸움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걱정이 앞선다. 이 글이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읽힐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바람은 우리가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쪽 극단에는 종교를 무조건 악으로 보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들은 종교에 대한 어떤 비리나 자신들이 몰랐던 작은 사실이라도 발견되면 그것이 전부인냥 생각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몇 년 전 유행했던 [다빈치 코드]란 책에 대한 반응이다. 이 책은 허구의 사실을 그냥 소설로 쓴 것일 뿐인데 그것이 마치 커다란 사실을 밝혀낸 것이나 절대진리인냥 흥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마케팅의 관점에서도 그런 것을 부추기기도 한다. 다른 한쪽 경향은 종교에 대한 비판을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종교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이나 의문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을 무조건 무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종교도 인간의 모임이기에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받아들이고 고치면 된다. 칸트의 주장처럼 인간의 순수이성의 한계로 인해 신의 존재나 영혼의 존재에 인식의 한계를 가질 수 있고, 이 부분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 부분은 서로의 견해를 이야기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의 시각은 매우 본받을만 하다. 저자는 자신이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일단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본다는 것은 신의 존재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종교에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객관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진화심리학으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껄끄러운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최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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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 : 권력의 기록 3 랑야방
하이옌 지음, 전정은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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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랑야방을 모두 완독했다. 랑야방은 중국작가 하이옌이 인터넷 웹사이트에 올렸던 소설이다. 이 소설이 인기를 얻어 책으로 출간되고, 드라마로 만들어지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3권으로 마시멜로 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이 소설의 여러 가지 장점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장점은 속도감이다. 일단 한 번 책을 잡으면 멈출 수가 없다. 3권도 한 번 잡고 읽은 후 새벽까지 계속해서 읽었다.


[랑야방]은 중국의 가상의 국가 '대량'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은 '임수'라는 남자가 '매장소'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와 권력의 심장에 칼끝을 겨누는 이야기이다. 대량의 황제는 전형적인 권력 집착형의 황제로서 누구든지 자신 외에 권력을 가지거나, 백성들이나 신하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황제의 첫째 아들 기왕은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사람으로 모두들 그를 따랐다. 특히 임수의 아버지 입섭은 7만 적염군을 이끌고 대량의 변방을 책임지는 뛰어난 장수로서 기왕을 존경했다. 결국 황제는 간신들의 모략과 자신의 욕망으로 임수와 적염군을 반란군으로 몰아 몰살시키고, 기왕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이에 연류시켜 모두 죽인다. 이런 피의 숙청 속에서 살아남은 임수는 매장소라는 이름으로 수도 금릉에 돌아와 복수를 꿈꾼다.





3권에서는 황제의 후계자인 예왕과 매장소가 황제로 만드려는 정왕과의 치열한 암투가 그려진다. 예왕은 정왕이 예전 임수와 적염군과의 의리를 잊지 못하는 것을 알고, 예전의 적염군 장군이었던 위쟁을 체포해 사형을 시키려 한다. 그리고 위쟁을 가둔 감옥의 경비를 일부러 허술하게 한다. 정왕과 매장소가 공격하기를 기다리려고 함정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매장소는 완벽한 전략으로 위쟁을 구하고, 오히려 예왕을 코너로 몬다.


이제 황제의 신임을 잃고, 정치적 코너로 몰린 예왕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황제가 정왕과 대부분의 신하들을 데리고 사냥터로 떠난 시기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하일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예왕의 반란은 매장소와 정왕의 활약으로 진압이 된다.


그리고 정왕이 태자가 된다. 계속 매장소의 정체를 의심하던 태자는 결국 매장소가 임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임수의 목적을 알게 된 그는 적염군의 누명을 벗길 결심을 하고 황제에 맞선다.



특히 3권에서는 적염군이 몰살 당한 진짜 이유와 임수가 매장소로 변할 수 있었던 화한독의 정체가 밝혀진다. 적염군이 몰살당한 매령 부근에는 설개충이라는 벌래가 사는데 이 벌래에게 물리면 화한독에 감연된다. 이 독에 감염되면 얼굴이 흉측하게 변하고, 무공이 모두 사라진다. 임수는 이 독에 감염되고 얼굴을 바뀐 후 복수를 꿈꿔왔던 것이다.



 


그동안의 흥미와 속도감에 비해 결말은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특히 매장소와 예황군주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쉽다. 이 책 1권을 읽으면서 흥미가 생겨 드라마로 끝부분 일부를 보았는데, 결말이 책과는 다르다. 특히 드라마에서는 매장소와 예황군주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그냥 아쉽게 끝난다. 무언가 속편이나 프리퀄, 시퀄 등이 기대되지만, 작가는 아직까지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한다. 오랜만에 읽어보는 속도감 있는 중국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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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걷다 - 당신은 아직 더 갈 수 있다, 니체가 들려주는 용기의 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이신철 옮김 / 케미스토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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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평생 초인을 꿈꾸었다.

사람들이 만든 가치관과 도덕관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드는 사람.

사람에 대한 연민,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도 빠지지 않고 오직 강한 힘만을 추구하는 사람.

지나 온 세상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

그런 초인을 꿈꾸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그런 초인이 되기를 간구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자신이 초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초인이기를 바랬지만, 자신은 실연으로 인해 자살을 꿈꾸고, 채찍지 달하는 말을 끌어안고 울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추구하는 자신과 현실의 자신에서 오는 괴리감, 그것이 니체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패했다고 해서 니체의 싸움이 가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기를 바라며, 그런 후에 몰락해 가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니체와 걷다]는 니체가 일생동안 여행하거나 휴향을 했던 곳을 멋진 사진과 그의 글귀가 함께 적혀져 있는 책이다. 사진 밑에는 그 곳을 방문할 수 있는 공항과 교통편이 적혀져 있다. 니체의 발자취를 따라 함께 여행하며 니체의 사상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책이다.


책의 초반부가 주로 니체가 태어난 독일과 니체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병으로 인해 대학교수직을 관두고 요향차 방문한 스위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후반부에는 주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니체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시기는 니체의 사상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니체는 이탈리아 여행 중 루 살로메라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거 거절을 당한다. 또한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을 이 시기에 쓴다.


이탈리아의 사진 중 단연코 눈에 띄는 사진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이다.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베네치아는 항구와 수로, 그리고 오래된 건물들이 아주 멋들어지게 펼쳐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니체는 이곳에 있는 카페에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사진 중 유난히 해가 지는 석양의 사진과 해가 뜨는 아침 사진이 많다. 하루가 사라지고, 다시 하루가 생성되는 징조인 노을처럼 니체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이미지가 또 있을까?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유독 니체의 [아침놀]이란 책의 구절들이 많이 적혀져 있다.



어떤 일에 책임을 지려 하는가.

그보다 자기 꿈을 이루는 일에 책임을 지면 어떨까.

책임질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약한가.

아니면 용기가 충분하지 않은가.


꿈 이상으로 당신 자신인 것은 없으련만.

꿈의 실현이야말로 그대가 지닌 최대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침놀] 중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연설을 하는 장소이자, 니체가 자주 산책을 했다는 이탈리아의 산마르노 광장이다. 이 광장을 거닐며 니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책에는 차라투스트라와는 조금 상관없는 만남과 기다림에 대한 그의 책의 한구절이 적혀져 있다.


"연락도 없이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태도와 약속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다리는 사이 상대방은

이런저런 좋지 않은 상상을 하게 되고, 걱정하며,

이어서는 불쾌해지고, 차츰 분개하게 된다.


요컨대,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나쁘게 만드는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마치 우리나라 남해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이탈리아에서 가까운 프랑스의 에즈라는 마을 사진이다. 니체는 이곳도 자주 방문해 산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곳에는 니체가 걸었다는 '니체의 작은 길'이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에즈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지중해의 모습니다.


"이상을 버리지 말라.

자기 영혼 속에 있는 영웅을 버리지 말라.

어딘가에서 이상과 꿈을 놓치면,

그걸 입에 올리는 다른 사람이나 젊음이를 비웃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마으이 시기와 질투에 물들어 흐려진다.

향상할 수 있는 힘과 극기심 역시 함께 버려지고 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유럽의 골목 사진이다.

어쩜 그렇게 유럽의 골목들은 돌들로 대충 쌓은 것 같은데도 멋스러울까.

니체도 이런 골목길을 거닐었을까.


"과거에 매달리거나, 하찮은 인간과 비교하여 자신을 칭찬한다든지 하지 말라.

꿈을 즐겁게 말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든지,

그렇다고 그런 현 상황에 만족하여 머무른다든지 하지 말라.

끊임없이 전진하라.

좀 더 먼 곳으로, 좀 더 높은 곳을 지향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이탈리아의 또 다른 도시 나폴리의 항구이다.
 

 


이탈리아의 마조레 호수이다. 이탈리아에도 이렇게 멋진 호수가 있었다니...


 



이 책의 끝부분에는 이탈리아의 어느 오페라 극장의 내부 사진이 있다. 니체가 평생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은 바그너였을 것이다.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그가 추구하는 초인사상과 디오니소스적 향취를 느꼈다. 그는 바그너가 진정한 그리스 정신을 구현하는 음악가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서 대중의 인기에 야합하는 속물 근성을 발견하고 바그너와 결별한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바그너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의 일생은 사람을 바라보다 실망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니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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