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볕

 - 안 도현 -


부서지렴.
글썽이는 가을볕
풀씨 날려 울음 타는
슬픈 언저리
아이들 꿈의 향기만큼
부서지렴.
수수깡 안경으로 엿 본
가을의 속살.
강아지풀 같은 아이들과 아이들,
사이를 뵈지 않게 미끄러지며
부서지렴. 울면서
울면서 어린 생각을 빗질하고
다시 어린 꿈을 닦아내고
그 맑은 눈물무늬
글썽이는 가을볕
부서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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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고 참 여유로운 가을 하늘입니다. 사무실 창문 안으로 눈물처럼 글썽이는 가을햇볕이 쏟아지고 살며시 내다본 창가로 한적한 구름 몇점 위에 가을 하늘이 높아만 가는 가을날 오후입니다.

콘크리트 투성이인 이곳에도 살랑살랑 찾아오기 시작한 가을바람이 참 푸르른 언덕배기에서 동행한 들꽃의 향기를 안겨줍니다. 황금 벌판에는 노란빛으로 빨간 사과위로 빨간빛으로 쏟아지는 가을 햇볕이 이곳 사무실 한 구석에도 회색빛이 아닌 노란빛을 던져주었으면 합니다.

풍성한 가을, 모두 행복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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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9-0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잉크냄새님은 너무 낭만적이세요... 오늘도 예쁜 글 읽고 갑니다.. ^^

물만두 2004-09-0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 본지 오래 되었네요. 비 온 뒤라 더 푸르겠지요? 요즘은 새벽 하늘밖에 못 봐서리...

호밀밭 2004-09-0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오기를 참 기다렸었는데 아직 제가 기다리는 가을은 안 온 것 같아요. 안도현의 시는 맑아서 좋아요. 하늘도 보고 싶고, 가을 바다도 보고 싶네요. 정말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계절이 잘 안 느껴져요. 제가 창가에 앉지 않아서 더 그런지 모르겠어요. 님은 가을과 잘 어울리는 분인 듯해요. 행복한 가을 맞이하세요.

Laika 2004-09-09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글을 읽고 나니 내일은 점심먹고 나가서 광합성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잉크냄새 2004-09-0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가을 햇볕이 유혹하는 오후입니다. 휴가를 내고 어디론가 확 떠났다 오고 싶게 만드네요. 주중에는 그러다가 주말만 되면 우중충해지니 가을의 시샘도 대단한것 같아요.
아 그러고보니 라이카님 광합성 시간이 지금쯤이겠네요.^^
 

통사론(統辭論)

- 박상천 -

주어와 서술어만 있으면 문장은 성립되지만
그것은 위기와 절정이 빠져버린 플롯같다.
'그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라는 문장에서
부사어 '우두커니'와 목적어 '그녀를' 제외해버려도
'그는 바라보았다.'는 문장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는 바라보았다.'는 행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나 서술어가 아니라
차라리 부사어가 아닐까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에는
눈물도 보이지 않고
가슴 설레임도 없고
한바탕 웃음도 없고
고뇌도 없다.
우리 삶은 그처럼
결말만 있는 플롯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밥을 먹은 사실이 아니라
'힘없이' 먹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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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직원이 올린 회의록을 보며 "결론이 뭔데?" 라고 묻곤 했지요. 각 팀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상황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노력이 묻어있는 그 회의록의 결론이 뭔가 부족한듯하여 그렇게 묻곤 했지요. 보고서 문화에 어느덧 물들어버린 사고구조가 과정이 아닌 결론에 집착하게 만들어가나 봅니다.

인간시대와 같은 인간의 따스함에 관한 장면을 봅니다. 처음과 끝, 그들의 모습은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소녀가장의 모습은 그대로 소녀 가장이고 바보스러울만치 착한 그들은 계속 그렇게 비춰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모습은 그 모습속에 담긴 진실이 아닐까요. 어려워도 따스함과 순수함과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 그들 속에 무의식적으로 표현되어진 부사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 삶이 세상살이 속에서 오롯이 솟아나는 시를 닮아가는 삶이 아닐런지요.

지금 아테네 올림픽의 양궁에서 윤미진 선수가 8강에서 탈락했더군요. 흔들리지 않으려는듯 쓴 검은 썬글라스 뒤로 작은 눈물 한방울 흘릴지도 모르겠네요. 성적이 아닌 숨이 턱턱 막히던 여름을 달려온 그녀의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열정을 바라봐주어야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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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8-1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는 말 기억하고 싶네요. 윤미진 선수가 떨어진 지 이제 시간이 좀 지났지만 다시 그 활을 잡았던 순간으로 가고 싶을 것 같아요. 우리 나라 선수들끼리의 금은 대결이기는 하지만 윤미진 선수를 생각하면 마음이 좀 아프네요.
시 속에 담긴 세상이 더 인간적이고, 올림픽 때 사람들은 더 애국자가 되고, 아침보다 밤에 더 세상이 또렷하게 보이는 듯해요.

Laika 2004-08-1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그런데, 올림픽에 관심이 없어서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답니다. 올림픽때 조차 애국자가 되지 못하는 인간이군요...

icaru 2004-08-19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지요^^* 오늘....근...삼일만에 들어와봤는데...페이퍼 제목이 통사론이라...어인 통사론인가...하고...들어와 봤답니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를 가진 시네요...우리삶의 통사론은 부사어라는...
저도 요즘...조금은....바로 이 부사.."지친듯"...일을 하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하네요...

그리고 윤미진이요...정말...아깝지요...어제는...몸이 안좋아서...모처럼 휴가를 내고...집에 있으면서....종일.....
사격에 양궁에...죄다 봤거든요....
침착하게 하는 모습...참...이뻤는데....

대만의 그 선수한테...졌던...예전 기억이...작용을 한듯.....아쉽고...안타깝고...하데요...

잉크냄새 2004-08-1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 이의 삶을 시적이라 표현하는 것은 그 속에 포함된 부사어구를 보게되는 이유인것 같아요.
시 속에 삶이 있는 건지, 삶 속에 시가 있는 건지.. 어느 세상이 더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복순이 언니님, "지친 듯"..이라는 부사어구는 이제 헐헐 떨쳐버리길 바랄께요.^^

미네르바 2004-08-2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미네르바의 말: 우리의 삶은 부사어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도 부사어를 사랑한다.

잉크냄새 2004-08-22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사어를 사랑합니다. 아마 삶이 더 풍요로워지겠죠.^^
 

회상

-김 성근-

지난 여름날
당신과 시장을 거닐 때면
항상 들르던
육교 밑 콩국 집

언제나
단숨에 삼키고
새침한 웃음을 웃던
당신을 보고
반 그릇을 더 퍼주시던
인정 많은 할머니

며칠 전
비가 몹시도 내리던 날
할머니 곁에서
당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

어느날 친한 친구와 저녁을 먹었죠. 당신을 알고 있던 그 친구가 당신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다 지나버린 이야기를 말이죠. 허허로운 웃음으로 몇마디 대답한후 술잔속의 그리움이 넘쳐버릴까 두려워 술잔속에 담긴 소주 한잔을 마셔버리고 화제를 돌려버렸죠.

아마도 당신과 나의 추억은 둘만의 것은 아닌가 봅니다. 콩국집 할머니처럼 그 친구의 빛바랜 흑백사진첩속에 당신도 서 있나 봅니다. 그 친구도 나를 보면 그렇게 아련한 모습으로 당신이 떠오르나 봅니다. 나쁘지는 않네요. 다가갈수 없는 아쉬움일망정 이렇게 당신을 추억함이....

제가 지금 해드릴수 있는 한마디...."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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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4-08-14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전히 둘만의 추억도 있겠지요.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이야기...
헤어진 사람에게 행복을 비는 것...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비록 아파도...

파란여우 2004-08-14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잉크냄새 2004-08-14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간 이도, 떠나보낸 이도.... 모두 행복해야죠.^^

icaru 2004-08-14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어제는 다늦은 밤에...맥주 딱 두캔 걸치고 노래방에 가서는.... 실컷 대학시절 추억이 덩달아 떠오르는 당시의 노래들을 마구마구 불러제켰습니다.(요즘 노래방 통 사절입네다..즈음 유행 가요를 잘 몰라서...아...옛날엔 한 노래했던거 같은데...)

그 때 알던 그 친구들, 그 사람들... 아련히 떠올랐는데....
왜 나이든 분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종종 눈을 감곤 하는지...알것같았어요!!

잉크냄새 2004-08-1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 언니님을 회상했더니 오랫만에 모습을 나타내셨군요.
알라딘에서도 누군가 자리를 비우면 그분의 서재에 모여들어 주인장을 회상한답니다.
 

단 추

- 백창우 -

나를
옭아매는 것이
내 몸의 단추만큼은 될거다
희망을 박탈당한
불쌍한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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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 소리로 맞이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미면서부터다. 빗질을 하고 서둘러 나서는 현관문, 고요한 아침이 무색한 출근길의 클락션소리,  가벼운 눈웃음마저 사치스러운 호기가 되어버린 아침의 근무풍경, 타다다닥 자판위를 움직이는 공식화된 손놀림, 사각의 틀에 갇혀버린 창밖의 하늘, 노을이 붉은색임을 어느덧 잊어버린 퇴근길 발놀림, 하루종일 육중한 무게를 지탱한 현관문을 열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하루가 마무리되곤 한다.

내 스스로 여미는 단추에 의해 나를 가두고 그렇게 여미어진 단추안의 일상은 나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것이라 스스로를 애써 자조하며 단추너머의 바다를 꿈꾸곤 했다. 단추를 풀어헤친 어느날 곱게 여미어진 단추속의 나의 모습에 익숙해진 일상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단추가 있어야할 단추구멍은 오히려 공허함과 나태함이 묻어날 뿐이다. 일상의 나의 모습에 익숙한 내가 주저앉는 소리, 그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오늘도 와이셔츠의 단추를 여미며 생각한다. 단추, 그것은 옭아맴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모습이다. 죽는날까지 단추너머의 바다를 꿈꾸겠지만 단추안의 세상, 내 삶이 되어버린 소중한 일상의 흔적들을 또한 바다만큼 사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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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8-0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여요. 잉크님 휴가 후유증인 거. 힘 내십시오. 홧팅! 아자!

Laika 2004-08-0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글 읽다가 "단추너머 바다"를 보려는듯 저도 모르게 창밖을 보는데...하늘이 안보여요....
저 창밖 건물 안의 누군가도 지금쯤 바다를 꿈꾸며 자판을 두들기고 있겠죠.....
"소중한 일상의 흔적들"을 사랑하며...오늘도 야근을....^^

호밀밭 2004-08-09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추가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네요. 늘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졌다가도 가끔은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요. 늘 앉아 있는 사무실 의자를 벗어나면 어떤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결국은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요. 시도 님의 글도 좋네요.

잉크냄새 2004-08-0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밖에 하늘은 안보여도 잉크 뱃사공이 보이지 않나요? 푸른 창공을 노저어가는 뱃사공...음 어쩌면 삶도 여행과 같아서 결국은 떠남이 아닌 돌아옴인것 같아요.
 

헐거워짐에 대하여

- 박 상 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던가요?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라고.

낡음, 오래됨 같은 단어에서는 왠지 포근함과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 오랜 세월을 통해 서로에게 편하게 길들여진것 같아요. 낡은 신발속의 발처럼 말이죠.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조금은 헐거워서 편안한 그런 사람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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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도 구두도 낙낙한 것이 좋아요.
사람도 좀 어리숙해서 편한 사랑이 좋고요.
내 몸에 발에 딱 맞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지고 헐거워진 것들이 좋아요.
시 잘 읽고 갑니다.

호밀밭 2004-07-29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가 잘 길들여져서 발이 편안해지면 안심이 되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발 치수보다 하나 정도 큰 것을 사게도 되더라고요. 헐거운 게 좋아서요. 사람도, 인생도 너무 꼭 끼면 숨이 막히기는 할 거예요. 저도 저에게 편안한 사람이고 싶네요.

잉크냄새 2004-07-3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근함, 아늑함... 왠지 낡은 냄새가 나면서도 단어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그 따스한 온기를 느낄수 있어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삶에서 조금은 헐거워질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水巖 2004-07-3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맞는 말씀이군요. 우리는 얼마나 빡빡한 세상을 살고 있었는지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것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