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글쓰기 나남산문선 11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기획 / 나남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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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손에 잡는다. 소파에 삐뜨름하게 누워서는 책을 읽을 때 나의 새벽은 서서히 아침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루중에 가장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이다. 글을 쓰고자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글쓰기에 대해서는 말 못할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다. 젊은 날에 한번이라도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학과는 담쌓고 있었던지라 사십이 다 되어서 쓰려고 하니 이것 참 답답한 노릇이다. 그래서 늘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다. 그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유의 느낌이 좋았고 자꾸만 머릿속을 파고드는 무언의 언어들에 취할 정도로 좋았다. 그런 사유의 바닷 속 을 헤험쳐다니다 보면 때론 장애물이 와서 부딪히기도 하고 누군가 던진 돌에 맞기도 하지만 사유의 힘은 그 아픔마저도 잊게 해주는 것 같다.그래서 책을 읽는 것 같다.

 

이 책은 한국의 내로라하는 작가 아홉 명이 풀어놓은 자신의 삶과 책 이야기이다. 아직 책읽기와 글쓰기의 낯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9人의 작가가 가지고 있는 책읽기와 글쓰기란 무엇일까? 김용택시인은 책을 통해서 사는 게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 알았다고 한다. 책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며 인생이 시작되었고 책을 따라가다보니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삶은 허망한 것이고 바람 같은 것이라는 것을, 별것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 사람들은 사람이기를 버린다는 것을 알았다.(p29)

 

 

 

 

도종환 시인은 글을 쓰게 되면 우리의 눈은 대상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간파해 내는 눈을 갖게 된다고 한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되는 대상 하나하나와 긴밀한 만남을 가지기 시작하며 대상과 나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며 내 앞에 있는 장미꽃이 나와 새로운 관계를 갖기 시작하는 장미꽃이 되는 것이다. 이에 나자신도 그러한 눈으로 바라보게 될 때 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 어느 날 문득 일상 속에 묻혀 사는 나를 다시 보게 만드는 사물, 일을 만나고 그것들이 그 일상과 적당한 거리를 만들게 하고, 그 거리에 서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만드는 것, 그것이 글인 것이다.”

 

서정오 작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될 때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고 한다. 공연히 어려운 말로 젠체하는 글이 아니라, 삶 속에서 절로 터져 나오는 내 생각과 내 느낌과 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글을 써야한다고 한다. 말과 글에 진심이 담기면 저절로 쉬워진다고 한다. 따라서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작가들은 사회가 어떻게 병들어가는지 , 어디서 허물어져 가는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서 그것을 대중에게 두루 알려주어야 좋은 사회가 된다고 한다.

 

 

 

안도현 시인이 말하는 글쓰기는

 "나’라는 인간을 하나씩 뜯어고쳐 가는 일이었으며, 문학에 의해 변화된 ‘나’가 흔들릴 때마다 문학은 초발심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매서운 매의 역할을 했다. 문학은 엄하고 무섭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문학을 가르쳐 준 세상에 대해 고맙다고 생각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읽고 쓰는 것, 그것은 이 세상하고 연애하는 일이라며 문학은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번도 글을 써 본적이 없으나 40대가 다 지나서야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서 썼다는 우애령 작가의 이야기 또한 인상깊다. 사회복지원에서 만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의 영혼을 자신의 힘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싶은 욕구가 글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하는 그녀는 지금도 인간이란 운명에 맞서 싸울 아무 힘도 지니지 못한 무력한 존재인가? 하는 의문에 답을 하고자 절망에서도 일으켜 세우는 사랑과 삶의 의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의무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책속의 것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오롯이 내 것이 되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럴때면 머릿속에 무언가 강한 울림이 퍼지는 느낌이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을 토해내는 것이 글쓰기이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이 책을 읽는 것은 삶의 풍요를 위한 훈련이라고 했듯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하며 그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마음속에 싹이 틀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풍요로와진다고 한다. <내 인생의 글쓰기>의 9人의 작가들은 책읽기를 통한 그런 감동으로 남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서정오 작가는 온 국민이 글을 쓰는 나라가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라고 한다. 글쓰기의 민주화는 쉬운 말과 글에서 시작된다. 책은 조그마하고 얇지만 그 안에 들어가있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많은 배움이 있는 책이다. 문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작가의 선한 영혼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주옥같은 그들의 생각은 두고두고 곱씹어 삼킬 만한 교훈들이다. 바른 책읽기와 바른 글쓰기를 하고자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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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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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지구촌 한 곳에서는 전쟁, 기아, 환경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바로 아프리카가 떠오른다. 끊임없는 내전과 기아 난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척박한 땅으로 그도 그럴것이 아프리카와 연관된 영화나 다큐는 처참한 실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가 아프리카를 구원하기 위한 천문학적 원조를 아끼지 않음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현재 주 세네갈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땅에서 직접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오랜 세월 노예로 살아온 흑인들, 최근 여러 방면에서 우수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 흑인들이 백인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백인 우월주의 , 선민주의에 입각한 아프리카 정체성 왜곡부터 시작된 것이다. 세게사 개론은 항상 아프리카 개론에서 시작한다.인류의 어머니인 호모 사피엔스 루시의 해골과 그냐가 발견된 동부 아프리카 지도가 항상 첫 장을 장식한다. 그러나 이후 아프리카의 이야기는 15세기 대항해 시대를 다루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아프리카에 문자가 없었던 탓에 과거를 기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기록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야만적이고 비문명적 활동으로 보고 세계사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아프리카를 야만과 암흑의 세계로 유럽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진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아프리카에 문자사용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인들은 대체적으로 문자화된 기록보다는 구술에 의한 직접적 전달을 선호하기 때문에 문자 기록을 그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라고 한다. 그러나 야만과 암흑의 세계로 각인되어진 흑인의 이미지는 헤겔에 의해서 세계사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시킴으로서 아프리카를 부정적인 이미지를 정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후 세계사에서 아프리카를 배제하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헤겔이 아프리카를 방문한 적이 없으며, 아프리카를 다년온 탐험가, 선교사들로부터 간접적인 지식을 얻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유럽인의 이미지와 지배욕을 학문적 수준으로 고착시킨 것이다. 이후 아프리카인을 성경의 족보에서 지워 유럽의 인종적 종교적 순수성과 우월성을 지키려 했던 인류의 다중기원설과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의 지능지수IQ 결과가 더해져, 흑인들은 저능하고, 미개하며 야만적이라는 인식은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렇게 잘못 심어진 선민사상에 입각한 흑인의 왜곡된 정체성은 노예무역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역사학자 올라돈 페터슨의 표현대로 노예 생산 과정은 '사회적 죽음'의 생산 과정이었다. 아프리카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사람들을 유럽인들에게 팔기 시작하며 대가로 칼과 창 같은 무기류를 얻었다. 아프리카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며 여러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17세기 신대륙개발로 노예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던 차에 흑인 노예가 어떻게 어디서 잡혀왔는지 따질 필요가 없었다.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상황에서 아프리카 부족과 마을들은 과거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을을 습격했다. 이것은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잡어먹는 ' 시대를 도래하였고 인근 부족과 이웃 마을 사람들 간 불신과 증오의 기억을 남기게 된다. 저자는 이런 증오의 기억이 훗날 국민 국가 형성 과정에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던 요인이라고 말한다.

 

아프리카는 절대 빈곤 국가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는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지질학적으로 대륙자체가 가장 오래전에 형성되었기 때문인데, 그런 면에서 아프리카는 축복받은 신의 땅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동안 아프리카에 천문학적인 원조가 있었으며, 독립이후에도 많은 자본이 투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성장가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현실은 저자의 말대로 의문과 모순덩어리다. 그리고 그 의문과 모순덩어리 이면에는 부패한 권력층들인 자본주의 엘리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부연설명이 있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 는 1999년 시에라 리온에서 벌어진 내전, 다이아몬드 지역 지배를 두고 벌어진 혈투를 다루고 있다. 수천명이 죽고, 수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다이아몬드를 보지 못했다.

국가란 어쩌면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기에 평소에는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국가가 무너져 제 구실을 못하는 아프리카에서 어린아이들은 총알받이와 성 노예가, 어민들은 목숨을 건 채 일확첨금을 노리는 해적이 된다. 아프리카 정부들의 무능력은 곧 비극의 씨앗이다. 유능하고 힘 있는 정부,적어도 국민들의 생명만큼은 지켜줄 수 있는 정부가 들어서지 않는 한, 아프리카 비극은 꼬리에 꼬리를 물 것이다. p259

 

 

이 책은 아프리카의 모든 것이다. 사회 경제와 정치, 더불어 인류 기원까지 방대한 역사까지도 다루고 있다. 어떤 한 대상을 볼 때 주관적입장으로 서술할 수 있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음에도 저자는 무척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 영국 학자 킷칭이 아프리카 연구에 인생을 바쳤으나 30년만에 그만둔 이유가 아프리카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문제를 외부적인 요인으로 보고 변화를 기대하였지만, 정작 아프리카의 문제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아프리카 엘리트들의 몰지각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저자는 현재 아프리카는 미약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국제 사회에서 아프리카와 함께 가기 위해서라도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중간에 백인에 의해서 자행된 흑인의 학대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울분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프리카의 오늘과 내일, 이 책에 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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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기엔 아까운 여자 나이 들수록 아름다운 여자 - 서른과 마흔 사이 여자가 준비해야 할 5가지 인생철학
사라 브로코 지음, 이은선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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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마흔이 될 때까지 이 복잡한 세상을 알지 못한다.

-윌터 피트킨-(미국 심리학자)

 

 

어릴 적의 나는 무척 조용한 아이였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지만 어른들의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처럼 여겼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지라 지금도 어른들의 말을 잘 섬긴다. 그리고 그게 인생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 인생은 굴곡을 그리 많이 겪지 않았다. 인생의 가장 큰 변곡점일 수 있는 결혼도 처음 만난 사람과 사랑하였고, 지금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남편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참 이상한건 고등학교때 늘 몰려다니던 4인방 친구들이 모두 나처럼 살고 있는 거 보면 친구는 끼리끼리 만난다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 살면서 슬픔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았을까. 이제 불혹을 앞두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을 떠올려보면 아마도 그때이지 싶다. 늦은 나이에 첫아이를 낳았을 때이다. 산후조리원에 장염이 유행하는 바람에 신생아들이 모두 집단 장염에 걸린 것이다. 자그마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을 때 아이가 너무 작아 혈관을 찾을 수 없다며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아이를 들여보냈을 때 울지 않으려고 해도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마치 아이와 나사이의 병실문이 영겁의 느낌이었다. 병실 밖에서 고통으로 황량한 뜨락에 민들레가 피고 새싹이 돋듯이 아이가 그 고통을 이겨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빌었던가..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의 기억이다.

 

 

겁쟁이는 사랑을 드러낼 능력이 없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의 특권이다.

-마하트마 간디-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사실 서른 다섯이후로 나이를 세어본 적이 없다. 그냥 세월에 몸을 맡기고 흘러온 기분이다. 남들은 출산과 육아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도 하는데 이제껏 쉬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바쁘게 살면서 지내는 지금도 결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이가 드는 것에 두려움은 없다. 사실 마흔이 되길 은근 기대하고 있었더랬다. 마흔에는 무언가가 다른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마흔이 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혹의 사전적 의미가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그만큼 세상의 유혹이 많아지는 나이라는 뜻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불혹에 자신의 중심이 없으면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여성나이 마흔에는 여성의 매력으로 보나, 사회적인 위치로 보나 불안한 시기를 격게 된다고 한다. 40~50대가 예전 같으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가족의 존경을 받는 나이겠지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중년의 삶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척 팍팍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우울증에 시달리는 중년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여성은 특히 마흔이 되면 매력이나 성적능력, 젊음, 심지어 창의력마저 끝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두려움은 대체적으로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사라 브로커는 심리치료사로 여자들이 마흔을 끔찍한 숫자로 여기며 그토록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는 이유를 밝히며, 마흔의 분수령을 지혜롭게 극복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솔직담백하게 들려준다. 저자는 여자에게 있어 마흔은 자신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나'라는 유일무이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한 다음에라야 사회에서 전하는 메시지와 심장의 외침을 서로 분리하고, 강박에서 벗어나 현재 모습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려면 다섯 가지 인생철학, 우아함과 유대감, 성취감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생의 분위기는 언제나 선택하기 나름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야기의 알맹이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자신이다 . -p282-

 

 

유방암을 앓은 300명의 간호사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가까운 친구가 없는 사람이 친구가 열 명이상인 사람보다 사망률이 네 배나 높았다고 한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타인과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걷잡을수 없는 방향에 흘러갈 때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하여 준다.

그리고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은 글귀가 있다. "나는 아이보다 날 더 사랑한다." 라는 글귀이다. 친구들 모두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인생이지 누군가나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거나 '나'를 대신하여 아파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보다 '나'를 사랑하게 될 때 아름답게 나이드는 비결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게 나이드는 비결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연습이 깊은 내면에 흘러들어 퇴적된 지층처럼 나의 한층위를 이룰 때 아름다운 나를 만나게 되리라.......

*나이듬의 미학과 눈부신 인생 후반부의 시작을 위하여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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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 내 인생의 전환점
강상구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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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신문에 지하철 담배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흡연과 음주, 욕설과 행패등 몰지각한 행동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기사를 읽으면서 정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서울에서 직장다닐때만 해도 지하철에서 담배를 피는 사람을 본 적도 없거니와 술을 마시는 사람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남자도 아닌 여자가.. 궁금함에 지하철 담배녀 폭행동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아무리 지하철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해도 좀 심한 폭행이었다. 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상황이 어림짐작이 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차마 여자를 때리고 싶진 않았는지 “아고 얼굴은 이쁘게 생겨서 행동도 이쁘면 얼마나 좋아. 아고 .” 하는 말이었다.

 

요즘 세상의 하수선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씁쓸한 기사였다. 예전에는 그래도 인성을 중요시하고 도덕의 가치를 우선시 했지만, 이제는 인성보다는 물질이 더 높은 가치가 되다보니 사회에서는 인성의 문제가 되는 사건들이 많아지게 된 것 같다. 싸움을 하지 않고 살면 좋겠지만 싸울 일이 오히려 더 많아지는 세상이다. 현재사회는 경쟁이라는 프레임 속에 현대인을 가두어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이겨야 잘 사는 인식이 저마다 강하게 박혀있다. 손자병법에서는 이기는 싸움을 하는 방법은 바로 이기는 싸움만 하는 것(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고 한다. 책을 읽기 전에 이 문구를 읽었을 때 지나치게 단순한 대꾸에 웃음이 나왔던 것 같다. 허나 손자가 이기는 싸움만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을 바로 아는 것(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百戰不殆)에 있다. 여기서 손자가 백승百勝이 아닌 불태不殆를 쓴 이유는 ‘싸워서 이기기’ 보다 ‘지지’않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는 승리를 아는 5가지 조건이 있다.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자가 이긴다. (불가이여전 불가이여전자승知可以與戰 不可以與戰 者勝)

☆군대의 많고 적음을 쓸 줄 아는 자가 이긴다.(식중과지용자승 識衆寡之用者勝)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쪽이 이긴다(상하동욕자승 上下同欲者勝)

☆싸울 준비를 끝내고 적을 기다리는 자가 이긴다.(이우대불우자승 以虞待不虞者勝 )

☆장수는 유능하고 임금은 개입하지 않는 쪽이 이긴다. (장능이군불어자승 將能而君不御者勝)

 

손자병법에서는 싸움의 시작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으로 시작한 싸움, 즉 자기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였을 때 비로소 이기는 싸움만 할 수 있다. 묵묵히 1만 번의 연습을 이어가는 게 자신을 완성해가는 방법이다. 자신과의 싸움에 이기고 난 후에 비로소 적을 마주하였을 때 지지 않을 준비가 되면 승리는 자명하게 된다. 흔히 바둑을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바둑판의 흐름을 잘 읽듯이 자기 자신을 한 발 떨어져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타인을 위한 입장 바꾸기가 아닌 자신을 위한 입장바꾸기를 해보면 자신을 바로 직시하기에 더욱 좋을 듯 하다.

손자는 장수의 위험요소를 5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앞뒤 재지 않고 죽자고 덤비기, 둘째는 싸움은 어찌되든 내 한 목숨 살기에 연연하기, 셋째는 성질 급하고 쉽게 화내기, 넷째는 혼자 깨끗한 척하며 명예에 집착하기, 다섯째는 보호할 능력도 안 되면서 백성 사랑하기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움이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적을 아는 것이 승부의 핵심이다. 손자가 말한 장수의 위험요소 5가지는 장수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약점이다. 장수의 약점을 알면 장수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적에 대한 신상파악은 기본이다. 대체적으로 힘있는 사람들은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고 힘 없는 사람은 듣기 싫은 말도 억지로 듣게 된다. 그래서 힘이 있는 사람이 보는 세상과 힘 없는 사람이 보는 세상은 틀리다고 한다. 아마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한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힘 없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면 아마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독단에는 빠지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선거철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손자병법의 진면목은 바로 이런 부분이다. 말로는 이기는 싸움만 하라고 하지만 그 속뜻은 싸우지 말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른 병법서와 차별된다. 게다가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은 삼국지가 아닌 삼국사기와 이순신의 싸움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기 때문에 손자병법이 수월하게 이해되면서도 친근하게 읽을 수 있다. 싸움하면 전쟁을 연상하곤 했는데 일상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상기시킬 수 있어 무척 친근한 자기계발서처럼 느껴진다. 첫머리에 지하철 막말녀를 예로 들었듯이 우리의 일상은 싸움에 노출되어 있다. 과거 스스로의 처신만 바로하면 싸울 일이 없던 때와는 다르게 점점 경쟁체제에 익숙하다보니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를 내고는 늘 후회를 하면서도 일단 저지르고 보는 나 역시도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한다. 이제 내 나이 마흔이기에 ... 이 책이 더 웅숭깊게 다가오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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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순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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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라의 보물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쓴 글로 전체를 놓고 보면 미술사의 낱낱 장면을 소개한 것이다. 결국 대중을 위한 명작 해설에 다름 아닌데 이게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본래 짧고 쉽고 간단하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오히려 이를 통하여 한국 미술사에 한 걸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니 피겨스케이팅에 비유하자면 '한국미술사 강의'는 선수권대회의 지정 종목이고 '국보순례'는 갈라쇼 같은 것이다. -저자의 글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슬그머니 미소가 번진다. 책을 향한 애정과 평소 소탈한 저자의 모습이 이 글에 그대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순례라는 말자체에 경건함과 여유의 모습이 연상되듯이 이 책은 왠지 모르게 경건해지는 마음과 여유로움으로 읽은 듯하다. 거기에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어우러진 해설은 지적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해설 옆 페이지에 있는 양질의 도판은 유물들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우리나라 문화유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움의 상징이라는 것을 배웠다. <국토순례> 이 책은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그림.글씨.공예.도자.조각.건축- 등 각 분야의 명작들을 뽑아내어 각각의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본다.( 단편적으로 소개가 되어 있어 인상깊었던 작품들을 적어놓는다. )

 

고려불화 '물방울관음'은 일본 센소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는 평생에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던 전설적인 명작을 보고 "아 ! 숭고하고 아름다워라."라며 감탄을 하는데 이유는 명작이란 사진 도판으로 익혀온 탓에 실제 작품을 보면 무덤덤해지기 일쑤인데 이 물방울 관음은 도판에선 느낄 수 없는 감동이 그대로 전해졌다고 한다. 한국미술사 불후의 명작인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560년이 넘은 작품이다. 보존 상태가 완벽해서 마치 어제 그린 그림처럼 생생한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天理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왜관수도원

정선 <금강내전도>

조선 18세기 성 베네딕도회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에 소장되었다가 국내로 돌아온 <<겸재화첩>에 대한 사연은 조금 길다. 독일 오틸이엔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 수도원장이 선교하러 조선에 왔을때 '금강산'구경을 하고 지인들이 겸재 그림 21점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독일로 돌아간 후에 <금강산에서>라는 책을 펴낸 베버의 책을 유준영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금강산에서> 책을 읽다가 수도원을 찾아갔더니 겸재의 화첩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겸재의 그림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자 여러 곳에서 수십억원을 제시하며 매매를 권하였지만, 수도원에서는 2006년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년을 맞아 왜관수도원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넘겨주었다. 저자는 겸재화첩에서 <금강내전도>와 <함흥본궁송> 두 폭에 매료되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금강내전도>를 본 순간 감탄이 흘러나왔다. 우리 산천의 멋을 그대로 멋지게 담아내어 율동감있게 표현한 금강내전도는 산이 살아움직이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전의 그림은 중국 화본에 나오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여 독창적인 한국의 화법이라 할 수 없었지만, 겸재의 산수화는 한국적인 산새와 계곡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탁월하다. 겸재를 두고 한국적 화풍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로 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버드나무 위의 새

 

겸재의 그림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그림은 <버드나무 위의 새>이다. 흐드러진 갯버들 사이에 새 한마리가 물가를 응시하고 있다. 수묵담채화로 그린 이 그림안에서 여백의 미를 발견하고 머리속이 번뜩이는 기분이 들었는데 , 화가 프리드리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여백을 강조하며 '우리의 눈은 환상과 마찬가지로 바로 눈앞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보다 막연하고 아련하게 보이는 것에 더 매혹되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김홍도의 그림에서 이런 여백을 발견한 것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우리 산천의 아늑함과 편안함, 여백의 미덕까지 그래서 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 일컫는지도 모르겠다. 위의 그림도 전체적인 인상은 부드러우나 나무줄기의 묘사는 거침이 없음을 알수 있다

 

<삼채향로>

 

 

우리에게 안타까운 역사가 있다면 아마도 발해를 잃어버린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저자 또한 발해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하는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인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의 가장 큰 실수라고 한다. 그것은 한 왕조는 앞 시대 왕조를 기록해줄 의무가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발해의 문화를 기록하지 못한 것은 우리전통 민족문화의 실추인지도.... 기록에 의하면 발해는 도기에 뛰어났다고 하는데 위의 삼채향로에서 보이듯 다리부분에 조각된 사자의 조각도 정교하고 삼채의 발색이 아주 우수한 명품이다. 통일신라의 그것과는 달리 어딘지 고구려적인 힘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발해풍이고, 발해취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발해의 이런 삼채기술은 거란족의 요나라에 계승되어 유명한 '요나라 삼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고려하면 청자가 떠오르지만 나전칠기의 명성은 청자나 불화못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고려 나전칠기의 위대함에 대해 잘 알려져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지만, 불행히도 고려 나전칠기는 모두 16점에 불과하며 단 한점만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일 뿐, 일본에 10점, 미국에 3점, 유럽에 2점이 있다고 한다. 그림.글씨.공예.도자,조각 부분까지는 세밀하게 읽었으나, 건축부분에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보았던 불국사 석가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불국사 대웅전,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경주 첨성대, 경복궁 근정전 등은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이외 마지막편에는 해외 한국 문화재 편이 실려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아직도 응달에 멍들어 있다.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 한 왕조는 앞시대 왕조를 기록해줄 의무가 있다." 고 했듯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문화유산을 되찾아와야 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몫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유산이 뿔뿔히 훝어져 있듯이 우리민족의 정체성도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다시 되찾을 날까지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계속될 것 같다. 우리 문화재 해설서이자 안내서인 <국보순례>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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