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순례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1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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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라의 보물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쓴 글로 전체를 놓고 보면 미술사의 낱낱 장면을 소개한 것이다. 결국 대중을 위한 명작 해설에 다름 아닌데 이게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본래 짧고 쉽고 간단하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오히려 이를 통하여 한국 미술사에 한 걸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니 피겨스케이팅에 비유하자면 '한국미술사 강의'는 선수권대회의 지정 종목이고 '국보순례'는 갈라쇼 같은 것이다. -저자의 글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슬그머니 미소가 번진다. 책을 향한 애정과 평소 소탈한 저자의 모습이 이 글에 그대로 배어 있기 때문이다. 순례라는 말자체에 경건함과 여유의 모습이 연상되듯이 이 책은 왠지 모르게 경건해지는 마음과 여유로움으로 읽은 듯하다. 거기에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어우러진 해설은 지적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해설 옆 페이지에 있는 양질의 도판은 유물들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으면서 우리나라 문화유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움의 상징이라는 것을 배웠다. <국토순례> 이 책은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 -그림.글씨.공예.도자.조각.건축- 등 각 분야의 명작들을 뽑아내어 각각의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본다.( 단편적으로 소개가 되어 있어 인상깊었던 작품들을 적어놓는다. )

 

고려불화 '물방울관음'은 일본 센소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는 평생에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했던 전설적인 명작을 보고 "아 ! 숭고하고 아름다워라."라며 감탄을 하는데 이유는 명작이란 사진 도판으로 익혀온 탓에 실제 작품을 보면 무덤덤해지기 일쑤인데 이 물방울 관음은 도판에선 느낄 수 없는 감동이 그대로 전해졌다고 한다. 한국미술사 불후의 명작인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560년이 넘은 작품이다. 보존 상태가 완벽해서 마치 어제 그린 그림처럼 생생한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天理 :천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왜관수도원

정선 <금강내전도>

조선 18세기 성 베네딕도회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에 소장되었다가 국내로 돌아온 <<겸재화첩>에 대한 사연은 조금 길다. 독일 오틸이엔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 수도원장이 선교하러 조선에 왔을때 '금강산'구경을 하고 지인들이 겸재 그림 21점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독일로 돌아간 후에 <금강산에서>라는 책을 펴낸 베버의 책을 유준영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금강산에서> 책을 읽다가 수도원을 찾아갔더니 겸재의 화첩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겸재의 그림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자 여러 곳에서 수십억원을 제시하며 매매를 권하였지만, 수도원에서는 2006년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년을 맞아 왜관수도원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넘겨주었다. 저자는 겸재화첩에서 <금강내전도>와 <함흥본궁송> 두 폭에 매료되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금강내전도>를 본 순간 감탄이 흘러나왔다. 우리 산천의 멋을 그대로 멋지게 담아내어 율동감있게 표현한 금강내전도는 산이 살아움직이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전의 그림은 중국 화본에 나오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여 독창적인 한국의 화법이라 할 수 없었지만, 겸재의 산수화는 한국적인 산새와 계곡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탁월하다. 겸재를 두고 한국적 화풍의 창시자이자 완성자로 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버드나무 위의 새

 

겸재의 그림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그림은 <버드나무 위의 새>이다. 흐드러진 갯버들 사이에 새 한마리가 물가를 응시하고 있다. 수묵담채화로 그린 이 그림안에서 여백의 미를 발견하고 머리속이 번뜩이는 기분이 들었는데 , 화가 프리드리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여백을 강조하며 '우리의 눈은 환상과 마찬가지로 바로 눈앞에서 또렷하게 보이는 것보다 막연하고 아련하게 보이는 것에 더 매혹되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김홍도의 그림에서 이런 여백을 발견한 것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우리 산천의 아늑함과 편안함, 여백의 미덕까지 그래서 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 일컫는지도 모르겠다. 위의 그림도 전체적인 인상은 부드러우나 나무줄기의 묘사는 거침이 없음을 알수 있다

 

<삼채향로>

 

 

우리에게 안타까운 역사가 있다면 아마도 발해를 잃어버린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저자 또한 발해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하는데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인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의 가장 큰 실수라고 한다. 그것은 한 왕조는 앞 시대 왕조를 기록해줄 의무가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발해의 문화를 기록하지 못한 것은 우리전통 민족문화의 실추인지도.... 기록에 의하면 발해는 도기에 뛰어났다고 하는데 위의 삼채향로에서 보이듯 다리부분에 조각된 사자의 조각도 정교하고 삼채의 발색이 아주 우수한 명품이다. 통일신라의 그것과는 달리 어딘지 고구려적인 힘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발해풍이고, 발해취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발해의 이런 삼채기술은 거란족의 요나라에 계승되어 유명한 '요나라 삼채'로 발전하였다고 한다.(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고려하면 청자가 떠오르지만 나전칠기의 명성은 청자나 불화못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는 고려 나전칠기의 위대함에 대해 잘 알려져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지만, 불행히도 고려 나전칠기는 모두 16점에 불과하며 단 한점만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일 뿐, 일본에 10점, 미국에 3점, 유럽에 2점이 있다고 한다. 그림.글씨.공예.도자,조각 부분까지는 세밀하게 읽었으나, 건축부분에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보았던 불국사 석가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불국사 대웅전,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경주 첨성대, 경복궁 근정전 등은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이외 마지막편에는 해외 한국 문화재 편이 실려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아직도 응달에 멍들어 있다.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 한 왕조는 앞시대 왕조를 기록해줄 의무가 있다." 고 했듯이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문화유산을 되찾아와야 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몫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화유산이 뿔뿔히 훝어져 있듯이 우리민족의 정체성도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다시 되찾을 날까지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계속될 것 같다. 우리 문화재 해설서이자 안내서인 <국보순례>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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