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하루 그림 - 그림으로 문을 여는 오늘, 그림 한 점의 위로와 격려
선동기 지음 / 아트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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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림 책을 좋아한다. 그림을 보며 상상하는 재미때문인데 , 이웃님들의 리뷰를 보며 조만간 구입을 하려고 마음 먹었던 책이 블로그 이웃인 키미스님으로부터 왔다. 살짝 작가의 이야기만 들으려고 펼쳤다가 다 읽을 수 밖에 없는 그림책이다. 실려있는 그림이 너무 생생해서 손으로 여러 번 쓸어보기도 하고 , 화가가 뛰어난 걸까, 편집을 잘한걸까 ? 하며 읽게 된.....

 

 

 무엇보다도 저자는 전문가가 아니다. 저자는 파워블로그로 닉네임 ‘레스까페(Rescape)’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림 읽어주는 남자’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미술사 책은 거의가 전문가들에 의해 출판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책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출판 트렌드로 떠오른 블룩(blog+book) 현상으로 보여진다. 그래서인지 더욱 친근하고 전문가와는 차별화된 방법으로 미술을 감상하게 한다.  마치 이웃집 아저씨가 설명해주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아저씨 느낌은 책 중간중간에 아내와 아이들 이야기가 무척 다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편안하고 따뜻함의 뜻 ^^). 책은 계절에 따라 4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또 봄, 여름,가을, 겨울에 따라 매달 10점씩의 그림을 소개한다. 책에 실려있는 그림들은 미술사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 대중적이지 않은 그림들이다.

 

 

유난히 더운 오늘 아이 운동회에 갔다가 뜨거운 태양에 벌써부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방 속에 있는 책을 펼치자, 그림 속의 이야기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스웨덴의 화가 소른의 「모라 시장」안에 낮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남편을 망연자실하여 바라보는 여자에게 저자는 " 봄기운에 취했다고 생각하세요. 살면서 저렇게 얼굴을 쳐박히도록 힘든 일이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하고 , 피어스의 「나무꾼의 딸」에게는 힘든 짐을 든 그녀의 모습이 여전사의 모습이라며 어깨에 멘 나뭇단을 가리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말을 전한다. 저자는 그림을 분석해야 할 대상이 아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림은 바로 우리 사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림이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림과 함께 화가의 일생이 요약되어 있어 화가의 화풍이라든지 성장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행복을 추구한다." 라고 했다. 『나를 위한 그림』은 보는 순간 행복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하루의 고단함을 잊기에는 최고였다. 사람들은 위대하고 진중하고 전문적인 것이 더 예술적이고 더 아름다울 거라 말하지만 일상의 소소함과 편안함이 어쩌면 예술에 더 가까운 지도 모른다. 예술이 곧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예술이라는 구분으로 바라보지 말고 진정한 예술적 가치란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곱고 이쁜 책이다.

 

 

 

 

* 보너스로 이쁜 그림 엽서 5 장이 들어있어요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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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사람공부 - 사람이 기적이 되는 순간 정진홍의 사람공부 3
정진홍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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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대기권 밖을 여행한 구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한눈에 보이는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 하늘에 신은 없었다."

 반면에 아폴로 12호를 탑승했던 미국의 우주비행사 제임스 어윈은 이렇게 말했다지요.

"저 멀리 지구가 오도카니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설명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차동엽 신부님의 「 잊혀진 질문」에서 이 구절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이유가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지만,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의 차이는 이렇게 삶의 많은 부분을 전혀 다르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주 많은 차이를 보일 거란 생각이 든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내  아이에게 바라는 부분은 더도 덜도 아닌 " 삶에서 감동을 느끼는 아이"로 자라주기만을 바란다. 다행인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민들레 홀씨가 날리는 모습에서 홀씨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본다. 어제는 작은 아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칭얼대길래 소파에 누워서 같이 『정진홍의 사람공부』를 읽었다. 고작 유치원생인 딸아이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하얀 것이 종이요, 검은 것이 글씨라고 생각했겠지만, 책을 읽어주면서 나는 그 안에 '감동' 이란 씨앗이 아이의 가슴에 심어지길 바랬다.  점점 삶의 양지가 되는 단어들은 사라지고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단어들이 난무하고 있는 세태에 의지하게 만드는 마지막 학문이 있다면, 인문학이라 말하고 싶다. 순수, 의리, 사랑, 용서, 화해, 기적이라는 단어들을 다시 살려내는 학문 또한 인문학이다. 『정진홍의 사람공부』은 그런 인문학이었다. 삶의 양지와 같은 책, 잊었던 감동을 다시 살려주는 기적의 책이다.  

 

 

지난 2월 68세를 일기로 떠나신 故 강영우 박사님 편지를 통한 울림으로 시작하여 ' 삶이 기적이고 사람이 기적'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 곳곳에 기적을 일으키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있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문명을 이루고 있는 것조차 사람이다. 기적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저자는 기적이 아주 가까이에 있으며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날마다 기적을 만들고 그것을 나누는 것에 있다고 한다. 책에는 그야말로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꽉 차 있다.그 중에서도 나의 눈시울을 촉촉하게 만든 사람은 '하춘화'의 이야기였다.  만 6세에 데뷔한 최연소 음반을 낸 가요신동이자 지금까지 총 136장의 앨범과 8400여회의 국내외 공연기록을 가진 최다공연기록 보유자이기도 한 그녀의 삶 뒤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녀는 39세에 대학에 편입해 2006년 8월에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 대중가요의 역사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학위를 소지한 현역 가수가 되었다. 그녀가 올곧이 한 길을 걸을 수 있는 데에는 아버지의 힘 때문이라고 하는데 , 하춘화가 데뷔할 때는 대중문화 가수를 딴따라라고 업신여길 때라고 한다. 지금도 만 6세에 가수데뷔를 시킨다고 하면 ' 몰상식한 부모라든지 어린아이를 내세운 돈벌이"라는 비난을 할 지도 모르겠다. 하춘화의 아버지도 그 숱한 비난을 들었어야 했다. 지금  나이가 들어 딸로서 아버지에게 그 비난을 어떻게 견뎌냈냐고 묻자 늙은 아버지는 " 그땐, 누가 뭐라고 해도 안 들리고, 안 보이더라 ,너를 최고로 키우겠다는 생각에 홀려 있었나보다."라고 한다.

 

 

 

자네 , 기적을 보고 싶나? 그러면 스스로 기적이 되게나 !

(You want to see a miracle, son? Be the miracle!) 

 

 

부모가 되고 보니 세상을 더욱 넓게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신의 삶보다 자식의 삶을 먼저 생각하지만 , 아이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자산은 "세상을 지혜롭게 바라보는 눈"이 아닐까  한다. 세계적인 인물들 중에 15퍼센트만이 유복하고 평온한 가정 출신이었고, 나머지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저자는 부모는 자식에게 도전과 응전의 정신, 그 가치만 가르치면 된다고 한다. 그 안에 '기적의 씨앗'이 심어있다고.....  故 강영우 박사나, 숱한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ET할아버지' 나 ,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죽음의 고비를 숱하게 넘기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빠삐용까지 모두 하나같이 긍정적인 사고 즉 '기적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눈빛이 맑아지기도 하고 촉촉해지기도 하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기기도 한다.  일상이 주는 소소함에서 아름다움을 스캔할 수 있고 ,  인간의 본성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혜의 알곡을 골라내는 방법을 배우고  세상 만물과 소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은 풍요와 아름다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삶의 양지 같은 책 『정진홍의 사람공부』는 모두에게 좋겠지만, 부모에게 더욱 도움이 되는 책으로 여겨진다.  

 

마음의 수행이란 긍정적인 생각을 키우고 부정적인 생각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진정한 내면의 변화와 행복도 바로 긍정을 키우고 부정을 물리치는데서 옵니다. -달라이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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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란 - 제1회 황금펜 영상문학상 금상 수상작 황금펜 클럽 Goldpen Club Novel
류서재 지음 / 청어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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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 어디가 꿈속의 도원인지 알 수 없어.

완벽한 세상을 천연히 노니는 사람을 보니

절세의 그림처럼 좋은 일이 생기려나

그림 속 천년을 계속 바라보아도 좋으리

<<몽유도원도>> 

 

 왕의 아버지로서 살았던  흥선대원군에 대하여 국사공부 시간에 배웠던 단골수식어는 '쇄국정책"이다. <<석파란>>을 처음 보았을 때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라 해서  '정치'를 말할 줄 알았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그린 책이다. 작가는 한편으로는 이런 '예술가'적 면모가 후에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흥선대원군)이 되면서 쇄국의 근간을 이루게 한 역사 이면의 모습으로 접근하였다.  

 

 

조선 시대 왕족으로 산다는 것, 그것도 권력이 없는 왕족으로 산다는 뜻은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잉여의 존재를 말한다. 이하응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서화가이자, 가야금에도 능했던 예술가이다. 이하응은 소설속에서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을 즐겨 바라보기도 하고  안평대군의 꿈을 자주 꾼다. 이것은 안평대군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처지가 안평대군과 다르지 않음을 투영하는 것이다. 자신과 똑같이 예술가적 기질이 뛰어났던 안평대군이 둘째 형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상상을 매일하며 , 이하응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야심없는 파락호를 자처하고, 궁도령, 혹은 상갓집 개라는 별명에도 잉여의 시절을 견딘다. 그런 시절의 이하응에게 '묵란'은 그림 이상의 것이었고 유일한 탈출구가 되어준다.

 

 

 

소설은 권력에서 밀려난 한 여인 조대비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조대비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비로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가 되었지만 안동 김씨를 친정으로 둔 시어머니 순원왕후에 밀려 한 많은 궁중 생활을 했던 비운의 대비였다. 당시 조대비는 순원왕후 사망 이후 궁중의 최고어른이 되어 안동김씨에게 친정의 원한을 갚을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궁중 생활이 녹록치 않듯이 철종의 즉위로 권력을 빼앗긴 조대비는 살아있는 "화무십일홍"이라는 전설을 상기시켜줄 뿐이었고, 뒷방 늙은이로 늙어가고 있는 외로운 여인에 불과하였다.권력을 잃은 여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예리한 "직관"이다. 예술을 느끼는 직관은 조선에서는 아무도 조대비를 따라 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느 날, 조카 조성하의 집에서 우연히 보게 된 "묵란"은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두사람, 이하응과 조대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현대로 넘어가기 위해  근대 조선 사회는 이미 밑바닥에서부터 요동치고 있었다. 그 요동치는 소리를 조선 지도층인 사대부들만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신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서학의 꿈틀거림에 신분사회가 출렁거렸고 , '오심즉여심'이라는 평등과 상생의 동학사상은 백성들의 마음을 달뜨게 했다. 동학과 서학 가운데 유학자인 이하응. 여기서 작가는 최제우와 이하응의 만남을 통해 동학의 근본 바탕을 이하응이 직접 체험케 하며, 아내 민씨 부인과 유모 (박마르타)를 통해 서학을 접하게 한다. 이어  동학과 서학에 대한 이해를 직접 이하응이 체험하게 하면서 체득하게 되는 사유속에서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닌 종교 이상의 변혁이라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그의 깨달음은 '석파란' 이라는 그림속에 국가의 이상이자 안평대군이 꿈꾸었던 무릉도원의 이상을 완성해간다..

 

 

"나는 조선의 사대부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오. 나는 내 몸의 이상 (理想)과 싸우는 중이오. -p248

 

 

유난히 난 그림을 잘 그렸다던 흥선대원군에게 '난' 이란 바로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작가는 '석파란' 을 통해 격동기에 있는 조선을 지배층의 시각이 아닌 서민들의 곤궁함을 들여다본다.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이 횡행하던 시기에 백성들에게 탈출구가 되어주던 동학과 서학을 향한 근원적인 물음 속에서 서원철폐를 강행하고 쇄국을 고집하게 된 흥선대원군의 사상적 배경을 다져가는 작가의 솜씨는 놀라우리만치 섬세하다. 우리는 과거에 흥선대원군은 정치적인 맥락으로만 이해하여 왔고 또 그렇게 배워왔다.하지만 예술가로 그려지고 있는 이하응의 삶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장점이 있다. 석파란에 담은 조선(이하응)의 이상은 비록 역사에 쇄국주의자라는 기록을 남기었더라 하더라도  꿈틀거리는 조선의 격동기에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사유의 형성에 접근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탁월하다. 기존의 역사책에서 다루지 않았던 조선의 격동기에 근간을 이룬 사유체계를 알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색다른 매력이다.

 

 

"정치도 묵란이네, 헛된 줄을 알면서도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그 이상이란 놈을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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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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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월의 더께에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은 퇴색하여 기억은 왜곡되어 갔다. 나이가 들면서 젊었던 날의 흑백사진보다 더 퇴색해버린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저 상상속에서나 만들어져야 할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내 오랜 추억 속에 있던 주인공의 얼굴조차도 희미해져 갈 만큼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와의 갑작스런 조우에 이미 그 주인공은 나의 추억과는 너무나 많은 세월의 거리를 두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때 나의 기억이라는 것은, 또 나의 아름답기까지 했던 추억들이란 얼마나 많이 왜곡되어 있는지를 쉬이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이 책은 1인칭시점으로 전개되는 주인공 토니의 이야기이다. 예순이 넘어서야 알게 된 진실, 그것을 추적해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기억이 얼마나 많이 왜곡 되어 있는지를 깨닫기까지 주인공이 읊조리는 이야기들은 삶의 진실과 거짓의 잣대에 던지는 날카롭고 에누리 없는 시선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누구나 한번쯤 지나온 시기- 어른들보다 더 삶을 확실하게 포착한 착각속에서 진실과 도덕과 예술에 탐닉하며 적어도 어른보다는 낫다는 '허세'를 부리는 그런 시기-에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 친구들 중에 가장 똑똑하고 지성인인 장래가 촉망되는 에이드리언과는 달리 토니와 그 친구들은 문학과 섹스에 심취한다.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여자친구, 순결한 처녀일 것 같고 아름다운 베로니카를 향한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과 싸워야 했던 젊은 날은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에게 호의를 보이자 토니는 이후의 모든 기억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토니의 삶은 여느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결혼하였고 아이도 낳았고 이혼하였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여사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토니는 자신의 왜곡된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한다. 자살하기 전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가 지워진 기억을 되살려 놓고 그제야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지우고 살았는지를 깨닫는다. 이렇게 자신 앞에 정체를 드러낸 삶의 명징성은 예순이 지난 토니를 자신의 기억에 기만당하고 농락당하고 살았다는 진실 앞에서 망연자실 할 뿐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2011년 영연방 최고 문학상인 맨부커상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줄리언 반스의 최신작이다. 나이듦에 대해서, 삶의 진실에 대한 통찰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이 소설은 올해 읽은 문학 작품 중에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나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육십 오세에 기억이란 주제로 책을 쓴 줄리언 반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삶의 명징성이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억은 불확실해지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함으로써 왜곡이 심해져간다. 기억은 스스로 지워지기도 하고, 다시 덧칠도 되었다가 점점 불투명하게 자리 잡아 간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이 마냥 좋을 수 없다는 것을 체득해감에 따라 , 최후의 상실까지 겪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법을 배우는 삶의 과정을 줄리언 반스는 날카롭고 에누리 없는 시선으로 명징하게 보여준다. 책을 다 덮고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이유는 과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파편들이 진실인지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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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누와르!
나서영 지음 / 심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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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자율학습 땡땡이를 치고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다음 날 담임선생님께 영화를 본 친구들과 복도에서 벌을 서야했지만, 창피함도 잊을 정도로 영화는 환상적이었다. 바로 오우삼 감독, 유덕화 주연의 천장지구였다. 느와르와 멜로의 조화가 어딘지 촌스러우면서도 주인공 유덕화는 사춘기 여고생의 마음을 자극하는 동경의 대상으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의 모습은 고결해보였다. 불량하지만 불량한 느낌이 없는, 첫 느와르와의 만남이었다. 이후부터 느와르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최근 들어 부쩍 느와르영화가 많아진 느낌을 받곤 하는데, 아마도 느와르가 한국인들에게 묘한 향수같은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최근 본 느와르 중에 기억에 남는 영화 악인은 너무 많다’(감독 김회근)가 아마도 전형적인 느와르로 보여진다. 건달 출신으로 흥신소를 운영하던 남자가 뜻하지 않게 범죄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야기로 느와르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느낌들 -'어두운 골목길, 안개가 자욱한 인적이 거의 없는 스산한 거리, 가로 등 밑에서 불안하게 서성이는 남자, 자욱한 담배 연기, 급히 빠져 나가는 자동차 엔진 소리, 검정 양복과 몸 어딘가에 꼭 있는 문신, 남자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여자,- 느와르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고 있는 구성 요소들이다. 여기에 '부패' '배반' '냉소주의' '환멸' 등이 가미되어 기본 줄거리로 다루어지고 있다.

 

나서영의 이게 바로 누와르! 는 느와르가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다, 한우리회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형제들, 모두 교도소 출신들로 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 발전하게 되어 나아가 용주군의 번영회 성격을 띠게 되었다. 급전을 융통해주고, 서로의 사업을 안정적으로 지원해주고 친목 형성이 두터운 조직이다. 혜영빌딩에서 한우리회 사무실을 꾸려가고 있는 이권하를 중심으로 형제정육점을 하는 유동식과 1층에는 윤구의 오락실이 있고 2층에는 형제통닭을 하는 성구가, 형제헬스장의 백후연, 흙표범이라 불리우는 최동학이 한우리회의 원조멤버들이다.

 

늘 사고만 치고 바보 형을 둔 윤구, 25년만에 재회한 형은 여전한 모습이었고, 한우리회 형제들은 그런 모습의 형도 따뜻하게 맞아준다. 알콜중독이었던 아버지에게 매일 맞고 자란 성구의 불행에 그늘로 자리잡아 있는 꽃처럼 이쁜 엄마. 그러나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엄마는 매일 맞는 성구를 대신하여 맞다가 벙어리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엄마와 동생을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던 자괴감으로 괴로웠던 성구는 벽가도라는 외진 섬에 엄마의 소식을 듣게 된다. 완벽주의에 엄하기만 한 군인 출신의 아버지에게 도망가고 싶어 가출한 최동학은 늘 따라다니는 아버지의 눈초리를 기억한다. 성인이 되자 ,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버지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사라지고 아버지는 새여자와 아들, 딸을 두고 살고 있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보고 최동학은 아버지를 더욱 증오하지만, 자꾸 아버지를 맴돌게 된다.

아픈 가정사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한우리회는 혈연관계보다 더한 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보형에게 깍듯이 존대해주고 오랫동안 헤어진 엄마와 동생의 해우에 마음으로 울어주는 진한 동지애를 자랑하지만, 그들 앞에 불어닥친 불행이라는 괴물은 '용진마트'라는 자유시장 경제체제라는 이름이었다. 심상만 , 심상문 형제가 세운 대형마트는 중소유통업체와 상인들을 야금야금 삼킨다. 영세상인들과 비정규직원들은 용진마트를 상대로 천막을 치고 숙식을 하며 철야농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용진구청과 용진마트는 용역패를 상주시키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시위대는 처참히 무너지고 깨졌다. 이를 바라보는 한우리회 이권하는 그들의 눈물과 슬픔과 억울함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서 그들의 눈물을 기억하기로 했다.

 

오우삼 감독의 누와르는 비둘기는 날아야 하고, 옷자락은 흩날려야 하며, 조명은 항상 뒤에서 비쳐져야 한다이다. 오우삼의 영화와 나서영의 글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오우삼의 그것은 화려한 토핑으로 장식한 피자라고 한다면, 나서영의 글은 봄날 한철 맛볼 수 있는 화려한듯 화려하지 않은 화전같다고나 할까. 나서영 작가는 간결하고 과하지 않는 표현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한 침해하지 않으려하는 배려가 묻어난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누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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