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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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은 내가 사는 곳의 이야기이다. 타고나길 길치에다가 익숙한 곳, 한 곳만 가는 습성 때문에 낯설고 번접한 곳은  가지 않는다. 우린 휴가도 언제나 사람이 많지 않은 지리산을 가고 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책으로 듣는 세계는 그와는 틀리다. 나는 고백하건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문화재가 있는 곳에 가보아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던 터라 문화유산답사 같은 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한 문외한중의 문외한이다. 그러나 나의 우매함은 언제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앞에서 철저히 깨부셔진다. 문화재는 하나의 물체이다. 문화재는 대부분이 미술품이다. 미술품을 바라볼 때 그것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미술품을 통해 나타나는 상(像)을 가지고 느껴야 한다. 따라서 미술품에 대한 해설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언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조건에서 시작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그런 작업이다. 시각적인 상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서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 침묵의 물체를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이다. 

 

지리산 동남쪽 답삿길로 육십령고개, 안의 , 함양, 산청, 단성, 대원사에 이르는 큰 줄기를 따라가는 길의 답사기의 시작은 안의로부터 이야기 보따리가 풀린다.안의에서는 첫 외직으로 안의현감을 지낸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가 빠질수 없다. 연암 박지원은 개인적으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지라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에 귀기울여 읽게 되었는데 부끄러웠던 것은 갈비탕으로 유명한 안의를 여러번 가면서도 스쳐지나던 안의초등학교를 무시로 보아왔다는 사실이다. 아 참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라는 말이 다시 생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조선왕조의 문예중흥기였던 정조시대의 문화적 성취와 성숙도는 사상에서 정약용,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회화에서 단원 김홍도, 경륜에서 번암 체제공 등으로 상징되는바,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연암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배워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고, 그렇게 우기고 있다.

 

부석사에서 선묘의 이야기에서는 선묘가 한국인인 의상을 위해 희생한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상을 만들어 그 희생의 뜻이 역사속에서 살아남게 한 것은 바로 800년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에서 한국문화의 배타적인 모습을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애향심,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인해 이민족에게는 대단히 배타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 선묘의 이야기에서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극으로 점철되게 만든 요인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엇보다도 타문화를  무조건 비판하는 시각보다는 다양성이라는 시각으로 문화를 바라봐야겠다.

 

 

2권에서는 석불사에 관한 장이 1,2,3으로 나누어져 있다. 2권은 석불사에 담긴 세계적인 가치에 대하여 알리고자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치 연암 박지원이 조선지식층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간절함으로 열하일기를 집필하였듯이 석불사를 보고도 그 위대함을 느끼지 못하는 나와 같은 문외한을 깨우치기 위한 간절함이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석굴암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석굴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석굴의 구조는 그 평면과 입면이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수리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분의 통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런 석굴암을 두고 고은 선생은 하나의 형용사로서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석굴의 찬사를 두고 나도 모르게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 뜻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야나기-

 

삼국유사에서 석불의 창건의 신화와 천장덮개돌이 깨진 전설로 시작되는 석불사의 이야기는 1913년 일제에 의해 완전 해체되는 비극을 맞는다. 그러나 이 석조물의 보수 공사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은 석굴 보존에 치명상을 주게 된다.  일제의 석굴의 개수공사는 1200년 유지해온 석굴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만 남기고 외형상에도 무수한 변조가 가해졌으며 미관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 신식 기술과 재료 사용으로 인하여 석굴이 극심한 누수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3차 보수공사를 하게 되지만 석굴의 습기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1927년 증기세척을 이끼를 제거하지만 시산의 경과속에서 이끼는 또 피어났다. 1934년 자시 증기세척으로 분무세례를 받게되며 석굴은 또 한번의 치명적인 손상을 받게 된다.결국 일제 36년을 통하여 일제가 석굴에 남겨준 유산이란 두께 2미터의 콘크리트벽과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푸른이끼, 그리고 가공할 흉기, 증기세척 보일러 뿐이었다. 그것은 석불사 석굴이 겪은 오욕의 역사에 첨부된 증거물이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어진 석굴암의 보수공사는 석굴암을 목굴암으로 암굴암으로 수굴암으로 전굴암으로 계속된 오욕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 석굴암의 습기와 이끼문제를 해결한 것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의 김효경 박사에 의해서이다. 김효경박사의 석굴암에 쏟은 정성으로 인해 나 역시 눈물나는 감동을 느끼게 되었는데 김효경 박사는 석굴의 보존문제의 책임이 끝난 지금까지도 석굴암을 관리 감독해 오고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석굴암의 안전을 확인하는 그는 늘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돌보아주어야 좋은 효과를 내며 자극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유흥준 교수는 이런 분들로 인해 우리 문화에 희망을 느끼다고 말한다. 관(官)이 하는 일보다도 민(民)이 하는 일이 빛날 때 그 문화는 성숙한다며 남들이 무라고 하든 곰바위처럼 자기가 생각한 일에 일생을 거는 쇠귀신같은 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4천만이 레게춤을 흔든다 해도 단 한명만이라도 그러지 않는 인생이 있다면 우리 문화는 죽지 않고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다고, 1권과 마찬가지로 2권은 더한 감동으로 읽고 배웠다. 처음 손에 잡은 순간부터 벅찬 감동의 연속인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무지와 무심을 한탄하기도 했다. 모르고 볼때는 내 인생과 별 인연없는 남의 땅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땅으로 가슴깊이 다가온다." 라는 말처럼...... 석굴암의 역사가 우리나라 역사와 닮아 있다는 신선한 충격과 안타까움과 함께 그런 위대한 유산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느끼지 못했던 나의 무지에 가슴아파 하면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가치를 새삼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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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풍경 - 아름다운 작은 도시 포트 콜린스에서 전해온
정혜경 지음 / 소풍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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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이 무척 이쁘다. 사진도 이쁘고 요리들도 참 이쁘다.그러나 더 이쁜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저자의 아름다운 시선이었다.

맛으로 느끼는 것보다 보는 맛이 더 즐거운 책이었던 것 같다.

삶의 열정이 묻어나는 책들을 만나면 그런 열정을 나에게도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는 한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사람들 특유의 세상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시선들을 닮아가고 싶다는 잔잔한 소망이 내 마음에 스며들고는 한다. 한 치도 여유없이 살던 내 삶과는 달리 코즈모폴리탄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일상의 소소한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예술로 탄생되어 가는 것을 보며 내게도 일요일의 한가한 여유와 같은 시간이 이 책으로 인해 느끼게 되었다.

 

 

 

 

두아이와 포트 콜린스에서 머물게 된지 8년 , 미국 콜로라도의 작은 도시에 살면서 포트 콜린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담아내기 시작하면서 사진의 매력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면서 눈에 보이지 않던 모든 사물이 하나의 아름다운 피사체로 탄생하며 의미 있는 오브제로 다가오기 시작한 감동의 이야기와 요리를 하면서 또한 사진으로 블로그에 올리자 많은 공감을 받으며 요리가 삶의 중심이 되어버리고 이에 늦깍이 공부를 시작한 저자의 이야기는 삶의 아주 소소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첼로만  연주하며 살아온 저자가 용기를 내어 칼리지에서 사진과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며 좋아했던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까지 여는 모습에서 대체 저런 열정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포트 콜린스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자신을 " 저는 영원한 학생이랍니다." 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책이었다. 

 

 

now and then it's good to pause in our pursuit of happiness and just be happy.

이따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그저 행복을 느껴 보는 것도 좋다.-기욤 아폴리네르-

 

맛있는 책읽기와 포트 콜린스의 소소한 이야기는 따스함과 함께 한가한 일요일 오후의 소소한 행복을 심어주는 시간을 주었다.

 

친한 친구들이 모두 외국에 있어서 이런 책들을 만나게 되면 가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들기도 하지만, 때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날들에 색을 입혀 일상의 소소함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면 그래서 이 세상이 아직도 살만한 곳이 아닐까 싶다. 포트 콜린스에서 날아온 맛있는 풍경은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맛있는 책읽기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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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09-23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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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행복주의 반철학사 5
미셀 옹프레 지음, 남수인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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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역사속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시대이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태동의 세기이다. 19세기의 프랑스 철학 또한 독일의 관념주의를 중심으로 많은 철학이 대두되었는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같은 사상의 대두와 영국의 철학이었던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철학사상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공리주의는 공리성을 가치판단으로 하는 사상으로서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데 얼마나 기여하는 가에 결정되어진다고 보는 사상이다. 따라서 19세기 반철학사는 대표적 철학자로서는  칸트, 헤겔 , 윌리엄 고드윈과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과 로버트 오언, 샤를 푸리에와 바쿠닌으로서 이들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사회적 행복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목사였던 윌리엄 고드윈은 프랑스의 계몽사상을 접하고부터 목사직을 그만둔다. 지극히 낙천적이면서도 골수 칼빈주의자요 철저한 평화신학주의자인 고드윈은 이성을 "우리의 자연적 활동에 상응한다."고 단언하고 , 진보는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 항구적인 운동은 돌이킬 수 없이 최상을 향해 천천히 ,틀림없이,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 그러나 진정으로 안내해 간다고 말한다. 고드윈은 사유재산의 부정과 생산물 분배의 평등분배에 입각한 사회정의의 실현을 주장하였으며 , 무정부주의의 선구자이자 급진주의의 대표로서 그의 사상은 감옥을 예를 들자면  , 감옥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제시하는 목표들-  범죄자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힘을 감소시키는 행동을 누적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는 - 에 비추어 좋은 것이기도 하고 나쁜 것이기도 하다. 전쟁도 마찬가지로 악도 선도 아니고 다만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다. 전쟁이 예방적이고 방어적일 때 국민의 불행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국민의 행복에 기여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될 때 좋은 것이요, 영토의 확장이라는 제국주의적 논리에서 진행되면 나쁜 것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의 계량가능성을 주장한 벤담의 양적공리주의’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공리주의’로 나뉜다. 벤담은 3살에 이미 문자를 터득하고 열다섯 살에 교회법학사, 열여덟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한다. 이후 벤담의 명성은 공리주의라는 용어와 함께 형성되는데 <도덕 및 입법원리의 서론>에서 공리주의 사상의 핵심 원리들을 체계화하여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가 되었다.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벤담은 공리주의적 죽음만이 아니라 사후 공리주의적 운명까지 계획하는데 철학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중요한 개념인 '오토 아이콘'으로 자신을 만들어 자신의 유용성 원칙의 강력한 관념을 상기하게 한다! ... (벤담의 머리를 지바로 방식으로 압축시키고 위는 비워서 시신의 연한 부분으로 채우고 해골은 깨끗이 닦아서 장갑을 끼우고 모자를 씌우고 옷을 입힌 다음, 이서을 여닫이 문을 붙이 장에 넣어 극장처럼 만들어서 공리주의적 장치를 런던 대학의 회의실에 설치한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인간의 자연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개인은 물론 개인의 집합체인 사회에도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보았다. 그러나 벤담의 공리주의는 제자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서 잘못된 공리위에 세워진 사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엄격한 아버지 아래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며 아버지는 하나의 거대한 컴플렉스로 자리잡게 된다. 아버지는 존에게 법의 화신이자 전지 전능한 신과 동급이다. 그것은 존의 어린 시절, 아이시절을 아이답지 못하고 소년다운 시절이 없이 성장하여  연애경험 없이 청년이 된 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뇌만 발달하고 관능에 무관심한 성인 남자가 자신이라는 자각을 한 후부터 시작된 컴플렉스이다. 존은 공리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벤담과 자주 만나게 되고 자연적으로 공리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끊임없이 마음속에서는 소리없는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 던 중 운명의 여인 해리엇의 만남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존 스튜어트 밀은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된다. 아버지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 준 동시에 해리엇으로 인해 공리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밀의 상황은 공리주의 실습이라는 탁월한 기회가 된다.

 

존 스튜어트는 해리엇을 사랑하는데 해리엇은 테일러의 부인이고, 해리엇 부부는 슬하에 세 아이를 두고 있으며, 해리엇을 사랑하는 두 남자 중 한 명은 독신에 자식이 없고 다른 한명은 기혼자로서 두 명은 모두 열렬히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최대 다수의 가능한 가장 큰 행복을 생성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달리 부정적으로 말하여 최대 다수에게 가능한 최소 고통과 최저 번민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다? 어떠한 상황이 속은 남편과 부정한 아내와 사랑에 전율하는 독신자에게 최소 불쾌를 느끼게 할까?

 

존 스튜어트 밀은 기본적인 공리주의적 근거들에 대해 벤담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행복은 고통의 부재로 정의되고 불행은 쾌락의 부재로 정의되며, 쾌락은 유용한 것과 동일시 될 수 있고 유용한 것은 쾌락과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벤담과 밀은 이 점들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밀은 벤담과는 달리 쾌락은  양이 아니라 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과  법률에 의한 정치적 제재를 중시한 벤담과는 달리 양심의 내부적인 제재로서 인간이 가지는 인류애를 중시하였다. 

 

"배부른 돼지이기보다 배고픈 인간인 것이 더 낫다. 배부른 바보이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인 것이 더 낫다."

 

반철학사를 통해 본 19세기의 공리주의 철학사들의 이야기는 비록 조명받은 철학가들은 아니지만 프랑스 사회에 감도는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사상만한 것도 없다. 19세기에는 수많은 혁명이 일어난 혁명의 세기이다. 그 혁명을 받침해 주는 사상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또한 존재한다. 반철학사가 무척 흥미로왔던 것은 마치 고전을 읽는 기분처럼 철학사들의 개인사와 함께 사상이 성립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여정이 지루함 없이  재미있게 다가오는 책이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국가의 번영'이 개인의 행복에 대한 보장과 함께 성취되기를 바라고 공동체 설립을 통해 사회적 행복주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후에 ‘다수결의 원리’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정치제도와 사유재산보호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분배의 평등을 강조하는 복지 사상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옹프레의 <사회적 행복주의>는 아주 재미있는 사상의 역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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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세트 (반양장본) - 전3권 -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4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 / 돌베개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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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양 말고삐를 잡고 안장에 앉은 채 졸아가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풀어냈다. 무려 수십만 마디의 말이 가슴속에 문자로 쓰지 못하는 글자를 쓰고, 허공에는 소리가 없는 문장을 썻으니, 매일 여러 권이나 되었다. 라는 고백처럼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열의로서 집필된 책이다.

 

[열하일기]는 중국기행문으로서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으로 연암 박지원도 가게 되었는데 이 때까지 연암은 이렇다할 벼슬을 하지 않은 상태이다. 삼종형 금성위 박명원에게 부탁하여 사절단에 오르게 된 연암은 말 등에 앉아 중국의 모든 것을 관찰하여 기록하였는데 열하일기를 가지고 조선에 오자 열하일기는 사대부들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이 비난의 이유는 여러 가지 였는데 열하일기가 비난의 대상이 되자 정조에게 까지 불려가게 되지만 정조의 뜻에 의해 서민들도 읽기 쉽게 한글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을 받게 되는데  이유는 열하일기 안에 당시 사회 제도와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정약용 같은 일부 지식층에게도 비난을 받는다.)

 

읽는 동안 나 역시 실학파였던 연암 박지원에 대한 몇가지의 오해를 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박제가가 북학의를 저술할 때 한 말 때문이다. 박제가는 청나라에 박지원보다 먼저 다녀왔는데 그 중에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언문을 쓰지 말고 모든 백성이 청나라 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실학파들이 지나치게 청에 치우쳐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나는 한가지로 많은 것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바로 그런 오류를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박제가의 지나친 격정의 말을 실학파 모두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열하일기 안에서 만나는 연암 박지원의 생각들은 무척 사리에 밝고 생각이 깊으며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져 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었다.

 

열하일기를 번역한 김혈조는 책의 앞머리에 열하일기를 읽는 방법을 알아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열하일기에는 연암 박지원의 진정성, 책을 집필한 진정한 의도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꼭 참고해야할 것 같다.

첫째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의 제공이다.

두 번째가 선진 문화 문물을 본받아야 한다는 북학의 내용이다.

세 번째가 천하대세를 어떻게 전망했는가? 하는 주제이다.

네 번째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묘사와 인물의 창조이다.

다섯 번째가 선비 곧 지식인의 역할과 처신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선비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 있다.”

 

역사는 현재의 미래라는 말처럼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해 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위의 다섯가지의 주제로 들여다본 열하일기에는 열하일기가 최근에 왜 세계유수의 고전 반열에 편입시켜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1권 책의 시작은 압록강을 출발하여 요양에 이르는 <도강록>부터 시작하는데 중간중간 연암의 재치있는 언변에 웃음이 나기도 하며 넓디 넓은 요동 벌판을 마주하며 한바탕 통곡하기 좋겠다는 대목에서 연암의 깊은 생각을 알 수 있다. 심양의 이모저모를 살핀 <성경잡지>와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일신수필>에서는 청나라의 풍물과 체험을 , <막북행정록>에서는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동안의 체험담이 쓰여져 있다.

 

2권은 열하에 도착하여 배정된 숙소 태학관에 머물면서 청나라 고관과 과시 준비생 및 학자들과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실은 <태학유관록>으로 시작되는데 천체,음률,라마교등의 이야기들은 조선인인 연암에게는 생소할 터인데도 전혀 밀리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의 학자들이 연암에게 감탄하는 대목에서는 독자인 나도 왠지 뿌듯해 지는 기분이었다. 태학유관록에 실린 이야기들은 뒤에 나오는 <곡정필담><망양록><황교문답><반선시말><찰십륜포>에서 본격적으로 내용이 세분화되어 다루어진다

 

2권의 주된 내용은 중국의 지식층들과의 필담을 통하여 천하의 정세를 살피는 한편 조선에서는 청이 중국을 지배한지 백년이 흐르고 있음에도 아직도 친명배청이라는 사상을 버리지 못한채 청을 미개하게 만 보는 조선의 지식층을 바라보며 한탄하는 내용이 지배적이다. 명나라의 지식층들이 자신들이 멸시하던 만주족의 지배를 받으며 고뇌하는 모습을 통하여 조선선비들이 조금이라도 무식과 무지함을 벗어나길 바라는 연암의 소망 또한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무지함에서 비롯됨을 개탄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마도 연암은 조선에서 실학파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들이 무척이나 사무친 듯 보였다. 슬프다 ! 하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거 보니 ........

 

3권은 북경에서 연암이 보고 들은 것과 경험한 것들을 모아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박물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환희기>에서는 요술을 부리는 것이 신기하여 요술놀이를 구경하지 못한 조선사람들이 글을 읽어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았는데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연암의 글은 관찰자시점에서 쓴 글들이 많은데 무척이나 세세하게 기록하려고 한 것을 보며 연암이 열하일기를 통하여 조선선비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취지를 엿볼 수 있다. <피서록>은 열하 피서산장 밖 태학관 회나무 아래의의자에 앉아 더위를 식히면서 쓴 시화인데 수록된 시화를 통해 연암의 비평의식을 볼 수 있다.

 

 

2권까지는 긴 여정을 그린 여행기이지만 3권은 주로 이야기들이 많다. 신기하고 진기한 물건들을 보면 자세하고도 세세하게 설명하려 애쓴 흔적이 보이고 지식인으로서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삶에 교훈이 될 내용들을 통하여 통찰하길 바라며 중국과의 교류가 중요한 이유와 조선의 현실을 비판하지만 독설적이거나 직설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해학적인 필체로 표현하고 있다. 열하일기의 기본 사상은 이용후생으로서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글을 통하여 백성들의 삶을 좀 더 편하고 부유하게 되길 바랐으나 사실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열하일기를 통해 정조는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젋고 유능한 실학파들을 등용하려고 하지만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열하일기를 읽으면 연암의 학문에 절로 감탄이 나오는데 실로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많은 공부를 하였던 연암이 일찍 학문에 눈을 뜨며 속물적인 사회를 혐오하게 되어 연암협에 의지하여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음에도 출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마도 열하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문장력, 사실적인 묘사는 아마도 그 시대의 문인들에게는 분명 충격이었을 것이라 어림짐작해본다. 사대부들이 자신의 자리에 위기를 느끼게 된 이유 또한 그와 같지 않을까 한다. 그처럼 열하일기는 민족과 세계의 고전에 값하는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또한 과거 한 시대를 살아간 선인의 자취에서 현재의 살아가는 지혜를 얻게 되는 기쁨과 더불어 연암 박지원의 진정을 되새기며 이런 책을 저술한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열하일기는 이백년이 흘렀음에도 연암의 정신은 유장하게  깨어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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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령 하는 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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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내게 공포의 존재이다. 사람보다 더 높은 빌딩 사이에 서 있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잠식되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불안과 공포에 견디지 못할 때 네온사인 사이를 배회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텁텁한 공기, 답답한 공간 속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쳐도 다음 날 눈을 뜨면 언제나 제자리였다는 것이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던 그 날들을 떠오르게 하는 책을 만났다. <아령하는 밤>을 읽고 밤새 몽유병환자처럼 꿈속을 헤집고 다닌 느낌에 사로잡혀 몽롱함 속에 한참을 멍하니 있게 만든 책이다. 강영숙 작가가 무척 생소하게 다가왔는데 현대문명속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끼고 사는 도시인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색다른 방법으로 도시인들의 아픔에 다가선다. 책은 일곱편의 단편으로 엮어져 있는데 일곱가지 단편들이 제각각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으며 모두가 도시를 방랑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래에서>는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서 구제역을 소재로 하여 문명의 진보가 자초한 재앙의 모습을 서늘한 감각으로 느끼게 해준다. 구제역으로 인하여 새들이 죽고 돼지들을 살처분하는 피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네바퀴로 굴러가는 자동차가 이렇게 많은데, 북극의 얼음은 계속해서 녹고 있는데, 건물들은 수시로 붕괴되고 전쟁은 여기저기서 터지는데, 암환자 천지인 세상인데, 그런 세상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았다. " 라고 말하는 것으로 현대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면서도 생명력이 가득한 한 여자애를 통하여 아직은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를 가지고 있는 예술가가 존재하는 한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고 " 말한다. 그것은 구역질, 악몽, 진땀 , 냄새 등 온갖 고통스러운 기억속에서 타인과의 소통의 모습으로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령하는 밤>은 조금 몽환적이 느낌이다. 언니의 죽음이후 언니의 기억만이 존재하는 외로운 한 노인의 고립된 삶을 통하여 도시의 불안과 공포가 어떠한 것인지를 무척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노인이 살고 있는 인근 공장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원인 모를 병에 죽어가고 10대 소녀들이 연쇄성폭행을 당하여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이 일하는 김밥집 건너 철판볶음집의 노인의 건장한 팔뚝을 본 순간 얼굴과 몸의 비대칭적인 모습에 호기심과 동시에 선망이 된다. 공원을 지나다가 우연히 본 아령하는 남자, 그리고 그와 있던 어린 여자, 그리고 그 다음 날 한 소녀의 죽음, 노인은 아령하는 남자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아령하는 남자와 환상을 꿈꾼다. 기괴함과 공포속에서 소통의 상대가 없던 노인은 매일 김밥을 싸고 매일 김밥을 먹고 날이 새면 김밥을 싸는 것으로 일상을 보내고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타자에게 김밥을 던져주고 오는 것으로 타인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라디오와 강>에서는 친한 킴의 죽음을 잊기 위해 배회하는 모습의 주인공을 통하여 기차가 수시로 오고가는 것 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의  일주일 휴가는 죽은 킴을  회상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킴의 시신이 발견된 아트센터 지하의 벽에서 복원된 그림을 바라보는 장면은 자신의 기억속에서 킴을 복원해 주인공의 상처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것으로 치유해낸다.

 

<죽음의 도로>와 <재해지역버스투어>의 주인공들은 일상과 악몽사이에서 방황하며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한다. 자살을 꿈꾸지만 자살하지 못하는 여자, 삭막하고 고단한 현실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재해지역버스투어에 몸을 실은 주인공들은 평온함 일상 뒤에 숨겨져 있는 재난의 풍경속에서 느껴지는 통각의 상상력으로 인해 현실을 대면하게 된다.

 

<그린란드>,<불안의 도시>는 실종과 배회가 모티브이다. 패기만만한 젊음 속에서 의기투합한 남자들 여섯이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배회를 시작하다가 실종하게 된 모습속에서 도시인들의 상실감이 진하게 배여있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일종의 불안감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프랴파트>와 <문래에서>는 예술적 소통의 희망을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원전사고로 인한 체르노빌의 아이들과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케이드'예술가들의 동참으로 프랴파트의 버려진 창고에 버려진 물품들은 예술작품으로 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두려움을 예술의 감각과 활기로서 새롭게 살아나는 모습으로  일곱편의 단편 주인공을 통하여 표현한다.

 

 

일곱 편의 주인공들은 모두 현대인들의 고단함을 가지고 각자의 상처속에서 살아간다. 현대문명의 이기로 인한 병폐들 속에서 눈꼽만큼도 없는 희망가운데에 희망을 찾아내는 방법은 바로 그 상처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는 결코 낯설지 않다. 소름끼치도록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뿜어내는 이 소설은 현대인의 실존을 둘러싼 불안에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강영숙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소설이다. 또한 소설들의 소재가 되는 자연재해와 환경오염에 직면한 황폐한 도시의 모습과 구제역, 원전사고, 도시개발, 홍수, 살인이라는 소재는 도시인들이 체감하지 못하는 불안의 요소이자 잠재된 의식의 공포로서 도시인들이 체감하는 모호하고 불안한 위기의 삶을 예리하고 사려깊은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일곱편의 주인공의 모습을 통하여 불안과 공포를 체집하는 고독한 순례자들의 모습이 바로 곧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척 독특하면서도 사실적인 주제의식을 가진 탁월한 소설이다. 최근 읽은 국내문학 중에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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