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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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은 내가 사는 곳의 이야기이다. 타고나길 길치에다가 익숙한 곳, 한 곳만 가는 습성 때문에 낯설고 번접한 곳은  가지 않는다. 우린 휴가도 언제나 사람이 많지 않은 지리산을 가고 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책으로 듣는 세계는 그와는 틀리다. 나는 고백하건데 우리나라의 유명한 문화재가 있는 곳에 가보아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던 터라 문화유산답사 같은 것에 가치를 느끼지 못한 문외한중의 문외한이다. 그러나 나의 우매함은 언제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앞에서 철저히 깨부셔진다. 문화재는 하나의 물체이다. 문화재는 대부분이 미술품이다. 미술품을 바라볼 때 그것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미술품을 통해 나타나는 상(像)을 가지고 느껴야 한다. 따라서 미술품에 대한 해설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언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조건에서 시작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그런 작업이다. 시각적인 상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서  이미지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확대되고 심화되어 침묵의 물체를 생동하는 영상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만남이며,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이다. 

 

지리산 동남쪽 답삿길로 육십령고개, 안의 , 함양, 산청, 단성, 대원사에 이르는 큰 줄기를 따라가는 길의 답사기의 시작은 안의로부터 이야기 보따리가 풀린다.안의에서는 첫 외직으로 안의현감을 지낸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가 빠질수 없다. 연암 박지원은 개인적으로 내가 무척 좋아하는지라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에 귀기울여 읽게 되었는데 부끄러웠던 것은 갈비탕으로 유명한 안의를 여러번 가면서도 스쳐지나던 안의초등학교를 무시로 보아왔다는 사실이다. 아 참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라는 말이 다시 생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조선왕조의 문예중흥기였던 정조시대의 문화적 성취와 성숙도는 사상에서 정약용,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회화에서 단원 김홍도, 경륜에서 번암 체제공 등으로 상징되는바,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연암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배워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고, 그렇게 우기고 있다.

 

부석사에서 선묘의 이야기에서는 선묘가 한국인인 의상을 위해 희생한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상을 만들어 그 희생의 뜻이 역사속에서 살아남게 한 것은 바로 800년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에서 한국문화의 배타적인 모습을 이야기한다. 지나치게 애향심,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인해 이민족에게는 대단히 배타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 선묘의 이야기에서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비극으로 점철되게 만든 요인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엇보다도 타문화를  무조건 비판하는 시각보다는 다양성이라는 시각으로 문화를 바라봐야겠다.

 

 

2권에서는 석불사에 관한 장이 1,2,3으로 나누어져 있다. 2권은 석불사에 담긴 세계적인 가치에 대하여 알리고자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치 연암 박지원이 조선지식층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간절함으로 열하일기를 집필하였듯이 석불사를 보고도 그 위대함을 느끼지 못하는 나와 같은 문외한을 깨우치기 위한 간절함이라고 할까. 그래서인지 석굴암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석굴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석굴의 구조는 그 평면과 입면이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수리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분의 통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런 석굴암을 두고 고은 선생은 하나의 형용사로서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고 한다. 석굴의 찬사를 두고 나도 모르게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 뜻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야나기-

 

삼국유사에서 석불의 창건의 신화와 천장덮개돌이 깨진 전설로 시작되는 석불사의 이야기는 1913년 일제에 의해 완전 해체되는 비극을 맞는다. 그러나 이 석조물의 보수 공사에서 시멘트를 사용한 것은 석굴 보존에 치명상을 주게 된다.  일제의 석굴의 개수공사는 1200년 유지해온 석굴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만 남기고 외형상에도 무수한 변조가 가해졌으며 미관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 신식 기술과 재료 사용으로 인하여 석굴이 극심한 누수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3차 보수공사를 하게 되지만 석굴의 습기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1927년 증기세척을 이끼를 제거하지만 시산의 경과속에서 이끼는 또 피어났다. 1934년 자시 증기세척으로 분무세례를 받게되며 석굴은 또 한번의 치명적인 손상을 받게 된다.결국 일제 36년을 통하여 일제가 석굴에 남겨준 유산이란 두께 2미터의 콘크리트벽과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푸른이끼, 그리고 가공할 흉기, 증기세척 보일러 뿐이었다. 그것은 석불사 석굴이 겪은 오욕의 역사에 첨부된 증거물이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이어진 석굴암의 보수공사는 석굴암을 목굴암으로 암굴암으로 수굴암으로 전굴암으로 계속된 오욕을 겪게 된다. 그러나 이 석굴암의 습기와 이끼문제를 해결한 것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의 김효경 박사에 의해서이다. 김효경박사의 석굴암에 쏟은 정성으로 인해 나 역시 눈물나는 감동을 느끼게 되었는데 김효경 박사는 석굴의 보존문제의 책임이 끝난 지금까지도 석굴암을 관리 감독해 오고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석굴암의 안전을 확인하는 그는 늘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돌보아주어야 좋은 효과를 내며 자극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유흥준 교수는 이런 분들로 인해 우리 문화에 희망을 느끼다고 말한다. 관(官)이 하는 일보다도 민(民)이 하는 일이 빛날 때 그 문화는 성숙한다며 남들이 무라고 하든 곰바위처럼 자기가 생각한 일에 일생을 거는 쇠귀신같은 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4천만이 레게춤을 흔든다 해도 단 한명만이라도 그러지 않는 인생이 있다면 우리 문화는 죽지 않고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다고, 1권과 마찬가지로 2권은 더한 감동으로 읽고 배웠다. 처음 손에 잡은 순간부터 벅찬 감동의 연속인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무지와 무심을 한탄하기도 했다. 모르고 볼때는 내 인생과 별 인연없는 남의 땅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의 땅으로 가슴깊이 다가온다." 라는 말처럼...... 석굴암의 역사가 우리나라 역사와 닮아 있다는 신선한 충격과 안타까움과 함께 그런 위대한 유산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느끼지 못했던 나의 무지에 가슴아파 하면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가치를 새삼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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