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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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는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다. 그녀는 좁은 방에서 할머니가 주워 온 헌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조제'라는 이름은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 속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현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 중 한 명인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에는 사랑 때문에 서로 얽혀있는 아홉 남녀가 등장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좋아했던 '조제', 그녀에게는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연하의 '자크'라는 남자친구가 있다. 과거 그녀의 연인이었던 작가 지망생인 베르나르도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해 주위를 맴돌고 있다.

'베르나르', 그에게는 이미 니콜이라는 부인이 있다. 또 그를 좋아하는 배우 베아트리스도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과거에 집착하며 조제를 원한다.

아직은 큰 인기도, 큰 역할도 맡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배우 '베아트리스', 덕분에 그녀 주위에는 많은 남자들이 있다. 이미 결혼한 알랭 말리그라스, 그의 조카인 에두아르 말리그라스, 그녀의 후원자를 자청한 쉰 살의 앙드레 졸리오. 그녀에게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이내 식어버리는 불꽃 같은 것이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할 줄 모른다.

'에두아르 말리그라스', 그는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한때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 버림을 받은 상태. 그는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는 다른 남자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

'알랭 말리그라스', 그도 이미 결혼을 한 상태지만 베아트리스를 향한 사랑만큼은 감출 수 없다. 더이상 그 사랑을 감출 수 없게 되자 그는 술로 분출하게 된다. 사랑 때문에 그는 폐인이 되어 버린다.

알랭의 아내 '파니'와 베르나르의 아내 '니콜', 그녀들은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지만 그저 다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그녀들은 상당히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나 파니는 남편처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선다.

서로 얽혀있는 사랑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서로 실타래가 얽히기 전으로 돌아온다. 속으로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 얽갈린 사랑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온다.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p. 136)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_ 베르나르

사랑, 한때 나도 그것에 매달렸던 적이 있다. 그때는 내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거라며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싫어했었는데, 역시 시간이 지나면 무디어지는게 그것인가 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면 사랑에 대한 감정을 가져보기가 더 어려울 것 같아 며칠 전에  『스탕달의 연애론』을 샀다. 그런데 그 책을 읽어보기도 전에 사강, 그녀 덕분에 사랑에 대한 허무감만 더 커져 버렸다.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_베르나르

"나도 알아요." _조제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_베르나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_조제 (p. 186)

 

2007/12/1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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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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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언제부터인가 그 도시는 내게 로맨틱한 감상을 던져 주었다. 언젠가는 꼭 여행하고픈 곳, 한번쯤은 사랑에 빠지고픈 곳. 아마도 두 남녀가 프라하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던 드라마의 영향이 큰 듯하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프라하에서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났지만, 과거의 사랑을 잃기도 했다. 그녀는 프라하 거리를 헤매며 울고 다녔다.

사실 프라하는 그리 로맨틱한 도시가 아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보여 주었듯이 프라하는 상처투성이의 과거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프라하의 봄'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와 자유를 외치며 죽어갔다. '프라하의 봄' 을 찾기 훨씬 전인 2차 대전 때는 나치에게 짓밟히기도 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지만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을 위풍당당한 몸으로 걸어다닌다. 그녀는 엄청난 거인이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아서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녀는 대단히 무거운 듯 힘겹게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마치 땅에 닿으면 큰 상처를 입기나 할 것처럼 힘겨워한다.

마치 환영처럼 도시에 나타나서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여자, 그녀는 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바람들을 향해, 인간들의 탄식과 눈물의 모든 소리를 향해 가슴을 열고서 울고 다닌다.

 

이 낯선 여자, 그녀는 누구일까? (p. 18)

 

원제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에서 'La Pleurante'는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상복차림의 눈물 흘리는 여인상'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다. 그녀는 이 거리에서 누군가를 잃었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은 여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 거리에서 상처를 받은 모든 사람들의 탄식과 눈물을 대신해 울고 있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리를 담아 울고 있다.

 


그녀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p. 13)

 

잉크의 길들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공유하는 길이다. 그 길은 지름길이다. 꼬불꼬불한 미로들로 된 지름길이지만 때로는 우리를 숲속의 빈 터들 중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가파르게 인도하기도 한다. 한순간 삶이 거기에 있고 우리는 세상 속에 있다. 우리는 세상의 속살에, 한복판에 있어서 마침내 세상의 의미와 충만한 아름다움에 닿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순간, 삶이 바로 여기에 빛나고 있고 세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지만 흔적들을 남긴다. (p97~98)

 

텍스트 속으로 들어온 그녀의 등장은 과히 도발적이다. 그녀가 지나간 곳은 잉크의 흔적이 남는다. 그녀가 울고 다닐 수 있는 텍스트는 프라하의 거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녀는 어느 한명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되어버린 존재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처럼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도 항상 같은 거리를 맴돌며 웃고 다닌다. 아무도 그의 이름과 나이, 그가 헤매고 다니는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그 곳을 지키는 '장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이처럼 우리가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녀는 어떤 거리를 울고 다니며 잉크의 흔적을 남기고 있겠지.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 프라하의 거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

그 여자가 여기 있다. (p. 149)

 

프라하 거리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의 그 크고 비물질적인 몸 속에서 나직하게 소리내며 흐르는 것은 비탄에 잠긴 사람들의 그 눈물인 것이다.

그 울고 다니는 여자는 두 가지 세계 사이에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의 세계와 과거의 세계, 살과 숨의 세계와 먼지와 침묵의 세계 사이에서 끝없이 다리를 쩔뚝거리고 있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p. 43)

 

희생자들의 고통이 정말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는가를 알려면, 한 방울의 눈물이 엄청난 무게라는 것을 사람들이 잊지 않으려면, 그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또 그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p. 50)

 

추상적인 시간이란 없었다. 시간은 항상 그 시간을 떠메고 가는 어떤 몸의 시간이고 산 자의 역사의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은 이 파열된 순간 푸른빛이 도는 그을음빛으로, 그곳에서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의 침상에 병으로 부서진 몸으로 쓰러져 있는 어떤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호흡도 뼈도 다 상처입은 어떤 사람. (p. 60~61)

 

그녀의 발소리는 텍스트들의 단어 속에 반향되고 그녀의 눈물은 행간에서 번뜩이다. (p98)

 

그 여자는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빠져나가버렸다 ─ 그러나 어쩌면 그녀는 다만 모습을 바꾸었을 뿐 어쩌면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하여 나타나지 않을까? (p. 136)

 

2007/12/1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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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여행을 멈추다 - 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
메이 지음 / 삼성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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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더 나아짐도 뒤떨어짐도 없는 지루한 일상에 우울해 하고 있던 즈음에 '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를 만나게 되었다.
나처럼 메이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고, 언제나 똑같은 일요일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녀 안에서  '지금 당장 떠나야만 해!'라고 누군가가 외쳤다. '떠나지 않으면 내 인생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라며 초조감이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어 괴롭히자 '그래! 그림 여행을 떠나자! 인도로.' 그렇게 결심하며 인도로 향했다.
 
"세상은 인도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죠. 인도는 억울한 일이 많은 나라예요.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요. 인간다움 삶을 산다고 할 수도 없죠." - 람 (p. 39)
 
처음 그녀가 인도를 향할 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첫 여행 이후 늘 그리워하던 인도를 돌아다니며 그림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골랄기또리아라는 인도의 한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혼자 인도를 바꿔 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 람을 만난 이후 그녀의 여행은 멈춰 버렸다. 그녀는 마음껏 물을 사용할 수 있는 편한 호텔이 아니라 마을의 흙집을 얻어 묵었고, 입맛에 맞지 않는 그들의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며 가까워지려고 했다. 혼자 발버둥치고 있는 람을 도와 공연을 준비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녀처럼 여행을 온 사람들도 함께하기 시작했고, 여행에서 만난 지니는 그녀처럼 여행을 잠시 멈추고 마을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먹고 생활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아지려는 노력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그들의 노력은 인도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변화를 당했다고나 할까.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했던 메이는 여행을 통해 바깥세상과 타인을 향해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더이상 변할 수 있는게 없다고 판단한 메이는 여행에서 돌아오고, 지니는 잠시 멈추었던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서만 여행을 하고 있던 나는 이제 가끔은 바깥세상과 타인을 향해 눈을 돌릴 수 있게 됐다. - 메이 (p. 112)
 
그녀가 '인도, 내 인생의 배꼽'이라고 표현했듯이, 여행자들에게 인도는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는 대학 시절에 인도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 매료되어 몇 년을 그곳에서 보낸 사람도 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할 수 있으리라.
잠시였지만 메이 덕분에 답답하고 지루했던 내 일상에 숨통이 트였다. 언젠가는 그곳을 직접 보게 되리라. 그날을 기대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2007/12/1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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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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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과 기축옥사, 오래전 국사 교과서에서 스치듯 배웠던 기억은 있지만 솔직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나 옥사로, 무려 1,000여명이 연루되어 화를 입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교과서가 아주 짧게 서술한 이 사건을 문화사학자인 신정일이 재구성했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고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아무런 끈이 없었던 그에게 출사는 쉽지 않았다. 보통 호남 출신들은 동인의 편에 섰지만, 그는 이이가 있는 서인의 편에 들어갔다. 그는 이이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지만 이이가 죽고나자 스승을 비판하며 동인의 편에 섰다. 그의 성격은 상당히 꼬장꼬장했다고나 할까. 임금인 선조 앞에서도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지 않았으며, 선조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싫은 내색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관직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고을, 나아가 호남의 민심을 얻게 된다.

 

이이가 죽자 서인들은 세력을 잃게 되고, 그 중에서도 송익필은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는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이 그를 비롯한 서인 모두에게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송익필 각본, 정철 연출의 "정여립 역모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정말 송익필의 각본에 정철이 연출을 맡아 날조된 사건이라는 시각도 있고,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해서 이것을 빌미로 동인 세력을 밀어내고자 했던 '사화'라는 시각도 있다. 또 단순히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정여립 역모사건"은 동학혁명을 초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정여립의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허균의 변혁사상인 호민론으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전라도는 반역의 고장으로 찍혀 차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호남의 한 선비는 "전라도에 인재가 나려면 앞으로 400년은 지나야 한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 그곳 출신의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이다.

 

정치와 권력,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스승이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밟고 올라가야만 했다. 자신의 형을 고변하려고 살피던 정여립의 동생이나 출사시켜준 스승을 비방한 정여립, 자신의 가문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날조한 송익필 등. 권력 앞에서는 원칙도 소신도 모두 무너져버리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임금이 임금 같지 않다. 임금이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는데 왜 신하인 우리들만 임금을 사랑해야 하는가?" (p. 103)

 

"백성의 마음은 곧 천명이니 백성을 괴롭히는 군주는 갈아야 한다." - 맹자 (p. 107)

 

며칠 있으면 우리 손으로 임금다운 임금,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를 뽑을 수 있는 날이 온다. 부디 그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2007/12/1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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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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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던가? 교과서에서 「선학동 나그네」를 접한 이후, 주변 사람들의 추천은 있었지만 일부러 그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한'이라는 것이 그닥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전 영화 《천년학》이 개봉되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천년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 사람』이 영화의 개봉을 맞아 새롭게 출간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미 이전에 영화를 통해 많이 봤던 「서편제」와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담겨져 있는데,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천년학》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보지 않았다. 영화까지 보러갈 만큼 소설이 내 가슴에 꽂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청준 작가가 모자란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러한 소재들에 공감을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사실 제목은 끌렸지만 이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깊은 공감을 얻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여전히 망국의 설움, 전쟁의 고통, 이념의 갈등 등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겪은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표제작인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일본의 노예 교육을 피해 지난날의 소련으로 유학길에 오른 유일승 씨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조국을 잊고 살아야만 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인들의 독립투쟁을 억압하기 위해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그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고국도, 고향도, 가족도 모두 잊고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까지 유일승에서 노일승으로, 유 세르게이로 바꾸면서 말이다. 곧이어 고국에서 전쟁이 터졌고, 그는 또 한번 그곳을 잊어야만 했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고국에서 월드컵이 열리자 그는 잊고 지냈던 가족과 고국을 찾아온다. 그러나 다시 고국을 잊으려고 돌아간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사실 잊고 지내야 했던 그의 심정을 100%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가슴 한켠에서부터 시린 어떤 것이 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책의 순서대로가 아니라 일부러 표제작부터 읽었던 것인데 잠시 책을 덮어두어야만 했다. 역시 대작가는 달랐다.

 

이 책에는 유일승 씨 뿐만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이들도 있고, 강제로 멕시코까지 끌려가 노동을 착취 당했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잊고 지내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고, '잊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가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또다른 소설인 「이상한 선물」을 쓰는 도중에 작가는 병원으로부터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제목처럼 '이상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바로 소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로 먼저 쓰고, 그 에세이를 에세이 소설로, 에세이 소설을 다시 소설로 쓰곤 한다. 그런 방법으로 인물을 쓰는 것은 에세이가 소설에 비해 인물을 보다 직접적이고 주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오직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인물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런 방법으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나 보다.

그는 에세이 소설 「귀항지 없는 소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것이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며, "자신의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 그가 담아내지 못한 인물들이 많다고 한다. 하루 빨리 그의 병이 완쾌되어 또 다른 독행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언젠가 탄식을 금치 못해하는 내게 시를 쓰는 한 이국 친구가 충고해왔다.

─ 너는 물론 그 길을 계속해가야 한다. 그 밤 산길행이 어째 너 혼자뿐이냐. 네가 가고 있는 산 이웃에도 다른 산들이 있고, 그곳에도 저 혼자 두렵고 어두운 제 산길을 가는 외로운 독행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은 모두 깨어진 영혼들이다. 네 소설은 그 깨어진 영혼들의 존재, 그 밤 산길의 보이지 않는 독행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 (「귀항지 없는 항로」, p280)

 

2007/12/10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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