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티드 맨 - 문신을 새긴 사나이와 열여덟 편의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3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좋은 소설을 읽으면 잠시 책을 덮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힌다. 피가 솟아오르는 흥분을 멈추고 나면 가슴속에 뜨거운 무엇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이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시대에 문학이라는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요즘처럼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언어 텍스트가 주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그렇다고 영상 텍스트가 주는 감동이 문학보다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문학이 마음속에 단단한 무엇이 자리 잡게 해준다면 영화는 우리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슬쩍 쓰다듬고 간다. ‘미디어는 마시지다(The Medium is the Massage)’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미디어는 인간 능력의 확장이고 미디어는 인간 오감을 어루만지면서 애무한다고 말했다. 매클루언이 말하는 미디어란 신문이나 TV와 같은 언어와 이미지적인 소통뿐 아니라 광고까지 포함한다. 그는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언어적 소통 명제에서 나아가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신체적 소통 명제로 의미를 확장한다. 미디어가 특정 감각 기관을 연장해주고 강화한다. 그 감각기관의 기능을 관장하는 두뇌에 마사지를 가하게 되며 결국 사고방식, 행동 양식이 달라진다.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인간(감각기관)의 확장’이라고 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는 인간의 눈, 입, 귀의 역할을 한다. 시간이 좀 지나면 미디어는 손을 뻗어 인간의 촉각을 자극한다. 매클루언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지만, 미디어의 위력을 일찍 먼저 감지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다. 매클루언의 명제가 세상에 처음 알려졌던 시기가 1960년대 초반이다. 브래드버리는 1950년대에 미디어에게 마사지를 받으면서 생활하는 인간의 생활상을 묘사한 단편소설을 썼다. 1951년에 발표된 연작 소설집 《일러스트레이티드 맨(The Illustrated Man)》에 수록된 『여는 글: 일러스트레이티드 맨』『대초원에 놀러오세요(The Veldt)』는 상상 이상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위력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문신을 새긴 사나이’다. ‘사나이’는 한창 혈기가 왕성한 젊은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문신 남자’가 젊다고 보기 어렵다. 문신 남자의 말에 따르면 스무 살이었던 1900년에 서커스단에서 일했으며 불행하게도 일하다가 다치는 바람에 사십 년 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의 나이는 대략 60대로 추정된다. 문신 남자의 몸에는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문신이 남아 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나’는 이 불가사의한 문신 남자를 만나면서 몸속에 새겨진 열여덟 편의 이야기를 확인하게 된다. ‘나’는 누운 채로 문신 남자의 몸을 바라본다. 그는 현실감 있는 영상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본 첫 번째 문신에 담긴 이야기가 『대초원에 놀러오세요』다. 이 이야기는 벽에 아프리카 대초원의 풍경이 그려진 아이들의 놀이방이 나온다. 아이들의 부모는 놀이방을 만든 것에 후회한다. 특히 입체 스크린 속에 입을 활짝 벌리면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을 볼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다. 부모는 놀이방에서 놀기만 하는 아이들이 걱정되어 놀이방을 폐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의 마사지에 푹 빠져버린 아이들은 부모의 결정에 반대한다.

 

『콘크리트 믹서(The Concrete Mixer)』는 미디어 시대의 병적인 중독 현상을 풍자한다. 소설의 제목은 영상에 지배되는 현대인의 의식을 상징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미래의 지구인들은 영화가 흘러나오는 스크린에 지배당한 상태다. 이 기계의 창조주인 지구인은 소유물의 노예가 되어 영화를 생산한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영상 매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작가이다. 이 작품은 미디어 영상이 지배하는 미래에 대한 작가의 비관적 전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영화나 TV 드라마로 재탄생되었고, 작가는 자신이 만든 문자 텍스트가 영상 텍스트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작가는 영상 미디어가 인간의 삶에 깊숙이 침투한 세상을 순순히 인정할 걸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미디어의 긍정적인 효과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일상성을 조물조물 마사지하듯 지배하는 미디어의 힘을 경계한다. 미디어의 마사지에 익숙하면 다른 생각을 가질 여유를 주지 않고, 몰입하게 만든다. 심지어 미디어가 주는 쾌락을 독차지하기 위해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방문객(The Visitor)』의 최면술사 레너드 마크는 상대방이 보고 싶은 세상을 눈앞에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의 최면술을 경험한 솔 윌리엄스는 최면술사를 ‘소유’하려는 욕심을 느낀다. 레너드 마크는 최면술사가 아니라 ‘영상 전달자’다. 스마트폰은 현대인을 즐겁게 해주는 최면술사다. 지금 그것은 우리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중독성이 강한 감각적 자극을 잊지 못한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에 나오는 영상에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언어의 시대 최후의 이야기꾼’이다. 지금처럼 생동감 있는 영상을 보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의 재주에 홀딱 넘어가 마치 영화가 눈앞에서 상영되는 것 같은 재미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미디어 영상이 언어 대신 현실을 재구성하고, 이제는 미디어 영상이 우리를 매일 즐겁게 해준다. 이야기의 재미가 외면받는 시대 속에 레이 브래드버리는 문학의 설 자리를 다시 마련하기 위해 창작욕을 불태웠다. 영상에 밀려 종이책을 외면하는 이 시대에 미래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풍경을 자세히 이야기해주는 레이 브래드버리와 같은 이야기꾼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레이 브래드버리의 재능을 반만 닮은 이야기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 시대의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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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27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아주 좋은 책인가 보다. 세계 어떤 영화 감독도 다 책에서 영감을 받았고, 엄청난 독서광이라잖아. 그런 걸 보면 책의 위력은 약화될 수는 있어도 소멸되지는 않을 것 같아. 네가 이렇게 쓰니 이 책 읽고 싶어진다.^^

cyrus 2017-09-27 18:26   좋아요 0 | URL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소설을 드라마로 각색한 프로그램도 있어요. 영어 실력은 안 되지만, 유튜브로 드라마를 보고 있어요. 브래드버리의 단편을 읽어보면 재미있어요. 어떤 이야기는 허를 찌르는 결말이 나오고, 또 어떤 이야기는 감동을 주기도 해요. ^^

북프리쿠키 2017-09-2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디어의 긍정적인 효과를 부정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사실 미디어 그 자체로서 순기능도 많을건데요. 만약 우리 시대가 미디어의 늪을 벗어날 수 없다면
부정적인 담론만 확대 재생산하여 피하려고만 하는게 좋은 방법일지,
아님 잘 활용하는 방안으로 갈지..
또 다른 길이 있는지...고민해 볼일인거 같네요.
다방면으로 좋은 글 쓰시는 싸이러스님 감사합니다^^;

cyrus 2017-09-27 18:29   좋아요 1 | URL
미디어의 부정적인 문제점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내세우되 미디어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말은 쉽지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죠. 이미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져서 문제점을 막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미디어의 문제점을 해결한다고해서 미디어 활용을 규제하고 제한하면 역효과가 일어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