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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 - 가부장제, 젠더, 그리고 공감의 역설
김미덕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9월
평점 :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은 남녀 불평등의 원인을 가부장적 섹슈얼리티에서 찾는다. 가부장적 섹슈얼리티는 남성은 능동적이고 여성은 수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저항할 능력이 없어 보이는 나약한 모습이 여성의 성적 매력이며, 지배적으로 보이는 것이 남성의 매력이라는 점. 그것은 섹슈얼리티가 바로 가부장적 권력관계 속에서 구성된 것임을 말해준다. 사랑의 이름으로 낭만화하는 성적 실천이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기본 토대가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섹슈얼리티를 분석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포착되지 않던 불의와 억압의 존재를 가시화(visibility)한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했다. 초기의 페미니즘 운동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었다.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적 제도라든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을 반대하고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주류 페미니즘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렇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페미니즘 운동이 전개되면서 단순히 여성 지위 향상이란 수준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까지 ‘페미니즘’이란 이름은 서구 중심 시각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의제일 뿐이다. 흑인 · 유색인종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인종적 · 계급적 평등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백인 · 중산계층 · 서구 중심적 시각으로 동질화한 페미니즘은 서구 밖으로 발전된 다양한 페미니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페미니스트의 검은 오해들》은 작년 페미니즘 도서 출판 열풍에 맞춰 나왔음에도 독자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 책은 오늘날 지역 · 국가 · 인종 · 사회적 경계를 넘은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소개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너무 늦게 수출한 것이다. 얼마나 늦었냐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 본격적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시기가 1960년대부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부터 비서구 유색인종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제3세계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등이 등장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3세계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점차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사상이다. 《페미니스트의 검은 오해들》을 쓴 김미덕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관점의 틀은 제3세계 페미니즘이다.
김미덕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그대로 수용한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이 여성의 권익이라는 다소 제한된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 보니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겪는 피억압을 강조하기 위해 성차별 문제를 폭로하고, 이를 전제로 남성에게 호소한다. 사실 작년에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페미니즘 도서 대부분은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다.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만화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악어 프로젝트》(푸른지식, 2016년)와 여성 혐오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남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맨 박스(Man Box》(한빛비즈, 2016년)가 있다. 《맨 박스》처럼 페미니즘 관점에서 남성을 비판하고, 남성의 반성을 유도하는 형식으로 쓴 책이 오찬호의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다. 《악어 프로젝트》같은 경우, 실제로 프랑스에 출간 당시 논란이 많았는데 남성을 여성의 삶을 침해하고, 공격하는 포식자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악어 프로젝트》의 저자는 남자를 악어로 묘사함으로써 여성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설정했다고 밝혔다. 이 책에서 악어로 묘사된 어떤 남성은 그동안 살면서 인식하지 못했던 여성 혐오와 성차별의 위험성을 이해하는 순간, 악어가죽을 벗는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남성을 악어로 묘사한 궁극적인 목표가 성별 간 대립이 아닌 이해와 화합이다.
그런데 김미덕은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한 폭로 및 공감 유도 전략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남녀 학생들에게 여성학을 가르치면서 겪은 경험과 남녀 학생들이 솔직하게 밝힌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 등을 소개하면서 ‘남성은 가해자이고 여성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설정에서 비롯된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설정으로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면, 일부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한다. 남성들이 여성 차별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페미니즘을 수용한다고 해도 단순한 공감에 그친다면 남성은 성차별과 가부장제에 얽힌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못하거나 실제로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를 회피한다.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대가 형성했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조금씩 열렸다고 환영하기에는 이르다. 눈에 보이는 공감이 전부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만들어낸 긍정적인 신기루만 바라보면, 인종 · 민족 · 계급 등 다양한 변수들이 얽힌 성 차별 및 성 불평등 문제를 보지 못한다. 김미덕은 페미니즘이 사회 정의 구현과 인권 문제에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공감과 역지사지(易地思之)보다는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 작업을 제안한다. 탈동일시는 자신의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주는 사회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과 동일시된 감정이나 생각에서 분리되면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의 검은 오해들》은 젠더 문제만을 접근하는 현재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바라보고, 그 문제 해결을 모색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이 이 한계를 바라보지 못하면, 국제적인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혼합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필요에 따라 적절히 동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 독자들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연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동참하려면 다양한 페미니즘들을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해 내부에 존재하는 억압의 문제를 인식하고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 글 제목은 이정서의 소설 《당신들의 감동을 위험하다》를 패러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