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시의 논란에 부쳐.....
고등학생 때 국어 문제집을 풀다가 만난 시다. 시의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궁그는’은 ‘구르다’의 전라도 방언이다. 시인은 물방울이 토란잎에 동그랗게 구르는 장면을 귀엽게 표현했다. 그런데 내가 본 그 문장은 시가 아니었다. 객관식 문제의 예시 문항이었다. 네모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문제의 답을 찾느라 시에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집을 덮는 순간, 문장은 영원히 탈출하지 못한다. 나는 문제집에 갇힌 문장을 구출했다. 생기 잃은 문장을 공책 칸에 옮겼다. 그러니까, 그때였다. 시가 날 찾아온 것은.1)
투명한 지하철 스크린도어 벽 속에 갇혀 있는 시다. 이 시의 제목도 예사롭지 않다. 「목련꽃 브라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목련꽃 브라자」는 시가 아니라고 한다. 심지어 이 시를 얼른 빼라고 화를 낸다. 여성 속옷을 지칭한 ‘브라자’와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비유한 ‘목련꽃’이라는 표현이 문제였다. 시를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브라자’와 ‘목련꽃’이 들어간 구절이 민망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 두 단어 때문에 감흥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시는 점점 생기를 잃었다. 문자라는 육신만이 쓸쓸하게 남은 송장이 된다.
앞의 시는 무기력한 감성을 소생하는 시로 부활했다. 반면 뒤에 소개된 시는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쓸쓸히 죽어간다. 서로 정반대의 운명에 처한 두 편의 시를 만든 사람이 누굴까. 사실 두 편 모두 한 사람이 썼다. 시인의 이름은 복효근이다. 복효근 시인은 1991년에 정식으로 등단했다. 그가 쓴 세 편의 시는 중고등학생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사람들은 시인의 이름을 모르지만, 학창 시절을 겪었다면 한 번쯤 그의 시를 만나봤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 「목련꽃 브라자」 선정성 논란 소식을 접했을 때 「목련꽃 브라자」가 아마추어 시인이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오늘 이웃의 글을 보다가 「목련꽃 브라자」 원작자를 확인했다. 시를 많이 읽지 않은 나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스크린도어에 적힌 「목련꽃 브라자」의 원작자 실명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나는 「목련꽃 브라자」를 수준 미달의 시라고 끝까지 믿었을 것이다.
「목련꽃 브라자」가 정말 수준이 떨어진 시인지 직접 판단하지 않겠다. 다만, 이 시 하나만 가지고 시인의 창작 능력을 폄하하는 상황이 씁쓸하다. 시인이 오래 살아서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으면 100편이 넘는 수의 시를 남긴다. 만약에 스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서 여든 살에 죽을 때까지 딱 천 편의 시를 남겼다고 가정하자. 사람들은 다작한 시인의 왕성한 작품 활동을 칭찬한다. 그렇지만 천 편의 시 모두 결점 없이 완벽한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이 즐겨 읽는 애송시로 등극하면 그건 시인의 대표작이 된다. 그러나 그 이외에 다른 시는 대표작에 2% 부족한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게 된다. 대체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보는 눈이 정확하다. 작가들은 오랜 시간 투자해서 열심히 썼던 글에 미흡한 점이 발견되면 혹독하게 평가한다.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독자들이 실망하는 실패작을 남긴다. 작가도 사람인지라 무조건 좋은 작품만 쓰는 일이 불가능하다. 「목련꽃 브라자」는 모든 독자에게 공감을 주지 못한 실패작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소수의 독자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 한 편에 모두 달려들어서 설왕설래해봤자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이번 기회에 싸움을 멈추고 다른 시인의 작품을 읽어보는 게 어떨까. 그래야 시인의 진가뿐만 아니라 시 읽기의 매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시는 시집으로 읽어야 제맛이다.
주 1)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시작되는 문장을 변주했음. 원본은 ‘그러니까 그 나이였다. 시가 날 찾아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