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시선 390
안주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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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써서 먹고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원고료라고 해봤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시집을 내봤자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시인을 시를 쓴다. 안주철도 마찬가지다. 그가 시를 쓰는 이유는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모진 세상에서 그래도 살아보겠다는 본능이 시에 배어 있다. 안주철의 첫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은 쓸쓸한 시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시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일까? 마치 그 시의 내용이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슬픔과 소외감은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혼자 밥을 먹어도 외롭지 않다. 식탐 때문에
혼자 밤늦게 산책을 해도 두렵지 않다.
미인이 쓰러져 뒹구는 술집 근처에 살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사람도 없고
애써 기억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도 심심하다. 친구는
사라진 일자리에 빠져 있고 나는
옆 테이블에 앉은 미인의 다리가 궁금해서
아내와 통화를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인이라도
생겼다면 거짓말이라도 정성스럽게 할 텐데.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다.
사진을 몇장 찍으며 나를 속인다.

 

혼자 밥을 먹으면 눈물이 난다. 식욕이 없어서
혼자 산책을 하면 외롭다.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서
혼자 영화를 보면 구석에 가서 울고 싶다.
등이 갈라지면서 또 하나의 내가 기어나와
갈라진 등을 두드리며 나를 위로해줄 것 같아서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
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인이 되는 법」, 34~35쪽)

 

 

 

고독이라는 감정은 늘 우리를 지배한다. 고독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늘이 있어도 없는 척 능청스럽게 살 수 있을까. 마음을 정리해도 끝까지 남는 것은 언제나 고독이다. 우울할 때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뎌 하면서도 끝내 혼자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 ‘혼자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 집을 지나친다/더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구절에서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 외롭지 않으면 결코 길을 떠나지 않는다. 시인은 불가항력적인 힘에 끌려 안식처를 지나쳤지만, 결국 고독을 받아들여 맞서 싸우기로 한다.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다음 생에 할 일들」, 74~75쪽)

 

 


사람이 일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위로다. 그다음이 칭찬이다. 이는 관심과 공감과 이해에서 나온다. 심적 고통의 늪에 빠졌다가도 누군가가 위로와 칭찬의 손길을 내밀면 대부분 그 아픔에서 해방될 수 있다. 내게 어떤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바로 그 순간 나 아닌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 아무도 없다면? 있어도 내 말과 생각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상상만 해도 슬퍼진다.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을 줘야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사랑을 주기보다 받으려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때 단절로 인한 고통은 자신이 변해 살 수 있다는 내 안의 ‘경계경보’다. 사랑을 먼저 주고, 곁에 있어 주며,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바뀌어야 한다. 시인은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것을 가정하에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이름하며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게 살 것’. 가족은 시인을 위로한다. 시인은 그런 삶이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같이 아프고 위로하는 가운데 정은 그 어떤 밧줄보다 튼튼해진다. 그 훈훈함도 산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군고구마 봉지보다 가슴 울린다. 정이 희미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시인은 등 돌린 타자들끼리의 새로운 관계망을 언어로 형성해 보려는 여정에 관심을 가진다. 쓸쓸한 개인들이 힘겹게 친밀성을 획득해가는 과정. 한 달만 지나면 난로보다 사람의 체온이 더 그리워질 것이다. 사람 사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에도 조그만 관심으로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고, 따스함으로 삶이 지탱되는 존재임을 또한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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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2015-09-24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헣....이 시집에서 <다음 생에 할 일들>이 참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또 보게 되네요. 덤덤하고 담담한 시에요, 참.

cyrus 2015-09-24 17:58   좋아요 0 | URL
이 시집 덕분에 안주철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어요. 다음 시집이 기대됩니다. ^^

인디언밥 2015-09-24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닿네요..

나비종 2016-01-04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롭지 않으면 결코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별도 어쩌면 외롭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떠남`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위로라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내 삶을 따스하게 지켜봐주는 관람자일까요? 나를 주인공으로 바라봐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