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 사일런스
미첼 슬렁 엮음, 김성화 옮김 / 고려문화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공포는 익숙하지 않은 생소함에서 기인한다. 그 생소함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의 일상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독자를 공포 속으로 끌어들인 호러 사일런스는 바로 이 생소함과 일상 속에 숨은 어두운 본성을 다루고 있다. 근친상간, 네크로필리아, 관음증 등 호러 사일런스에서 다루는 소재들은 생소하다. 열일곱 편의 이야기는 바로 이 생소함을 무기로 독자들을 암울한 공포 속으로 초대한다. 이 책의 편집자 미첼 슬렁에로틱한 공포를 주제로 한 열일곱 편의 이야기가 완벽한 추리문학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책머리에 밝혔다. 그런데 막상 작품을 읽어보면 추리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수두룩하다. 기본적으로 섹스 장면이 하나씩 묘사되어 있고, 문학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B급 섹슈얼리티 공포소설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호러 사일런스를 그저 킬링타임으로 읽기에 좋은 허접스러운 작품들만 모아놓은 책으로 볼 수 없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이 책을 그냥 가볍게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을 썼던 작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 낸시 A. 콜린스 에이프라(Aphra)

2. 사라 스미스 피의 폭풍이 몰아칠 때(When the red storm comes)

3. 리자 터틀 어떤 생일(A brithday)

4. 할란 엘리슨 그녀의 얼굴(The face of Helene Bournouw)

5. 머빈 피크 같은 시간, 같은 장소(Same time, same plece)

6. 로버트 블록 모델(The model)

7. 테렌스 헨버리 화이트 불길한 사랑(Kin to love)

8. 로버트 에커만 어떤 환상적인 사건(Ravissante)

9. 레이 러셀 그 기간이 지난 후에는(The runaway lovers)

10. 램시 캠벨 한 번만 더(Again)

11. A.E. 코포드 실버 서커스(Silver circus)

12. 찰리 보우먼 - 변태인간(The crooked man)

13. J.G. 발라드 잔혹한 환상(A host of furious fancies)

14. 메이 싱클레어 증거의 본질(The nature of the evidence)

15. 데이비드 퀠스 첫경험(The first time)

16. 클리멘트 우드 신혼여행에서 생긴 일(Honeymoon)

17. 엘리자베스 제인 하워드 미스터 악마(Mr. Wrong)

 

 

할란 엘리슨은 휴고상, 에드가상 등을 화려한 수상 이력이 있는 SF, 미스터리 단편소설의 대가이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화되었으며 영화 터미네이터의 원작자다. (‘터미네이터개봉 당시, 엘리슨은 영화가 자신의 작품 ‘The Outer Limits’를 표절했다고 제작사를 고소했다. 결국, 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은 영화 엔딩 크레딧에 원작자로 엘리슨의 이름을 넣었다고 한다)

 

로버트 블록은 앨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로도 알려진 <사이코>(해문출판사, 2001)의 원작자다. 2차 세계대전 때 겪은 포로수용소 생활을 바탕으로 쓴 J.G. 발라드의 소설 <태양의 제국>(삼신각, 1988)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자동차 사고에서 성적 즐거움을 얻는 사람을 소재로 한 <크래시>(그책, 2013)는 출간 당시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다.

 

메이 싱클레어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영국의 여류 작가다. 흔히 의식의 흐름 기법을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가 먼저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문학사적 선구자로 기억되는 두 사람 사이에 메이 싱클레어의 이름도 추가해야 한다. 의식의 흐름을 반영한 그녀의 작품 해리엇 프린의 삶과 죽음은 피터 박스홀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마로니에북스, 2007)에 선정되었고, H.P. 러브크래프트<공포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에서 그녀의 공포소설을 언급했다.

 

 

 

 

 

  

 

머빈 피크는 작가뿐만 아니라 삽화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타이터스 그론>, <고멘가스트>, <타이터스, 홀로>로 구성된 일명 고멘가스트 3부작은 영국인들의 애독서로 선정된 환상소설이다. 피크의 작품들은 아직 국내에 단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지만, 그가 직접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열린책들, 2009)<보물섬>(열린책들, 2010)의 삽화는 볼 수 있다. 테렌스 헨버리 화이트는 아서 왕 전설을 패러디한 연작소설을 썼으며 이 작품의 완전판인 <과거와 미래의 왕><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포함되었다.

 

호러 사일런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작품들 대부분은 나온 지 상당히 오래된 것이라서 독자의 마음을 흡인하는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편이다. 낸시 A. 콜린스의 에이프라는 해골에 성적 욕구를 분출하는 성도착증에 걸린 사람을 소재로 기괴한 사랑을 묘사했으나 무언가 2% 부족한 작품이다. 해골에 집착하는 주인공이 자신뿐만 아니라 평온한 가족까지 파멸시키는 과정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로버트 블록의 모델은 종족 본능에 충실한 인공 생명체가 나오는 영화 <스피시즈(Species)>와 거세에 대한 공포를 다룬 <티스(Teeth)>의 등장을 예고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찰리 보우먼의 변태인간은 호모 연애가 정상적으로 통용되는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성애자들은 비정상인으로 규정되어 지하에 숨어 산다. 1955<플레이보이> 지에 변태인간이 발표되자 파격적인 설정에 분노한 독자들의 항의 편지가 빗발쳤다. 1950년대의 미국은 동성애를 사회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죄악으로 여겼으니 당시 독자들이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억압받는 장면을 불편하게 여길만했다. 하지만 보우먼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소설을 썼을 수 있다. ‘변태인간에서 동성애자는 음란한 인물로 나온다. 결국, 이 소설에 동성애자를 성적으로 문란한 악마로 보는 부정적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미국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날 다음에 보우먼의 소설을 읽으니 기분이 묘하다. 이제는 동성애를 악의적으로 묘사한 소설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작가 이력을 제대로 소개했다면 호러 사일런스가 싸구려 에로틱한 공포소설을 모아놓은 책으로 여기는 오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책이 시대를 잘못 만났다. 호러 사일런스가 출간되었던 시기(1994)공포특급시리즈 같은 공포물이 범람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공포문학은 비주류 혹은 B급 문학으로 취급되었고, 세계적인 대문호가 쓴 공포문학은 아이들의 정서에 맞게 원본을 마음대로 잘라내어 유령, 귀신 이야기로 둔갑했다. 미첼 슬렁은 호러 사일런스호러 킹스티븐 킹에게 헌정했다. 이 헌사만 봐도 서양에서 공포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외국은 공포문학을 순수문학과 동등한 위치로 보며 한 해 동안 가장 잘 쓴 공포소설을 뽑는 문학상도 있다. 하지만 외국 공포문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문학성 떨어지는 작품으로 격하되는 이유에 정서적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귀신같은 초자연적 존재의 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공포 이야기에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초자연적 분위기를 연출하다가 종국에 가서 충격적인 결말이 나오는 외국의 공포 이야기의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귀신이 하나라도 없는 외국의 공포소설을 처음 접하면 팥소 없는 찐빵을 먹는 느낌이 든다. 호러 사일런스의 역자는 원작의 묘미를 살리지 못한 점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서 호러 사일런스에 수록된 작품 중에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은 작품 다섯 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공포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인 나도 책의 편집이 아쉽다. 역자가 아쉬움을 꾹 삼키면서 제외했던 다섯 편의 작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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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6-30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하면 귀신이나 hack/slash계열로만 여겨지는 풍토가 없지 않은 듯 하네요. 호러소설도 당당히 한 장르를 차지하고, 명작을 읽어보면 어떤 다른 장르와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 작품성을 보는데 말이죠.ㅎ 뜬금없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cyrus 2015-06-30 20:08   좋아요 0 | URL
공포문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러브크래프트죠. 우리나라에 공포가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대중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는 공포 만화 같은 이미지에 익숙해졌으니까요. ^^

감은빛 2015-07-0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외된 5편이 궁금하군요.
책이 나온 시기에 비해 지금은 분위기가 또 많이 달라졌을테니,
지금 다시 출간하면 포함할 수 있지도 않을까요?
요런 문학 작품에서 무언가의 잣대로 작품을 넣고 빼는 짓은 참 화가나요!

cyrus 2015-07-02 21:4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지금은 장르문학을 즐겨 읽는 독자들이 많아졌으니 이런 작품들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