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추적자들
하랄트 바인리히 지음, 김태희 옮김 / 황소자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화창한 오후의 어느 날, 시냇물이 흐르는 언덕 위에 앨리스가 언니와 앉아 있다. 그림이라고는 한 장도 없는 지루한 책을 읽고 있던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앨리스는 내심 언니와 같이 놀고 싶다. 그렇지만 책 속에 빠진 언니는 앨리스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앨리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너른 들판을 쳐다본다. 그때 난데없이 토끼 한 마리가 마치 사람처럼 조끼와 바지를 입은 채 두 발로 지나간다. 앨리스는 토끼를 보고 깜짝 놀란다. 토끼는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더니 놀라서 혼잣말을 한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이렇게 늦었으니…….” 토끼는 부리나케 어디론가 뛰어간다. 호기심에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간다.

 

토끼의 모습은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시간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 생각에 침투해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대작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것은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 우리는 돈이나 보이는 것을 관리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시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무감각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만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무자비할 정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집어삼킨다. 그러면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우리는 촉박해지는 상황에 직면한다.   

 

Knappe Zeit. ‘제한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씩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남는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빠듯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하랄트 바인리히는 세계 지성사에 등장했던 사상가와 작가 들이 ‘빠듯한 시간’을 어떻게 인식했고, 사용했는지 소개한다. 그가 쓴 책 《Knappe Zeit》는 우리나라에선 ‘시간 추적자들’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가, 예술가들은 얼마 남지 않은 ‘빠듯한 시간’을 크로노스에게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쫓아가는 추적자가 된다. 그러면 앨리스가 바쁘게 지나가는 토끼를 쫓아가는 것처럼 독자는 똑똑한 시간 추적자들을 따라가면 된다.

 

‘빠듯한 시간’을 맨 처음 사수하기 시작한 사람은 히포크라테스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직계후손답게 히포크라테스는 시간을 집어삼키는 크로노스의 횡포를 간파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로 잘못 알려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기둥에 새겨진 명언인 ‘너 자신을 알라’와 함께 가장 오래된 격언으로 일컫는 불멸의 문장을 남겼다. 흔히 ‘인생은 짧고, 기예는 길다’에서 ‘기예’를 예술 개념과 동등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예술의 위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격언이 ‘의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여기서 말하는 기예는 예술이 아닌 의술에 가깝다. 좀 더 포괄적으로 본다면 살아가면서 전수되어 배워야하는 앎의 내용도 될 수 있다. 이 말 뒤에 “기회는 덧없고, 경험은 미혹하며, 판단은 지난하다”란 말이 이어진 것만 해도 그렇다. 히포크라테스는 예술의 위대함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빠듯한 시간’을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스스로 각성하는 동시에 ‘빠듯한 시간’을 무심코 간과하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운명의 세 여신」 1505년

 

 

 

그림 오른쪽에 실패를 들고 있는 여신이 운명의 실을 뽑는 장녀 클로토, 실을 들고 있는 가운데 여신은 운명의 실을 감거나 헝클이는 차녀 라케시스, 왼쪽에 가위를 들고 운명의 실을 자르는 막내 아트로포스다.

 

 

 

히포크라테스의 충고는 수천 년 동안 전해지게 되었고, 후대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사용됐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희극 《발렌슈타인》에서 시간을 ‘수천 개의 모래알’처럼 흘러내린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자신의 손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모래알들이 얼마 남아있는지 잘 알았고, 흘러내리는 시간의 모래알보다 좀 더 빠르게 예술의 불꽃을 피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예술가라도 하나의 실로 된 자신의 운명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여신 아트로포스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슈베르트, 모차르트, 라파엘로 같은 조숙한 천재들은 예술의 불꽃을 크게 피우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으니까.

 

실러는 시간을 손에 오랫동안 쥘 수 없는 조그만 모래알갱이처럼 여겼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시간은 살아가는 내내 손에 꼭 쥐고 있어야 ‘돈’이다. 원래 시간의 중요성을 돈의 가치와 동등하게 결부시킨 사람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였지만, 시간을 돈처럼 관리하는 방법은 프랭클린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프랭클린은 일분일초를 소중하게 생각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 근면 성실함과 언제나 유익한 일에 힘을 쏟은 결과 초등학교에서 1년간 글을 배운 것이 전부인 그가 피뢰침을 발명하고, 미국 독립 성취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한다. 이것 말고도 프랭클린이 이룬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프랭클린은 ‘빠듯한 시간’을 가장 잘 쓰고, 자신의 계획대로 잘 쫓아간 위대한 시간 추적자였다.

 

반면 ‘빠듯한 시간’이 주는 정신적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자꾸 흘러가만 가는 시간을 잡으려고 무진장 애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의 움직임에 쉽게 종속당한다. ‘빠듯한 시간’을 자각하는 수준을 넘어 ‘시간의 노예’가 된다. 앨리스 이야기에 나오는 토끼처럼 시계를 쳐다보면서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계속 시간을 집어삼키는 크로노스에, 생명의 실 한 가닥에 언제 들이댈지 모르는 아트로포스의 가위질이 두렵다. 독일의 철학자 블루멘베르크의 명제처럼 세계는 시간을 앗아간다. 히틀러는 ‘빠듯한 시간’ 안에 게르만 대제국을 만들고 싶었고, 다스리고 싶었다. 오스트리아인의 야욕은 극단적 강박관념을 사로잡혔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 전체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만약에 당신이 《시간 추적자들》을 읽으면서 ‘빠듯한 시간’을 쫓아가는 위대한 인물들을 호기심 가득한 앨리스처럼 따라간다면 시간의 신의 손아귀와 운명의 여신이 들이대는 가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를 잊지 마시라. 제한 시간이다. 우리는 제한 시간이 정해진 인생의 시한폭탄 하나쯤 가지고 있다. 째깍째깍하면서 시간이 점점 줄어들면 인생의 시한폭탄은 터진다. 재수 없으면 너무 이른 시간에 폭탄이 터지기도 한다. 이 폭탄이 터지면 당신은 가위를 든 아트로포스를 만나고 지옥 또는 천당으로 향한다. 모차르트처럼 일찍 생명의 실이 끊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크바르트는 ‘빠듯한 시간’ 안에서 전력 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직시하고, ‘느림’의 삶을 권고한다. 천천히 할수록,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나오는 새로운 것들은 한순간에 과거의 상징으로 변하며, 새로운 것에 도취할수록 시간의 운동이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 잠깐 숨을 고르면 ‘빠듯한 시간’에 대한 초조한 마음이 줄어들고, 협소한 시간의 범위 안에 달성하고 싶은 삶의 목적을 세울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빠듯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된다. 잘 사용하면 프랭클린처럼 부지런한 시간 추적자가 되고, 반대로 시간에 쫓겨 자멸에 이르는 히틀러가 된다. 시간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시간의 중요성을 발견한 세네카의 잠언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대가 이용할 줄만 안다면 인생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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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1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게 사는데 시간관리 하는것 같지는 않네요 ^^;; 예전에 프랭클린다이어리를 사용했는데 맨날 똑같은 일정이 반복되다 보니 쓰다가 때려쳤어요 ㅋㅋ

cyrus 2015-02-15 12:11   좋아요 0 | URL
저도 시간관리를 하지 않은 성격이에요. ^^;;

라파엘 2015-02-14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cyrus 2015-02-15 12:16   좋아요 1 | URL
시간을 주제로 다룬 문학, 철학을 소개한 책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작가들이 나옵니다. ^^

수이 2015-02-1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길게 살고 싶어. 즐겁게 유쾌하게. 아 근데 내 속은 너무 좁은가봐_

cyrus 2015-02-15 12:17   좋아요 0 | URL
즐겁게 잘 사시는 것 같은데요. ^^